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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바람 Nov 30. 2024

단군신화와 한국고기를 비롯한 세계신화의 신과 영웅들 4

제1장 제4편. 삼한시대의 신과 영웅들

삼한 시대의 신과 영웅들은 한반도의 삼한시대(三韓時代)와 삼국시대(三國時代)를 있게 한 신과 영웅들이다.     

 선도성모(仙桃聖母, 생몰년 미상)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신라 건국 전의 인물이자 신라 건국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로서 신라의 여신으로 여겨졌던 영웅으로, 서술성모(西述聖母), 동신성모(東神聖母), 서악대왕(西岳大王) 등으로도 부른다.

 선도성모는 중국 제실(帝室)의 딸로 이름이 사소(娑蘇)였고, 신선술을 얻어 해동(海東) 즉 신라에 와서 오랫동안 돌아가지 않았다. 사소의 부황(父皇)이 솔개의 발에 편지를 매어 보내면서, 이 솔개가 멈추는 곳에 자리잡아 살라고 했고, 사소는 솔개를 날려보내고, 솔개가 멈춘 한 산에 머물러서 지선(地仙)이 되었는데, 그 산의 이름은 서연산(西鳶山, 서솔산, 서솔개산)이 되었고, 신모는 오랫동안 살면서 나라를 도와 신이한 일을 많이 일으켰다.       


 박혁거세(朴赫居世, BC 69년~57년)


 박혁거세의 칭호는 거서간(居西干) 또는 거슬한(居瑟邯)이었는데, 신라의 초대 국왕이자 시조이며, 한국이나 기타 재외동포를 포함한 모든 박씨들의 시조 즉 박씨들의 공통조상인 영웅이다.     


  박혁거세가 세운 신라의 시원이 되는 육부촌은 고조선 유민의 나라이고, 고조선은 신교도를 신봉하였던 종교 나라의 성격을 가진 국가였으며, 당시 진한이었던 것으로 보아 육부촌은 고조선에 속한 중국 진한의 유민으로 보이는데, 육부 촌장이 지은 이름이 박혁거세였다.

 박혁거세의 성씨 박(朴)은 나무를 뜻하는 목(木)과 점을 치는 사람이나 무속을 뜻하는 복(卜) 자를 합성한 단어이고, 또한 박은 우리말 ‘밝’에서 유래한 단어로 이름 혁거세(赫居世)의 “세상에 태어나 살면서 빛을 밝힌다.”는 의미와 같다. 

 한국 고기에 의하면 고조선 당시 선인(仙人)들을 ‘밝니’라고 하기도 했는데, “세상을 밝게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박혁거세(朴赫居世)와 의미가 같다. 따라서 박혁거세가 고조선 신교도(神敎道)의 도주(道主)이자 신라 국왕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박혁거세는 박처럼 생긴 알에서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으며 성을 박씨로 정한 것도 그 이유이고, 부인의 이름은 알영정(閼英井)가에 나타난 용(또는 鷄龍)의 옆구리에서 탄생했다고 하여 알령(閼英)·아리영(娥利英)·아이영(娥伊英)·아영(娥英)으로 부르는데, 흔히 알영부인이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다.     

 박혁거세는 60년 넘게 신라를 통치하다가 기원후 4년 73세로 승하했다고 하는데, 왕후 역시 왕을 따라 세상을 하직했고, 죽기 1년 전이었던 기원후 3년 경주에 용 2마리가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경주에 4릉(蛇陵)이 있고 이에 대한 전설이 있는데, “죽을 때 하늘로 올라간 8일 후에 몸뚱이가 땅에 흩어져 떨어진 것을 큰 뱀의 방해로 머리와 사지를 제각기 장사 지내 오릉을 만들었고, 뱀이 무덤을 지키기에 능의 이름을 사릉이라고 했다.”라는 기이한 이야기이다.     


 해모수(解慕漱王, 생몰년 미상)


 해모수는 북부여를 건국한 부여의 시조이며, 동시에 동부여의 시조인 해부루와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의 아버지로 여겨지는 영웅이다.

