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제주4.3사건
제주4.3사건은 원래 제주폭동이라 하였는데, 국가의 민간인에 대한 잔혹한 폭력임이 밝혀지면서 제주4.3사건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2조(정의)에 의하면 “ 제주4.3사건이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일어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제주4.3사건이란 미군정 시인 1947년 3월 1일 ~ 정부 수립 후인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국가가 주민 즉 국민을 학살한 사건이라는 이야기인데, 결국 제주4.3사건은 제주도에서 일어난 삼일절 발포사건과 4월 3일 제주4.3사건, 1948년 5월1일 오라리 방화사건, 1950년 6.25 전쟁 발발로부터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나고 무장대가 괴멸한 1954년 9월 21일까지의 모든 주민학살사건이 포함되는 것이다.
제주4.3사건은 고려 공민왕 23년(1374년)에 원(元)의 목장이 있던 탐라(오늘날의 제주도)에서 말을 기르던 몽골족 목자인 목호(하치)들이 주동해 일으켰던 목호의 난(牧胡-亂) 당시 고려 조정이 명의 사신의 항의로 탐라를 정벌해 양민을 학살하였던 목호의 난 참사와 함께 제주도 역대 최대의 참사 중 하나이며, 대한민국 제1공화국 시기에 일어난 여순 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보도연맹 학살사건· 경산 코발트광산 학살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 사건 등과 더불어 민간인이 억울하게 학살되거나 희생된 대표적인 사건으로 꼽히는데, 사망자 숫자 자체를 비교하면 제1공화국 시기에 일어난 단일 사건으로는 6.25 전쟁 다음으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사건으로, 이는 당시 미군정과 그 이후의 대한민국 정부, 그리고 이를 상대한 남조선로동당 세력들 모두가 민간인 학살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었기 때문이었다.
(1) 배경
제주4.3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제강점기로부터 해방과 6·25전쟁을 관통하는 항일(抗日)↔친일(親日) 그리고 반공(反共)↔친공(親共)이라는 단어의 대립과 제주4.3사건의 배경이 된 미군정 당시의 한반도와 제주도의 국내 상황을 알아야 한다.
① 일제 강점기
일제강점기에 항일인사들은 국내에서 활동하던 국내파· 중국 만주에서 활동하던 상해파· 중국이 청일전쟁으로 일본에 패하자 러시아로 피해간 소련파· 미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해외파 등 많은 항일 단체로 나누어져 있었고, 항일 단체와 인사들 중에는 김일성· 박헌영 등을 필두로 하는 공산주의자와 홍범도· 최재형· 안중근 등을 필두로 하는 사회주의자도 있었다.
여기서 알고 지나가야 하는 것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이다.
먼저 사회주의는 생산의 개념이 없고 자본분배의 개념만 있다. 즉 자본가(상류층)와 노동자(하류층)의 구분없이 사유재산을 인정하되, 자본가가 자기 재산을 풀어 같이 잘살자는 사회를 만들자는 개념인데, 사실 욕심 많은 인간의 속성을 생각할 때 현실 속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개념이다.
다음으로 공산주의는 생산의 개념만 있고 자본분배의 개념이 없다. 즉 공동으로 생산하자는 것인데, 역시 욕심 많은 인간의 속성상 결국 권력자 계층(상류층)인 자본가가 독식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독재가 되는 것인데, 공산 독재라는 말이 그래서 생겨난다.
조선은 농업국가로 자본가 계층(상류층)에 속하는 10%미만의 양반 지주와 노동자 계층에 속하는 90% 이상의 상민과 노비(하류층)로 나누어져 있었다. 즉 권력자 계층(상류층)인 양반 지주가 토지(자본)를 제공해 자본가가 되고 상민과 노비(하류층)이 노동을 제공해 노동자가 되어 공동으로 생산을 하는 제도 즉 공산주의 제도에 속한다. 하지만 전제주의 형태로 결국 생산물은 권력자 계층(상류층)으로 자본가가 되는 양반 지주가 마음대로 약탈할 수 있는 제도이기 때문에 독재가 되고, 결국 공산 독재와 유사한 개념으로 볼 수 있다.
1910년 조선이 멸망해 일제강점기에 들어감으로써 전제주의에 의한 공산 독재는 사라지고, 국내에는 무정부 상태에서 일제에 부역하는 친일세력이 남고, 1919년 상해에 임시정부가 세워지는데, 여기서 인간은 속성상 네 가지 종류로 나누어 진다.
첫째와 둘째는 전제왕조 대신 조선의 재물과 권력을 차지하려는 새로운 전제주의 세력 즉 공산 독재세력인데, 당시 국내에 남아 전제왕조 대신 조선의 재물과 권력을 차지하려고 일제에 부역한 이완용을 필두로 한 친일세력이 그 첫째이고, 항일 독립운동가들중 전제주의가 아닌 나라 즉 권력자 계층(상류층)이자 자본가 계층인 양반의 권력과 재산을 없애고 자신들이 새로운 권력자 계층(상류층)이자 자본가 계층이 되는 나라를 세우려 했던 김일성을 대표로 한 공산주의자가 그 둘째이다
셋째는 항일 독립운동가들중 전제주의가 아닌 나라 즉 권력자 계층(상류층)이자 자본가 계층인 양반의 권력과 재산을 없애고 공정하게 경쟁하여 능력대로 사는 나라를 만들어 새로운 형태의 권력자가 되려던 이승만을 대표로 한 자유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자이다.
마지막 네 번째는 약 90%가량에 속하는 그외의 항일 독립운동가와 조선의 전제주의를 싫어했던 양반 지주가 아닌 조선 백성들인데, 그들은 전제주의가 아닌 나라 즉 권력자 계층(상류층)이자 자본가 계층인 양반의 권력과 재산을 나누어 함께 잘살자는 나라를 만들자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 즉 사회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항일 독립운동가들중 사회주의자들도 있고 공산주의자들도 민주주의자들도 있었지만, 당시만 해도 국내에는 사회주의니 공산주의니 자유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니 하는 개념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특히 공산주의와 관련한 반공(反共)이니 친공(親共)이니 하는 개념이 없었고, 오직 항일(抗日) 대 친일(親日)이라는 개념만이 있었다.
한편 일제강점기 이북에는 일제강점기부터 평양을 중심으로 기독교교회가 발달해 있었고, 이남에는 해방 후 유엔의 신탁통치가 결정된 해인 1945년 12월 영락교회가 생겨났다.
② 해방국면
해방이 되자 독립운동을 하던 항일인사들이 속속 국내로 몰려들어 정부 수립 준비를 하며 세력을 다투었는데, 4월 후인 1945년 12월 신탁통치 결정에 따라 북한에는 소련군이 남한에는 미군이 점령하였고, 남한을 점령한 미군정은 미국파인 이승만과 손을 잡고 친일 경찰을 고용하고 친일단체를 이용해 군정에 들어갔다.
