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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미 최 사카모토 Oct 27. 2024

당신을 스친 어떤 여자(3)

9월 11일 수요일 오후 다섯 시 오십 분 경. 오전부터 열 시부터 약 여섯 시간 동안 이어진 모델 촬영 일정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여자는 침대를 옆에 두고 바닥에 누워 O를 기다리고 있었다. 스토킹을 신고한 당일인 어제 여자는 문밖에 나서기조차 두려웠다. 촬영 일정이 있는 오늘 과연 외출할 수 있을지 걱정했으나, 아직까지 돈은 여자를 방 밖으로 끄집어내는 동기부여를 하기에 충분했다. 이미 입금 완료된 건이었기에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다음 건까지 무사히 따낸 걸 보면, 여자는 오늘 클라이언트 앞에서 말실수하거나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데에 아마 성공한 것 같다.

아파트를 나가고 들어갈 때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남자와 자주 마주쳤던 방향과는 반대편에 위치한 입구를 이용했다. 마스크로 얼굴을 최대한 가리고, 주변을 지나는 남성을 감지하는 레이더망을 작동하고, 특히 그 남자가 출몰할 가능성이 짙은 아파트 주변에서는 축지법 쓰듯 날렵하게 몸을 놀렸다. 그렇게 여자는 이틀째 남자를 마주치지 않고 무사히 집에 도착하는 쾌거를 이뤘다. 오늘의 생존을 자축하며 바닥에 누워 자조하는 여자는 자신이 현재 정신적으로 매우 불안정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곧 집에 도착할 절친한 친구 O와 시간을 보내면 분명 상태가 나아질 거라 믿었다.


여자의 집 근처에 도착한 O에게서 전화가 왔다. 집 앞 편의점인데 무슨 과자를 사갈까 하는 내용이었다. 저번에 김 맛 감자칩이 아주 맛있었으니 그걸로 부탁한다고 하고 전화를 끊은 여자는, 끙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켜 식탁과 그 주변을 정돈했다. 곧바로 O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직 집 앞에 도착할 시간도 아니었거니와 도착했다 한들 O는 여자의 집 비밀번호를 알고 있으니 말이다. 여자가 전화를 받았다.


“편의점에서 너희 집 가는 길에, 고가 아래에 의자 몇 개 있잖아. 얼마 전에 우리 같이 있을 때 너한테 말 걸었던 그 남자가 지금 거기 앉아있는 것 같거든? 근데 앉아서 핸드폰을 하는 것도 아니고, 담배를 피우는 것도 아니고, 지나가는 사람들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어. 꼭 누굴 찾는 것처럼. 그러다가 나랑 눈이 마주쳤는데, 내 생각엔 아무래도… 내가 너랑 체격도 외모도 비슷해서 쳐다본 것 같아.”


O의 말을 듣는 순간, 여자는 지금껏 품었던 의문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됨을 느꼈다. 여자의 집에서 공동 현관으로 나가 우측 방향으로 걸어가면 아파트 입구가 있다. 유턴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맞은편엔 자주 가는 편의점과 또 다른 아파트가 있는데, 이를 횡단보도로 오고 갈 수 있는 구조였다. 그 도로에는 유턴하는 저속 차량밖에 들어오지 않기에 신호등 없이 무단횡단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유턴 도로 위쪽으로는 고가 도로가 쭉 뻗어있고 이를 지탱하는 기둥이 유턴 도로 중앙에 군데군데 서있다. 그 기둥 주변으로 몇 개의 의자가 놓여 있어 주변 상가 직원들이 이를 흡연구역처럼 이용하곤 했다. 그런데 설마, 그 구역을 이런 식으로 활용할 줄이야.

그러니까 남자는 그 의자에 앉아 여자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우연을 가장한 마주침은 남자가 계획한 역겨운 필연이었다. 최근 여자가 아파트 입구를 지나칠 때마다 어디선가 불쑥 남자가 튀어나올 수 있었던 건 그래서였다. 그놈은 거기에 죽치고 앉아 여자를 기다렸던 것이다. 지금도, 그 자리에서 여자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내가 바로 갈게.”


여자는 분노로 얼굴이 뜨거워졌다. 여자의 착각이 아니었다. 내가 유난 떠는 게 아니었어. 그놈은 미친놈이 맞다. 내 인생에 함부로 난입한 강도다. 여자는 여태 영문도 모른 채 불안감에 떨었다. 자신을 끊임없이 의심하며, 남자에게 악의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애써 스스로 타일렀다. 그러나 O의 전화를 받는 순간 여자는 드디어 확신했다. 이 년 전부터 지금까지, 우연이나 실수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남자가 자신을 찾아다녔음이 틀림없다고. 불쑥 남자를 죽여버리고 싶은 마음이 여자 안에서 솟구쳤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가슴에 품은 채 호기롭게 방문을 박차고 나왔으나, 아파트 입구로 향하는 동안 여자의 분노는 차츰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내가 왜 바로 간다고 했지? 가서 뭘 어떻게 하려고? 일단 섣불리 접촉하지 말고 멀리서부터 남자의 사진과 영상을 최대한 찍어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직 남자의 신원이 파악되지 않은 상태이니 경찰에게 저 남자가 바로 그 남자라는 사실을 알려야 할 테다. 신고를 하면 되나? 그래도 되는 상황인가? 오늘은 그 남자가 아직 나에게 말을 안 걸었는데…따위의 생각을 여자가 하는 동안 멀리서 O의 모습이 나타났다.

