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장 제2편. 치우환웅시대의 신과 영웅들
치우환웅은 유소환웅의 뒤를 잇는 환인의 화신 즉 아바타로, 유소환웅에서 치우환웅으로 이름이 바뀌는데,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서자 환웅에 해당한다.
치우환웅 시대에 환인과 환웅 시대의 신인 반고가한과 함께 황제 공손헌원(公孫軒轅), 염제신농의 후손인 염제 유망(楡罔炎帝), 공공(共工), 소호(少昊) 등이 있고, 본격적으로 한국민족의 신과 중국민족의 신이 나누어지는 시기인데, 다만 한민족의 신인지 중국 민족의 신인지 헷갈리고 있는 공공 외에는 모두가 신이 아닌 영웅에 해당하고, 심지어 염제 유망은 한민족의 영웅에서 중국 민족의 영웅으로 갈아타 변절하는 인물로 나온다.
① 치우환웅(蚩尤桓雄)
치우환웅은 치우 신앙의 대상인 신으로, 중국 사서에서는 전쟁의 신으로 그려지고, 단군신화에서는 홍익인간사상을 펼친 환인의 서자 환웅으로 그려진다.
※ 중국사서
중국 사서에서 치우는 동방 구려(九黎) 부락의 두령이라고도 하고 중화삼조(中華三祖)로 여겨지기도 하는데, 공공· 축융· 형천과 함께 염제 신농씨의 대장군이다.
중국 사서에서 치우는 신화적으로 오랫동안 요괴나 마귀 또는 괴물로 취급되었다. 그러면서도 치우 신앙 또한 분명히 존재하였고, 많은 중국의 군주들도 전쟁에서의 승리를 그에게 기원했듯, 시대와 기록에 따라서 천자의 재상, 대제후, 섭정과 서자 떨거지, 요괴, 재앙신 등으로 위상이 천차만별로 매우 달랐다.
한 고조 유방도 치우에게 제사를 지내고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는 등 군신으로서 치우 자체에 대한 신앙은 면면히 존재해 왔다. 다만 이는 지역마다 달라서, 치우 신앙이 시작된 중국 동북지방에서는 상당히 대우가 좋았다.
진나라 때 진시황에게 접근한 방사들이 숭상을 권한 팔신 중에 치우가 있었으며, 현재도 중국 동북지역 일부에서는 민간에서 용신(龍神)이자 우신(雨神)으로 숭배된다. 실제로 한나라가 중국 대륙을 지배하기 전에는 중국에서는 지역과 국가별로 민간 신앙의 차이가 컸으나 치우 신앙이 있었고, 한나라를 시작으로 점차 각지의 민간 신앙이나 흡수한 나라의 관변 신앙을 정리하고 유학을 장려하면서 변하기 시작했다. 본래 중국의 창세신(創世神) 급(級) 여신이던 여와가 태호 복희씨의 여동생으로 격하되는 신화도 한나라 때부터 등장한다.
치우의 특징은 팔 6개에 눈 4개가 달리고, 동두철액(銅頭鐵額) 즉 소의 뿔과 발굽에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가 있었고, 일부 자료에서는 소들과 관련된 다양한 신화적 특징들을 지녔었으며, 그의 머리는 두 개의 뿔이 달린 황소의 모습을 하고 있고 몸은 인간이지만 뒷모습은 곰을 닮았다고 한다. 그리고, 맨몸으로 맹수와도 대적할 수 있을 만큼 힘도 굉장히 강했다고 하는데, 그 때문에 당시의 조악한 기술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안개 도술까지 구사할 수 있다고 한다.
이것 말고도 치우는 구려(句麗)라는 신족(神族)의 우두머리이기도 하며, 베트남, 중국, 라오스 등에 사는 묘족인 몽족들에게는 현명한 신화적 왕으로 알려져 있고, 출처와 견해에 따라서는 동이족 혹은 묘족 등의 조상으로 인식이 되며, 그렇기에 오늘날 치우는 전쟁의 신으로 여겨지면서도 몽족의 전설적인 건국 아버지로 숭배되고 있다고 한다.
※ 한국고기
치우환웅은 규원사화 환단고기, 단군신화에 홍익인간사상을 최초로 가진 신으로 등장하는데, 형제 81인 또는 72인과 풍백(風伯)· 운사(雲師)· 우사(雨師)를 거느리고 다녔고, 그 외에 다섯 병기를 만들어 팔 6개로 들고 다녔다. 풍백· 운사· 우사가 가진 의미처럼 천둥과 벼락의 신으로 홍수신화와 관계가 있는데, 홍수 이야기는 수메르 신화의 우트나피쉬팀(Utnapishtim) 즉 지우수드라(Ziusudra)와 그리스 로마 신화의 데우칼리온 부부 이야기와 성경에서의 노아의 방주 이야기에 맞닿아있다.
