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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바람 Nov 01. 2024

한민담서(韓民談書) 5

5-3. 5·18 민주화 운동

 5.18 민주화운동은 처음에는 신군부에 의해 광주폭동, 당시 매스컴에서는 광주사태 또는 광주소요사태 등의 이름으로 불렸으나, 점차 시대가 변하고 진실이 밝혀지면서 현재는 광주민중항쟁, 광주민주항쟁, 광주학살 등으로 부르기도 하며, 대한민국 초·중·고 교과서 대부분 5.18 민주화 운동이라고 적고 있고, 일어난 날짜로 줄여서 5·18로 부르기도 한다.      

 5.18 민주화운동, 5.18 광주 민주화운동, 광주 민주화운동 또는 광주민중항쟁은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의 총탄에 서거한 1979년의 10. 26을 계기로 전두환과 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1979년 12월 12일 내란과 폭동을 일으킨 데 저항하여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전라남도 광주시 및 인근 지역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이다.  

 넓게 보면 1979년 12.12 군사반란 직후부터, 좁혀 보면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전두환과 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내란과 폭동을 저지르고 이에 저항한 무고한 광주 시민들을 학살한, 시민과 계엄군 모두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사건인데, 신군부 등에 의한 불법적 헌정질서 파괴범죄와 부당한 공권력 행사로 다수의 희생자와 피해자가 발생했다.    

 

 (1) 배경     


  1979년 10월 26일 10.26 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해 당시 국무총리였던 최규하가 대통령 권한 대행이 되었고, 대통령 권한대행 최규하는 1979년 11월 10일 특별담화를 통해 제4공화국 헌법에 따라 우선 간접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하되, 새 대통령은 가능한 한 빠른 기간 안에 민주헌법으로 개정한 후 이에 따라 다시 선거를 실시하여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1979년 당시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들의 목소리가 크게 터져 나오는 가운데, 당시 국군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은 하나회를 통한 군사 쿠데타로 12.12사태를 일으켜 최규하 대통령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우고, 하나회를 통해 하나하나 정권을 장악하는 한편, 대통령을 능가하는 권력으로 이듬해 1980년엔 헌정을 중단시키는 5.17 내란을 일으키고 비상계엄을 전국적으로 확대해 반발을 막을 계획을 세웠다.

 당시는 방학이 시작된 직후였던 터라 개학이 될 때까지 대학가의 시위는 일어나지 않았고, 개학을 맞이한 1980년 3월에야 시위가 본격화되어 민주화 열풍으로 서울의 봄을 기약하고 있는 가운데, 광주에서도 ‘서울의 봄’의 민주화 열기가 퍼져 5.18의 전조가 시작되었다.    

 

(2) 전개     


  5.18의 시작은 4일 전인 5월 14일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의 대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민주화운동을 전개하는 가운데. 전남대 총학생회는 광주지역 대학생들의 시위조직인 ‘민족 민주화 대성회’를 조직하고, 5월 초를 ‘민족 민주화 성회’ 기간으로 정하는 한편, 일부터 전남도청 앞에서 ‘시민 민주화 토론회’를 열면서 시작되었다.      

 5월 16(): D-2     


 16일은 5월 14일부터 시작된 광주지역 대학생들의 시위조직인 ‘민족 민주화 대성회’의 절정에 달한 날이었다.      

 오후 2부터 시작된 집회에는 광주 내 9개 대학에서 온 30,000여 명의 학생이 집결해 있었다. 특히 전남대학교 학생들은 교수들과 함께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가두시위를 벌이면서 도청으로 들어왔다.      

 오후 3시 30분이 되자 학생과 시민 50,000여 명이 전남도청 앞 광장은 물론이고 금남로까지 채운 상태에서 박관현이 개회 연설로 집회를 시작했다. 이 날에는 복학생 정동년이 시국선언문을 발표하였고, 각 대학의 대표는 물론이고 고등학생 대표까지 분수대에 올라와 선언문을 발표하고 연설했다. 일반 시민들도 여기에 호응하여 자신들도 분수대에 올라가 하고 싶은 말을 하였으며, 한 학생은 스스로를 민주시민이라 지칭하곤 자신이 직접 지은 시를 낭송하기도 했다. 

 집회가 점점 끝나가고 저녁이 오면서 학생들은 전날 예고한 횃불시위를 준비했다. 박관현은 일장 연설을 하며 횃불시위의 의의를 설명하고 그 필요성을 호소하였다. 

 총학생회에서는 준비한 400여 개의 횃불을 지급하였고, 학생들은 보다 효율적인 시위를 위하여 여러 개의 조를 편성하여 역할을 나누어 횃불시위대를 만드는 사이 해가 지고 있었다.      


 오후 8부터 횃불시위대가 두 갈래로 흩어져 두팀으로 나누어 광주 시내를 행진하였다. 횃불시위대는 행진하면서 구호를 외치거나 노래를 부르면서 흥을 돋웠다. 

 시위는 우려와 다르게 박관현이 당시 경찰국장 안병하와 사전합의를 하였기 때문에 원만하고 안전하게 진행되었다. 그래서 경찰들은 비록 시위 진압을 위한 장비와 복장을 전부 갖춘 상태였지만 줄곧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래서 집회는 아무런 충돌 없이 진행되었다.    

  

 밤 10시경 모든 횃불시위대원이 도청 앞 광장에 모였고, 시가행진은 분수대에 박정희와 전두환의 허수아비가 내걸리면서 끝이 났다.

 시가행진이 종료되자 마지막 순서로 학생들은 박정희와 전두환의 허수아비를 횃불에 불태워 '5.16 쿠데타 화형식'을 시행하고, 시위군중은 박수를 쳤는데, 아이러니컬 한 것은 정작 5.16 당시에는 지식인층들과 일반 국민 및 대학생들간에 이를 수긍하는 분위기가 많았고, 서울대 총학생회는 “5월 23일 5.16 정변이 4.19를 계승한 혁명이다.”고 하며 지지하는 성명서 발표를 하기까지 했다는 사실이고, 5.18의 주범인 전두환이 5.16 당시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을 주도하여 군사 정변 지지 시가행진을 했다는 점이다. 