 

O와 여자는 아파트 입구 부근의 구조물 뒤에 몸을 숨겼다. 여자는 최소한의 몸만 빼꼼 내민 채, 재빨리 눈알을 굴려 남자를 쫓았다. 빨간 캡 모자를 쓰고 무채색 반팔 티셔츠와 검은 긴 바지를 입고 슬리퍼를 신은 그 남자가 과연 O의 말대로 고가 도로 아래 의자에 앉아 행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한 여자는 강렬한 두 가지 충동에 휩싸였다. 남자를 해치고 싶은 충동과, 도망쳐 집에 들어가고 싶은 충동이 양극단에서 각각 여자를 끌어당기는 바람에 여자의 심장은 쉴 새 없이 가쁘게 날뛰었다. 여자는 카메라 줌을 최대로 당겨 남자의 모습을 영상으로 담았다. 생각보다 거리가 멀어서 남자의 얼굴은 잘 담기지 않았다.


영상을 충분히 찍고 나서, 여자는 다음 순서로 어떤 행동을 실행에 옮겨야 할지 몰라 한참을 고민했다. 만일 지금 여자가 남자 앞을 지나가는데 남자가 여자에게 말을 건다면, 그리고 그 장면을 완벽하게 포착할 수 있다면……. 여자는 남자를 빼도 박도 못하게 현행범으로 신고할 수 있다. 남자의 죄질을 보다 더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스스로 미끼가 되는 건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그다지 위험하지도 않을 것이다. 지금껏 남자는 여자를 협박하거나 물리적 위협을 가한 적은 없었으니까. 그러나… 여자는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도대체 뭐가 무서운 거지? 남자 앞을 지나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 몸이 발작을 일으키려 했다. 지금껏 남자를 마주치면 도망치기 바빴던 여자는 이토록 시간을 들여 남자를 관찰한 일이 없었다. 멀리서 바라본 남자는 여자의 기억 속 모습보다 훨씬 덩치가 컸다. 백팔십 센티는 훌쩍 넘어 보이는 큰 키에 건장한 체격의 남자는, 백오십오 센티미터에 마른 체격인 여자에게 가히 위협적인 인상을 주었다.


남자를 멀리서 지켜보며 한참을 숨만 고르던 여자는 결국 112에 전화했다. 지난번 피해자 보호 조치의 일환으로 여자와 여자가 겪고 있는 사건에 관한 정보가 112시스템에 등록되어 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경찰을 호출할 수 있었다. 전화를 끊고 오 분 정도 흘렀을 무렵 경찰차가 왔다. 여자는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그의 반응을 주시했다. 남자는 별 반응 없어 보였다. 그러나 경찰 두 명이 차 문을 열고 나올 즈음, 남자는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나는가 싶더니 여자를 등지고 반대편 아파트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여자는 다급하게 경찰을 불렀다.


“저기, 저 사람이에요! 지금 도망가는 사람! 빨리 붙잡아주세요!”


차에서 내린 여성 경찰과 남성 경찰 중 남성 쪽이 남자를 쫓아갔다.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경찰이 자신 때문에 소환됐을 거라곤 상상치 못해서인지, 느리게 걸어가던 남자는 곧 경찰에 따라잡혔다. 여자는 남자가 경찰에게 붙들려있는 장면을 멀리서 바라보며 희열을 느꼈다. 드디어 남자의 정체를 알 수 있다. 이 년 전부터, 혹은 그보다도 오래전부터 온 오프라인 상에서 여자를 추적하고 정보를 수집하고 동선을 파악했을지 모를, 베일에 싸여있던 남자의 정체를 드디어 알게 된다. 남자의 약점이 될지 모를 것들을 어쩌면 여자 자신의 손에 쥘 수 있게 된다.


남성 경찰과 동행한 키 큰 여성 경찰이 여자에게 다가와 상황에 대해 자세히 물었다. 처음에는 현재 경찰을 부르게 된 정황에 대해 묻는가 싶더니, 차츰 여자가 겪고 있는 스토킹 전반에 대해 처음 듣는 것처럼 질문해왔다. 남자에게 온 신경을 집중하느라 날이 서있던 여자는 약간 격앙된 목소리로 되물었다. 아니, 경찰에 제 정보 등록되어 있다면서요? 공유 받으신 거 아니에요? 저희가 공개된 정보만 가지고 모든 걸 알 수 없어서요. 번거로우시겠지만 한 번 더 명확히 설명해 주세요. 여자는 흥분으로 인해 약간 말을 더듬으며 사건 전반에 대해 최대한 간단명료하게 전달하려 애썼다. 그러는 동안 경찰의 무전기를 통해 여자의 사건을 담당하는 형사에게서 연락이 왔다. 무전기를 건네받은 여자는 상황을 거듭 설명했다. 네, 아니 그러니까, 지금 남자가 저한테 말을 걸었던 건 아니고요. 맨날 마주치던 그 자리에서 죽치고 앉아있던 걸 친구가 발견해서 알려줬어요.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고요. 다른 사람한텐 말을 안 걸어요. 저를 기다리고 있던 게 틀림없다니까요! 여자가 무전기를 붙들고 통화에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여자의 주변을 지키며 맴돌던 O의 시야에 이상한 장면이 포착됐다. O가 다급하게 말했다.