치우환웅은 천신이자 웅씨(雄氏) 계보의 최초 인물로, 신으로서는 고대 한국시대와 구려 한국시대의 유소 환웅의 뒤를 잇고, 인물로서는 웅씨(熊氏) 계보 최초 인물인 유웅국 소전(少典)의 아래 연배와 시기인 동시에 황제와 같은 연배와 시기이다. 치우환웅과 유소 환웅이 동일 신이고 유인 환웅의 뒤를 이었으며, 유인 환웅이 고시씨이고 유소 환웅이 그 직계이므로 치우환웅 역시 고시씨의 직계이다.
한편, 염제 신농이 소전의 아들이고, 황제와 염제 유망 역시 소전의 아들인데, 소전이 고시씨의 방계이므로 둘 다 고시씨의 방계가 된다. 결국, 고시씨의 방계인 웅씨(熊氏) 계보 소전의 아들 황제와 염제 유망은 고시씨의 직계인 웅씨(雄氏) 치우환웅과는 남이 아니다.
한국 역사에서 치우환웅은 하느님 유소 환웅이 하나님으로 칭송받으면서 생긴 다른 이름으로, 홍익인간사상으로 보아 평화적인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는데, 흉악하고 전투적인 모습은 중국사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다만 역사학계에서는 신화 속의 존재일 확률이 매우 높고 실존 인물이라는 증거가 전혀 없다는 이유로 부정되고 있다.
한국역사의 기적은 없는 역사나 신화도 만들어 내는 외국과는 달리, 이처럼 있는 역사나 신화도 부정하는 것인데, 정말 한국인들이 공정해서 그런 것인지 누군가 다른 꿍꿍이가 있어서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한국인들 대부분이 이익을 위해서 거짓말 정도는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현재의 풍토로 보아 전자는 아닌 것 같고, 아마도 누군가 다른 꿍꿍이가 있어서 일 것이다. 어찌했던 한국고기에서 치우의 캐릭터는 단군신화를 통해 보듯이 인간을 위하고 구하는 선한 신이다.
② 자부선인(紫府仙人)
중국 도교의 경서(經書) 포박자(抱朴子)에 등장하는 신선으로 자부선생(紫府先生)이라고도 하는데, 동방 청구국에 사는 신선으로, 황제 헌원이 도(道)를 물은 동서남북 각 지역의 선인 중 서방 공동산의 광성자(廣成子)와 함께 가장 비중이 크다.
포박자에 따르면, 헌원이 청구에 와서 풍산(風山)을 지나던 중 자부선인을 만나 삼황내문(三皇內文)을 받고 만신(萬神)을 부리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기록의 전부이다. 한국 고기에 의하면 발귀리 선인의 자손이다.
③ 황제(黃帝) 공손헌원
공손헌원(公孫軒轅)은 스스로를 황제(黃帝)라 칭하여 황제헌원(黃帝軒轅)이라고도 한다.
황제는 용(뱀)을 캐릭터로 신격화 된 영웅으로 치우환웅과 같은 시대인데, 황제와 관련된 신화는 한국고기와 중국 사서에 공히 등장하고, 문헌에 따라 전승되는 내용이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사마천(司馬遷, BC 145~BC 86)이 쓴 사기(史記)의 오제본기(五帝本紀)’에는 황제(黃帝)에 대해 “성은 공손(公孫)이요, 이름은 헌원(軒轅)으로 유웅국(有熊國)의 임금인 소전(少典)의 아들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위의 사기에 의하면 헌원이 유웅국(有熊國)의 임금인 소전(少典)의 아들인데, 곰 토템의 웅녀가 시기적으로 보아 유웅국(有熊國)의 임금인 소전(少典)의 아들의 딸 즉 손녀쯤 된다는 점에서 방계로 추정된다.