 다만, 당대의 기록인 위서(魏書)나 광개토왕릉비, 모두루 묘지명 등에는 해모수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는데, 따라서 일각에서는 백제의 대성팔족 중 하나인 해씨 가문에서 부여계인 가문의 정통성과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 가공한 인물이라는 주장도 있다.     

 옛날에 천제(天帝)가 태양신(太陽神)과 달의 신(월신, 月神)으로 변했고, 태양신이 큰 아들인 인신(人神) 해모수를 낳고, 달의 신이 작은 아들인 지신(地神) 해부루를 낳았다. 양쪽 모두 해씨(解氏)로 천제의 화신(化身)인 동시에 후손(後孫)인데, 해모수는 지상 세계로 내려와 북부여를 세워 단군(檀君)으로서 부여의 시조가 되고, 이후 유화부인과의 사이에서 고주몽을 낳아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의 아버지가 된다.      


 ④ 연타발(延陀勃, 생몰년 미상)


 연타발의 다른 이름은 연타취발(延陀翠勃)인데, 온조, 비류의 외할아버지이자 소서노의 아버지로 소서노와 고주몽을 도와 마한과 백제를 있게 한 영웅이다.   

  

 소서노(召西奴, BC 66년~BC 6년)


 소서노는 고구려를 건국한 동명성왕의 아내이자 백제의 시조인 비류왕과 온조왕의 어머니로서,  한국 역사에서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그것도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두 개의 나라를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여성 영웅이다. 


 금와왕(金蛙王, 재위: BC 60년~BC 24년)


 금와왕은 동부여를 세운 영웅이다.      

 옛날에 천제(天帝)가 태양신(太陽神)과 달의 신(월신, 月神)으로 변했고, 태양신이 큰 아들인 인신(人神) 해모수를 낳고, 달의 신이 작은 아들인 지신(地神) 해부루를 낳았다. 양쪽 모두 해씨(解氏)로 천제의 화신(化身)인 동시에 후손(後孫)인데, 해부루가 동부여를 세운  금와를 낳았고, 금와는 정비와의 사이에서 첫째 대소와 막내 갈사를 낳고 유화부인과의 사이에서 둘째 도모를 낳는다.

 족보를 보면, 태양신과 월신이 형제 사이이니, 해모수와 해부루는 사촌 형제가 되며, 해모수의 아들인 고주몽과 해부루의 아들인 금와 역시 사촌 형제가 되고, 고주몽의 아들인 유리왕과 금와왕이 유화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도모는 이복형제간이 된다.          


 고주몽(高朱蒙, 재위: BC 37년~ BC 19년)   

  

 고주몽은 고구려를 건국한 건국 시조로 추앙받는 영웅으로,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성씨인 고씨(高氏)의 시조이다.

고주몽을 시조로 하는 고씨는 한국 횡성 고씨(橫城 高氏)· 한국 제주 고씨(濟州 髙氏)· 중국계 요령성 요양 고씨(遼陽高氏)· 중국계 광녕 고씨(廣寧 高氏)가 있고, 따라서 크게 고구려계와 탐라계와 중국계로 구분되는데, 중국계인 광녕 고씨(廣寧 高氏)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제주(濟州)의 분관이다. 


 ※ 동명왕의 이야기는 설화와 역사를 넘나들면서 전개되는데, 알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는 건국설화에 흔히 등장하는 왕의 신성화로 결국 역사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 고주몽의 계보는 다음과 같다.                    

천제(天帝)

 1대 태양신(太陽神)

 2대 단군 해모수-신격인간: 인신(人神): 처 유화(?)

 3대 단군 ?: 처 유화(?)

 4대 고주몽(추모)


 ※ 유화부인의 아들인 고주몽과 도모는 이복형제간이 되는데, 한국고기에 의하면 금와는 정비와의 사이에서 첫째 대소와 막내 갈사를 낳고, 유화부인과의 사이에서 둘째 도모를 낳으며, 유화부인과의 사이에서 도모를 낳기 때문이다.       


※ 동명왕의 이름은 추모이고, 추모는 나라 이름 추(鄒)와 소 우는 소리 모(牟)의 합성어로, 소의 뿔과 발굽을 가졌다고 표현되는 치우환웅이 다스렸던 구려(句麗)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의미인데, 즉 고구려(古句麗) 즉 옛 구려를 이어받았기에 새로 만든 성씨 고(高)를 붙여 고구려(高句麗)로 이름지었다는 의미이다.     