“어? 저 사람 지금 이쪽으로 오는 것 같은데?”

 

여자는 곧바로 시선을 들어 남자를 봤다. 어라…? 남자가… 정말로 남자가 이쪽으로 온다. 남성 경찰과 동행한 남자는 여자가 있는 방향으로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이성의 끈을 놓친 여자는 비명을 지르며 남자의 수직 방향으로 황망히 도망쳤다. 그러나 남자와의 거리는 이미 좁혀진 뒤였다. 형식적으로 남자를 제지하는 경찰의 손을 신경질적으로 뿌리치며, 남자는 여자의 바로 옆을 지나쳐 갔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여자를 봤다. 여자는 도망치면서도 행여 남자가 쫓아올까 봐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남자는 미간을 찌푸린 채, 겁에 질린 여자의 일그러진 얼굴을 두 눈에 아로새기듯 노려보았다. 남자가 아파트 입구로 들어가며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여자는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O와 경찰이 뒤따라와 여자를 달랬다. 경찰은 큰 소리로 우는 여자의 모습에 당황하며 말했다.


“잠깐, 왜 그러세요? 진정하세요.”

“왜…! 왜 제가 있는 쪽으로 데려와요! 오면 온다고 말을 해줘야 될 거 아녜요!”

“아, 저분이 이 아파트 주민이라고 하셔서…. 집에 들어가라고 보냈어요. 괜찮아요. 진정하세요.”

“괜찮긴 뭐가 괜찮아요! 저 사람이 제 얼굴을 봤잖아요! 째려봤다고요! 저한테 무슨 일 있으면 책임질 거예요?”


여자는 과호흡으로 숨을 몰아쉬며 성대를 긁는 기괴한 음성으로 오읍했다. 눈물과 콧물로 뒤덮인 여자의 얼굴에 여자의 긴 머리카락이 들러붙었다. O와 경찰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여자의 등을 토닥이며 O가 경찰에게 물었다.


“근데… 저 남자가 이 아파트에 산다고요?"

“네, 신분증을 확인했는데 이 아파트에 사는 걸로 확인됐어요.”

“어떡해… 어떡해요. 하필이면 또 같은 아파트야. 나 어떻게 살아.”


여자는 통곡에 가까운 울음소리를 내며 계속 울었다.


“혹시 그 사람 몇 동 몇 호에 사는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뭘 할 건 아닌데, 어디 사는지 알고라도 있어야 친구가 최대한 피할 수 있을 것 같아서….”


O의 말에 경찰은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남자의 동호수를 알려줬다. O는 이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곧바로 여자의 카톡에 전송했다. 잔뜩 눈물과 원망을 쏟아내 지친 여자는 O와 여성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집에 돌아왔다. 도어록을 해제하려는 여자에게 경찰이 말했다.


“긴급 조치도 시행됐고 접근 금지 명령도 곧 통과될 거예요. 여하튼 잘 피해 다니세요.”


대체 무슨 소리지?라고 여자는 속으로 생각했다. 니들 덕분에 오늘 내 존재가 남자에게 다시 한번 각인됐는데. 아까는 괜찮다느니 소릴 하더니, 이제는 나더러 잘 피해 다니라고? 여자는 경찰이 도통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한국말을 쓰고 있었고 심지어는 같은 여성이었지만, 큰 키에 곧은 자세와 무표정한 얼굴의 여성 경찰은 키 작은 여자와는 아예 다른 세상 사람처럼 느껴졌다.


집에 들어온 여자는 곧바로 침대에 누웠다. 그 새끼가 같은 아파트에 산다니……. 여자는 벙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비죽비죽 실소하다 으아앙 소리를 내며 마저 울었다. 씨발 진짜…. 경찰이고 뭐고 다 좆같아. 어떻게 이래, 대체. 어떻게…….

도대체 무슨 수로 살지? 삶이 평생 이따위 일의 연속이라면, 다들 어떻게 계속하고 있는 거야? 지금까지 삶을 겪어낸 여자로서는 지금 이 상황이 최악일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떤 위협으로부터 가까스로 생존하더라도, 보다 다채로운 인생의 배신이 여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혹시 신이 나를 죽이기 위한 계획을 단계별로 실행 중인데 내가 눈치 없이 계속 살아있는 아닐까? 한 치 앞이 막막할 뿐 도저히 생존에 동기부여할 만한 미래가 그려지질 않았다. 여자의 머릿속은 죽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 메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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