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아홉 시 십분 즈음부터 여자의 핸드폰 메시지 알림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새벽에 접수한 스토킹 신고와 관련해 경찰에서 오는 연락이었다. 주로 어느 파출소 혹은 어느 경찰서의 어떤 수사관이 사건을 접수하였다거나 어디에 배당되었다거나 하는 내용들이다. 곧이어 전화가 왔다. 피해자 조사 날짜를 잡기 위한 연락이었다. 여자는 주기적으로 조여오는 명치께를 붙들고 침대에 옆으로 누워 몸을 구부린 채, 핸드폰으로 스케줄러를 확인한 뒤 다음 주 월요일 두 시로 약속을 잡았다. 그날은 추석 전날이었지만 여자에게는 별다른 일정이 없었다. 다시 눈을 감고 있는데 잠시 후 또 전화가 왔다. 아까와는 다른 번호였다.
“안전조치를 가능한 한 빨리 신청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괜찮으시다면 오늘 방문해 주세요.”
수화기 너머 남성은 나긋하고 천천한 말씨로, 자신이 저녁 다섯 시까지 있으니 되도록이면 그전까지 경찰서에 와달라고 했다. 여자는 자신이 오늘 밖에 나갈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일단 알겠다고 답했다. 그 외에도 이것저것 설명을 들었지만 여자의 머릿속에 제대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전화를 끊은 여자는 알람을 맞춰놓고 잠들었다.
오후 두 시에 알람 소리가 울리며 여자는 눈을 떴다. 한숨 자고 일어나니 정신과 육체의 상태가 약간 나아졌음을 느꼈다. 경찰서에 방문하기로 결심한 여자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지속된 긴장과 스트레스 탓에 혈액순환이 잘 안되는지 손발이 뻐근하고, 은은한 공복감이 몸을 감돌았다. 여자는 옷장을 열고 느릿느릿 옷을 갈아입었다. 아이보리색 긴팔 셔츠 원피스 아래에 복숭아뼈를 덮는 검은색 롱스커트를 겹쳐 입고, 모자와 마스크까지 썼다. 여자는 작년에 성추행을 겪은 이후 종종 그런 식의, 최대한 몸을 드러내지 않는 차림을 택하곤 했다. 정신이든 몸이든 취약한 상태일 때 자신이 본능적으로 그러한 옷차림을 택한다는 사실을 여자는 최근 깨달았다.
외출 준비를 마친 여자는 철푸덕 방바닥에 앉아 고민하기 시작했다. 경찰서까지 어떻게 가지? 대중교통으로 가기에는 다소 애매한 위치에 있는 경찰서는 걸어서 대략 이십분 거리다. 원래라면 별문제 없이 걸어갔겠지만, 경찰서 방향으로 가려면 필시 육교를 지나야 한다. 육교를 지나려면 여자가 최근 남자를 두 번 마주친 아파트 입구를 반드시 통과해야 한단 말이다.
그러면 반대 방향으로 나가서 택시를 타야 하나? 여자는 다섯 달 전 택시를 탔다가 목적지와 전혀 다른 곳으로 끌려갈 뻔한 적이 있다. 위협을 감지하고 스스로 택시 문을 박차고 뛰쳐나온 여자는 뒤늦게 경찰에 신고했으나, 길에서 잡은 택시라서 번호를 찾기도 어렵고 찾는다 한들 어떤 혐의를 들이밀기도 어려웠다. 직접적인 범죄 행위가 일어나기 전에 여자가 도망쳤기 때문이다.
“되도록이면 카카오택시를 이용하세요. 기록이 남으니까 함부로 하지 못할 거고, 혹여 무슨 일이 있더라도 신고가 수월할 거예요.”
그게 경찰에게 전해 들은 그나마 실현 가능한 해결 방안이었다. 그러나 그 일 외에도 여자는, 택시 기사에게 요청한 적 없는 찐득한 눈빛과 외모 칭찬을 받거나, 궁금하지도 않은 젊은 시절 영웅담을 들으며 맞장구쳐야 하는 일이 많았다. 그런 일들은 카카오택시를 이용한다고 해도 막을 수 없었다. 오늘 같은 날 타인의 비위 맞추는 일을 상상하자니 여자는 죽고 싶을 만큼 고단했다.
약 이십분가량 침대 옆 바닥에 모로 누워 치열하게 고민하던 여자는 결국 카카오택시 앱을 이용해 택시를 부르기로 한다. 여자는 약간 몸을 웅크린 채 살금살금 현관 문밖으로 걸어나갔다. 남자와 자주 마주치던 아파트 입구와 반대 방향으로 나섰음에도, 여자는 택시를 기다리는 내내 불안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기다림 끝에 탑승한 택시에서 기사가 자꾸만 말을 걸었다. 여자는 대화하기 싫음을 피력하기 위해, 기사가 묻는 말에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목소리로 최대한 짧게 답했다. 모자는 더욱 눌러쓰고 마스크는 시야를 가리기 직전까지 치켜 올리고 귓구멍에는 이어폰을 꽂았다. 노래는 듣지 않았다. 그 상태로 고개를 우측으로 돌려 넋이 나간 듯 창밖을 응시하는 여자는 꼭 병든 닭 같았다.