 ※ 동명왕이 정복했던 송양의 비류국을 다물국(多勿國)이라고 칭하는데, 북쪽의 송양의 영토를 정복하여 제후국으로 직접 다스리도록 그에게 땅을 되돌려 주었기에 결국 옛땅을 되찾았다는 의미로 사용했는지, 아니면 구려의 고토(古土)인 중국 땅을 되찾겠다는 의미로 사용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고구려라는 이름만으로 보아서는 후자가 옳은 것 같다.


 ※ 동명성왕은 고씨이고, 아들인 유리명왕은 해씨이므로 동명성왕과 유리명왕은 혈통이 다르다는 견해가 있다. 

 이는 해씨 고구려설과도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는데, 고대에는 성씨 문화가 엄밀하게 정착된 것이 아니었고, 동명성왕이 부여에 있을 때 함께 했던 부여 왕족들 또한 성씨가 이름과 같이 표기되지 않으며, 후대에 성씨가 기록된 것들도 많아서 같은 계통이라도 다른 성씨를 사용하기도 하고 나중에 바뀐 성씨와 옛 성씨가 혼재되기도 하는 등 확실하게 확인하기가 어렵다.   

  

 반면. 동명성왕은 원래 해씨였으나 부여를 탈출하고 고구려를 세우면서 고씨로 성을 바꿨고, 아들인 유리명왕은 그 사실을 모른 채 부여에 남아 있다가 탈출한 것이므로 여전히 해씨를 사용했다가, 아버지를 만나서 고씨로 바꾸었다는 설명도 있는데, 가장 합리적인 해석으로 보인다.    

 

 ※ 동명왕의 본처인 예씨부인은 BC 37년 주몽이 동부여를 탈출할 때 아들 유리를 밴 상태여서 따라가지 못했다. 그후 동명왕은 소서노를 후처로 맞아 그 도움으로 고구려를 세웠고, BC 19년( 동명왕 18년) 4월, 동부여에서 동명왕의 아내 예씨 부인이 아들 유리와 함께 도망쳐 와 유리가 태자가 되었는데, 예씨 부인이 고구려로 왔던 것 이외의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동명왕이 왕후로 정한 후 사망했거나, 왕후로 정한 당시 소서노에 의해 축출된 것으로 보인다. 

 동명왕 승하 시에 소서노가 두 아들 비류 온조와 함께 살아 있었고, 따라서 유리가 왕위 계승 싸움에서 승리하여 왕위에 올랐는데, 이에 소서노는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남하하여 백제를 세운다.


오· 마· 협(烏· 摩· 陜)  

   

 오· 마· 협은 동명왕과 같이 남하하여 고구려를 새우는데 큰 공을 세운 오이(烏伊, ?~?)와 마리(摩離, ?~?)와 협보(陜父, ?~?) 3명의 영웅을 말한다.    

 

 오이와 마리와 협보는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 추모와 함께 동부여에 살았던 시절부터 친구였는데, 이후에 추모가 동부여의 왕자 대소에게 위협을 당해 탈출할 때 동행하였으며, 훗날 고구려 건국의 주역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다만, 위서 고구려전에 실린 고구려 건국기사에서는 오이, 마리, 협보가 아닌 오인(烏引)·오위(烏違) 2인이 주몽과 남하했다고 적고 있다.     


 ※ 협보는 함께 동명성왕을 따라 나섰던 친구인 오이나 마리 등과는 달리 전쟁에 참전해서 활약한 기록이 전무하며, 때문에 장수였던 오이, 마리 등과는 달리 무관이 아닌 행정 관료나 학자로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동명성왕이 죽고 유리명왕이 왕위를 이어받은 후에도 관료로의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유리왕 대에는 아마도 내정을 관장하는 대보의 직위까지 오를 정도로 큰 비중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런데 서기 3년(유리왕 22년)에 협보가 유리왕에게 "정사를 소홀히 하니 바로잡으소서"라고 간하자 분노한 유리왕이 협보를 대보에서 파하고 관원(官園)의 일을 보게 했다고 나온다. 