 집회 해산에 앞서 총학생회장 박관현은 시위군중들을 향해 마지막 연설을 했는데, 3일간의 집회기간 동안 수고한 학생, 시민, 경찰에게 감사함을 표했고, 대한민국의 민주화가 조속히 이루어져야 할 것을 강조하면서, 그러나 만약 정부가 민주화 조치를 하지 않는다면 다시금 학생들은 거리에 나와 투쟁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연설을 끝으로 3일 간의 민족민주화대성회는 막을 내렸다. 

 집회가 완전히 끝난 후 학생들은 모여 향후 계획을 논의하였다. 여기서 시위를 주도했던 학생회측은 만일 휴교령이 내려질 경우 학교에서 만나자는 행동지침을 내렸다. 학생들은 귀가하면서 집회 때 사용했던 물품들을 정리하고 쓰레기들을 청소하였고, 다음 날 새벽까지 청소를 이어갔다.      


②  5월 17(); D-1     


 오전 10시경, 계엄 당국은 내란음모 조작 사건으로 김대중을 "사회혼란 및 학생, 노조 배후조종 혐의"로 20여명과 함께 전격 연행하였고, 김영삼을 가택 연금하였으며, 김종필을 보안사령부에 감금하는 한편, 서울에 있는 각 대학 학생회장단을 모두 연행하였다.     


오전10시 40 2군사령부는 광주 소재 8개 전문대학에 31사단병력을 투입하도록 지시하였다. 

     

오후 4 2군사령부는 7공수여단 33, 35대대를 31사단에서 작전통제 하도록 지시하였다. 

19시 40분 2군사령부는 전교사(전투교육사령부)에“5월 18일 00시 01분부로 충정작전이 유효하며 대학점령은 5월 18일 04시 이전까지, 불순분자 체포는 5월 18일 00시 01분 이전까지 완료하라.”는 지시를 하달하였다.     


 오후 8시경 2군사령부는 7공수여단에 “ 5월 17일 20시 01분부로 2군사령관 작전통제 아래 전남대 조선대 등을 5월 18일 02시까지 점령하고 04시 01분까지 소요 주모자를 전원 체포하라.”는 지시를 하달하였다. 

 5.18의 도화선이 된 이 사건은 평화적으로 진행되고 있던 시위에 군사작전이 시행된 사건으로 국가가 국민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것과 같은 행위였다. 

 같은 시각 전남대 총학생회에 "서울에 있는 각 대학 학생회장단이 모두 계엄당국에 연행되었다"는 한 여학생의 다급한 전화가 왔고, 박관현, 윤한봉 등을 비롯한 총학생회장단은 계엄군에 의해 전국적인 체포령이 내려졌다고 판단해 저녁 어둠을 틈타 무등산장으로 피신했는데, 그곳에서 비상계엄 확대 소식을 확실하게 접하고 각자 나름대로 광주를 빠져나갔다.    

  

 밤 23, 경찰과 보안사 요원들이 시위주동자에 대한 이른바 '예비검속'을 실시하여 재야인사와 학생회 간부 등 연행대상자 22명 중 정동년, 권창수, 오진수, 이승룡, 유재도 등 8명을 체포했다. 이를 모면한 인사들은 광주 외곽이나 지하로 숨었으나, 총학생회가 피신하면서 비상 대중 동원 능력이 상실되어 버렸고, 23시 40분에 이 상태로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③ 5월 18(); D-day


 0부터 비상계엄이 시작되고, 계엄포고령 10호에 따라 새벽부터 정치 활동이 전면 중단되고, 어떠한 정치적 옥내외 집회 및 시위도 금지되었다. 

 계엄사령부는 김종필, 이후락 등을 포함한 박정희 정권 시절의 거물 10여 명을 부정축재자로 발표했고, 이들은 신군부의 협박 앞에 재산을 헌납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으며, 결국 단 하루만에 모든 정적들을 제거하였다.     


 새벽 1~9, 전남대와 조선대에 특전사 7공수여단 장교 68명과 사병 680명이 M16 소총을 지닌 채 투입되었다. 

 군인들은 도서관에 공부하려 모인 학생들과 5.17 내란과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에 당황해서 모인 대학생들을 나가지 못하게 막아 학내에 구속하는 한편 교내를 수색해 학생들을 무차별 공격하고 연행해갔다. 이때 학생들 중에는 농성하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멀쩡히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날벼락을 맞은 사람들도 있었다. 

 오전 10시에 전남대 교문 앞에서 학생들이 먼저 공수부대에게 돌을 던졌다"고 왜곡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러나 병원 기록과 의사의 증언을 보면 공수부대원들은 이미 전남대에서 돌 던지기 전부터 시민들을 구타하고 있었다.

 결국, 군인들은 이틀 전 횃불 시위를 마친 뒤 정부의 반응을 신중히 살피던 학생들을 구타하며 체포해 대다수 학생들을 학교 본부건물에 감금하였는데, 운 좋게 체포를 면한 몇몇 학생들은 강의실 옥상이나 화장실로 기어올라 파이프를 타고 내려와 화를 입지 않았다. 이 습격으로 전남대학교에서 69명, 조선대학교에서 43명이 연행되었고, 그렇게 계엄군은 두 학교를 완전히 점령했다.

 한편, 서울의 모든 대학에도 휴교령이 선포되고 군부대가 진주하였다. 전국 학생회장단이 서울역 회군 이후 모여있던 이화여자대학교를 급습해서 전원 체포하여 학생운동 세력을 무력화시키고, 민주화를 요구해온 재야인사와 사회운동세력을 지명수배해 일제 검거하였다. 

 이날 수배령이 떨어진 이들 가운데 600여 명이 체포되었고, 신문과 방송들은 수배자들의 명단과 죄목을 경쟁하듯 우수수 쏟아냈는데, 당초 신군부는 김대중이 북한의 사주를 받아서 소요를 사주했다는 식으로 몰아가려 했으나, 방송을 통해 5월 18일 광주사태는 김대중이 신군부에 항거해 일으킨 내란이라고 몰아붙였다.