한국고기 태백일사와 한국사서 규원사화에서는 헌원의 아버지 소전에 대해 "소전은 소호씨(小皞氏)와 함께 모두 고시(高矢)씨의 방계이다. 소전의 별고(別孤)에 공손(公孫)이라고 있었는데, 짐승을 잘 기르지 못해 헌구(軒丘)로 유배되었다. 헌원의 무리는 모두 그의 후손이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공손이 소전의 별고(別孤)라 하였음은 은혜를 입어 가족이 된 외로운 존재라는 의미로, 따라서 공손은 소전의 친아들이 아니고 양자이며, 사기의 아들이란 기록은 양자를 친자로 날조한 허위이다.
참고로 여기서 소호씨(小皞氏)는 중국 전설시대 오제(五帝)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인물인 소호(少昊)와는 다른 존재이다.
황제(黃帝)라는 명칭이 황제(皇帝)에서 비롯되었다는 해석이 있는데, 반대로 된 해석이다.
오행(五行) 사상에서 곤륜산(崑崙山)을 중심으로 하늘의 동·서·남·북을 각각 청제(靑帝 혹은 蒼帝)·백제(白帝)·적제(赤帝)·흑제(黑帝)가 다스리고, 중앙을 천제(天帝)인 황제(黃帝)가 다스린다고 하는데, 황제(黃帝)는 하늘과 세상을 다스리는 중심이라는 사고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중국문화권에서 헌원이 중국의 국가 형성과 관련된 신화에 나타나는 삼황오제(三皇五帝) 가운데 하나인 제왕 즉 황제(皇帝)가 되면서 하늘과 세상을 다스리는 황제(黃帝)로 탈바꿈한 것이다.
한편 황제(黃帝)라는 명칭이 황제(皇帝)로 바뀐 기원에 대해 중국 지식인들이 일본의 황기(皇紀)를 보고 자극받은 창안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일본제국 당시 일본은 천황 즉위에 따른 연호를 사용하면서도, 동시에 진무덴노가 즉위했다고 전해지는 BC 660년을 원년으로 하는 진무덴노즉위기원(神武天皇即位紀元) 통칭 황기(皇紀)도 병용했는데, 일본제국에 유학을 온 중국의 지식인들이 이를 보고 황제의 황(黃)을 황(皇)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너무나 큰 연대적인 차이나 고대로부터의 문물 전래과정이 중국-한국-일본의 순서였음을 생각하면 의문의 여지가 있다.
한편 중국 진나라(秦) 사람인 갈홍의 포박자에는 "옛날에 황제(黃帝)가 동쪽의 청구(靑丘) 땅에 이르러 풍산(風山)을 지나는 자부 선인(紫府仙人)을 만나 삼황내문(三皇內文)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한국고기에 의하면 청구는 구려 한국의 수도이다.
일부의 한국 재야사학자들은 이를 토대로 환단고기에 의거해 자부 선인이 태호 복희와 함께 공부한 발귀리 선인(發貴理 仙人)의 후손이며, 상고시대인 배달국의 학자로 후대 유위자(有爲子)의 학문도 자부 선인에게서 나왔다고 주장한다.
만약 포박자의 기록대로 황제가 자부 선인으로부터 삼황내문을 받았다면, 환단고기의 위서 여부를 떠나서 황제는 구려 한국을 추종했던 인물이 된다.
황제(黃帝)는 중국을 통일해 국가를 세운 최초의 군주(君主)이자, 문자, 의복, 수레[지남거(指南車)], 거울, 60갑자 등의 문물을 만들어 중국 문명을 창시한 인물로 숭배를 받아 왔는데, “황제(黃帝) 헌원(軒轅)이 중국의 모든 나라를 건설했고 이에 따라 천하가 평화로워졌다.”라며 황제(黃帝)를 칭송하고 있다. 그리고 이상적인 제왕의 모습으로 여겨져 전국시대(戰國時代)에는 황제(黃帝)의 정치에 관한 황학(黃學)이 학문으로 등장하기도 하였다.
사기(史記)에는 황제(黃帝)가 100년간 재위(在位)하였으며, 그 뒤에 수양산(首陽山)으로 가서 구리를 캐어 보정(寶鼎)을 주조한 뒤에 용을 타고 승천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포박자(抱朴子)에는 황제(黃帝)가 만년에 자기가 직접 죽을 날을 택해 신하들과 사별한 후 교산(橋山)에 묻혔지만, 얼마 후 무덤이 갑자기 무너져 내렸는데 무덤 속에 시신은 없고 검과 신만 있었다는 내용이 전해진다.