 내정의 요직을 맡고 있던 개국 공신을 관청의 정원 관리인으로 강등시킨 걸로 보면 유리왕과 협보 사이에 상당히 험악한 기류가 흘렀던 것으로 보인다.     


 개국 공신인 협보에게는 사실상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일이었고, 토사구팽에 실망한 그대로 고구려를 떠나서 남쪽의 한(南韓)으로 가버렸다고 전한다. 이후의 행보는 기록에 없어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좌보와 우보로 분할된 점을 보면 유리왕이 국정 개편을 했을 가능성도 있는 듯하다.

 어쨌든 고구려 건국 이후 체제를 굳혀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지배 계층 간의 갈등을 상징, 또는 조선 개국 이후 왕족과 개국 공신 세력 간의 권력 싸움과 유사한 경우로 보기도 한다. 마치 권력이 강해진 공신 세력을 대거 숙청하여 강력한 왕권을 확립한 조선 태종이나 고려 광종처럼 유리왕 입장에서도 선제의 큰 신임을 받은 개국 공신이 부담되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 오이와 마리는 14년 8월, 유리왕 시절에도 함께 2만의 군대를 이끌고 양맥국(梁貊國)을 정벌하여 멸망시켰으며, 고구려현(高句麗縣)까지 공격하여 점령하는 등 고구려 건국 초기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건국 왕조에서는 장수의 병력을 빼앗기는 어려우니 왕조를 지키기 위해 창업 장수들을 전쟁터로 내보내는 관습이 있는데, 전방에 파견해 장수가 이기면 국토가 넓어져 좋고 장수가 지면 권력이 줄어 좋으니 이와 유사한 사례로 보인다.     


 재· 무· 묵(再· 武· 默)     


 재·무·묵의 이름은 각각 재사(再思)와 무골(武骨)과 묵거(默居)인데, 오·마·협과 함께 동명성왕 추모를 도와 고구려를 건국한 공신이자 성웅이다.     


 재사와 무골과 묵거는 모둔곡(毛屯谷)에서 오이와 마리와 협보와 함께 동부여를 탈출한 주몽을 만났다.

 위서(魏書)에서는 모둔곡을 보술수(普述水)라 표기했고, 지금의 혼강(渾江)을 뜻하는데, 당시에는 이 강을 비류수(沸流水)라 불렀다.

 당시 재사(再思)는 마의(麻衣)를 입고 있었고, 무골(武骨)은 압의(衲衣)를 즐겨 입었으며, 묵거(默居)는 수조의(水藻衣)를 즐겨 입었다.       


 주몽이 세 명의 현자(賢者)를 향해 “그대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성(姓)은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인가?”라고 물었지만, 성씨는 답하지 않자 주몽이 무골에게는 중실씨(仲室氏), 묵거에게 소실씨(少室氏), 재사에게는 극씨(克氏) 성씨를 주고 “내가 바야흐로 하늘의 크나큰 명을 받아 나라의 기틀을 열려고 하는데 마침 이 세 명의 현명한 사람을 만났으니, 어찌 하늘께서 주신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며 그들의 능력을 살핀 뒤 각기 일을 맡겼다.

 재사와 무골과 묵거는 동명왕을 도와 오·마·협과 함께 졸본천(卒本川)에 이른 뒤 고구려 건국에 큰 공을 세웠지만, 오·마·협과는 달리 그 이후의 행적에 대한 언급은 없는데, 이에 대해서는 현자라는 단어와 그들의 이름 및 의상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현자 즉 현인(賢人)은 어질고 총명한 사람을 말하는데, 이들이 고조선의 유민임을 감안하면, 신교도(神敎道)의 선인(仙人) 출신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재사(再思)는 거듭 생각한다는 뜻이고, 그가 입은 마의는 삼베로 만든 옷으로, 천체를 보며 천기를 읽고 인간의 생사와 미래를 예측하고 조율할 줄 아는 선인 출신의 무인(巫人)으로 해석되고, 책사(策士)로 활약한 것으로 보인다. 

