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면 약을 먹으면 되잖아?
최근 일상생활에 지장이 갈 만큼 불편을 겪고 있는 증상을 죽 나열해 보자면, 대중교통 이용이 힘들고, 사람을 대하는 게 어렵고, 집을 나가기가 무섭고, 감정 기복이 크며, 자주 속이 쓰리다. 특정 자극에 과민하게 반응해 몸이 발작을 일으키는 것도 상당히 불편하다. 일을 최소화하고 자기 돌봄에 힘쓰고 있지만 여전히 답을 찾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무엇보다 하루에 한두 번씩 찾아오는 살해 충동에 내가 언제까지고 나를 살려둘 수 있을지 스스로 믿을 수 없게 되어 병원에 방문했다.
망원동 연세맑은정신건강의학과의원에서의 진료는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초진이었는데 타 병원에서 흔하게 진행하는 이런저런 검사 따위 없었고 짧은 진료시간 내에 나의 경험과 생각을 압축해서 말해야 했다. 항우울제는 자살 충동을 악화시킨 경험이 있으므로 제외하고 필요시 약과 취침 전 약만 받아 왔다. 약물에 대한 부작용 경험이 커 아주아주 약한 약으로 처방해달라고 당부했다. 해당 병원은 예약 없이 당장 진료가 필요할 때, 빠른 시간 내에 약만 타는 게 목적일 때 추천하지만 그 외의 경우에는 추천하지 않는다.
필요시 약은 자나팜정 0.125mg과 인데놀정10mg, 취침 전 약은 잘레딥 5mg과 데파스정 0.25mg. 요새 조금만 긴장되어도 속이 쓰리는데, 진료를 기다리면서부터 명치가 조이기 시작했고 진료를 받는 동안 더 심해져서 내내 배를 쓰다듬었다.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 렌트 차량 운전석에 앉아서 약 이름을 하나하나 검색해 본 후 필요시 약 한 봉지를 입에 털어 넣었다. 효과는 나쁘지 않았다. 카페에서 조금 시간을 때우다 두 달 치 생활비가 걸린 촬영 미팅을 갔다.
사람을 만날 때면 내 기분보다 상대의 기분이 우선이고 그를 최대한 기분 좋게 해주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그래서 누구를 만나면 원하든 원치 않든 자동으로 외향인 모드가 눌리곤 하는데, 요즘엔 의식적으로 고양되는 기분을 억누른다. 멀쩡한 척 신나게 떠들다가 사람들과 헤어지고 홀로 조용한 집에 들어오면 존나 더 격렬하게 죽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삼년에 걸쳐 겨우겨우 올려놓은 몸값을 떨어뜨리고 싶지 않다면 클라이언트 앞에서는 어느 정도 멀쩡한 척을 해야 한다. 나는 당신들의 프로젝트에 꼭 필요한 좋은 상품이며 일정에 차질을 빚지 않을 만큼 책임감 있고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다는 신뢰를 심어주어야 한다. 여전히 속이 쓰렸지만 미팅 중에는 배를 쓰다듬지 않았다. 미팅은 성공적이었다.
곤드레밥과 솔부추장으로 도시락을 쌌는데 혼자 밥 먹기 싫고, 이대로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가기도 싫고, 병원에 갔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라도 털어놓고 싶어 최근까지 일했던 장어집에 갔다. 직원 두 명이 마침 식사 중이었기에 옆자리에 앉아 겸상했다. 장어집 근무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에너지 소모가 커서 종종 위경련이 왔고 나중에는 일을 하기도 전부터 불안발작이 일었지만, 내가 얼마나 힘든지 따위는 나 외의 다른 사람들은 알 수 없으므로 갑작스레 그만둔 주제에 뻔뻔하게 찾아온 나는 적당히 아프고 불쌍한 “척”을 해야 한다. 텐션이 낮아진 나는 꽤나 우울증 환자 “같다”. 밥을 먹으며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다 직원들의 휴게시간이 끝나가고 다시 속이 쓰리기 시작할 즈음 집으로 돌아왔다.
예전에 같은 카페에서 근무하던 사람들이랑 다음날에 약속이 있는데 갈지 말지를 일주일 전부터 지금까지 대략 오십 번째 고민 중이었다. 일단 약을 먹고 잘 자고 일어나서 생각하기로 했다. 전날 밤을 거의 새운 탓에 초저녁부터 몸이 매우 피곤했는데, 제시간에 잠들기 위해 다음날 구울 대파 스콘 재료를 손질하고 글을 쓰면서 버텼다. 너무 피곤해서 그런가? 아니면 아까 먹은 약 부작용인가? 글이 안 써졌다. 마음에 드는 문장이 하나도 안 나오고 온통 이상했다. 속상하고 불안했다.