④ 염제유망
염제 유망(炎帝楡罔)은 염제 신농씨의 8대손이라는 것과 황제 헌원에 의해 판천 대전에서 패배해 그의 추종세력이 된 것 외에 별다른 기록이 없다. 다만 치우환웅 시대이자 염제 신농의 8대손으로 한국고기와 중국 사서에 공히 등장하는데, 염제 신농과 같이 한자 염(炎)으로 보아 당연히 태양을 상징캐릭터로 하는 신격화 된 영웅이다.
최초의 염제 신농씨가 출연한 시기가 BC 3218년이고, 염제 유망과 같은 시기인 황제 헌원씨가 즉위한 해가 BC 2697년으로 서로 500년 정도 차이가 난다. 염제 신농은 신의 존재이니 출연 시기가 BC 3218년이 되어도 별로 상관없을 것이고, 다만 전형적인 국가 건설 신화에 따라 염제 신농이 염제 유망의 선조 격이 될 수는 있다. 또한, 염제 유망은 인간의 존재이니 수명으로 관계를 논할 수는 없지만, 인과 관계로 보아 염제 신농에 관한 이야기 중 많은 부분이 염제 유망과 중첩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염제 유망이 소전의 아들인 염제신농의 8대 후손이고, 염제신농이 웅씨인 소전의 방계이므로 염제 유망 역시 방계가 된다.
⑤ 공공
공공(共工)은 중국 신화에 나오는 물의 신으로, 불의 신인 축융(祝融)의 아들이다.
공공은 원래 삼황오제 중 남방 상제로 취급되는 전 천제 염제 신농 열산씨의 자손으로 강성(姜姓)이며, 전승에 따르면 인간의 몸에 뱀의 하반신을 지닌 남성 신으로, 9개의 머리에 붉은 머리칼을 지녔다는 언급도 있다.
활동 중심지역은 이른바 ‘구주(九州)’로 황하 중류 이수(伊水)와 낙수(洛水) 유역에 가까웠다.
공공은 황제 때 물과 관련된 사업을 담당한 수관이다. 공공은 어느 기록에서나 물과 관련되어 나타나며, 또 공사(工師)로 기용되었다는 기록도 있어 토목과도 관련이 있었던 것 같다. 그의 아들 후토(后土)는 물과 흙을 다스리는 능력이 있어 치수 사업에 공을 세워서 사신(社神)으로 받들어졌다고 한다. 요임금 때는 교만 방자하고 사악하다는 이유로 배척당한 기록이 『사기』에 보이는데, 그만큼 그의 세력이 강력했음을 반증하는 대목이라 하겠다.
사람들은 공공을 기려 대황 북쪽 들판과 북방 해외에 공공대(共工臺)라는 것을 세웠다고 하는데, 동지 팥죽 전승과 관련이 있는 신이기도 하다. 공공의 아들 중 하나가 동짓날에 죽어서 역병을 퍼트리는 귀신이 되고 말았는데, 그는 팥을 무서워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동짓날 팥죽을 쑤어다가 이 귀신이 집에 못 들어오게 문 앞에 뿌리거나 했다고 한다.
한국고기에서 공공은 반고 가한의 수하로 함께 삼위산 납림 동굴에 내려온 신으로 그려지고 있는데, 중국 사서에서는 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천하에 해를 끼친 4주의 악신인 사죄(四罪) 중 하나에 해당한다. 사마천의 사기 본기에서 사죄는 각각이 중국 사방에 사는 오랑캐족이 되는데, 공공(共工)은 북적(北狄), 환두(驩兜)는 남만(南蠻), 삼묘(三苗)는 서융(西戎), 곤(鯀)은 동이(東夷)가 되었다고 한다.
중국 사서에는 또 사죄(四罪)와 유사한 것으로 사흉(四凶)이 있다. 서경과 춘추좌씨전에서는 고대 중국의 순제(제순)에 의해 중원의 사방으로 쫓겨난 4 기둥의 악신인 사흉을 들고 있는데, 큰 개의 모습을 한 혼돈(混沌)· 양신인면(羊身人面)에 눈이 겨드랑이에 있는 도철(饕餮)· 날개가 달린 호랑이인 궁기(窮奇)· 인면호족(人面虎足)으로 멧돼지의 송곳니를 가지는 도올(檮杌)이 그것이다.
사죄와 사흉은 모두가 중국민족과 대립하였던 민족에 대한 명칭인데, 고대에 중국과 가장 크게 대립하면서 입장이 갈렸던 역사 기록이다. 따라서 공공과 함께 이들 모두 한민족과 깊은 관련이 있어 보인다.