 무골(武骨)은 무(武)에 출중하다는 뜻이고, 그가 입은 압의는 못쓰게 되어 사람들이 쓰레기로 버린 낡은 헝겊을 이것저것 모아 빨아서 바늘로 꿰매고 누벼서 만든 회색 장삼으로, 선승(禪僧)으로 무공을 닦던 선인 출신의 무인(武人)으로 해석되고, 장수(將帥)로 활약한 것으로 보인다. 

 묵거(默居)는 소리 없이 머문다는 뜻이고, 그가 입은 수조의는 물풀(수초, 水草)로 만든 뜻으로, 지덕을 쌓은 선인 출신의 도인(道人)으로 해석되고, 군사(君師)로 활약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오이와 마리와 협보와는 달리 고구려 역사에 등장하지 않는 것은 이들의 이런 출신과 관계가 있지 않은가 생각되는데, 아마도 이들이 생각하는 이상과 정복 군주의 길을 걷는 동명왕이 맞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이고, 그래서 떠났거나 혹은 제거당했을 수도 있다.  

   

 정견모주(正見母主, 생몰년 미상)      


 정견모주는 대가야 왕 이진아시와 금관가야왕 김수로의 어머니라는 설이 있는데, 가야지역에서 가야의 시조이자 가야산신(伽倻山神)으로 숭배되던 여성 영웅이다.   

  

 ※ 설화     


㉠ “본래 대가야국(大加倻國)은 ‘김해부(金海府) 산천(山川) 하(下)’에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으며, 시조 이진아시(伊珍阿豉)왕으로 한편으로 내진주지(內珍朱智)라고 한다. 도설지왕(道設智王)에 이르기까지 범(凡) 16세(世) 520년간 계속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9 고령현(高靈縣) 건치연혁(建置沿革)]  

   

㉡ 가야산신 정견모주(正見母主)가 천신 이비가(夷毗訶)에게 소원을 이루어주기를 소원하였다. 그리하여 대가야왕(大伽倻王) 뇌질주일(惱窒朱日)과 금관국왕(金官國王) 뇌질청예(惱窒靑裔) 두 사람을 낳았다. 뇌질주일은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의 별칭이고, 청예는 수로왕(首露王)의 별칭이다. 그러나 가락국(駕洛國) 고기(古記)의 육란(六卵)의 설(說)과 더불어 황탄(俱荒)하여 믿을 수 없다. 

 다시 말하자면 석순응전(釋順應傳)에는 대가야국 월광태자(月光太子)가 곧 정견모주의 십세손(十世孫)으로 전한다. 부는 이뇌왕(異腦王)이라 하는데 신라에 구혼하여 이찬비지배(夷粲比枝輩)의 딸을 배필로 맞았고, 둘 사이에 태자를 낳았다. 이뇌왕은 뇌질주일의 팔세손(八世孫)이다. [최치원(崔致遠)의 석이정전(釋利貞傳)]


 ㉢ 가야산신 정견모주가 가야산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는데, 천신이 이를 훔쳐보고 있었다. 이런 줄도 모르고 그녀는 한가롭게 목욕을 하고 있었다. 정견은 환하게 들여다보이는 물 속을 보기도 하고 산새들이 우 짓고 있는 숲속을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목욕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다가 햇빛이 유난히 밝은 것을 느꼈다. 그녀는 그 순간 너무나 눈부시게 빛나는 햇볕을 의식하면서 그 자리에 쓰러졌다. 

 정견은 눈이 부셔 햇빛을 보지 않으려고 한 손으로 해를 가렸으나, 햇빛은 여전히 정견의 마음속까지 환히 비치는 듯하더니 순간 이비가의 얼굴이 보였다. 그 순간 정견은 아주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정견이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을 때는 해가 서산으로 완전히 기울어 있었다. 