십오분. 딱 십오 분만 버티면 된다고 여자는 속으로 되뇌었다. 그런데 기사가 자꾸만 길을 헤맸다. 계속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하염없이 도착 시간이 미뤄졌다. 그게 민망한 건지 아니면 눈치가 없는 건지, 기사는 여자의 비언어적 표현을 모조리 무시한 채 시답잖은 소릴 해대며 끈질기게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목적지가 경찰서로 찍혀있는 걸 보고도 짐작하는 바가 전혀 없는 건가. 대꾸 않기를 포기한 여자는 기사의 말을 대충 맞받아치면서, 그가 이토록 사려 깊지 못함에도 중년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부러워했다.
경찰서 앞 사거리에서 신호가 걸렸다. 목적지를 목전에 두고 택시는 도로 위에 정차해있었다. 주변 신호는 여러 번 바뀌었는데도 이상하게 정면의 신호만은 초록불로 바뀌지 않았다. 원치 않는 이유로 좁은 공간에 남성과 단둘이 갇혀있는 여자의 시간은 끔찍하게 느리게 흘렀다. 아이보리색 셔츠 원피스 위로 몇 방울 눈물이 떨어졌다.
여자가 억겁의 시간을 체감한 뒤 마침내 신호가 초록불로 바뀌었다. 어디 세워드려? 저기 앞에까지 가주세요. 어디? 저기…경찰서 문 앞이요. 어디? 저 그 저 앞에까지 말이여? 힘이 쭉 빠진 여자는 여자는 걸어야 하는 걸음 수를 하나라도 줄이고 싶었지만 기사는 길 안쪽으로 들어가는 게 싫은 건지 계속 물었다. …그냥 아무 데서나 세워주세요. 여기서 세워주셔도 돼요. 여자는 체념한 듯 말했다.
경찰서 정문으로 들어선 여자는 전화를 통해 안내받은 대로 별관으로 향했다. 건물 내부는 낡은 학교 같았다. 여자가 초중고를 나오는 동안 여러 번 쓸고 닦은 것 같은 익숙한 대리석 문양의 낮은 계단이 좌르륵 깔려있었다. 엘리베이터는 없었다. 타악…. 탁…. 탁…. 계단을 오르는 여자의 느린 발걸음에 맞춰, 계단에 설치된 오래된 미끄럼 방지 패드의 알루미늄 부분이 계단에 붙었다 떼졌다를 반복하며 규칙적인 소리를 냈다. 한동안 계단을 올랐을 무렵, 여자는 어디에도 층수가 표시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층에 오면 전화해 달라고 했는데…. 여자는 자신이 몇 층까지 걸어 올라왔는지 헷갈렸다. 여자가 도착한, 삼층인지 사층인지 모르겠는 그곳은 투명한 유리문으로 막혀있었고, 안쪽에는 학교 복도가 연상되는 공간이 보였다. 유리문 옆쪽에는 <여성청소년계/여성청소년강력범죄수사팀/교통범죄수사팀/범죄예방질서계>라고 적힌 설명과 인터폰이 달려 있었다. 여자는 한 발 뒤로 물러서 몸을 길게 뺀 채 계단 위쪽을 살폈다. 중간부터 철문으로 막혀있었다. 여자는 자신이 오층까지 올라왔을 리는 없다고 생각하며 유리문 앞으로 돌아왔다.
“저… 도착한 것 같은데요.”
곧 유리문 내부 왼쪽 방향에서 전화받은 남성이 나타나 문을 열어줬다. 여자는 남성의 안내에 따라 복도 왼쪽 끝에 위치한 둥근 테이블 앞에 앉았다. 그리고 여자가 겪고 있는 스토킹의 위험도를 평가하기 위한 질문지를 건네받았다. 거기에는 가해자와 일면식이 있는 사이인지, 가해자가 협박이나 물리적 폭력 등을 가한 적이 있는지 등의 질문이 적혀 있었다. 펜 꽂이에서 주황색 삼색 볼펜을 뽑아든 여자는 양면으로 된 질문지를 유심히 읽으며 네 혹은 아니오 칸에 체크했다. 작성을 마친 질문지를 확인한 남성은, 유심히 고른 단어를 입안에서 몇 번씩 굴리고, 그마저도 약간 더듬으며, 답변 내용에 따르면 현재 여자가 겪는 범죄 피해의 위험도는 1단계로 분류된다고 조심스레 전했다.
“그렇지만… 가해자가 집 근처에서 자주 나타나는 점을 고려해서, 제가 임의로 위험도를 한 단계 더 높이도록 하겠습니다.”