⑥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
풍백은 단군신화에서 치우환웅(환웅 천왕)이 하늘에서 내려올 때 거느리고 온 세 명의 신 중 바람을 관장하는 신이다.
중국 신화에서는 “비렴(飛廉)이라는 전설에 나오는 황제(黃帝) 때 사람으로 빠른 바람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고, 황제가 태산(泰山)에서 귀신을 맞을 때 그가 먼지를 쓸었다고 하며, 치우(蚩尤)가 병사를 일으켜 황제와 전쟁을 벌였을 때 그와 우사(雨師)를 불러 큰 비바람을 일으키도록 했다.”고 한다.
한국신화와 중국 신화에서 치우환웅을 돕기 위해 풍백과 함께 움직이는 우사(雨師)는 비를 일으키는 신이고, 운사(雲師)는 구름을 일으키는 신인데. 풍백과 함께 세트로 움직이는 신인데, 이 신들은 치우환웅의 아바타 내지는 신이한 능력을 의인화한 존재로 보인다.
⑦ 이매망량(魑魅魍魎)
이매망량은 악신인 도깨비를 지칭하는 하나의 성어(成語)인데, 도깨비를 의미하는 이(魑)+매(魅)+망(魍)+량(魎)의 합성어이고, 산 속의 요괴를 의미하는 이매(魑魅)와 물 속의 괴물을 의미하는 망량(魍魎)의 합성어이다.
좌씨전(左氏傳)의 '선공(宣公) 3년' 조에 이매망량에 대한 기록이 있다.
" 초(楚)나라 장왕(莊王)이 주(周)나라의 대부(大夫) 왕손만(王孫滿)에게 주나라 왕실이 지닌 정(鼎:솥)의 크기와 무게를 물었다. 정은 왕권을 상징하는 물건으로, 장왕은 주나라가 정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쇠락하였으므로 자신이 그것을 차지하겠다는 속셈을 품고 있었다. 왕손만은 장왕의 속셈을 간파하고 정의 크기와 무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덕(德)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하다고 대답하였다. 문정지대소경중(問鼎之大小輕重)이라는 고사성어는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왕손만은 정의 용도에 대하여 "거기에 온갖 사물을 새겨 놓음으로써 백성들에게 신령스러운 것과 간악한 것을 구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물에 들어가거나 산에 들어가서 자신에게 해로운 것을 피할 수 있고, 이매망량 같은 귀신 도깨비들과 마주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유래하여 이매망량은 요괴와 괴물 등 온갖 도깨비를 뜻하는 원래의 의미 외에 그러한 요괴와 괴물처럼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치는 가지각색의 악인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⑧ 과보(夸父)
과보는 중국신화에 나오는 과보·용백·박보라는 세 거인족 영웅 중 하나인데, 특히 발이 크고 걸음이 빨라 태양과 경주를 하려 했다는 과보추일(夸父追日)의 신화로 알려져있다.
과보는 신의 자손으로 계보를 따라 올라가면 저승과 토지의 신 후토의 후예이며, 후토의 계보를 따라 올라가면 염제신농에 닿는다.
⑨ 삼묘(三苗)
삼묘는 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악신(惡神)인 동시에, 중국 요순(堯舜)시대에 강(江)·회(淮)·형주(荊州)에 자리 잡고 있었던 만족(蠻族)의 이름이기도 하다.
여기서의 삼묘는 전자의 악신에 해당하는데, 악신으로서의 삼묘는 환두와 함께 요에 대해서 반란을 계획했다고 전해지며, 그것 때문에 삼묘는 공공(共工), 환두(驩兜), 곤(鯀)과 함께 사죄(四罪) 중 하나로 꼽히는 이유가 되고 있다. 요와의 싸움에서 패한 후, 그 후손들이 남방으로 멀리 달아나 삼묘국을 세운 것으로 여겨진다.
삼묘국의 모습과 위치는 산해경 등에 적혀 있다. 삼묘가 있었던 지역의 주요 분포는 장강 주변, 둥팅호와 포양호 사이인 것으로 보여지고 있는데, 사기 본기에는 삼묘의 자손들이 서쪽으로 가서 서융(西戎)이 되었다고 적혀 있다. 또, 삼묘는 세 자손들이 각각 제홍씨(황제)의 혼돈(渾沌), 소호씨의 궁기(窮氣), 진운씨의 도철(饕餮)이 되었다고 한다. 이 3명은 전욱씨의 도올(檮杌)과 함께 사흉(四凶)으로 불린다. 근 현대, 삼묘인은 먀오족의 연원이 된다고 말해지고 있지만, 자세한 관련성은 불분명하다.