 정견은 이런 일이 있은 뒤로부터 하늘나라의 천신인 이비가의 아이를 잉태하였다. 정견은 아이를 위하여 자기 몸을 소중히 하였다. (중략) 정견은 오랜 산고 끝에 쌍둥이를 낳았다. 정견은 큰아이의 이름을 뇌질주일, 작은 아이의 이름을 뇌질청예라 하였다. [민간설화]      


해석     


 ㉠ 가야는 1, 2세기경 변한(弁韓) 지역에 세워졌다는 사실 외에는 밝혀진 역사가 없고, 대략 구야국이 금관가야· 가락국이 대가야· 안야국이 아라가야· 고자미동국이 소가야로 이어져 한반도 남부의 경상남도·경상북도·부산광역시 지역에 걸쳐 위치했던 것으로 비정하고 있는데, 따라서 정견모주는 구야국 혹은 가락국 안야국 혹은 고자미동국 중 한 곳 출신으로 추정된다.      


 ㉡ 정견모주는 가야 산신이고, 「석이정전」의 기록 이외에 천신 이비가의 존재를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는데, 그렇다면 천신과 산신이 결합하여 대가야와 금관국의 시조가 탄생한 것이 된다. 가야 시조가 천손이라는 인식이 가야 당대에 존재한 것인지, 후대의 부회(附會)인지 알기 어렵다. 이러한 인식은 부여에도 존재하였는데, 신화의 모습은 다소 다르지만, 수로왕이나 김알지의 탄강(誕降) 신화에도 하늘의 자손이라는 인식이 투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현재 한국의 해인사에는 국사단(局師壇)이라는 이름의 사당(산신각)이 있고, 가야산의 산신으로 정견천왕(正見天王)이라 불리는 산신이 모셔져 있는데, 정견모주와의 차이점은 산신의 성별이 여성에서 남성으로 바뀌어 있다는 것이지만, 국사단에는 2013년에만 해도 여성의 모습을 한 산신도가 걸려 있었다 

 성주군 수륜면 백운리 마을 뒷산에는 길이 15m에 높이가 7m에 달하는 거대한 바위가 있는데, 마을 주민들이 이곳에서 정월 대보름날이면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또한, 백운리에서 칠불봉에 올라가는 길에 있는 서성재에서 남쪽으로 200m 된 곳에 넓적한 바위가 40도 각도로 비스듬하게 정상부에 걸쳐진 형태의 바위가 있는데, 가야산 국립공원에서 부르는 공식적인 이름은 ‘서장대로 현지에서는 가마바위 또는 상아덤이라 불리는 이 바위는 정견모주가 이비가지를 맞이할 때에 탔던 가마라고 전하고 있다.    

 

 ㉢ 대가야를 세운 수로왕 뇌질청예와 금관가야를 세운 이진아시왕 뇌질주일은 이처럼 정견모주의 아들로서 형제의 관계이다. 뇌질주일은 아버지인 이비가를 닮아 얼굴이 해와 같이 둥글고 붉었다고 한다. 수로왕은 어머니인 정견모주와 닮았다고 한다.

 가야 초기에는 금관가야의 전신인 구야국이 변한의 맹주국으로서 대가야라 불렸지만, 후기에 금관가야가 광개토대왕에 짓눌려 세가 역해지자, 그 후에는 가라국이 맹주국이 되어 대가야가 되었다.  

    

 ㉣ 수로왕 뇌질청예는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 허황옥(許黃玉)을 비로 삼은 것으로 더 알려져 있고, 왕릉이 수릉(首陵)이라는 것과 김해김씨의 시조라는 것 외에 정작 본인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알려져 있는 것이라곤, “ 금관가야 9부족의 추장인 9간(干)이 42년(신라 유리왕 19)에 김해구지봉(龜旨峰)에 모였을 때, 붉은 보자기에 싸여 하늘로부터 내려온 금합(金盒) 안에서 해처럼 둥근 황금알 여섯 개를 얻었다. 반나절 만에 여섯 개의 알은 모두 사람으로 화하였는데 수로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키가 9자(尺)이고 팔자 눈썹이며 얼굴은 용과 같이 생겼는데, 처음으로 사람으로 화했기 때문에 '수로'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 달 보름에 9간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라는 정도이다.     


 ㉤ 이진아시왕 뇌질주일의 경우 더욱 심하여 42년 반파국(대가야)을 건국한 시조라는 것과 정견모주의 9대손이라는 것 외의 역사 기록은 거의 전무한 수준이다. 