그로서 여자가 받을 수 있게 된 조치는 112시스템 등록과 맞춤형 순찰이었다. 112시스템 등록이란 여자가 겪는 범죄 피해에 관한 내용을 경찰 내부 시스템에 등록하여 여자가 112에 신고하는 즉시 전화받은 경찰관이 이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하는 조치이고, 맞춤형 순찰은 특정 시간 동안 특정 장소의 순찰을 강화하는 조치이다. 여자는 해당 조치에 필요한 자신의 개인정보를 남성에게 전달하고, 몇 가지 추가 질문에 답변했다. 그 내용을 컴퓨터로 문서화하기 위해 남성은 복도 양쪽에 위치한 교무실같이 생긴 공간 중 한곳으로 들어갔다.
여자는 원형 테이블 앞에 덩그마니 앉아 옆에 놓인 라디에이터와 그 위에 놓인 작은 화분, 그리고 금속재 창살로 덮인 불투명한 유리창을 바라봤다. 와아, 경찰청쇠창살… 경찰청쇠창살이다. 어릴 때 발음 연습하며 놀던 바로 그 경찰청쇠창살 안에 여자는 갇혀 있는 듯했다. 여자는 피식하는 웃음과 동시에 눈물을 흘렸다. 내가 왜 여기 안에 있지, 정작 나를 위협하는 남자는 경찰청쇠창살 밖 넓은 세상을 떳떳하게 거닐고 있을 텐데, 따위의 생각이 여자의 머릿속을 스쳤다.
잠시 뒤 남성은 컴퓨터로 작성한 문서를 출력하여 여자에게 건넸고, 여자는 내용에 틀린 부분이 없는지 확인했다. 뒤이어 남성은 응급조치, 긴급 응급조치, 잠정조치 등 피해자가 받을 수 있는 조치에 관해 더 설명을 해주었다. 여전히 그 내용은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았지만, 차분하고 신중한 언어로 더듬더듬 말하는 남성의 모습을 보며, 여자는 잔뜩 찌그러지고 웅크러든 마음이 살짝 누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부주의한 언어로 인해 상대가 조금이라도 상처받는 일을 피하고자 애쓰고 있음이 전해지는 사려 깊은 태도였다. 여자는 남성의 학습된 배려를 받는 기분이 썩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경찰서를 나온 여자는 이전부터 점찍어놨던 근처 화덕피자집에 들어갔다. 거기에는 비건으로 먹을 수 있는 “마리나라”가 있었다. 밀가루 반죽 위에 토마토소스와 마늘이 올라간 심플한 피자다. 피자 하나만 먹기 아쉬웠던 여자는 카운터 앞에 서서 눈에 불을 켜고 메뉴판을 뜯어봤다. 그러다가 감자 구이 요리인 “파타타”라는 메뉴를 발견했다. 사진에서는 위에 치즈가 뿌려져있는 것 같았지만, 빼달라고 하면 비건으로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마리나라와 치즈 뺀 파타타를 주문한 여자는 구석진 2인석 자리를 찾아 전면 유리로 된 입구 방향을 등지고 앉았다. 그 상태로 카운터 뒤에 자리한 화덕을 마주 보며 직원 두 명이 얇게 민 밀가루 반죽과 감자를 화덕 안에 넣고 빼는 모습을 구경했다.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며 여자는 발을 동동 굴렀다. 공복이 열여덟 시간 이상 지속되기도 했지만, 경찰서에 갔다 오는 동안 속에서 뭔가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낀 여자는 빨리 무언가를 입안에 넣고 씹고 삼켜서 뱃속을 가득 채우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있었다. 매장에 손님이 여자밖에 없었기에 오래지 않아 메뉴가 나왔다. 기다리던 마리나라는… 피자라고 부르기 민망할 만큼 볼품없었다. 그나마의 주재료인 토마토소스조차 넉넉히 올라가있지 않아 소스 아래로 밀가루 반죽이 비쳤다. 여자는 피자를 한입 베어먹고 우물거렸다. 맛이 없었다. 음식 간을 보는 데 자부심이 있는 여자는, 내가 만들어도 이것보단 낫겠다고 생각했다. 파타타는 스위트 칠리소스와 함께 제공되었는데, 이 역시 집에서 오븐에 감자를 구워 먹는 쪽이 맛있었을 것 같았다. 그다지 저렴한 가격도 아니었는데…. 화덕에 들어갔다 나왔을 뿐인 손바닥만 한 감자의 가격이 뻥튀기 된 것에 여자는 불쑥 화가 났다. 그럼에도 꾸역꾸역 음식을 입안에 넣고 씹고 삼켰다. 조금이나마 맛있게 먹기 위해, 토마토소스가 발린 밀가루 빵 위에 스위트 칠리소스를 찍은 감자를 올려 말아 먹었다. 그러다 음식이 얹히는 기분이 들었다. 여자는 빵 귀퉁이와 감자 몇 조각을 남기고 가게를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