 한편, 당시 경희대학교 법과대학 학생이던 문재인은 유신반대 운동을 해서 찍혔는지 강화도에 있는 처가에 갔다가 영장도 없이 끌려가 유치장에 그대로 수감되었고, 수감 중 사법고시 2차 합격 소식을 그의 아내로부터 듣게 된다.       


 오전 9 전남대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진 일요일인 와중에도 1백여 명에 이르는 전남대학생들이 학교로 속속 모여들었는데, 교문에는 "정부 조치로 휴교령이 내려졌으니 가정학습하길 바란다."라고 쓰여진 공고문이 나붙고, 교문 앞에 11명의 무장 공수부대원들이 서 있었다. 

 학생들이 군인들과 실랑이를 하다 교문 근처의 용봉교(龍鳳橋)라는 다리를 사이에 두고 군인들과 대치하는 사이, 학생의 수가 2 ~3백여 명으로 늘어났다. 학생들이 교문을 열라고 항의를 하자, 장교 하나가 나와 학생 한 명을 붙잡아 마구 구타했다. 이를 본 학생들은 이 구타 행위를 비난하면서 "비상계엄 해제하라, 계엄군 물러가라, 휴교령 철폐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돌을 던지는 등의 시위를 했고, 이에 부상당한 공수부대원들이 분개하여 학생들을 향해 돌격 앞으로를 외치며 돌진하여 해산을 시도했다. 

 공수부대원들의 무자비한 폭행에 학생들은 도망가고, 학생들이 도망가자 이들은 인근이나 집까지 찾아다니며 도주하는 학생들을 쫓아가 쇠심이 박힌 진압봉으로 어깨, 머리 등을 가격하고 체포한 학생들을 난폭하게 연행하였다. 공수부대원들은 근처를 지나던 시내버스에서 진압에 항의하던 학생들도 버스를 강제로 세우고 잡아서 무자비하게 폭행했는데, 심지어는 신분을 밝히며 말리려 다가간 전남대 교수에게도 사정없이 곤봉을 휘둘렀다. 

 결국, 학생들은 도망가다 광주제일고등학교 방향으로 피했는데, 광주제일고등학교는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던 곳으로 일본제국 경찰조차 함부로 드나들지 않던 곳이지만, 공수부대원들은 그 잔악하던 일본제국 경찰들마저도 누군가를 연행하려면 적어도 교장실에 들러 사전 양해는 구했는데, 일언반구 없이 무작정 교실로 뛰어 들어가 수업받던 학생들을 곤봉으로 두들겨 패고 군화를 신은 발로 짓밟았다. 이날 교실에 있던 학생들은 10대 때 고등학교를 다니지 못해 그 과정을 이수하기 위해 방송통신고교에 적을 두고 일요일 수업을 받던 어른 학생들로서, 학자금이 없어 정규 고교에 진학하지 못했거나 직장 때문에 공부하지 못했던 시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공수부대원들이 광주제일고등학교로 들이닥치는 것을 보고 무슨 일인가 싶어 들어갔던 한 육군 간부도 두들겨 맞았다. 그 군인은 정복을 입고 있었음에도 불문곡직 두들겨 맞다 재빨리 교문 밖으로 뛰쳐나갔는데, "나도 군인인데 어떻게 저럴 수 있는가"라며 말하며 빠져나갔고, 눈물이 난 건지 눈언저리를 계속 문지르고 있었다. 

 그날 광주제일고등학교에선 체육대회를 했는데, 그 대회에 참여한 사람들도 수난를 당했다. 조선대 의대 4학년 재학 이민오 씨는 광주일고에서 하는 동문 체육대회에 참여했다가 공수부대원들에게 쫓겼다. 그러다 교장관사에서 막혔고 공수부대원들한테 무자비하게 구타당했다. 엄청난 중상을 입었는데 췌장과 비장이 파열됐다고 한다. 

 사방에서 일어난 무차별 폭력 속에서 결국 사망자가 나왔다. 사망자는 청각장애인 김경철 씨였다. 그는 평범한 시민들이었고 시위에도 참여하지 않았으나, 공수부대의 잔혹한 폭동으로 인해 처참하게 맞아 죽었다. 

 공수부대의 폭동이 어찌나 잔혹했던지, 이를 지켜보던 시민들은 진저리를 쳤다.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그들을 악마라고 말을 했을 정도로 공수부대의 폭동은 잔혹한 것이었다. 어느 할아버지는 “저럴 수가 있느냐. 나는 일제 때에도 무서운 순사들도 많이 보고, 6.25때 공산당도 겪었지만 저렇게 잔인하게 죽이는 놈들은 처음 보았다. 학생들이 무슨 죄가 있기에 저러는가. 죄가 있다고 해도 저럴 수 없다. 저놈들은 국군이 아니라 사람의 탈을 쓴 악귀들이야”고 말하면서 통곡했다. 어느 중년의 사내는 “나는 월남전도 참전해서 베트콩도 죽여봤지만, 저런 식으로 죽일 바엔 그냥 총으로 쏴 죽이지. 저놈들을 죽여버려야 해”고 말하면서 오열을 터뜨렸다. 

 같은 시각 전남대 외에 조선대, 광주교대도 같은 상황으로 반란 특전사 대원들의 일방적인 폭력 사태가 있었고, 학교 밖에서도 반란 특전사 대원들의 일방적인 폭력 사태가 벌어졌는데, 다방에선 여자 하나가 ‘공수부대원들이 머리에 피가 철철 흐르는 청년 한 사람의 머리를 잡고 끌어내서 포승으로 묶은 뒤 트럭에 내던지는 것’을 보고 '학생이 아니다'라고 울부짖다 땅에 내동댕이쳐지기도 하고, 공수부대원들이 조선대 입구 철로변을 지나가던 학생 11명을 총 개머리판으로 구타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해서 온 거리가 피의 강, 울음의 바다가 되었다.