  월광태자(月光太子)가 곧 정견모주의 10세손(十世孫)이고, 월광 태자의 아버지 이뇌왕이 뇌질주일의 8세손(八世孫)이니, 정견모주의 아들이자 월광태자의 아버지인 이뇌왕은 9세손(九世孫)이 되기 때문이다.      

 대가야의 모태인 가야산이 소머리 모양을 닮아서 우두산(牛頭山)이라 불렸고, 가야 산신의 아들이란 탄생설화 때문에 산신제 때는 소를 제물로 바쳤다. 

 이진아시가 맨 처음 도착해서 나라를 세운 곳이 경상북도 고령군 대 가야읍 장기리 알터 마을로 추정하는 이유도 위의 설화 때문이다. "알터"라는 이름은 주변 산기슭에 꿩이 집단으로 서식해 알이 꿩알이 많아 알터가 되었다는 설화도 있지만, 이진아시 설화에서 이진아시의 알이 멈춘 장소도 바로 이곳이어서 "알터"가 되었다는 설도 있기 때문이다. 

 키는 형인 수로왕과 같은 알 6개에 태어난 가야 왕들과 같이 9척이었다고 하는데, 대가야의 기록이 부실한 만큼 더 이상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허황옥(許黃玉, 32년 ~ 189년) 

    

 허황옥(許黃玉, 32년 ~ 189년)은 수로왕 뇌질청예의 아내이자 금관가야의 초대 왕후이자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의 시조모로서, 허황후 또는 보주 태후 또는 스리라트나(Princess Suriratna)황후 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는 여성 영웅이다.     


설화     


 “허황옥은 본래 아유타국(阿踰陁國)의 공주인데, 부왕(父王)과 왕후가 꿈에 상제(上帝)의 명을 받아 공주를 가락국 수로왕의 배필이 되게 하였다. 

 공주는 오빠 장유화상과 함께 많은 종자(從者)를 거느리고 김해 남쪽 해안에 이르렀다. 이에 수로왕은 유천간(留天干), 신귀간(神鬼干) 등 많은 신하들을 보내어 맞으며, 황후로 삼았다고 전한다. 

 황후는 태자 거등공(居登公)을 비롯해 아들 10명을 낳아 김해 김씨의 시조모가 되었으며, 이 중 남편인 태조 수로왕에게 청하여 2명의 아들은 자신의 성을 따라 허씨(許氏) 성을 쓰게끔 하게 해달라고 간청하여 수로왕의 동의를 얻으니 2명의 아들은 허씨 성을 쓰게 되어 김해 허씨가 생겨나게 되었다. 황후가 188년에 죽으니 나이 157세였다고 한다. 구지봉 동북쪽 언덕에 장사지냈다고 하는데, 현재 경상남도 김해시 구산동(龜山洞)의 고분이 허황후의 능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  

   

 ※ 해석     


 허황옥이 먼 바다를 건너 남방(南方)에서 왔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설(異說)이 별로 없으나, 음성적 유사성을 바탕으로 아유타를 인도와 연관짓기도 한다. 그러나 인도 자체에는 전설에 대한 기록이 없다.

 황후의 친정오빠 장유화상의 이야기를 통하여 인도와 관련짓기도 하는데, 장유화상이 금관가야 지역에 장유암(長游庵)이란 사찰을 짓고 불상을 모셨으며 이후 가야지역에 불교가 전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실제로 김해시 장유면 대청리 장유암(長游庵) 경내에는 장유화상 사리탑이 현존하고 있으며, 장유화상의 사리탑은 1983년 7월 20일 경남도 문화재자료 31호로 등재되었다.  

   

잡신     


 한국에는 신화 외에도 민간설화로 전해져 오고 있는 저승사자(저승차사)· 아기 귀신· 총각귀신· 처녀귀신· 몽달귀신· 달걀귀신 등의 잡신(雜神)들이 있고, 불교의 마찰· 아귀· 사대천왕 등의 신과 귀신들이 있는데,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모르지만 한국고기에 신의 개념밖에 없는 것으로 보아 중국 신화의 영향을 받았거나 삼한 시대나 그 이후에 나타난 신들로 보인다.      




제1장 제5편. "단군신화의 신관"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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