⑩ 응룡(應龍)
응룡은 중국 신화 속에서 인류의 창조주인 여와의 강력한 적으로 등장하는 동물 신이다.
응룡의 양팔은 매의 날개로 되어 있어, 마치 용의 머리를 가진 맹금류처럼 보인다고 한다. 온몸은 깃털로 뒤덮여 있고 꼬리는 아름다운 꼬리털로 장식되어 있다. 발가락의 힘이 강하고 날카로운 발톱이 나 있다. 양팔의 날개는 매우 강력해서 제비보다도 빨리 날 수 있으며, 한순간에 천상의 신들이 있는 곳으로 날아올라갈 수 있다. 또한 응룡은 깃털이나 털이 있는 모든 동물의 조상이자 조류의 왕으로 추앙된다.
여와는 불을 관장하는 용족이었는데, 그 시대에 지상은 화룡족이 지배하고 있었다. 비바람을 관장하는 응룡은 그들이 지배자라는 사실을 묵과할 수 없어, 지상을 평정하려는 여와에게 싸움을 걸었다. 바람을 자유자재로 다루고 번개 구름을 부르는 응룡과 여와의 싸움은 오랜 세월 동안 격렬하게 계속되었다. 그러나 여와는 우거(牛車)를 이용해 비바람으로부터 몸을 지키고 많은 술법을 구사하여 끝내 응룡을 굴복시키고 포로로 잡아 그의 자유를 빼앗았다. 응룡은 죽지 않으려고 여와 일족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약속하고는 겨우 포로의 신분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응룡은 또한 전설상의 현왕인 순왕의 치수 사업을 도와주려고 나선 적도 있다고 한다. 몇 대에 걸쳐 중국 전체를 뒤덮은 홍수를 가라앉히도록 순왕은 부하인 우(禹)에게 명령했다. 우는 도술을 써서 산을 뚫고 제방을 만들어 강을 넘쳐 흐르는 물을 막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대지를 삼킨 채 줄어들 줄 모르는 물에 대해서는 방법이 없었다. 여와의 핏줄을 이어받은 우는 물을 다룰 수 있는 응룡을 불러내어 치수를 부탁했다. 응룡은 꼬리를 이용하여 땅에 바람을 뜻하는 글자를 썼다. 그러자 범람한 물이 그곳으로 흘러들었고 마침내 홍수는 수습되었다. 기우제를 할 때 땅바닥에 응룡의 그림을 그려 비를 부르는 것은 이 고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의 치수 이후로 응룡은 더는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응룡은 여와의 핏줄을 이어받은 군주가 백성의 고난을 없애고자 바람이나 비의 수호를 필요로 할 때, 자신의 터전인 영산에서 날아오른다고 전해진다.
⑪ 발(妭, 魃)
발은 황제의 딸로 여성적인 에너지가 충만하여 태양의 힘을 모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으나, 가뭄을 부르는 재앙신의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여신답지 못한 평범한 외모와 앞일을 예측하고 상대방의 마음을 읽어내는 비상한 재주를 가지고 있는 여성 영웅이다.
발은 본래 지니고 있는 풍부한 여성성을 아버지인 황제의 영향으로 억제하며 자랐으나, 후에 무함국의 무녀들에게 무무(巫舞)나 비를 부르는 등 무녀의 능력을 사사 받으면서 점차 독립적인 신격을 형성하면서 차츰 아버지인 황제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게 된다. 무함국의 무녀들은 반신반인(半神半人)의 존재로 하늘을 오르내리며 신과 직접 교통할 수 있고, 귀신들과의 소통도 자유스러우며, 무무(巫舞)를 추어 비를 기원해 자연 재해 등의 재앙을 해소하거나 특별한 약초 등의 채집과 조제를 통해 질병을 치료하고 가까운 미래를 예언하는 능력도 갖추고 있다. 때때로 죽은 사람의 목숨을 구해내기도 한다.
⑫ 축융(祝融)
측융은 불의 신으로 갑옷을 입고 칼을 휘두르며 커다란 호랑이를 탄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축융은 하늘과 땅을 분리하고 전 세계의 질서를 세우는 것을 도운 신 중 하나였다.