한편, 북한에서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고 1946년 3월 대표적인 개신교인 민족주의자였던 조선민주당 당수 조만식이 소련 군정과 김일성에 의해 감금당하자, 북한에 있던 지주와 기독교인 등은 남한으로 내려와 북한에 반대하는 단체의 조직을 준비하였고, 이후 월남한 청년 남성들이 모여서 조직의 규모가 확장되었다. 1946년 3월 5일 문봉제(文鳳濟) 등 월남 청년들이 주도한 집회가 성공하고, 이에 힘입어 평남동지회가 조직되고, 다시 평남동지회는 평남북 조직을 합친 평안청년회로 확대되었는데, 결성대회에는 북한 지역 연고자(이윤영, 김병연, 강기덕)는 물론 김구도 참석했다. 1946년 11월 YMCA에서 우익단체들과 영락교회 청년회 등이 통합하여 서북청년회가 결성되자 김구, 이승만, 한민당 등은 함께 서북청년단에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
당시 남한 정세를 보면 자유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로 남한만의 독립을 추구했던 이승만과 미군정이 한편이 되어 우익(右翼)을 자처하며 공산주의자를 색출했고, 남북한 공동정부를 추진하였던 사회주의 항일인사들이 좌익(左翼)으로 한편이 되어 민족주의로 이에 대항하며, 북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했던 북한과 남한에 남은 공산주의 항일독립인사들이 남한의 공산화를 추진하는 삼파전이 이루어졌다.
미군정과 이승만은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과정에서 친일 경찰의 손을 잡고 서북청년단과 함께 민족주의로 남북한 공동정부를 추진하였던 사회주의 항일인사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숙청했고, 영락교회도 서북청년단을 지원하며 이에 힘을 보탰는데, 결국 북한과 남한의 공산주의 세력과 친일세력과 결탁한 남한의 민주주의자와 기독교 세력이 민족주의로 남북한 공동정부를 추진하였던 사회주의 항일인사들을 배격하고 몰아내는 형국이 이루어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항일(抗日) 대 친일(親日)의 개념이 남아있었고, 따라서 일반 백성들의 눈에는 국내의 이런 정세가 마치 미군정과 이승만과 친일 경찰이 손을 잡고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항일인사들을 탄압하는 것으로 비추어져 미군정에 대한 민심이 좋지 않았는데, 업친데 덥친 격으로 미군정이 미곡정책 등에서 정책 실패를 하면서 군정에 대한 민심이 악화되었다.
당시 제주도는 일제강점기에 일본과 가까운 지형적 위치에 있었기에 일본으로 징용을 가 공장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많아 항일감정이 깊었을 뿐 아니라 비교적 깨어있었고, 해방 이후 육지와 격리된 제주도는 일본에서 귀환한 인구의 실직 난, 생필품 및 식량 부족, 콜레라의 유행 등으로 인하여 사회적으로 어려운 여건에 놓여 있었으며, 특히 항일감정이 깊었던 차에 전술했던 미군정의 미곡정책 실패로 인해 육지에서 격리된 이유로 육지보다 더 큰 타격을 받아 민심이 더욱 악화되어 있었다.
다만, 이때까지만 해도 백성들 사이에서는 공산주의에 대한 반공(反共) 의식이 없었으며, 사실 백성들 간에 공산주의에 대한 반공의식이 확실히 생겨난 것은 6.25로부터이다.
(2) 전개
제주4.3사건 안에는 제주4.3사건의 발단이 된 1947년 3월 1일의 삼일절 발포사건, 제주4.3사건의 여파로 발생한 제주 오라리 방화사건, 다랑쉬굴 학살사건, 북촌리 학살사건 등 여러 개의 사건이 있고, 6.25가 터지자 전국교도소에 있던 제주 4.3사건 구속자 대부분을 좌익 정치범이나 좌익 혐의자, 보도연맹 가입자 등과 함께 학살을 자행해 목숨을 잃게 했던 사건도 있다.
① 삼일절 발포사건
제주4.3사건의 발단이 된 삼일절 발포사건은 1947년 3월 1일에 제주 북국민학교에서 열렸던 제주도 삼일절기념 대회가 끝난 후, 행사를 끝낸 25,000~30,000여명의 주민들이 시가행진을 위해 가두로 나온 행렬이 우연한 사고로 군중시위의 형태를 띠면서 시작되었다.
주민들의 시가 행렬이 미군정청과 경찰서가 있던 관덕정을 지나가고, 200명 정도의 군중이 시가행진을 구경하고 있던 도중 사건이 하나 터졌는데, 오후 2시 45분경, 시가행진을 지키던 기마 경관 소속의 임영관(任永官) 경위가 군중들을 헤치며 지나가 제북교에서 관덕정으로 들어서는 길모퉁이를 돌려 할 때, 고빗길에서 서성대던 어린이가 말의 발굽에 차인 것을 모르고 지나가 버린 것이다.
순간 누군가 아이가 경찰의 발에 치여 다쳤다고 소리쳤고, 시가 행진을 하던 주민들과 길가에서 행렬을 지켜보던 주민들이 다친 아이에게 몰려들었는데, 당시만 해도 일제의 앞잡이였던 경찰이 미군정의 앞잡이가 되어 항일인사들을 잡아들인다고 여겼던 주민들이 분노해서 경찰을 비난하며 몰려들자, 평화롭던 시가행진은 갑자기 군중시위로 변했다.
갑작스런 군중시위에 기마 경찰은 놀라 황급히 도망쳤고, 군중들은 도망치는 기마 경찰을 향해 돌을 던졌으며, 돌팔매질과 더불어 거리가 난장판이 되었는데, 다행히 이 날 시위에 참여한 사람 가운데 사망자가 하나도 없었기에 경찰에게 돌을 던진 게 잘못이긴 하지만 문제는 없는 것 같았다.
문제는 이때 경찰서에 있던 경찰들이 놀라 군중이 경찰서를 습격하는 줄 알고, 응원 경찰들과 함께 관덕정 주변의 사람들에게 발포하여 6명을 죽이고 8명에게 부상을 입히면서 일어났다. 경찰은 경찰의 발포가 군중의 경찰서 습격에 대응한 것이었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경찰서와 상당히 떨어진 관덕정에서 희생자가 발생했기 때문에 분명 문제가 있었다.
게다가 경찰은 군중들이 경찰서로 몰려와 왜 무고한 주민을 향해 발포했느냐고 따지자, 총에 맞은 사람은 무고한 사람이 아닌 시위대라고 주장했지만, 사망자 6명 중 5명이 등 뒤에서 총을 맞은 것으로 확인되면서 사망자들이 시위와 관련이 없으며, 경찰의 발포가 과잉 대응이었음을 보여주면서 문제가 확산되었는데, 이들의 발포는 미 육군 소속의 미군 정보기관인 CIC(방첩부대)의 정보보고서에서도 비이성적이라 규정할 정도였다.
경찰은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관덕정 앞에서의 발포가 치안을 위한 정당방위라고 주장하면서 3월 1일의 군중들이 경찰서를 습격하려 했다는 미확인 정보를 사실인 것처럼 흘렸다. 동시에 3월 1일 저녁부터 제주도에 통행금지령이 선포되었고, 다시 수백 명의 응원 경찰이 육지로부터 파견됐다.
3월 1일 이후 이 시위와 관련하여 여러 명이 경찰에 끌려가자 제주도의 민심은 크게 동요해 제주도민들 대다수가 이 여기에 호응했고, 이에 제주도에 있던 남조선 노동당이 개입해 시위 세력을 이끌면서 경찰의 만행을 규탄하는 운동을 주도했다. 거기에 3.1 발포사건의 진상을 아는 우익 세력들도 우려를 나타내며, 점차 경찰을 향해 광범위한 비판적 여론이 형성되었다.
