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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플하게 살고 싶다는 소망

by La Francia

집에 돌아왔다.

도어락에 지문을 인식시켜 문을 열었다.(일본집에서는 금속 열쇠를 가지고 다녀야 했다.) 공기가 무겁게 착 가라앉아있었다. 84 제곱 평방미터인 내 집이 으리으리하게 느껴졌다. 방하나에 거실하나였던 자그마한 집에서 네 식구가 한 달을 옹기종기 살았는데, 여긴 방이 세 개에 화장실도 두 개나 있다. 주방엔 그릇도 수저도 컵도 많다. (설거지를 자주 안 하고 싶다 보니 식기가 야금야금 늘었다.) 안방에 있는 티브이도 어찌나 큼지막해 보이는지,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이웃집 거실에 걸린 더 커다란 티브이를 부러워했었는데 말이다. 붙박이장을 열어보니 이불과 베개가 천장까지 켜켜이 쌓여있다. 서너 장 밖에 없는 담요를 넷이 쪼롬이 깔고 덮고 자던 며칠전이 아득하게 느껴진다.



문득 버려야 할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결혼할 때 샀던 저(때가 잔뜩 묻어있는) 구스 베개. 드레스룸에 걸려있는 몇 년째 안 입는 셔츠 니트 카디건들. 이미 작아졌는데 아직 정리하지 못한 아이들 옷, 더 이상 쓰지 않는 (아이가 다니던 학원 로고가 적힌) 가방들, 싱크대 상부장에 모아둔 컵과 그릇, 텀블러들. 사용하지도 착용하지도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들을 넘치게 소유하고 있는 내가 보였다. 아까워서, 언젠간 입겠지, 언젠가 필요하겠지 싶어서 버리지 못한 것들이 비로소 보인다. 오늘, 아이들이 등교한 뒤에 큰맘 먹고 청소를 시작했다. 쓰레기봉투를 꺼내와서 아이들이 만든 조잡한 색종이 접기 따위(일명 예쁜 쓰레기)를 먼저 넣었다. 옷을 한아름 가지고 내려가 헌옷수거함에 잔뜩 넣고 이빨 빠진 그릇들과 컵, 때탄 텀블러와 가방 따위를 싹 정리했다. 이런 것들 없이도 잘 살았다. 오히려 더 깔끔하게.



본디 나는 미니멀리스트와는 거리가 먼 성향이다.

물건을 이것저것 돌려가며 쓰기를 좋아하고(남들 보기에 비슷비슷할지언정) 옷도 가방도 덥석덥석 잘 산다. 샴푸나 세제, 휴지 같은 생필품은 팬트리에 차곡차곡 쟁이고, 정리정돈과 버리는 것을 어려워한다. 그 결과 집에 있는 모든 수납공간은 물건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타지에서 최소한의 것들로 살아보니 알게 되었다. 내가 끌어안고 살고 있는 여분의 것들은 대체로 불필요하다는 것을. 일본에서는 의식주가 참으로 간소했는데 그것이 오히려 삶을 심플하게 만들어주는 효과가 있었다. 거의 매일 마트에 가서 하루 이틀 분의 식료품만 샀다. 냉장고가 작아서 식재료를 쟁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냉장고에 무엇이 있는지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있는 식재료를 모르고 또 구입하거나 남아서 버리는 일이 없었다. 음식도 딱 먹을 만큼만 요리해서 잔반이 생기지 않았다. 옷도 가방도 신발도, 계속해서 사기보다는 이미 가진 물건을 잘 관리해서 오래 사용하고 싶어졌다. (물론 일본에서도 쇼핑을 꽤 하긴 했지만.. 올해는 더 이상 쇼핑을 하지 않기로 다짐해 본다.)



맥시멀리스트적인 나의 성향은 물건뿐 아니라 생활습관 전반에 녹아있다. 대표적인 것이 책이다. 읽고 싶은 책이 늘 많고, 그래서 도서관에 가서 여러 권을 빌려오고, 다 못 읽었으면서 다른 도서관에 가면 또 빌려오고 만다. 약 3년 전부터는 큰맘 먹고 책 사는 걸 그만두었는데, 그래도 좋아하는 작가님의 신간이 나오면 참지 못하고 사버린다(일 년에 열 권 안팎으로 사는 듯하다). 그래서 내 서가에는 세로로 꽂힌 책들 앞에 가로로 누운 책들이 수북 쌓여있고, 소파 옆, 침대 머리맡, 식탁 가장자리에도 책이 흩어져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뭘 읽을지 늘 고민하고, 이 책 저책 동시에 읽긴 하지만(있어 보이는 말로 병렬독서라 한다..) 결국 반납기간이 되어 다 읽지 못한 채 반납하는 책들이 늘 생긴다. 일본에는 한글책을 딱 2권 가지고 가서 한 자 한 자 아껴 읽었다. 그 어느 때보다 독서에 집중이 잘 되었다.



쇼핑을 할 때는 또 어떠한가. 우리집에 필요한 생필품, 식재료 같은 것들이 똑 떨어진 걸 어찌 알고 온라인 쇼핑 플랫폼에서는 하루에도 몇 통씩 광고 알림을 보낸다. 오늘의 특가, 오늘만 최저가 이런 단어에 홀려서 나는 그 링크를 타고 들어가서 물건을 살핀다. 필요한 것만 사면 되는데 배송비를 생각하며 안 사도 되는 것도 담는다. 그러고 나서 바로 결제를 하면 될 텐데, 그전에 또 다른 사이트에 한번 더 가격을 비교해 본다. 이를테면 쿠팡 장바구니에 담은 물건들을 컬리에서도 한번 담아보고 가격을 확인해 보는 것이다. (예전에 같은 제품을 크게 다른 가격으로 팔고 있는 걸 확인한 후에 생긴 습관이다.) 이런 식으로 쇼핑을 하다가 고개를 들어 시계를 보면 시간이 훅 지나가 있다. 내 소중한 시간과 역시 내 소중한 돈. 시간 부자가 진정한 부자라고 생각을 하지만서도 이럴 땐 정말이지 시간을 허투루 쓰는 것 같다. 일본에서는 매일 집 앞 마트에 가서 그곳에서만 장을 보았고, 남김없이 낭비 없이 잘 살았었는데. 너무 많은 정보와 다양한 선택지가 꼭 좋다고만은 할 수 없는 것이다.



매일 일기를 쓰고 허접한 글일망정 브런치에도 거의 매일 글을 올리던 지난달을 떠올려본다. 일본에서는 할 일이 단순했고 그것만 끝나면 자유로웠다. 읽을 것도 사야 할 것도 많지 않았고 운동도 줄였고 그래서 매일 글을 썼다. 뭘 해도 여유로웠던 감각이 좋았다. 집에 돌아오니 같은 24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듯하다. 여기서는 해야 할 일들이 자꾸 보이고 뭘 안 했지를 늘 점검한다(늘 놓친 것이 있다). 집청소에도 시간이 많이 걸리고, 읽어야 할 책들이 다시 눈앞에 쌓여있고, 헬스장도 가야 하고, 뭘 살 때도 고르고 따지느라 불필요한 시간을 빼앗긴다. 각종 모임 약속, 예약일정 등으로 빼곡한 플래너를 보면 내가 뭘 이루겠다고 이렇게 바쁘게 사나 싶다.



심플하게 살고 싶다. 누가 그러지 말라고 말리는 것도 아닌데. 내 환경을 간소하게 만들고 내 시간을 좀 더 잘 써 보자고 스스로에게 말해본다. 이번 한 달 살기의 교훈은 미니멀리즘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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