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나는 독서모임 멤버들과 점심식사 중이었고, 좀 이따 콜백 하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끊기 전에 엄마는 너그러이 말했다. 급한 일 없으니 볼일 다 보고 천천히 전화하라고. 보통 때의 엄마이다. 그러니까 평정 상태의 엄마. 집에 돌아와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며칠 전 통화에서 내가 병원에 검사받으러 갈 일이 있다고 말한 걸 기억하고 있었다. 잘 다녀왔느냐고 묻는 걱정 어린 목소리. 나는 내일모레가 예약일이고, 다녀와서 알려줄 테니 걱정 말라고 했다.
며칠 전엔 크게 달랐다. 나는 공원에서 친구와 야간 달리기를 하는 중이었고 그때도 엄마에 가 전화가 걸려왔다. 헉헉거리며 전화를 받은 나는 지금 운동 중이니 다시 걸겠다고 했다. 엄마는 알았다며 끊었다. 단 몇 초 만의 짧은 대화였지만 나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엄마는 지금 몹시 심기가 불편하다. 이유는 모르지만.
찜찜한 마음으로 귀가해서 전화를 걸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엄마는 지금 집에 티브이가 안 나온다고 하소연을 했다. 그녀는 짜증을 억누르려 애쓰고 있었니만 화와 짜증은 단어와 단어 사이를 스멀스멀 삐져나오고 있었다. 자초지종은 이러했다. 내 남동생이 며칠 전 엄마집을 방문해서 티브이를 시청했고 그 녀석이 무엇을 어떻게 건드려놨는지 엄마는 지금 티브이를 볼 수 없는 상태라는 것. 말을 하면서 점점 더 화가 나는지 그녀의 목소리는 점차 격앙되었다.
니 동생은 대체 왜 그런다냐. 그놈은 옛날부터 그랬다. 뭘 잘못 만져놨으면 책임을 지고 가야지 그냥 가버리고. 내가 진짜 답답해서 못살겠다. 아휴. 진짜.. 근데 너는 왜 전화를 재깍재깍 안 받냐. 지난번에도 몇 번이나 그러더니. 애엄마라는 사람이 전화를 놓치면, 어? 애들한테 무슨 일 생기면 어쩌려고? 그러고 그 밤에 애들 놔두고 운동은 무슨 운동이냐?! 그것도 남편이 타국에 있는 애가. 너 그러지 마라 이서방이 오해한다.
황당하기 그지없는 이 상황에 나는 대꾸할 말조차 찾지 못한 채 눈만 끔뻑거렸다. 이 화살은 왜 갑자기 나를 향하는가. 최근에 엄마 전화를 놓친 적이 몇 번 있긴 하지만 그것이 어째서 이 상황에 회자되는가. 초등학생 두 아이를 한 시간가량 집에 두고 운동하러 나가는 행위는 엄마 혹은 아내로서의 결격사유인가. 내남편은 갑자기 왜 소환되었지? 자기가 화난 걸 가지고 날 이상하게 몰아가는 엄마. 날벼락이 따로 없었다.
흩어지려는 이성을 애써 붙잡고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자, 엄마, 리모컨에 외부입력이라는 버튼이 있어요 눌러보세요? 그럼 셋톱박스를 리셋해 보세요, 안돼요? 그럼 코드를 뽑았다 다시 꽂아보세요, 아 영상통화로 전환해서 나한테 화면을 비춰봐요. 리모콘도 같이 보이게해봐봐요쫌.
할 수 있는 걸 다해봤는데도 뜻대로 안 되자 엄마는 더 화를 냈다. 나도 포기했다.
엄마, 그냥 내일 아침에 케이티에 전화해서 기사를 부르세요.
그녀는 폭풍 같은 한숨을 내쉬며 나지막하게 욕을 읊조리고는 전화를 끊었다.
이 사건은 내게 잊고 있던 몇 가지 사실을 상기시켰다.
첫째, 엄마는 원래 쉽게 평정심을 잃는 사람이었다는 것. 둘째, 십여 년 전 아빠와 이혼한 뒤로 엄마에게는 화낼 일이 거의 없어졌다는 것.
그러나 여전히 믿기 힘든 사실은 이번 날벼락의 원인이 고작 티브이였다는 것이다. 티브이. 혼자 사는 엄마에게 티브이가 필수품이고 소중한 건 알지만.. 대관절티브이는 엄마에게 무슨 의미인거지?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엄마아빠의 부부싸움은 일상이었다.
엄마는 화가 많았다. 치사하게 경제권을 쥐고 군림하는 남편은 대외적으로는 호인이었다. 그러니 어디 가서 속내를 털어놓지도 못하는 엄마의 마음엔 화가 차곡차곡 쌓였을 것이다. 회피형 아빠와 공격형 엄마의 말다툼은 엄마의 쏘아붙임으로 시작하여 엄마의 분노폭발로 끝이 났다. 혼자 악쓰고 소리 지르고 욕했다. 억압된 감정을 표출하고야 마는 성정이 오히려 건강한 것 같기도 했다.(실제로도 지병 없이 아주 강건한 편.) 그 당시엔 엄마도 아빠도 반반 이해되었지만, 두 사람의 지난한 이혼소송과정에서 엄마가 지나치게 고통받는 모습을 지켜본 이후부터 나는 엄마와 정서적으로 한층 친밀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엄마는 이혼 후 화를 내지 않았다. 매사에 불평불만을 하며 혼잣말로 욕지거리를 내뱉던 사람이 소소한 일에도 감사함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엄마에게 이혼은 구원이었다.
내가 아는 엄마의 과거모습과 현재모습을 떠올려본다.누구에게나 여러 가지 얼굴이 있다. 우리는 타고난 기질과 형성된 성향이 어우러져 탄생한 그 얼굴들로 세상과 소통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어떤 얼굴이 주로 비춰지는지는 그가 놓인 환경과 상황에 기인하는 것 같다. 특정 환경에 오랜 기간 노출되면 주로 사용하는 얼굴도 변하는 것일까. 설사 그렇다 해도 해묵은 얼굴들은 작고 단단한 사과씨앗처럼 우리의 무의식 어딘가에 콕 박혀있다가 특정 자극이 감지되는 순간 득달같이 튀어나오는 것 같다. 어제의 엄마처럼. 나는? 너라고 그처럼 굴었던 적이 없었니. 자문해보니 부끄러워서 숨고싶다.
내가 가진 가장 저급한 구석도, 제일 그럴싸해 보이는 모습고 나라는 이름으로 공평하게 품고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잘나기만 한 사람이 세상천지 어딨으며 못나기만 한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나의 못남도 타인의 결함도 수용할 수 있는 아량이라는 걸 갖고 싶을 뿐이다. 우리가 끝내 서로를 받아줄 수 있도록 말이다.
결국 내 남동생은 다음날 퇴근 후 ktx를 타고 엄마집에 가서 티브이를 원상복구 했다고 한다. 내가 전화했을 때 엄마는 모처럼 아들이랑 단둘이 소고기를 구워 먹는 중이라고 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무척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