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회색토끼
“어, 좀 이따가 다시 전화 걸게.”
강혁은 바로 뚝 전화를 끊었다. 그의 강력한 촉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우연이겠지만 이 사건과 형의 전화는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 것 같다고.
일단은 의뢰인의 이야기를 더 듣는 것이 필요했다. 서영은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의 여동생의 신분이 도용됐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있었다.
“이름도 한가영. 주민등록번호 900218-2 XXXXX. 이거 다 내 동생 거라니까! 내 동생은 미혼에 유학 중인데 뭔 개소리냐고 이게.”
“워워. 의뢰인 앞인데, 워딩을 순화하는 게 어떨까요, 변호사님?”
강혁은 의뢰인의 눈치를 보며 얼른 서영의 귀에 속닥거렸다. 그녀는 그제야 큼큼 헛기침을 내뱉으며 좀 더 욕지거리를 내뱉으려다가 간신히 참았다. 의뢰인은 아까보다 좀 더 움츠러들어 있었다. 겉보기에 지나치게 수더분하여, 오늘 돈이 없어 차비가 없다고 하면 당장에라도 지갑에서 2000원쯤은 꺼내 손에 꼭 쥐어주며 집에 조심히 가라고 말할 것 같은 인상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좀… 욱하는 성격이 있는지라, 하하.”
서영은 넉살 좋게 웃었고 의뢰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니까 가영이 신분이 위조신분이라는 거죠…? 이름도… 가영이가 아닌 거죠..?”
“네. 진짜 신분은 모르시는 거예요?”
강혁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쩐지… 뭔가 좀 이상한 부분이 있긴 했어요.”
의뢰인은 곰곰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강혁은 얼른 주머니에서 다이어리와 펜을 꺼내 들었다. 서영도 그의 옆에 찰싹 붙어 앉아 다리를 꼬았다.
“어떤… 점이죠?”
“사실 제 아내는 형이 소개해줘서 만나게 된 거였어요.”
“아하… 형이요…?”
강혁은 다이어리에 인물 관계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아직까지는 간단해 보였다. 형제와, 동생의 아내. 아내는 형과 친구 사이.
“저희 부모님이 난임이셨어서… 임신을 포기하고 형을 입양하게 되었어요. 전 그 뒤로 운 좋게… 어떻게 생기게 됐지만.”
그는 그런 설명을 하는 것이 어딘가 머쓱하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강혁은 아랑곳하지 않고 필기를 이어나가며 기계적으로 물었다.
“그럼 부모님은 형을 어디서 입양했는지 아시나요?”
의뢰인은 한참 또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은… 혜원이라고 했어요. 보육원 이름이 그런 이름이었는데.”
“ ‘은혜원’…? 나 이거 신문기사에서 봤는데. 몇 년 전에 폐쇄됐댔어.”
서영이 얼른 호응하며 정보를 덧붙였다.
“암튼, 가영이… 가영이라고 할게요. 가영이도 같은 보육원 출신이었는데 좋은 여자라고 소개해줬어요.”
“같은… 보육원 출신의 여자를… 소개해줬다…?”
강혁은 뭔가 미심쩍은 듯 턱을 쓰다듬었다.
“저도 가영이랑 만나다 보니 마음에 들어서 사귀게 됐는데, 가영이는 저보다 형이랑 몰래 더 많이 만나는 느낌이었어요.”
“…네?”
이혼변호사 한서영의 코끝을 간질이는 내용이었다. 아까는 여유롭게 다리를 꼬고 있었지만 지금은 다리를 풀고 오히려 고개를 앞으로 빼꼼 내민 채 의뢰인의 이야기를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듣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신 이유는요…?”
“형이랑 카톡 하는 것도 자주 봤었고……저한테는 집에서 쉰다고 해놓고선 실은 형이랑 만나고 있었던 걸 언젠가 본 적이 있어요.”
“형이랑… 불륜관계!?”
서영은 이미 거기까지 시나리오를 짠 느낌이었다.
“그랬다면 제가 결혼까지 하지는 않았겠죠. 그냥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지만… 선을 넘진 않는 것 같았어요. 결정적인 증거는 없었어요.”
이미 그의 증언을 여기까지만 들었을 때도 선을 조금은 넘는 느낌이 들었지만 강혁도 서영도 더는 첨언하지 않았다.
당장 모텔을 같이 들어갔다든지, 진한 스킨십을 했다든지 하면 서영의 전문 분야로 바로 변신하는 것이었으나 그런 정황은 없었다고 의뢰인은 단언했던 것이다.
“아! 그러고 보니… 저희 통성명도 안 했네요. 전 여기 사립 탐정사무소장 사강혁입니다.”
강혁은 공손하게 손을 내밀었다.
“제 이름은 강준원입니다. 형 이름은 강준완이었는데 이름이 비슷해서 사람들이 자주 헷갈려했어요.”
“아내 분이 사라졌던 날…에 대해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요?”
며칠 전부터 가영은 신경이 곤두서있었다. 별일 아닌 일에 화를 냈고 일상적인 질문을 집착이라고 생각했다. 그날도 카페에서 흔한 데이트 중이었었다. 그녀의 휴대폰으로 전화가 걸려왔고, 그녀는 발신인을 확인하자마자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녀는 전화를 받는다는 핑계로 후다닥 나가더니 한참을 돌아오지 않았다. 준원은 걱정이 되어 이만 그녀를 찾아볼까 생각하던 찰나, 그녀가 자리로 돌아왔다.