 계엄군에게 짓밟힌 학생들은 "이 일들을 시민들에게 알려야 한다."면서 광주 시내로 향했다. 학생들은 비상계엄 해제, 김대중 석방, 휴교령 철회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여럿씩 짝을 지어 행진했다. 광주역에서 재집결한 학생들은 공용터미널을 지나서 전남도청이 있던 금남로로 향했다. 전투경찰을 피하면서 학생 시위대는 여러 갈래로 나뉘었고, 이동하면서 합류하는 인원으로 인해 그 수가 불어났다.  

    

 오전 9~10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전남대 앞 충돌 상황 등 광주상황을 보고받고 있었고, 대응 병력이 2개 대대 600여명에 불과하여 추가 병력 투입의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 김재명 작전참모부장에게 1개 공수여단의 투입을 지시했다. 

오전 10 진종채 2군사령관은 “광주지역에서만 전남대 앞에서 계엄군과 학생들 간 충돌이 있다.”는 보고를 받고 현지 확인 및 작전 지도차 광주를 방문하였다.      


오전 11시경 계엄군은 독서실에 올라가 가만히 입시 준비하던 고교생들을 구타했고, 이유 없이 매를 맞은 고교생들 일부는 독서실에서 울고 일부는 독서실 밖으로 피신했다. 이때 대학생들이 시내로 몰려들었고, 모두가 함께 파출소에 돌을 던지거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지만, 경찰들의 진압에 따라 무너지거나 흩어졌다.     

 오전 11시 25분경 충장로 파출소에 군중들이 돌을 던져 유리창이 부서졌다.

 11시 30이 넘어서는 금남로 가톨릭센터 앞에서 학생 1,000여 명이 연좌농성을 벌이기 시작했다. 금남로에서 벌이는 시위를 전투경찰들은 저번의 진압 방식과는 다르게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그러자 학생들은 금남로에서 차츰 밀려났고 주변의 시위대를 규합하며 돌아다녔지만, 경찰의 계속된 진압으로 분산되고 말았다.     

 

 오후 2 학생들이 금남로에 다시금 모여들더니 오후 3시 경 수백여 명의 대오가 되어 시위에 나섰다. 시위대는 충장로 학생회관 부근의 전투경찰들에 맞서고 페퍼포그 차량을 불태우는 등 산발적인 시위를 계속 전개했다. 하지만 계엄군이 투입될 정도로 위력적인 시위는 아니었고 그 이전의 통상적인 시위수준에 지나지 않았기에 공수부대 시내 투입은 전혀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다. 

 같은 시각 김재명 작전참모부장은 정호용 특전사령관의 지정에 따라 11공수여단을 투입하기로 결정했고,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윤흥정 전교사령관에게 “다른 지역에는 시위가 없는데 광주에만 시위가 있으니 빨리 진압하라.”는 지시를 하였고, 정웅 31사단장은 “500M

D 헬기를 타고 전남대와 조선대로 가서 7공수여단 33·35대대장에게 경찰이 수세에 몰려 있다면서 16시에 병력을 투입하여 시위를 진압하되 도청 앞은 경찰이 차단하고 있으니 35대대는 금남로를 중심으로 좌우측 도로를 차단하고 33대대는 금남로에서 도청 방면으로 압축하여 시위대를 해산시킬 것.”을 명령하였다.   

    

오후 3 김재명 작전참모부장은 11공수여단을 수경사 작전통제로부터 해제함과 동시에, 11공수여단에 광주로 이동하여 2군사령부 작전통제하에 소요 사태를 진압하라는 작전명령을 시달하였다.

오후 3시 30분경 정호용 특전사령관 역시 11공수여단이 주둔하고 있는 동국대학교로 가 최 웅 11공수여단장에게 “광주에 7여단 2개 대대가 계엄군으로 나가 있으나 고전을 하고 있다.”면서 “광주에 가서 7여단을 도와 임무수행을 잘 하라.”고 지시하였다.


오후 3시 40 입은 제7공수특전여단 33대대(지휘:권승만 중령)와 35대대(지휘:김일옥 중령)가 유동 삼거리에 출동했다. 시위를 하던 학생들은 공수부대가 유동삼거리 쪽에 다가왔을 때부터 이미 대부분 잽싸게 빠져나간 상태였고, 현장에 있던 시민들은 이때만 해도 시위진압이 아닌 폭동적 무차별 진압과 살육이 일어날 줄은 생각도 못했다.

 공수부대가 얼룩무늬 횡렬을 지어 도청 쪽을 향해 다가가다, 지휘자가 '제자리 서, 정렬'이라 하자 군인들은 횡단 보도에서 일제히 멈춰서 대오를 가다듬으며 대기했다. 유동삼거리에서 몇 미터 떨어진 횡단보도였고, 북동 180번지와 누문동 62번지를 연결하고 광주제일고등학교 교문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오후 4 대열을 따라온 초록색 탑 차량 위에 있는 스피커에서 "거리에 나와 있는 시민 여러분, 빨리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빨리 돌아가십시오."라는 방송이 울려퍼졌다. 

 시민들은 당시 상황을 그대로 지켜보기만 하던 상황이었는데, 이런 방송이 있은 지 1분 정도 지났을까 말까 하는 짧은 시간이 지난 뒤, 군인들에게 "거리에 나와 있는 사람 전원 체포하라."는 충격적인 명령이 하달됐다. 동시에 도열해 있던 계엄군이 튀어나와 금남로와 충장로를 중심으로 남녀노소 구분없이 눈에 보이는 시민들을 모조리 구타하고 연행하기 시작했다. 

 계엄군은 진압 첫날부터 대검을 사용했는데, 전교사에서 작성한 '전교사 작전상황일지 1950. 5.18'을 따르면 대처 상황 중 수습 및 작전에 '7공수대 총검진압'이라고 적혀있고, 안기부가 1985년 작성했던 자료에도 '7공수여단 착검진압'이라고 써져있다.  