3월 10일부터는 미군정 중앙정부에 사과를 요구하는 민관합동파업이 제주도내에서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관공서는 물론 통신기관·운송업체·공장·회사·학교 등에서 공무원과 심지어는 미 군정청 통역단까지 파업에 참여하였고, 노동자와 학생들이 일제히 파업하면서 폭동은 13일까지 제주도 전역으로 퍼졌다. 파업 참여자들은 3.1 발포사건에 대한 사과와 발포자 및 책임자 처벌은 물론 희생자 유가족 지원 등을 주장했고, 심지어 제주도 출신의 경찰들이 파업에 참여하여 직장을 이탈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 총파업은 이후의 이념적인 무장봉기나 국가권력 주도의 학살이 연상되기 어려운, 민중항쟁의 성격을 띠고 있었고, 총파업에 참여한 직장과 사람들은 166개 기관, 41,211명이었다.
하지만 미군정은 철저히 이런 요구 조건을 무시해버렸고, 미군 보고서는 총파업의 원인이 3.1 발포사건에 대한 분노와 남조선로동당의 선동에 있다고 봤지만, 미군정과 이승만은 제주도 인구의 70%가 좌파단체 동조자이거나 관련이 있는 좌파분자의 거점이라며, 제주도민 모두를 좌파로 몰아갔다. 결국 미군정과 이승만은 사태를 수습하기는커녕, 저항세력을 모두 좌파로 매도하고 탄압해 총파업을 와해시키려고만 했던 것이다.
이승만은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악명높은 서북청년회 소속 청년들을 내려보냈는데, 제주4.3평화기념관에는 “이승만이 공식석상에서 대놓고 ‘가혹하게 탄압하라’고 말하기도 했다.”라는 기록이 보존되고 있다.
미군정과 이승만은 곧이어서 파업에 참여한 66명의 경찰을 해임하고 육지에서 온 서북청년회 소속 사람들로 그 자리를 충원하게 하였고, 당시 경무부장이었던 조병옥을 비롯하여 응원 경찰들을 제주도로 파견을 보냈는데, 조병옥의 지휘 아래 경찰과 서북청년단은 파업 본부를 습격하고 파업 참여자들을 잡아서 총파업을 적극적으로 탄압했다.
3월 말부터는 탄압 때문에 총파업이 가라앉았지만, 탄압은 계속되었다. 육지에서 온 응원경찰과 서북청년회원들을 중심으로 파업 참여자들에 대한 검거 선풍이 한동안 이어졌고, 검거된 사람들은 경찰에 의해 모진 고문을 당했다. 1947년 3.1 발포사건 이후부터 1948년 4월 3일까지 2,500여 명이 감옥에 갇혔다. 이들을 수용하기에 제주도의 감옥은 너무 좁았고, 때문에 미군 감찰반의 보고에 따르면 약 3평 정도의 방에 35명이 갇혀 있을 지경이었다. 수용자들의 상태가 최악이었던 것처럼, 감옥에 갇히지 않은 사람들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중앙정부에서는 사태가 이럼에도 제주도민들과 타협하려 하지 않았으니, 그 대표적인 예가 유해진 제주도지사의 부임이다.
1947년도에 도지사로 부임한 유해진 지사는 미군정에게도 극우파로 규정된 인물로서, 도민들의 의견을 듣지 않고 정치적 반대파만 탄압하고자 하였다. 유 지사는 자신의 편과 가까운 단체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단체의 회합도 금지했을 정도로 심한 탄압 정책을 썼고, 미군정 관계자들조차 불만을 토로할 지경으로 도를 지나쳤다. 이와 같은 유 지사의 행보는 본인(군정장관)은 물론 도민들을 당혹케 했다. 따라서 제주도 우익테러 행위는 증가했고, 지사는 이런 행위를 막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더욱이 탄압 정책에 동원되어 입도한 서북청년회원들은 극우테러 활동은 물론, 태극기와 이승만 사진을 강매하거나, 주민들의 재산을 강탈하는 등 여러 만행을 저질렀다. 서북청년단의 이같은 폭력행위는 사상적 요인도 있었지만, 정규 봉급이 없었다는 경제적 요인과도 결부되었는데, 그들은 자금 모금을 위해 테러에 의존했던 것이었다. 심지어 이들은 같은 우익 진영과도 갈등하였는데, 서청 세력은 심지어는 때로 같은 우익진영까지 빨갱이로 몰아 사살하는 행위까지 저질렀으니 그 만행이 극에 달했다고 할 수 있었다. 실제로 1948년 1월 CIC보고서에 따르면, 제주도의 지식인층과 대중들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있지 않으며, 좌익 인사들도 이렇다 할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있고, 좌익 인사로 불리는 이들의 대부분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따라서 제주도 좌익의 전통적인 관심사는 선대로부터 이어져 온 가난의 해결이었고, 우익을 위시한 이들의 빨갱이 공포 선동은 테러의 일차적 요인에 불과했다.
제주도민과 경찰 사이의 충돌은 극단적 탄압 국면이 점차 심화되면서 점점 더 빈번하게 발생했다. 1948년에 접어들면서, 경찰에 끌려간 20대 젊은이 3명이 잇달아 사망했을 정도로 경찰의 고문으로 인한 사망자가 속출했다. 경찰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사망한 이들은 모두 고문으로 죽은 것이 확실해 보였다. 이 때문에 1948년 남한을 방문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회의에서 프랑스 대표가 고문치사 사건을 언급하며 질문을 했으며, 국제적인 관심이 있던 덕분인지 관련 경찰들은 징역형을 받았다. 그러나 형벌을 내렸다고 죽은 사람이 돌아올 수 있었던 건 아니었기에,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한 날을 기점으로 제주도의 민심은 더욱 흉흉해졌다.
경찰의 폭력행위는 3.1절 발포사건 이후 경찰력이 육지발 응원경찰 위주로 교체되면서 본격화되었는데, 응원 경찰의 취조는 매질부터 시작했다는 증언이 속출하는 등, 경찰의 강압에 대한 도민사회의 불만은 고조되어갔다. 육지에서 온 토벌대는 제주어를 알아듣지 못해 일본어로 의사소통을 했다고 변명했는데, 이들이 당시 일본어로 소통한 것은 제주 사람이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 이민족이라는 인식을 가진 것이고, 이러한 인식이 대량학살의 촉발원인이 되었다는 분석도 있다.
② 제주4.3사건
이승만의 폭주는 제주폭동에 파견된 서북청년단원들이 우익인사들을 무차별 습격했던 제주4.3사건으로 극에 달한다.
남조선로동당 제주도당은 지속적인 탄압을 받자, 1948년 초부터 격렬한 찬반 논의 끝에 무장투쟁을 결정하고 준비에 들어갔는데, 사실 어느 정도 남로당의 개입이 있었던 제주 민관총파업까지만 해도 각 진영의 온건파에게 호응을 얻은 민중항쟁의 성격이 강했지만, 남로당의 무장봉기로 제주도에는 제주4·3사건이 일어나 생지옥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결정은 남로당 중앙당과의 협의를 하지 않은 상태였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즈음에 제주도 각지의 오름마다 봉화가 솟아올랐다. 그것은 남로당을 주축으로 한 무장대가 반란을 일으키겠다는 신호였다. 곧 350여 명의 남로당 무장대가 제주도 내의 전 경찰지서 24개 중 12개 지서와 우익인사의 집과 우익 청년단체 등을 일제히 습격했다. 남로당 무장대는 무기를 들고 경찰·경찰 가족·우익인사·우익 청년단체 단원·우익 청년단체 가족 등을 공격했다. 이 일로 경찰 4명, 우익인사 등 민간인 8명, 무장대 2명이 목숨을 잃었다.
