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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토요일

by La Francia

아이들과 함께 산지 아홉 해째다. 남편과 함께 산지는 열두 해째인데, 지금은 잠시 곁에 없다. (육개월간 해외근무를 하는 중이다.) 덕분에랄까 우리 모녀는 셋이 아주 단단히 친해지는 중이다.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자란다. 특히 보리는 내가 보살펴야 하는 존재에서 점차 나를 챙겨주는 존재로 거듭나고 있다. 이 아이가 얼마나 기특한지를 보여주는 예를 들자면, 내가 야밤에 분리배출을 하러 나가는 상황을 말할 수 있다. (남편이 없어진 이후로 분리수거도 내몫이다. ) 집안에 쌓인 재활용품들의 양이 많아서 분리배출은 보통 2차 3차에 걸쳐 나가야 할 때가 있는데, 1차를 내 다 버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양손 가득 박스를 들고 뒤따라 나오는 보리와 마주치는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상대가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아채고 행동하는 아이가 내 첫딸 보리이다. 이 아이에 관해서라면 자랑하고 싶은 것이 수없이 많은데, 자식 자랑이나 하는 팔불출은 되고 싶지 않아서 자세히 말하지 못한다. 언젠가 보리의 미담에 대해 글로나마 구구절절 써보고 싶다.



토요일 아침. 나는 평일과 다름없이 7시에 일어나 간단히 도시락을 싼다. 아이들과 8시 수영 강습에 가야 하고, 끝나고는 곧장 근처 도서관에서 열리는 그림책 수업에 참석해야 하므로 이동 중에 먹을 것이 필요하다. 달걀 세 개가 압력솥에서 익는 5분 동안 나는 사과와 바나나와 오이 따위를 썰고, 식빵에 딸기잼을 발라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도시락이 든 보냉가방을 어깨에 메고, 각자의 수영복 가방과 독서수업 책가방까지 양손에 들고 세 여자는 집을 나선다.



아이들이 강습을 받는 레인 바로 옆 레인에서 나는 혼자 수영을 한다. 스마트워치를 켜고 25미터를 자유형으로 하염없이 왕복한다. 뒤따라 오는 사람의 속도가 빠르다 싶으면 턴을 하기 전에 잠시 멈춰 그를 먼저 보내고 다시 출발한다. 오늘은 레인에 3명밖에 없어서 쉬지 않고 내 페이스대로 왕복했다. 물속에서 팔다리를 휘저으며 지난밤 꿈에 대해 생각했다. 꽤 실감 나는 꿈이어서 몇 시간이 지났는데도 생생했다. 주제는 뜬금없게도 가상현실이었다. 어떤 가게에 가서 돈을 지불하고 내가 원하는 가상현실의 테마를 선택하여 그걸 체험하는 방식이었다. 나의 옛 친구들(얘네는 내 초중고시절 유일한 친구들로서 아주 가끔 연락하며 지내고 있으며 내 꿈에 너무 자주 나온다. 유년시절이 인간의 무의식에 각인된다고 믿는 이유이다.)이 등장했고, 우리는 일본 온천 같은 곳으로 가기로 했다. 그러니까 가상의 온천으로. 그런데 먼저 그곳으로 간 친구들과 달리 나 혼자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어엇, 얘들아 나는 여기 있어! 내가 아무리 애타게 불러도 그들은 나를 보지 못했다. 마치 평행우주처럼 동시간대에 다른 공간에 존재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혼돈의 소용돌이 속에서 저 멀리 아득하게 알람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꿈속 가상세계를 건너 현실세계로 돌아왔다. 참 이상한 꿈이었다. 모닝페이지를 쓰는 기분으로 아직까지 생생한 지난밤 꿈에 대해 남기고 있다. 개꿈이겠지?



수영을 마치고 도서관에 도착했다. 아이들이 교실에 들어가고 나는 차에서 내 도시락을 먹었다. 마침내 찾아온 휴식의 시간. 삶은 달걀, 고구마, 사과, 오이, 파프리카을 우적우적 씹다가 검은콩 두유에 빨대를 꽂아 마셨다. 남편과 함께 있을 땐 아이들이 수업받는 한 시간 반동안 둘이 근처 식당에 가서 뭘 사 먹곤 했다. 맥도날드, 고봉민김밥, 소머리 국밥, 돼지국밥.. 남편은 먹을 것 -특히 고기- 에 애착이 많고 나와 딸들은 그렇지 않다. 남편이 없으니 우리는 외식을 거의 하지 않는다. 집에 계란과 채소와 김 정도만 있으면 며칠이고 끼니를 해결할 수 있다. 고깃집에 가서 삼겹살이나 한우를 구워 먹지 않으니 식비가 현저히 줄었다. 생활비도 아끼고 좋네, 하는 생각을 하던 차에 핸드폰 화면에 사진첩 랜덤 사진이 떴다. 지난달에 도쿄타워에 가서 넷이 찍은 가족사진이었다. 사진 속에는 네 명 모두 환하게 웃고 있었다. 평소에는 자세히 보지 않는 남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이 사람이 이렇게 웃는 사람이었던가. 다정한 사람이긴 하지. 맨날 우리에게 뽀뽀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뽀뽀귀신(애들이 지어준 별명)이기도 하지. 문득 비어있는 조수석이 허전했다. 갑자기 그와 맥도날드에 가고 싶어졌다. 그는 빅맥을 시켜서 단 몇 입만에 다 해치워버리고는 이제 달달이 디저트를 먹으러 가자고 할 테지. 그의 목소리가, 체온이, 존재가 지난밤 꿈처럼 생생하게 살아났다. 나는 갑작스럽게 사무쳤다. 고구마를 먹어서 목이 메는 줄 알았는데 그리움이 북받친 것이었다. 그렇게 혼자 운전석에 앉아서 한바탕 울었다. 때마침 차 안에는 Everything happens to me 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 노래는 나를 속절없이 감상적으로 만들고 만다. 차창이 어둡게 선팅되어 있어서 다행이었다.



저기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보리와 담이 보였다. 나는 서둘러 눈물을 닦고 차에서 내렸다. 얘들아, 배고프지? 오늘은 맥도날드 갈까? 애써 명랑하게 말해보았다. 보리는 약간 상기된 내얼굴을 수상하다는듯 들여다보며 감튀를 먹겠다고 했고 담은 치즈버거를 먹고 싶다고 했다. 보리가 기어이 말했다. 얘한테 뭔가 숨기기란 너무 어렵다.

엄마, 혹시 울었어?

응..갑자기 조금 슬퍼져서.

우리의 대화를 듣지않고 뒤따라 걷던 담은 혼잣말처럼 말했다. 아빠도 같이 가면 좋았을 텐데.

아이들의 말에 참았던 눈물이 또 주르륵 흘러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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