“…아, 미안.”
“누구야? 누군데 그렇게 안색이 안 좋아?”
가영은 그를 노려보며 삐죽거렸다.
“무슨 상관인데. 그냥… 직장 상사 전화야.”
“주말에… 이렇게 전화한다고?”
가영은 아메리카노를 벌컥벌컥 들이마시다가 쾅하고 내려놓았다. 어찌나 세게 내려놓든지 곧 유리컵이 깨질 것만 같았다.
“왜. 내 상사가 지랄 맞아서 주말에도 전화하는데, 어쩔 건데. 네가 해결해 줄 거야?”
“… 가영아, 왜 화를 내고 그래.”
“분명히… 내 일에 간섭하지 말라고 말했을 텐데.”
준원은 그녀의 말에 상처를 받았지만 그저 그녀의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날카롭게 반응하는 것이라고 좋게 생각했다.
“나 잠깐 들를 데가 있어서. 먼저 집에 가있을래?”
카페에서 어색한 침묵이 흐르다가 먼저 그녀가 말을 꺼냈다.
“응? 어딘데 그래? 같이 가자.”
그러자 그녀의 표정은 아까보다 더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는 입을 앙다물며 복화술 하듯 말했다.
“ … 먼저 집에 가 있으라고 했잖아. 같은 말…두 번 반복하게 하지 마.”
준원은 또 기가 죽어 잔뜩 어깨를 움츠렸다. 어쩐지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행동은 최대한 하고 싶지가 않았다.
“아… 알았어. 너무 늦게 들어오지 말고. 내가 저녁밥해놓고 기다릴게.”
그는 엉거주춤 일어나서 카페에서 나갔다. 가영은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는 듯 한참을 팔짱을 낀 채 창밖을 바라보며 씩씩거렸다. 그게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녀가 무슨 이유로 화가 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화가 났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걸려 준원은 혼자 이것저것 반찬거리를 사다가 저녁 만찬을 차렸다. 저녁 6시, 7시, 8시가 되어도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분명히 저녁밥 해놓고 기다린다까지 이야기했었다. 더 늦을 것이었으면 그렇다고 연락이라도 해줄 여자였다. 하지만 어떠한 연락도 없었으며 전화를 걸어보아도 끝없이 뚜르르르하는 전화 연결음만 흐를 뿐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 위주로 호화롭게 차려둔 식사는 무참히 식어갔다. 10시쯤 되었을 때, 포기할 만도 했지만 그는 치우지 못했다. 왠지 곧 그녀가 돌아올 것만 같아서. 치우고 나면 미안해하며 집에 들어올 것만 같아서. 돌아오면 빨리 전자레인지에 데워주거나 끓여주면 금방이니까. 다 정리하고 냉장고에 넣고 싶지 않았다.
그런 그의 기대와는 달리 새벽 1시, 2시, 3시가 지나도록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밀랍인형처럼 가만히 식탁 의자에 앉아있었다.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 하얗게 질려갈 무렵 그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 가영아……어디로 사라진 거야….”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상하게도 형 역시 전화를 받지 않았다. 형에게 문자도 남겨보았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설마 둘이 야반도주를 한 것일까, 자꾸만 생각이 나쁜 쪽으로 기울었다. 가끔 날카롭고 차가워지는 구석이 있긴 했지만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해주던 여자였다. 형의 말대로 따뜻한 여자였었다. 이렇게 뜬금없이 자신을 배신할 만한 사람은 분명히 아니었다.
“그럼 경찰에 실종신고는 하셨나요?”
“네. 그렇지만 별로 그렇게 관심이 없더라고요…. 그냥 며칠 기다려보라고나 하고.”
그렇다면 아내가 사라지고 며칠이 지난 다음에야 의뢰인이 사무실을 방문한 셈이다. 그 며칠의 텀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 수 있다면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는 일이었다.
강혁은 다시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제야 흩어져있던 퍼즐조각들을 한 상자에 조금씩 모아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냥 풀리는 대로 이끌려가면 재미가 없겠지.
“여어~형, 미안. 나도 바쁘잖아. 공기 좋고 맑은 데서 힐링하는 거 아니었어?”
수화기 너머로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와 함께 욕지거리가 흘러나왔다.
서영과 준원은 어떤 이야기가 오가는 것인지 잔뜩 궁금해하는 눈빛으로 숨을 죽였다.
“그 왜 형 유배보낸 사건 증인이 보육원 원장이라하지 않았나?”
-To be continued-
[Behind the Scene]
1. 이번 회차도 재밌게 보셨을까요. 퍼즐 조각 좀 담아보셨을까요. 이번에도 썼다가 또 혼난 건 안비밀...ㅎㅎ쓰면서 많이 부족함을 느낀답니다. 꺼흐흑.
2. 요새 계속해서 공모전만 나갔다 하면 낙방하고 있습니다. 투고도 다 반려비를 맞았죠. 이쯤 되면 글이랑 저는 인연이 없는 게 아닐까요? 여러 생각이 많아지는 요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