고대 중국의 전설에 따르면, 초나라의 선조 전욱의 후손인 중려(重黎)가 제곡이 즉위한 뒤에 화정(火正:불을 관리하는 벼슬)을 맡았는데, 제곡이 그가 불빛으로 천하를 밝게 비추어 큰 공을 세웠으므로 축융(祝融)이라 부르도록 명하였다. 축융(祝融)의 후손이 기(己)씨라고 전하기도 하는데, 주나라 시대 소(蘇)씨가 되었다.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축융부인은 축융의 후예라고 서술하였다.
⑬ 창힐(蒼頡)
창힐의 원래 성은 후강(侯冈),이름은 힐(颉),호는 사황씨(史皇氏)로 문자의 신이다. 그는 눈이 네 개에 눈동자가 두 개씩이었으며 아주 총명했다고 한다. 전설 속 황제의 사관으로 한자를 창조 발명하여 "조자성인(造字聖人)’ 서성(書聖)’ 사문비조(斯文鼻祖)' 인문시조(人文始祖) 등으로 추앙받고 있다.
창힐은 역대신선통감(歷代神仙通鑑)‘ 순자 해폐(解蔽)’ 한비자 오두(五蠹)‘ 여씨춘추 군수(君守)’ 한국고기 환단고기 등 고문서에 문자 발명의 주인공으로 나온다. 다만 한국고기 환단고기에는 가림토문자라는 소리글자를 만들었다고 나온다. 참고로 역대신선통감은 1712년 4대 황제인 강희제(康熙帝) 때, 서도(徐道)가 초안을 서술(敍述)하고 이리(李理)가 교정했다는 역대 신선(神仙)과 조사(祖師) 및 성현(聖賢)들을 소개하는 전기소설이다.
역사학자는 한자가 은허에서 발견된 갑골문자에서 발전한 것으로 보고 있고, 오늘날의 역사학자들도 문자의 출현을 창힐과 연계시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당시 역법 제정 등에는 문자 기록이 필요했고, 신탁 따위도 문자를 필요로 했다. 어떤 학자는 창힐이 처했던 시기가 대략 기원전 26세기 무렵이고 전욱 부락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다만 노신(魯迅)은 문외문담(門外文談)에서 “문자를 만든 사람이 창힐 한 사람만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여러 사람이 만든 것을 사관이 채집하고 덧붙여 사건을 기록했을 것이다.”라고 했다. 다시 말해 한자는 창힐 한 사람의 창조가 아니라 창힐 같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차츰 풍부해졌다는 것고, 창힐은 그런 사람들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중요하고 큰 작용을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창힐이 문자를 창조했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글자를 만들었다는 이 사건 자체가 갖는 의의다. 글자의 출현은 인류 역사가 문자기록의 시대로 들어섰음을 의미하는 중대한 사건이자 후대에 크고 중요한 영향을 준 사건이기 때문이다.
창힐의 문자발명에 대해 여러 가지 설들이 전해내려 온다.
어느 해에 창힐은 남방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양허(陽虛)의 산(지금의 산시성 뤄난현으로 추정)에 올라 강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등에 푸른색 문양이 선명한 큰 거북을 보고, 그냥 보아 넘기지 않고 가져다 꼼꼼하게 연구했다. 창힐은 거북등의 문양이 어떤 뜻을 갖고 있음을 발견했고, 문양이 어떤 의미를 나타낸다면 그에 따른 규칙을 정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전달하고 일을 기록하면 되지 않겠느냐에 생각이 미쳤다.
창힐은 밤낮으로 생각에 빠졌다. 가는 곳마다 모든 것을 관찰했다. 하늘의 별자리 분포와 산천대지의 모양은 물론 새의 발자국, 짐승, 벌레의 흔적과 초목의 형상을 관찰하고 그것을 그림으로 그린 다음 다시 서로 다른 부호로 만들어냈다. 그리고는 부호마다 그것이 나타내는 뜻을 부여했다. 창힐은 이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자신의 설명을 덧붙였다. 그리고 이 부호를 자(字)라 불렀다. 거북등의 문양을 뜻하는 문(文, 또는 문紋)과 이 자(字)가 합쳐져 문자(文字)가 된 것이다.