군경은 남로당 무장대의 습격에 일동 긴장하였지만, 경찰과 군 병력에 비하면 남로당 무장대는 상당히 약체였다. 처음 반란에 가담한 인원은 300여 명에 불과했고, 이들이 가진 무기는 일본군이 놓고 간 일제 99식 소총·권총·수류탄 등의 소화기와 군도·대검 ·칼·죽창·몽둥이뿐이었다. 물론 이후에 군경에 대한 습격과 충돌을 통해 무기를 보강하기는 했지만, 총기가 턱없이 부족하여 대다수가 칼·죽창·몽둥이만 들고 나섰을 정도였으니 인력과 무기는 부족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빨치산으로 군경과 우익인사들을 공격했고, 제주도민들을 향해서 끊임없이 5.10 총선거 거부와 공산주의를 주장하였다. 군경은 5.10 총선거를 1달 정도 앞두고 있던 상황이라, 4월 3일의 무장반란을 선동으로 인한 무장폭동으로 규정하며 민감하게 반응했다.
4월 5일, 미군정은 제주비상경비사령부를 제주경찰서 감찰청 내에 설치했고, 곧이어 응원 경찰들과 우익 청년단체 단원들이 증파되었으며, 통행금지령을 내려 오후 8시 이후의 통행을 금지했다.
경찰과 우익은 좌익을 더 강하게 탄압하고자 했고, 이들은 제주도민들과 또다시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에 남로당 무장대와 제주도민들이 합친 무장대가 형성되었다. 경비대가 망설였지만, 경찰은 진압에 소극적인 경비대를 의심하고 일부러 무장대의 방화 사건을 조작해 경비대를 내보냈다. 결국, 무장대와 군경 간의 충돌이 벌어졌고,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던 경비대 9연대도 무장대 진압 명령을 하달받았다. 그러나 9연대장이었던 김익렬은 미군정에서 파견 나온 맨스필드 중령의 요청으로 무장대와의 평화협상에 들어갔다.
4월 22일, 무장대에게 평화협상을 요청하는 전단지가 뿌려졌다. 그러자 무장대는 연대장이 직접 올 것과 협상의 장소와 시기는 자신들이 정하겠다고 답변했다. 제9연대장 김익렬과 무장대 총책 김달삼과의 회담은 4월 28일 제주도 대정면 구억리에서 열렸다. 이 회의에서 둘은 논의 끝에 합의를 보았다. 그것은 72시간 내로 전투를 중단하고, 귀순자들의 신병을 보장해준다는조건으로 점진적인 무장해제와 하산을 통한 귀순을 진행한다는 내용이었다. 김익렬과 맨스필드는 이러한 협상 결과에 크게 만족했다. 정말 이렇게 협상이 진행되었더라면 더 이상의 유혈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72시간이 거의 끝나기 전에 오라리 방화 사건이라는 대형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③ 제주 오라리 방화사건
제주 오라리 방화사건은 1948년 5월 1일 미군정이 제주4.3사건의 여파로 제주도 제주읍 오라리 연미 마을에서 우익청년들에 의해 일어난 방화 사건을 폭도의 소행으로 몰아 강경 진압 작전으로 수많은 주민을 학살했던 사건이다.
사건 당일 우익청년들이 정체불명의 무장세력으로 위장해 제주읍 오라리 마을을 습격하고 방화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 사건에 대해 경찰은 "배신자들에 대한 공비들의 보복"이라고 주장했다.
현재는 경찰 측이 협상 및 토벌의 주도권이 경비대로 넘어간 데 대한 보복을 한 것으로 보고 있는데, 물론 경찰 측에서는 이게 좌익의 이간질이라고 주장했지만, 실제 습격 현장에서 체포된 포로가 자신은 경찰관이며 제주경찰서장의 명령에 따라 행한 일이라고 자백했기 때문이다.
현재 밝혀진 제주 오라리 방화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오라리 마을은 4.3사건 이후 무장대와 경찰의 충돌로 여러 명의 희생자가 나온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우익청년단원들이 무장대로 위장해 마을로 난입하여 좌익 활동을 한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의 집 10여 채에 불을 질렀다. 불이 나자 마을 주민들은 불을 끄려고 했고, 무장대가 위장한 우익청년단원들을 쫓아갔으나 충돌은 없었다. 소식을 듣고 온 경찰은 이미 떠나버린 우익청년단원들을 추격하지 않고, 무장대와 마을 주민들을 향해 총을 쏘다가 경비대가 출동하자 황급히 마을을 떠났다.
김익렬이 사건을 조사하러 오라리에 갔는데, 당시 김익렬은 “이 사건의 전말을 알고 미군정에 그 사실을 보고했지만 묵살당했다.”고 했다.
5월 3일에는 귀순을 하러 산을 내려오던 사람들과 그들을 인솔하던 군인들이 정체불명의 무장세력으로부터 총격을 받았다. 총격을 가한 자 중 하나가 붙잡혔는데, 그는 자신이 “상부의 지시에 의해 폭도와 미군과 경비대 장병을 사살하여 폭도들의 귀순공작 진행을 방해하는 임무를 띤 특공대”라고 자백했다. 이것을 안 김익렬은 “경찰들이 진압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과오를 숨기는데만 급급한다.”며 분노했다. 한편 미군정의 태도도 이 사건을 전후하여 강경책으로 바뀌었다. 평화협상은 완전히 깨졌고, 다시 전투가 재발했다. 김익렬과 맨스필드의 노력이 허사로 돌아간 셈이었다.
5월 5일, 딘 군정장관이 안재홍 민정장관, 조병옥 경무부장, 송호성 준장 등을 이끌고 제주도에 나타났다. 이들 일행은 맨스필드 중령, 유해진 도지사, 김익렬 연대장 등을 만나 비밀리에 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서는 다시 재발한 무장반란과 충돌에 대해서 논의가 이루어졌다.
경찰 측에서는 줄기차게 이 반란이 계획적인 폭동이고 강경하게 진압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에 김익렬이 “ 이 반란은 복합적인 이유에서 발생했으며 경찰에게도 일정 부분의 책임이 있고, 무력과 선무 공작을 병행해서 사태를 해결해야 한다.”고 반박하면서 물증까지 내놓자, 딘 군정장관은 경무부장 조병옥에게 “설명과 다르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에 조병옥은 이것이 다 조작된 증거이고, 김익렬은 공산당과 관련이 있는 자라는 모함을 했고, 분노한 김익렬이 조병옥에게 달려들며 회의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다음 날 김익렬은 연대장 자리에서 전격 해임되고 말았는데. 그의 후임은 경비대총사령부 고급부관이던 박진경이었다.
무장대는 평화협상이 깨지자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5.10 총선거가 코앞이었기에 무장대는 선거를 방해하고자 했다. 반면 군경은 선거를 성사시키고자 했다. 선거가 다가오자, 선거사무소와 선거관리위원들에 대한 무장대의 공격이 더욱 빈번해졌다.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피살당했고, 선거 관련 문서들이 탈취되거나 소각되었다. 이러한 방해 공작으로 제주도의 최종 선거인 등록률은 64.9%에 불과했다. 선거위원들도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군경이 자신들을 보호해 주기를 바랐다. 군경은 무장대의 공격에 대응하면서 선거를 지원하고 선거운동을 진행했는데, 그 와중에도 무장대와 군경 간의 충돌이 이어져 5월 7일부터 5월 10일까지 29명이 목숨을 잃었다.