 본격적으로 국가가 국민을 상대로 한 전쟁이 시작되었고, 거리에는 지옥이 열렸다. 계엄군들은 대검을 구비하고 다니면서 M16 소총에 끼워서 붙잡은 시민들을 찔렀고, 심지어 도망가는 시위대를 향해 공수부대원이 칼을 던지기도 했다. 이로 인해 자상으로 죽거나 다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뒤이어 군용차량에서도 군인들이 쏟아져나와 시민들을 공격했다. 공수부대원들은 M16 소총을 등 뒤에 메고, 손에는 진압봉을 든 상태에서 진압대형을 유지하여 도청 방향으로 진군, 시위대를 압축해 나가다가, 돌격 명령이 내리면 함성을 지르며 시위대를 향하여 돌진하면서 진압봉으로 시위대를 타격하는 방법으로 시위대를 해산시켰는데, 군인들은 시위 학생뿐만 아니라 시위와 무관했던 일반 시민들까지 진압봉으로 무차별하게 구타하였고, 3∼4명이 한 조가 되어 시위현장의 주변 건물까지 샅샅이 뒤지며 진압 작전을 전개하였다. 그 과정에서 공수부대원들은 시위대와 시민들을 진압봉으로 가격하거나 군홧발로 밟기도 하였고, 대검으로 찌르고 도주를 방지한다는 이유로 거리에서 체포된 시위대의 상의나 하의, 혁대를 벗기거나 머리를 땅에 처박게 하는 등 기합을 주기도 하였다.  

   

 당시의 기록 두 개를 소개한다.   

   

“ 젊은 여성들의 경우 계엄군은 다짜고짜 블라우스 등을 찢어 걷어내거나 대검으로 바지와 치맛자락을 찢어 여자를 거의 나체 상태로 만든 다음 폭행을 가했는데, 방망이나 구둣발길이 날아가는 신체의 부위가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곳이었다... 젊은 여자, 그것도 옷 맵시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고 예쁘장한 여자일수록 가해지는 폭력은 더 심했고, 옷을 찢어발긴다든지 가격하는 신체 부위가 여체의 특정 부위들에 집중되었을 때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되겠는가? 백주겁탈, 폭력난행, 성도착적 무력진압 등의 표현들이 얼핏 떠올랐으나 그것 역시 광주 상황을 전하기엔 적절치 못하였다. [김충근(동아일보 사회부 기자), 금남로 아리랑]     

 “ 공수 놈들이 여고생을 붙잡고 대검으로 교복 상의를 찢으면서 희롱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60살이 넘어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아이고, 내 새끼를 왜들 이러요?' 하면서 만류하자 공수놈들은 '이 씨팔 년은 뭐냐? 너도 죽고 싶어?' 하면서 군화발로 할머니와 배와 다리를 걷어차 할머니가 쓰러지자 다리와 얼굴을 군화발로 뭉개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여학생의 교복 상의를 대검으로 찢고 여학생의 유방을 칼로 그어 버렸다. 여학생의 가슴에서는 선혈이 가슴 아래로 주르르 흘러내렸다. [박남선, 피고인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오후 4시 30분경 최 웅 11공수 여단장이 여단 작전참모와 61대대 1 지역대 병력을 선발대로 하여 성남비행장에서 광주로 출발하였다.      


오후 4시 40분경 이 사건은 김실록 5.18 광주민중항쟁(창작시대사)에 실린 영택 동아일보기자의 기록을 옮겼다. 

“ 11대 군용트럭 대열 맨 마지막 차량 위에는 22~23세가량의 처녀인 듯한 여성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수모를 당하고 있었다... 하얀 색 투피스 스타일의 윗옷은 피투성이가 된 데다 갈기갈기 찢겨진 채 옷을 입었다기보다는 젖가슴이 보일 정도로 걸쳐져 있었고 아랫도리는 완전히 벗겨진 채였다. 아가씨는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고 있었다. 처녀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치부를 가리기 위해 두 다리를 소아마비 환자처럼 구부리고 있었다. 발아래에는 그녀가 입었던 팬티며 스커트가 피로 얼룩진 채 함부로 버려져 있었다... 그녀는 차량 옆에서 군홧발로 채이고 진압봉으로 두들겨 맞아 쓰러져 있었다. 그러자 군인들이 '이년 봐라'하면서 옷을 붙잡고 일으키다 옷이 찢겨져 버렸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군인들이 다시 '쌍년 올라가'라고 욕지거리를 하며 군홧발로 걷어차자 차 위로 올라갔는데, 또 다시 발길질로 군인들이 그녀를 맞았던 것이다. 윗옷마저 거의 찢겨져 완전히 나체 상태로 바뀌기 직전이었다. 

 이때 한 40대의 남자가 하얀 가운을 들고 나와 이 아가씨에게 던져 주려다 군인들에게 붙잡혔다. 공수부대원들은 이 남자에게도 군홧발과 몽둥이 세례를 여지없이 가했다. 그는 바로 옆에 있는 서석병원 사무장이었다. 병원장 김상수(45) 박사로부터 가운과 팬티를 구해다 주라는 지시를 받고 병원 간호사의 것을 들고 나왔던 것이다. 16시 45분쯤이었다. 이 같은 광경은 행인은 물론 이 건물 저 건물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 보고 있었다. 

 시민들은 살기등등한 공수부대원들의 행패를 이미 겪었거나 눈으로 직접 목격했던 터라 감히 나와서 만류하거나 제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공수부대원들의 만행에 대한 탄식은 자신도 모르게 이 입 저 입에서 튀어나왔다.... 한 마디, 두 마디가 모여 군인들의 귀에도 들렸음인지 그들은 병원 사무장이 던져주려 했던 가운을 홱 던지며 "입어"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해 비틀거리며 얼굴을 감싼 채 군인들의 무리 속에서 빠져 나와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오후 5 11공수여단 61대대 잔류 병력과 62·63대대가 청량리역에서 열차편으로 광주로 출발하였다. 

 한편, 같은 시각 정웅 31사단장은 2군사령관-전남북계엄분소-31사단의 지휘계통을 따라 '작전명령 제1호'를 선포하여 공수부대원들에게 시내로 투입될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④ 5월 19(): D+1     


 19일 아침의 광주는 전날인 5월 18일의 잔혹한 진압으로 시위가 진압됨으로써 겉으로는 평온을 유지하고 있었다. 