저녁 여덟시쯤부터 약 먹을 생각에 긴장되기 시작했다. 세수를 하고 양치를 하고 잘 준비를 하는데 점점 우울해졌다. 아아. 나는 약이 정말 싫다. 열여덟 살 때부터 스무 살 때까지 몸이 너무 아파서 너무 많은 약을 먹었고 그 약은 나를 더 아프게 했다. 싫다고 했지만 무섭다는 말에 더 가깝다. 약이 나를 해칠 것 같다. 하지만 약을 먹지 않는다면 내가 나를 해칠 것 같다.
저녁 아홉시쯤 약을 먹었는데 몸은 물먹은 솜마냥 무거운데 비해 정신은 말짱하고 심장은 오히려 빨리 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너무 긴장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몸을 침대에 눕히고 얼른 자자고 어르고 달래보는데 갑자기 눈물이 났다. 누구에게라도 전화하고 싶었는데 하필이면 가장 친한 친구는 애인과의 기념일 축하로 바빴다. 외롭다. 존나 외롭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것 같다. 전화번호부를 스크롤링하다 문득 여자에게 전화 걸기까지 엄청나게 망설이는 나를 발견한다. 새삼스럽게 내가 여자를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내가 전화를 걸어서, 자꾸 내 힘든 얘기를 하고 징징거리면서 나아지지는 않아서, 그들이 나에게 질리고 나를 싫어하게 되면 어쩌지 걱정한다. 내가 사랑한 여자들은 내가 원하는 사랑을 주지 않았고 나를 함부로 대하거나 버렸다. 나는 버려지는 것이 싫다. 미움받고 상처받고 외면당하면 죽어버릴 것 같다.
그래서 여자 대신 남자를 만나왔다. 힘들 때면 친구가 아닌 남자를 찾았다. 그들은 웬만해서 나를 버리지 않았다. 그게 비록 나와 한 번 더 자고 싶어서 일지라도.
몇 번 잠자리했던 남자의 번호와 유튜브 팀을 함께 했던 언니의 번호 사이에서 여러 개의 자아가 이쪽으로 갔다 저쪽으로 갔다 우당탕탕 왁자지껄하며 난동을 피웠다. 결국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요즘에 나는 여자들의 연대를 믿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사랑에 내 몸을 그만 팔고 싶다.
언니에게 팀을 그만두게 된 이유를 털어놓고 약 먹기가 무섭고 싫다며 울었다. 언니는 그 얘기를 이제야 듣게 되어 서운하다고 했다. 나는 내 힘듦이 힘듦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봐 무서웠다고 말했다. 언니와 사십분가량 통화하며 조금 진정됐는지 잠에 들 수 있었다.
그런데 두 시간 만에 깼다. 이유는 알 수 없다. 약을 한 봉지 더 먹었다. 여전히 몸은 무거웠으나 정신은 말짱했다. 짜증나. 이게 뭐야. 내가 약을 먹겠다는데. 그토록 거부했던 약을 내가 먹겠다는데. 이제는 약이 나를 거부하는 건가?
결국 새벽에 대파 스콘을 구웠다. 오일을 너무 많이 넣어 식감이 축축한 것만 빼면 맛은 훌륭했다. 설거지를 하고 뒷정리까지 마치고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잠이 오질 않았다. 왤까. 어제부터 도합 네 시간 정도 밖에 못 잤는데. 약을 한 봉지 더 먹어볼까 싶다가 불쑥 약한테 화가 났다가 받아온 이주치 약을 왕창 입에 털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조금 울다가 창밖이 밝아지고 나서야 겨우 잠에 들었다.
그런데 이번엔 잠에서 깰 수가 없는 것이다. 약을 먹은 지는 분명 열두 시간도 넘었는데. 약속 시간 한 시간 전에 겨우 일어나 조금 늦을 것 같다는 메시지를 단톡방에 보냈으나 몸에 힘이 안 났다. 샤워를 하는 데도 머리가 멍하고 같은 생각만 도돌이표에 튕겨져 반복됐다. 침대에 다시 누워버렸다. 누가 눈꺼풀을 잡아끌어내리는 것 같다.
결국 약속에 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