선거 날인 5월 10일이 되자 무장대는 주민들을 산으로 보내 투표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했다. 주민들은 무장대의 지도에 따라 한라산이나 오름에 올라가 생활하다가 선거가 끝난 후에 하산했다. 동시에 투표소에 대한 조직적인 공격도 이루어졌다. 이렇게 되니 마을에는 군경, 군경 가족, 우익 인사, 우익청년단원 등을 제외하고는 투표할 사람이 별로 없었다. 투표가 진행된다 하더라도 무장대의 습격으로 투표소가 불타거나 담당자가 살해당하기 일쑤였다. 결국, 대대적인 선거 방해로 인해 미군정과 군경의 투표 독려에도 불구하고 제주읍 중심을 제외하고는 선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3개 투표구 중 2개 투표구의 선거가 무효화되었고, 제주도는 5.10 총선거를 거부한 유일한 지역이 되었고, 재선거는 1년 이후에야 치러질 수 있었다.
5.10 총선거 실패 이후 군경과 무장대와의 대립은 더욱 첨예해졌다. 제주도의 선거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서 군경은 더욱 눈에 불을 켜고 무장대에 대한 진압을 가속화했다.
미군정은 무장대의 공세가 수그러들지 않자, 5월 20일경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아시아 대륙을 누볐던 야전군 출신인 미 20연대장 브라운 대령을 '제주도 최고 지휘관'으로 임명해 제주도 작전을 총지휘하도록 했다. 제주도 지부 지휘관이 된 브라운 대령은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강경한 진압을 천명했다. 또한 그는 제주에서 발생하고 있는 사건들이 공산주의자들의 책동으로 인해 일어났다고 확신했다.
하지 중장은 제주도 제59군정중대와 제주 CIC에도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브라운 대령을 지원하도록 명령했으며, 브라운 대령은 이에 따라서 제주도에 대한 무자비한 무력진압을 추구해 이른바 '평정작전(Pacification Plan)'을 진행했다. 당시 미군정은 소위 6.23 재선거실시를 위해 '중산간 지역 고립 및 검거작전'을 벌였는데, 이는 제주도민 대량 검거 사태를 불러왔다. 이처럼 제주도에서 미군정 수뇌부의 지휘와 관심에 따라 강력한 토벌전이 전개되어 많은 제주도민이 체포되고 인명피해가 급증하기에 이르렀는데, 1948년 6월 북제주군 조천면 북촌리 집 앞 굴속에 숨었다가 형제 주민들과 함께 붙잡혔던 강서수씨의 증언이 있다.
김익렬의 뒤를 이은 박진경도 그러한 강경진압에 한몫했다. 마침 그가 부임한 직후 경비대 병사 41명이 탈영하여 무장대에 합류하는 사건이 터졌는데,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제주 출신 병사들을 소외시키고 육지에서 온 병사들을 중심으로 진압 작전을 펼쳤다.
브라운과 박진경의 진압 작전으로 제주도 중산간마을 전역에서 수천여 명의 주민들이 무차별 체포되었고, 이런 무차별 체포작전으로 박진경은 두 달만에 대령 자리를 꿰찰 수 있었다.
경찰과 우익청년단원들도 마찬가지로 무장대를 진압한다며 민간인들을 탄압했고, 이들 중 무장대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이들은 좌익 혐의자에게 사적제재를 가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1948년 6월 18일, 강경진압을 주도하던 박진경이 끝내 부하들에 의해 피살되었다. 그를 죽인 자는 문상길 중위, 손선호 하사 등을 포함해 9명이었다.
재판에서 검찰은 이들이 김달삼의 지령을 받아 박진경을 죽였다고 주장했지만, 피고인들은 박진경 대령은 동포를 학살하고 진급했고, 또 평상시 “3천만을 위해서는 30만 제주도민을 다 희생시키도 좋다. 민족상잔은 해야 한다.”고 역설했고, 실제 행동에 있어서도 무고한 양민을 압박하고 학살하게 한 등 확실한 반민족주의자였으므로 죽였다고 밝혔다. 피고인들은 대부분 중형을 받고, 문상길과 손선호는 총살당했다.
이후 박진경의 후임으로 최경록 중령과 송요찬 소령이 임명되었는데, 이들 역시 박진경의 뒤를 이어 강경 진압을 계속 진행했다. 그리하여 계속 수많은 사람들이 잡혀왔으나 최경록의 말처럼 실제 전투에 종사한 정예 부대는 아직 하나도 체포되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결국, 1948년 7월경 들어 무장대도 적극적인 공격을 삼가고, 제주도민들의 여론도 평화적 문제해결을 계속 요구하며 진압도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한편 7월 15일 경비대 제9연대가 부활하여 송요찬이 연대장에 임명되었다.
한편, 무장대에서는 '남조선 대의원' 선거를 비공개 혹은 반공개적으로 실시했고, 총책 김달삼이 1948년 8월에 열리는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하고자 월북하면서 이덕구가 후임으로 부임해 무장 공세를 이어갔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어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고, 정식으로 국군과 경찰이 창설되었으며, 9일 후인 24일 대한민국과 미국은 양자 간에 한미군사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에 의거하여 미군이 완전 철수할 때까지 주한미군사령관은 한국군의 작전통제에 참여하게 되었다.
한국군을 지휘하고 통제하기 위해서 주한미군으로부터 '임시군사고문단'이 파견되는 사이, 1948년 10월 15~16일 경 육군본부가 제주4·3사건 진압을 목적으로 제14연대의 제주도 파병 계획을 하달하면서 제주도로의 파견을 반대하며 좌익 성향의 군인들이 여순사건을 일으켰는데, 이승만 정부 수립 2개월 만에 일어난 이 사건으로 반란군에 의해 경찰 74명을 포함해 약 150명의 민간인이 살해당했고, 정부측 진압 군경에 의해 2,500여 명의 민간인이 살해당했다.
이 때 제주도 근해에 소련 선박이나 잠수함이 출현했다는 소문이 퍼졌고, 점차 대대적인 토벌전이 준비되기 시작했다. 1948년 9월부터 소강상태는 종료되고 군인들과 경찰들이 육지로부터 제주도로 차츰 파견되었으며, 그나마 제주도민들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던 김봉호 경찰청장이 경질되었다.
1948년 10월 19일 제주 4.3 사건을 진압하라는 이승만 정부의 출병 명령을 거부한다는 명목으로 여수에 주둔 중이었던 조선국방경비대 14연대 소속 장병들이 여수, 순천 일대의 남조선로동당 당원과 합세하여 여수, 순천 지역을 점거하고 일으킨 반란과 반란의 진압과정에서 반란군과 진압군에 의해 민간인들이 학살당한 여수·순천 10.19 사건이 일어났고, 육군총사령관 송호성 장군을 지휘관으로 하는 ‘반란군토벌전투사령부’가 창설되어 이를 진압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정부 측 발표로 여수에서만 관민 1,200명이 학살당하고 1,15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 사건 이후 12월에 화순·나주 민간인 학살사건도 벌어졌는데 2016년 12월에 돼서야 국가의 책임, 배상을 인정하였다.