 평일이었기에 회사와 관공서는 문을 열었고, 초, 중, 고교에서도 정상 수업이 이뤄졌다. 정부는 철저히 광주지역을 봉쇄하고, 광주 이외의 다른 곳에서도 보도를 차단하였기에 평상의 일상이 시작되고 있었다. 하지만 광주시민들은 전날의 충격과 분노에 휩싸여있었다,    

 

 오전 9 전날의 충격과 분노에 마음이 들끓고 있던 시민들이 금남로로 속속 모이기 시작했다.

 오전 10 어느듯 3,000 ~ 4,000여 명이 군중이 집결하여 경찰, 군인과 대치했다. 시위대에는 학생도 있었지만, 전날의 계엄군의 폭력 소식이 시민들에게 전해지면서 분노한 시민들이 시위에 가세해 일반 시민들의 비중이 눈에 띄게 늘었다.  

 경찰과 군인들이 최루탄을 쏘면서 제압하려 들자 사람들은 합심하여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맞섰다. 시위군중은 가톨릭센터를 중심으로 관광호텔과 광주은행 앞을 거쳐 전남도청 방면으로 진출하려 애썼다. 

 공수부대는 전날과 마찬가지로,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 잔인하게 진압작전을 실시했다. 5.18 때 공수부대가 대검뿐만 아니라 화염방사기까지 시위진압에 동원했다는 주장과 증언이 꾸준히 제기되어왔지만, 1995년 검찰은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화염방사기 사용설을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박종규 당시 3공수여단 15대대장의 체험기와 2007년 국방부 보고서에는 당시 공수부대가 화염방사기를 사용했다는 내용이 있다. 

  시위군중은 "비상계엄 해제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김대중을 석방하라"는 구호를 외치고 애국가와 정의가 같은 노래를 부르며 서로를 응원했으며, 대형 화분·보도블록·공중전화 박스·교통 철책 등으로 바리케이트를 치기도 했다. 

 제11공수여단 61~63대대는 교착상태가 계속되자 시내에서 시위 군중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격을 가했다. 시위대가 안 보이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였는데, 군인들은 때려 팰 대상이 없었기 때문에 대신 아무 데나 뒤져서 보이는 시민을 패고 끌고 갔다. 시민들은 군인들을 피해서 주변 상가, 건물, 골목으로 숨어들어 갔다. 군인들은 3~4명씩 무리를 지어 다니며 끝까지 추격에 나섰다. 

 군인들은 잡힌 사람들을 곤봉과 총검을 휘둘러 피투성이로 만들었으며, 옷을 벗겨서 팬티만 남긴 채로 끌고 가기가 부지기수였다. 어떤 젊은 남매는 멀쩡히 길을 지나가다가 공수부대원들한테 얼굴에서 피를 흘릴 만큼 두들겨 맞았다. 학원이 많아 학원가 거리라고도 불렸던 금남로 1가 YWCA 건물 옆길에서 두 여인이 걷고 있었는데, 공수부대원들은 그 중 20대로 보이는 여자를 갑자기 진압봉으로 때렸고, 다른 여자가 항의하자 마찬가지로 진압봉으로 때렸다. 고시학원에서 나오던 학생들이 그 광경을 보고 '우~' 야유를 퍼붓자, 공수부대원들은 그 학생들 까지 두들겨 팼다. 학원 안에 있던 학생들도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며 야유를 보냈고, 그러자 이번엔 학원 안으로 들어가서 조경숙 씨를 비롯한 수강생 50명을 진압봉과 개머리판으로 두들겨 패고, 최용범 등 10명은 밖으로 끌고 와서 밖에 있던 공수부대원들과 함께 두들겨 팼다. 

 진압이 계속 될수록 계엄군의 진압은 점점 도를 넘어서서 연행한 여성들을 상대로 성폭력 등의 성범죄를 저지르거나 여관을 습격해 직원은 물론이고 투숙객까지 잡아갔고, 자신들의 소행이 눈에 띌 것을 염려해 주변 건물들을 향해 "문을 닫고 커튼을 쳐라. 내려다보면 쏴버리겠다"는 협박도 서슴치 않았다. 또, 구경을 하거나 자신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건물 안에 있는 자라 할지라도 예외 없이 쫓아가 폭력을 행사했다. 이렇게 되니 경찰 간부조차도 "제발 집으로 돌아가라. 공수부대에게 걸리면 다 죽는다"고 울먹거릴 정도였다. 

 어느 듯 점심때가 되어서 시위는 거의 해산되고 거리는 다시 침묵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금남로와 충장로는 어제처럼 다시 공포 분위기에 휩싸였고, 상가, 회사, 관공서들은 일제히 문을 닫고 직원들을 내보냈다. 그러나 강경한 진압은 오히려 시위에 참가하는 시민들의 수를 더욱 늘어나게 했다. 


오전 11 계엄군은 소위 한 사람이 시민들 돌에 부상을 입자, 시민들이 보이면 무차별로 구타를 했다. 

11시 25 공수부대원들이 동구청 민원홀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2명을 잡았고, 구청 변소 앞에서 8명이 진압봉과 전투화로 때렸다. 11시 34 동구청 앞 도로에서 머리가 길고 젊기만 한 사람은 무조건 잡아서 허리띠를 빼앗아 차창 옆에 던진 뒤, 엎드리게 해서 진압봉으로 무차별로 갈겨댔다. 일부 시민은 머리에서 피가 흘러 윗옷이 빨갛게 됐다     


 정오 12 공수부대가 점심 식사를 위해 철수하자,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할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오후 1시 30 점심 식사를 마친 수많은 군중이 거리를 가득 채우자, 경찰들이 최루탄을 쏘며 진압에 나섰다. 

 젊은 사람들은 물론이고, 중년와 노년, 부녀자, 노동자들도 쉽게 눈에 띄었고, 시위군중은 오전에 비해서 더욱 대담하고 과격하게 투쟁했다. 경찰들이 최루탄을 쏘며 진압에 나섰지만 역부족이었고, 시민들은 돌멩이와 화염병을 던지며 덤볐다. 