창힐의 문자 발명에 대해 또 다른 설도 있다. 한번은 창힐이 매듭을 지어 사건을 기록한 것을 황제에게 제때 전하지 못해 황제가 염제 신농씨와의 영역 담판에서 손해를 보았다. 이 일로 창힐은 관직을 버리고 천하를 떠돌며 사건을 기록하는 더 좋은 방법을 찾아 다녔다. 3년 뒤 고향 백수 양무촌으로 돌아온 창힐은 홀로 별자리와 자연계를 관찰하여 세상만물을 대표하는 각종 부호를 창조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앞서 말한 대로 이런 부호들을 자(字)라 불렀다. 창힐의 글자는 만물의 형상에 따라 만든 것이다. 예를 들어 일(日)자는 태양의 붉은 원을 본뜬 것이며, 월(月)자는 달의 상현달 형상을 본 뜬 것이다. 창힐의 문자 창조를 알게 된 황제는 크게 감동하여 그에게 창(倉)이란 성을 내렸다. 그 뜻은 군(君) 위에 한 사람, 사람(人) 밑의 군(君)이란 것이다.
창힐이 글자 발명에 성공한 날 발생했던 괴이한 일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대낮에 갑자기 밤송이만한 비가 내리더니 밤이 되자 귀신의 곡소리가 들렸다. 이에 대해서, 창힐이 문자를 만들어 이를 이용하여 마음을 전달하고 일을 기록할 수 있게 되었으니 축하의 뜻으로 비가 내렸을 것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절기 곡우(穀雨)가 비롯되었다고 한다.
밤에 귀신이 곡(哭)을 한 것을 두고 어떤 이는 훗날 지식인들이 글 때문에 화를 당하는 이른바 문자옥(文字獄) 내지 필화(筆禍)를 예견하고 통곡한 것이 아닐까 추측하기도 한다. 문자가 생김으로써 사람들의 지혜는 밝아졌지만 덕은 쇠하여 속이고 죽이는 일이 갈수록 많아져 천하가 더 이상 태평을 누리지 못하게 되었기에 귀신조차 불안해 통곡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⑭ 소호(少昊)
소호(少昊)는 중국 역사에만 등장하는 영웅이다.
사마천의 사기에서 보면 "소호씨는 황제의 두 아들 중 하나인 현효(玄囂)로 나오며, 궁상(窮桑)에 도읍을 정했기 때문에 궁상씨라고 불렀다. 오행의 으뜸인 금(金)’자로 자신의 정치와 덕을 표시하고 '금덕(金德)으로 천하의 왕 노릇을 한다’는 설을 내세웠기 때문에 금천씨(金天氏) 또는 소호금천(少昊金天)이라고도 한다. 후세에 대화하현종강황제(大华夏显宗康皇帝) 혹은 백제라고 불리었고, 84년간 재위하다가 100살로 세상을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기에서 소호씨가 소호금천(少昊金天)으로도 기록된 것으로 보아 한자로는 소호씨(少昊氏)가 된다. 소호씨(少昊氏)=금천씨=소호금천은 반고 가한의 후예로 추정되는데, 둘 다 금(金)이라는 공통점이 있어 모두 중국민족의 조상으로 확인된다.
중국기록의 황제의 아들 소호(少昊)' 소호금천(少昊金天) 혹는 금천씨(金天氏)는 한국 기록의 소호씨(小皞氏)와는 분명 다른 인물로, 소호씨(小皞氏)가 소호(少昊)보다 3세대 앞설 뿐만 아니라 소호(少昊)는 씨자를 붙였을 때 금천씨로 성이 바뀐다. 분명 소호씨(小皞氏)와 황제의 아들 소호(少昊)를 동일시하여 중국 전설시대 오제(五帝)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인물을 허위로 만들어 낸 것으로, 역시 황제의 경우처럼 중국문화권의 사기 행각이다.
다만 사기(史記)에서 "소호(少昊)는 소호(少皞), 소호(少皓), 소호(少颢)라고도 하며, 청양씨, 운양씨(云阳氏), 주선(朱宣)라고도 불린다."고 하였는데, 소호씨(小皞氏)와 음이 같은 이름을 썼던 점과 전통적으로 새를 토템으로 삼았던 점과 그 자손들이 산둥반도에서 장화이(江淮) 유역으로 세력을 발전시켰던 점 등을 통해 보면 중간에 소호씨(小皞氏)가 소호(少昊)와 잠시 합쳐져서 새 토템을 전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설에 소호씨(小皞氏)가 황제의 아들인 소호(少昊)로 가을을 주재하는 신인(神人)이라고도 한 것은 이런 연유로 보이는데, 한글로 쓸 때는 소호씨 vs 금천씨로 구분하여 사용하여야 한다. 즉 금천(金天)이 성씨가 되고 소호(少昊)가 이름이 되는 것이다.
제 1장 3편. "영웅시대의 신과 영웅들"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