10월 11일에는 '제주도경비사령부'가 설치되어 사령관으로는 김상겸, 부사령관으로는 송요찬이 각각 임명되면서 대대적인 토벌 작전이 시작되었다.
10월 17일, 송요찬은 포고문을 발표하여 "해안선으로부터 5km 바깥에 있는 지역에 통행금지령을 내리고 허가 없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은 폭도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무시무시한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이 결정은 중산간마을 거주민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이 포고문은 그들에게 있어서 생활터전 자체를 포기하라는 명령이나 다름없었고, 그래서 그들은 해안으로 내려와야 살 수 있는데도 내려오지 못했다.
다음 날인 10월 18일부터 해안은 전면적으로 봉쇄되었고, 군경은 중간산마을을 비롯한 산악지역을 적지(敵地)로 간주했다. 여순사건이 터진 후에는 더욱 심해져서 서북청년회 회원들이 대거 제주도로 내려와 군인과 경찰 행세를 했다. 또 제주도민들을 대상으로 민보단을 조직해 무장대를 막으려고도 했다.
마침내 1948년 11월 17일, 이승만 대통령은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고, 송요찬을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이 계엄령 선포에 대해 불법이었는지에 대해 논란이 되고 있다.
제헌헌법에는 제64조에 "대통령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계엄을 선포한다"라고 써 놓았고 제헌헌법 제99조에는 "법률의 제정 없이는 실현될 수 없는 규정은 그 법률이 시행되는 때부터 시행한다"고 명시되어 있는데, 계엄령 선포 당시 계엄령을 선포할 수 있는 법률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계엄령 선포가 적법했다는 측은 제헌헌법 이전의 법령인 일본의 계엄법이나 미군정 아래에서 계엄령이 폐지되지는 않았다는 점, 제헌헌법 제100조에는 "현행법령은 이 헌법에 저촉되지 아니하는 한 효력을 가진다"고 명시한 점 등을 들어 계엄령이 법적 근거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 논란으로 인하여 이승만의 양자가 소송을 건 일이 있었는데, 법원은 그에 대한 판단을 유보했다.
계엄령 선포는 제헌국회에서도 논란이 되었다. 야당 국회의원들이 당시 법무장관이었던 이인에게 계엄령의 허점을 지적하며 위헌 아니냐고 묻자, 그는 계엄법의 부재를 인정했지만 "계엄령은 급박한 때에 현지 군사령관이 하는 것이고, 단지 동란을 방지하는 응급조치의 수단에 불과한 것"이라면서 얼버무렸다.
계엄령을 토대로 군경토벌대는 본격적인 진압에 들어갔다. 토벌을 위해 군경은 해안을 통제하고, 언론에 재갈을 물려 방송을 통제했고, 제주도는 외부로부터 고립되었다.
1948년 11월 중순부터 중산간지대의 마을들과 주민들이 주요한 진압 작전 대상이 된 초토화작전이라고 불리는 강경 진압이 시행됐다. 또한 미군정은 남한 단독정부 정착을 위한 내부의 불안요소 제거를 명분으로 제주도에서 경비대와 경찰로 구성된 군경토벌대를 조직해 중산간마을 소탕작전을 지속했다. 참고로 중산간마을은 한강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의 배경이 되는 지역으로, 특히 중산간마을 중에서 해발고도가 가장 높아 지금도 겨울철 눈이 심하게 내리면 사실상 고립되다시피하는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가 가장 유력해 보인다.
군경토벌대는 중산간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주민들을 폭도로 간주해 고문과 학살을 자행했고, 가는 곳마다 닥치는대로 마을에 불을 질렀다. 상상을 초월하는 끔찍한 일들이 학살 도중에 벌어졌는데, 토벌대는 주민들을 집결시키고 가족끼리 말을 태우게 하거나 뺨을 때리게 했고, 만약 조금이라도 주저한다면 마구 구타했다. 반항하면 그 자리에서 총살하는 일도 있었고, 총살자 가족에게 총살당하는 사람을 보게 하며 만세를 부르고 박수를 치게 했다. 그런가 하면 무장대로 변장하여 들어가 도움을 요청한 다음, 도움을 주면 바로 본색을 드러내 사살해 버리는 함정 토벌(陷穽討伐), 자수를 종용하며 명단이 있으니 거짓말하면 재미없다며 으름장을 놓다가 자수를 하면 바로 처형해 버리는 자수 처형(自手處刑)도 있었다. 처형 대상인 사람이 없자 그 사람의 가족을 데려다 대신 죽여 버리는 대살(代殺)과 마을 주민들을 관광객으로 모아놓고 학살을 벌이는 관광총살(觀光銃殺)도 횡행했다. 어떤 곳에서는 군경토벌대가 주민들을 대상으로 사격을 연습하는 연습사살(練習射殺)을 벌이기도 했다. 그렇게 마구잡이로 학살된 선량한 주민들은 토벌대에 의해 모두 '사살된 폭도'가 되었고, 학살행위는 공적(功績)으로 치하되었다.
한편 학살을 피해 마을을 탈출한 사람들은 한라산 인근을 떠돌아다니면서 동굴이나 숲에 숨어야 했는데, 군경토벌대는 이런 사람들까지도 색출해 학살했고, 이런 끔찍한 일들로 인해 제주도에서는 '이름 빼앗기지 말라'는 유행어가 나돌았다. 사례로는 다랑쉬굴 학살사건이 있다. 구좌읍 종달리와 하도리에서 살고 있는 주민들은 1948년 12월경에 구좌읍 세화리에 있는 다랑쉬 오름 근처의 다랑쉬굴로 피난을 가 있었다. 그런데 군경토벌대가 그 위치를 알고 안에 있던 사람들 보고 나오라고 했다. 사람들이 나오지 않자 토벌대는 굴 입구에 불을 지폈다. 결국, 연기에 질색하여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사망자 중 3명이 여성이었고 아홉 살 아이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다랑쉬굴은 1992년에야 발굴되어 그 전모가 알려졌다
토벌대 중에서는 월남한 지주나 이북 출신 조직폭력배, 개신교도, 극우세력 장정들이 주류를 이룬 서북청년회 소속 대원들이 진압군 중에서도 가장 악랄했는데, 이들은 노인, 어린이, 아기 등 나이와 성별을 가릴 것 없이 소위 도피자 축에도 끼지 못하는 일반 서민들을 빨갱이와 한통속으로 치부하여 모조리 죽이며 제주에서 화풀이와도 같은 만행을 저질러 악명이 높았는데, 당시 생존자 김순애 씨는 “저 한길을 대낮에 한번만 걸을 수 있으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 는 생각을 했다고 증언했다.
④ 북촌리 학살사건
북촌리 학살사건은 제주 4.3사건의 여파로 1949년 1월 17일에 북촌리에서 벌어진 학살사건이다.
당시 북촌리 부근의 국군 소속 제2연대 3대대의 일부 병력이 무장대의 기습을 받아 군인 2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에 놀란 마을 원로들을 포함한 주민 10명이 직접 시신을 싣고 신고를 하러 대대 본부가 있는 함덕군주둔소를 찾아갔는데, 군인들은 흥분하여 마을 원로들을 포함한 9명을 무참히 살해했다,
군인들은 그것으로도 성이 차지 않았는지 토벌대를 만들고, 북촌리를 찾아가 북촌리 주민 1천여 명을 집결시키고 주민 전체가 빨갱이라는 죄목을 씌우는 등 억지 핑계를 대며 민보단 책임자를 제일 먼저 사살했다. 놀란 주민들이 동요하자 위협사격을 가했는데, 이 때 사격으로 많은 젖먹이를 안고 있던 여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의 목격자 중 한 명은 "아기가 죽은 어머니의 젖을 열심히 빨던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고 회상하고 있다.