 가톨릭센터 앞에서는 기독교방송 취재차량이 불에 타는 채로 경찰 저지선을 향해 다가갔고, 근처 공사장의 기름통도 불에 타는 채로 경찰 저지선에 부딪혀 굉음과 함께 불길을 뿜어냈다. 시민들은 가톨릭센터 옥상에 군인들이 있음을 알아내고 이들을 공격하기도 했다. 한편, 하늘 위로 헬기가 나다니며 해산을 종용하는 방송을 하자 분노한 시민들이 헬기를 향해 울분을 토해내기도 했다.     

 

 오후 2시 30 계엄군이 점심 식사를 마치고 진압 작전을 시작했다. 군인들은 오후에 더욱 잔인해졌는데, 진압에 투입된 제11공수여단 61, 62, 63대대와 제7공수여단 35대대는 금남로에서 바둑판식 분할점령 방식으로 시위대를 해산시키는 한편, 다이아몬드형으로 진압 대형을 짜고 금남로를 향해 진격하면서 보이는 족족 시민들을 때려잡았다. 

 M60 기관총을 장착한 장갑차가 시위대를 향해 돌진했고, 시민들은 급히 대피했으나 미처 피하지 못하고 가톨릭센터 내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계엄군에 의해 잔인한 폭행을 당했다. 

     

오후 3시경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앞, 운집한 시민들이 소방서 부근에 진을 치고 있던 공수부대원들에게 돌을 던지자, 공수대원들이 달려오면서 공중을 향해 화염방사기를 쏘아 엄청난 가스가 뿜어져 나왔다. 

    

 오후 3시 40 예비병력으로 남아 있던 제7공수여단 33대대까지 투입되어 다른 병력들과 함께 거리마다 무리한 진압작전을 진행했다. 

 시민들은 필사적으로 계엄군에 저항했으며, 칼이나 각목 등 각종 무기들을 사용하거나 거리의 물건들로 바리케이드를 만들었다. 또 중장년들이나 부녀자들이 보도블럭을 깨면 그 조각들을 젊은이들이 던지는 방식의 협업도 이루어졌고, 공사판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연장, 각목, 쇠파이프 등을 시위군중에게 흔쾌히 제공해주기도 했다. 마침 휴교령이 내려져 귀가하던 학생들도 대거 시위대열에 동참하였다. 그러나 계엄군의 계속된 진압으로 금남로로부터 밀려났다.

 금남로로부터 밀려났어도 시위는 계속되었다. 금남로에서 밀려난 군중은 마치 한쪽을 치면 다른 쪽이 솟아오르는 두더지 게임을 하는 것 처럼 광주시를 돌아다녔다. 충장로, 적십자병원, 광주공원, 광주천, 광주일고, 현대극장, 양동시장, 공용버스터미널, 대인시장, 전남여고, 중앙국민학교, 문화방송, 녹두서점, 노동청 등 수많은 장소에서 시위대가 있었다. 시민들은 적극적으로 시위에 나섰고 보다 공세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소수의 공수부대원들의 경우에는 시민들에게 반격을 당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시민들의 시위는 마치 싸우다 죽겠다는 듯이 점점 열기를 띄어갔다. 시위대열은 시내 주위 곳곳에 포진하며 경찰, 군인들과 대치했으며 충돌 또한 쉬지 않고 일어났다. 가장 치열했던 곳 중 하나는 공용터미널 부근에서였다. 치열한 시위 도중 한 여성이 "나는 공산당도 아닙니다. 난동자도 아닙니다. 단지 선량한 광주시민의 한 사람일 뿐입니다"라고 외치며, "우리 모두 나섭시다. 학생들을 살립시다. 계엄군을 물리치고 우리 스스로 광주를 지킵시다"라고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했다. 그러자 수많은 군중들이 모여들었고 계엄군이 이를 진압하러 나서면서 한바탕 난전이 벌어졌다. 이 시위 도중에 수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입고 연행되었는데 특히 터미널 내 지하도로 피신한 사람들의 피해가 극심했다. 이들은 몽둥이로 두들겨 맞거나 대검에 무참히 찔려 심각한 상해를 입었다. 계엄군은 여전히 야만스러운 방식으로 시민들을 대했는데, 진압봉과 대검은 기본이었고 온갖 가혹행위들이 시민들에게 저질러졌고, 1시간 즈음 지나자 종국에는 시민들을 향해 발포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금남로의 시위는 잦아드는 듯 보였지만, 전과는 달리 시위대는 쉽사리 무너지지 않았다.     

 

오후 4시 50분경 광주고등학교 앞에서 최초의 발포 희생자가 발생했다. 시민들과 장갑차가 충돌했는데, 시민들이 장갑차에 불을 지르려고 하자 안에 있던 공수부대원이 총을 난사했고, 이 일로 조선대학교부속고등학교 3학년생 김영찬이 손과 대퇴부에 3발을 맞고 쓰러졌다. 시민들이 그를 도우려고 다가가는 사이에 장갑차는 달아나버렸다. 

 오후 5시경 두 번째 사망자가 발생했다. 그는 공사장 막노동일을 하던 김안부씨로 일하는 와중에 광주공원에 들렸다가 계엄군의 무자비한 폭력으로 인해 살해당했다. 시체는 전남대병원 영안실에 안치됐고 부인인 김만복씨는 이 사실들을 다른 사람들에 전해 시민들은 사망자가 나왔다는 걸 알게 됐다. 당시 전남대 의대의 시체 검안서에서 뇌가 손상되는 '뇌좌상'과 머릿속에 총탄이 박힌 '맹관총상'이 기록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총격으로 인한 최초 사망자가 아닌가 하는 보도가 있었다.    