토벌대는 이어서 마을에 불을 질렀고, 이에 마을 전체가 불에 타 잿더미로 변했는데, 군인들은 공포에 잠긴 주민들을 협박해 군경 가족을 골라낸 다음, 나머지는 수십명씩 끌고 가 마을 주변의 움푹 파져있는 옴팡밭과 묻기 쉬운 모래밭에서 모조리 총살했다.
그날 군인은 종일 학살을 계속했는데, 학살은 북촌초등학교를 중심으로 서쪽 '너븐숭이'와 동쪽 '당팟' 등 2곳으로 나눠 이뤄졌다. 오후 5시가 돼서 겨우 학살 중지 명령이 내려지자, 군인들은 주민들에게 함덕으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주민들은 가족들의 시신도 수습하지 못한 채 함덕으로 이동했는데, 군인들은 거기서 또 총살을 이어갔다.
이 사건으로 불과 이틀 만에 300~460여 명의 주민들이 목숨을 잃었고, 마을주민들은 몇 달이 지나서야 겨우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지만, 죽임을 당한 아이들의 시신을 구분할 수 없어 너븐숭이에 그대로 두어야 했는데, 너븐숭이는 글자 그대로 넓은 돌밭이란 뜻으로 죽이거나 버리기 좋은 장소라는 의미이다.
이 사건은 제주 4.3 사건 당시에 일어난 학살사건으로는 최대의 규모였고, 나치의 절멸수용소나 일제의 난징 대학살에 비할 수 있을 정도로 전후후무(前後後無)한 이 학살로 인해 북촌리의 성비는 한동안 여초(女超)였다고 하는데, 군경은 이런 자신들의 학살 행위를 무장대의 행위라고 왜곡해 서술해 놓았다.
(3) 제주4.3사태의 평정
이렇듯 수많은 학살사건을 양산했던 제주4.3사태의 평정은 1949년 3월, 유재흥과 함병선이 제주도 지구 전투 사령관으로 부임하여 토벌대의 강경한 진압이 수그러들면서 시작되었다.
유재흥은 무력 진압으로 일관하던 진압 방식을 무력(武力)과 민심을 안정시키는 선무(宣撫) 공작을 병행하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그리하여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구호대책이 마련되었고, 산에 있던 피난민들에게 자진해서 하산하면 죄를 묻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하산을 권유했다.
처음에는 반응이 없었지만, 4월부터 하산자들이 속속 나타났다. 5월까지 수천여 명이 하산했고 여자, 어린이, 노약자 등을 제외하고는 철저히 검색되어 따로 수용되었다. 당시 증언에 따르면 자신들이 직접 돌을 쌓아 격리 구역을 만든 뒤 그 안에 수용되었다고 한다.
유재흥은 재선거가 있던 5월 초까지 부임했고, 5월 15일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는 제2연대에게 임무를 위임하고 폐지되었다. 서북청년회 일색이었던 제2연대 제3대대와 서청 출신 경찰들도 같이 철수했고, 이후 육군 수색학교의 후신인 독립대대와 해병대가 순서대로 제주도에 들어와 치안을 담당했다. 하지만 정작 학살자는 처벌되지 않았고, 하산자 중 1,600여 명은 전국의 교도소에 분산되어 수용되고 말았다. 그래도 제주 주민들은 2연대의 공적을 높이 찬양했고 기리기 위해 서귀포에 ‘함병선 대령의 공덕비’를 건립하고, 1949년 7월 7일에는 도민 전체의 이름으로 한라산에 평정비(平定碑)를 건립했다.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과 선무공작 등 일련의 정책들로 무장대 대원들도 하산 행렬에 따르거나 초토화 작전 도중 사살당했고, 간부들도 이와 비슷한 처지가 되었으며, 6월 7일에는 무장대의 상징적 존재였던 이덕구가 토벌대에 의해 사살되었다. 그의 시신은 나무 십자가에 묶여져 제주경찰서 정문 앞에 하루 동안 전시되고 태워졌다. 그의 죽음은 무장대의 완전한 몰락을 의미했다. 이후 무장대의 활동은 급격하게 약화되었고, 지속적인 진압 작전이 이루어지면서 이들은 거의 소멸되었다.
(4) 제주4.3사태의 재발(6.25)과 종결
하지만 4.3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으니, 1950년 4.3 사건의 여파가 간신히 가라앉던 즈음 6.25 전쟁이 터지면서 되살아 났다.
이승만 정부는 전쟁이 터지자 전국에서 좌익 정치범이나 좌익 혐의자, 보도연맹 가입자들을 대상으로 예비검속과 학살을 자행했고, 전국에 있던 교도소에서 이들에 대한 학살을 벌였는데, 이 때 그곳에 있던 4.3 구속자들 거의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고, 이들에 대한 탄압과 학살 그리고 유족들에 대한 연좌제 적용으로 인해 제주도민들중 적잖은 민간인이 자원입대로 충성심을 증명해야 연좌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해병대 등 국군에 자원입대하는 일도 적잖게 있었다.
한편, 무장대는 전쟁이 터지자 북한의 지원이 있으리라는 희망 속에 방송국, 파출소를 습격하는 게릴라 전술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끝내 대부분이 투항하거나 진압되었고, 나머지는 군경에 쫓겨 잔비(殘匪)로 불리며 한라산 일대와 오름을 떠도는 처지가 되었다. 1952년 군 정보국이 무장대의 수를 무장인원 35명, 비무장 동조자 30여명 등 총 65명으로 예측하였으나, 이런저런 내분 끝에 4.3사건 7주기를 맞은 1954년의 제주 경찰의 브리핑에서는 ”무장대의 수가 남성과 여성 포함 6명으로, 두 편으로 나뉘어 서로 연락이 두절된 상태"라고 밝혔고, 그 중 여성 한 명이 투항하면서 1955년에는 다시 5명으로 숫자가 줄었다. 1956년에는 이들 중 다시 2명이 경찰에 의해 사살되었고, 1957년에는 다시 2명이 또 사살되었다. 그렇게 9주기를 하루 앞둔 1957년 4월 2일 마지막 무장대원이 검거되면서 무장대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나고 무장대가 궤멸당한 1950년대 중반에야 제주도는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다.
1954년 9월 21일 제주 경찰은 경찰국장 신상묵 명의로 포고문을 발표해 한라산에 내려졌던 금족령을 해제하였으며, 1957년 4월 2일 최후의 무장대원 오원권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며 제주도에서 4.3 사건의 총성은 멎었다.
6.25와 제주 4.3 사건이 종결되면서 국내는 물론 제주도도 안정을 되찾았지만,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서 친일 vs 항일로 가득했단 정서가 반공(反共) vs 친공(親共)으로 바뀌었고, 남한에서는 친일적 정서를 가진 정치세력이 우익을 자처하며 반대편을 반공으로 공격하면서 좌익으로 모는 정서가 생겨났다.
제주 4.3사건으로 압축된 일련의 많은 참혹한 살육에는 이승만 정부와 미군정의 무거운 책임이 있는데, 남로당 제주도당의 봉기 자체가 이전부터 이어진 당국의 탄압 조치로 부정적인 여론이 조성되었기에 가능했던 것이고, 본문에선 군인 경찰로 표현했지만, 사실은 대한민국 국군과 경찰이 국민에게 자행한 짓이다.
미국과 이승만 정부의 입장에서 제주도는 냉전 상황에서 군사 요충지 및 임시 거점으로 쓰일 공산화되면 안 되는 곳이었다. 그러나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는 결코 그 요충지인 제주도에 사는 주민들을 좋게 대해주지 않았고, 오히려 주민들을 탄압하던 일제에 협력했던 기존 관료들을 그대로 쓰고, 복시환을 비롯한 밀항선을 통해 자원을 자신들의 주머니로 빼돌리는 모리(謀利) 행위를 하였다.
뿐만아니라 미국과 이승만 정부는 이에 분노한 주민들의 항의에 경찰이 총부리를 겨누어 일부 주민을 죽이자, 사태를 수습하겠다고 좌파 탄압이라는 이념하에 폭력의 소용돌이를 더 크게 키웠다. 결정적으로 미군정은 경비대가 이 폭력의 소용돌이를 수습하려 무장대와 맺은 4.28 협정이 정체불명의 세력의 훼방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김익렬의 진상 보고를 무시하였다. 실제로 피해자들 가운데 대다수가 이승만 정부와 미군정의 초토화 작전으로 생긴 것이었다. 또한, 제주도민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이북 출신 극우 단체 등을 토벌 작전에 끌어들이면서 수많은 민간인들이 살해당하도록 방관한 것도 결정적으로 비판받아야 하는 점이다. 게다가 정부는 제주 4.3의 영향으로 발발한 여순 사건을 진압하는 과정에서도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으며, 6.25 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도 제주도에서의 학살을 계속해서 진행하였다.
한편 제주 4.3사건으로 압축된 일련의 많은 참혹한 살육의 책임을 남로당 제주도당에 묻기도 하는데, 이들이 제주 도민을 선동하여 사태를 파국으로 몰아간 주체이긴 하지만, 사실 이들은 당시 남한을 전복하려던 공산주의자로서 원래 대한민국 사람이 아니니 핑계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5) 제주 4.3사건의 결론과 후유증
제주 4.3사건으로 인한 총 희생자 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최대 제주도민 8분의 1이 죽거나 행방불명(추정치는 3만 명에서 최대 8만 명)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재까지 유해 발굴 작업이 계속되고 있음에 따라 희생자 수는 아직까지도 늘어나고 있고, 유해 발굴이 되었어도 신고한 사람 대부분이 70~80대를 넘긴 고령이거나 이미 사망한 경우도 허다해서 유해가 발굴되었어도 신원이 파악되지 못해 피해자로 등록되지 못한 경우도 있으며, 사실 일가족 전체가 몰살 당하거나 학살 도중 육지로 도피해 살아남았어도 트라우마로 인해 아직도 신고조차 하지 못한 경우가 허다해 현재진행형이다.
현재 제주도는 친척 몇 다리만 건너면 4.3 사건 희생자인데, 실제로 오늘날도 제주도에 가 보면 세 집에 하나꼴로 희생자가 있고, 촌락별로 거의 비슷한 날에 제사가 치러지는 걸 보면 당시에 제주도민들이 얼마나 학살당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한강 작가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는 위 내용에다 선혈이 낭자하고 고통과 두려움에 몸부림치고 여자와 노인과 아이의 절규와 울음소리가 메아리치는 모습을 좀더 잘 느낄 수 있도록 소설가의 감성을 더해 적나라하게 묘사했을 것이다.
한강 작가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는 위 내용에다 선혈이 낭자하고 고통과 두려움에 몸부림치고 여자와 노인과 아이의 절규와 울음소리가 메아리치는 모습을 좀더 잘 느낄 수 있도록 소설가의 감성을 더해 적나라하게 묘사했을 것이다.
한강 작가가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를 통해 제주4.3사건의 역사를 왜곡했는지 아닌지는 위 역사 기록을 토대로 본인이 판단하시기 바란다.
하지만 판단하기 전에 이 두 가지만은 알아야 하는데, 이하는 필자의 사견임으로 참고만 하시기 바란다.
첫째 제주 4.3사건의 유족들은 사건 이후, 제주에서 빨갱이라는 단어가 무서워 침묵하며 살아가야 했고, 그래서 빨갱이라는 단어를 피해 부산으로 혹은 전남으로 혹은 멀리 일본으로까지 나가 살아야 했는데, 사실 어느 누구도 어떤 방법으로도 제주 4.3사건으로 죽은 이들과 유족들의 억울함과 슬픔을 대신할 순 없지만, 최소한 기억만은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부산에는 이 사건으로 인해 바다를 건너 피난을 떠난 제주도민들이 상당수 있다. 특히 부산으로 건너온 피난민들의 대부분은 영도 쪽에 정착해서 살았는데, 제주은행 부산지점이 부산의 중심가가 아닌 영도구 남항동에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며, 영도에는 여전히 많은 제주 출신 해녀가 활동하고 있고, 덤으로 제주도민회관 역시 공교롭게도 부산 안의 섬인 영도의 영도구에 있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그들이 한국 땅 어디에나 살고 있을 것이고, 그들 모두가 하나 같이 내 동포이고 내 이웃이며 그들 중에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나 동료나 선배나 후배가 있을 수도 있다.
현재 일본에도 제주도에서 피난한 밀항민들이 살고 있고, 일단 자료로 확인된 일본행 밀항자는 281명이고, 그 외에 여러 가지 밀항 루트로 일본으로 피신한 사람은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당시의 만행에 가까운 국가폭력이 얼마나 치가 떨렸으면 일본까지 피해갔을까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둘째 당시 제주 4.3사건에 참여했던 경찰들과 검사들은 대부분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넣고 심판하던 일본 경찰과 일본검찰 출신의 친일 경찰과 친일검사였고, 따라서 경찰과 검찰이 언젠가는 혁신을 통하여 이런 잘못된 오욕의 역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일제 시대 경찰과 검사 출신은 해방 된 후 친일 경찰과 친일검사가 되어 권력의 도구로 전락했고, 검사가 법정 안에서 암약한 반면, 경찰의 경우 일제강점기에는 일제 앞잡이가 되어 독립군들을 잡아들이는 한편 무고한 조선인들을 학대하고 해방 후에는 친일 경찰로 권력의 앞잡이가 되어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하는 등 사회에서 직접 악행을 행했다. 경찰의 이런 역사 때문에 한국 사회와 역사에서는 경찰에 대한 믿음이 없어 경찰의 힘이 약해졌는데, 지금도 경찰 조직의 이런 행태는 조금도 변하지 않고 있다
최근 검경 수사권 조정으로 말들이 많은데, 검찰과 경찰이 혁신을 통하여 권력의 도구로 전락하는 이런 잘못된 오욕의 역사를 만회하지 못한다면, 검경수사권 조정으로 많은 권력이 경찰로 넘어가 봐야 말짱 헛짓이 될 것이고, 따라서 검경수사권 조정은 검찰조직과 경찰 조직의 이런 행태가 바뀌는 것을 전제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한민담서(韓民談書) 5( 5-3). 5·18 광주사태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