 

 오후 7 가랑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 시위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고속버스터미널에서는 1,000여 명의 군중이 시위대를 벌이다가 경상남도 표지판을 달고 있는 화물트럭과 대형 아치에 불을 질렀다. 시민들은 양동, 누문동, 임동, 고속버스터미널, 광주역 등의 지역에서 게릴라처럼 계엄군과 쫓고 쫓기며 시위를 벌였고, 이 과정에서도 많은 피해자가 발생했다. 

 오후 7시 30분경 최미자씨는 학동 남광주역 부근에 있는 친구집에 가고 있었다. 그러다 누군가 '장갑차다'고 외쳤고, 사람들은 골목길로 달아나고 최미자씨도 같이 달아났다. 장갑차를 타고 온 공수부대원들은 대검질과 함께 발길질을 했고, 그 중 최미자 씨는 오른쪽 겨드랑이와 젖가슴 사이 오른편을 대검에 찔려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금남로를 뺀 도로에는 시내버스와 택시들이 운행을 했는데, 공수부대원들은 그 차들을 세워 운전자들을 마구 두들겨 패는 일도 벌였다. 부상자를 병원으로 운반해준다는 게 그 이유였다. 경찰들이 공수부대에게 쫓기기도 했고, 동구청 건물 1층에서 전투복을 입은 경찰국 작전과장 안수택 총경은 시민을 몇 명을 방면해줬다가 공수부대 장교한테 '왜 폭도들을 빼돌리느냐'면서 두들겨 맞았다. 시위는 군이 경찰까지 공격하고 두들겨 팼던 이런 상황 속에서 자정 이전에 마무리가 되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텔레비전 방송에 광주의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 것을 알고 분노해야 했다. 


 밤 11시경 정웅 31사단장은 광주에 파견된 공수부대 지휘관들과 경찰 지도부를 불러모아 강경진압을 중단하라는 '31사단 작전명령 제3호'를 지시하였다. 하지만 전두환, 정호용 등을 포함한 신군부 실세들의 생각은 달랐고, 더 강경한 진압을 위해 제3공수여단과 보안요원들을 광주에 파견했다. 

 18일과 19일의 참혹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이날 광주시내 병원에는 계엄군에 의해 두들겨 맞고 대검에 찔린 환자들이 대거 병원으로 몰려들었기에 광주 시내의 병원들은 북적거렸다. 허나 안타까운 것은 그렇게 병원에 오게 된 부상자들이 계엄군의 진압 작전에 겨우 빠져나온 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⑤ 5월 20(): D+2     


 오전 7시 전날부터 내리던 가랑비가 여전한 가운데, 서울에서 출발한 제3공수여단(지휘관 : 최세창) 5개 대대가 광주에 도착하여 전남대학교에 짐을 풀었고, 이 날 전라남도교육위원회는 광주의 모든 중고등학교에 임시휴교 조치를 내렸다. 

 한편, 서울에선 국회 임시회가 예정되어 있었던 5월 20일 공화당과 신민당 양당의 국회의원들은 국회 앞에 모였지만 탱크까지 동원해 국회 정문을 막아서고 있었던 군인들과 실랑이를 벌인 끝에 결국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모두 돌아가야 했다.    

  

 오전 9시경 가랑비가 그치자 시민들이 점차 시내로 몰려들었지만, 오전의 시위는 전에 비해 소강상태였다.

 오전 10시경 대인시장에는 1천여 명의 시민들이 집결하여 계엄군의 폭력진압에 분노하며 시위에 나섰다. 상인들도 “이 난리판에 무슨 장사냐?”면서 시위 대열에 참여했다. 그렇게 모인 시위대는 금남로에서 계엄군과 충돌하며 시위를 벌였으나, 오전의 시위는 전에 비해서는 소강상태였다.     

 오전 10시 30분경 가톨릭센터 근처에서 30여명의 남녀들이 팬티, 브래지어 등만 걸친 채로 계엄군에 의해 온갖 기합을 받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시민들은 분노에 치를 떨었고, 여기저기서 시위대가 몰려들었다.


 오후 1시 점심 식사 후 오후에 들어서며 금남로 인근에 20만 명의 시위대가 모였고, 시위는 다시 무섭게 불타올랐다. 대학생과 고등학생, 대인시장의 아낙네, 중장년층, 노동자, 회사원, 유흥업소 종업원, 가정주부, 꼬마 손을 잡고 나온 할머니까지 다양했고, 동명동, 계림동 동문다리, 계림파출소, 조흥은행, 금남로 4가, 충장로 등에 이르기까지 수백 혹은 수천의 군중들이 집결하여 돌을 던지고 계엄군과 충돌했다. 

 공수부대원들은 여전히 시위대에게 잔혹한 진압방식을 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도망가지 않고 거리에서 농성하며 "차라리 우리 모두를 죽여라!"고 외치며 저항했다. 누군가 "시위를 위한 스피커가 필요하다."는 말에 그 즉시 40여 만원의 모금이 시민들 사이에서 모일 정도로 결집력도 대단했는데, 시위대는 그렇게 모인 돈으로 스피커를 사서 더욱 효과적으로 시위를 전개할 수 있었다. 시위대의 공수부대에 대한 반격도 빈번해져서, 소수의 군인들은 고립되어서 오히려 시민들에게 당했다. 그러자 군인들은 대규모로 모여 다니면서 진압작전을 수행해야 했다.

  시위는 치열하게 벌어졌다. 시민들은 계엄군의 진압이 있으면 흩어졌다가 그들이 사라지면 다시 모이기를 반복했다. 스피커를 마련한 시위대 사이는 가두 방송단을 조직하여 시민들의 투쟁을 독려했다. 사람들은 투석전을 벌이고 거리의 물건들로 계엄군을 막으며 맹렬하게 맞섰다. 인근 주택에서는 시민들이 물을 마실 수 있도록 대야를 갖다 놓았고, 시위대 속에서는 돌·각목· 철근 등을 리어카와 자전거 등을 이용해 실어날랐다. 어떤 사람들은 치약이나 물수건을 준비해서 최루탄 연기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기도 했다. 시위대는 이런 협동 속에서 계엄군을 밀어 붙었고, 계엄군은 금남로에서 여러 겹의 저지선을 구축하며 시위를 진압하느라 진땀을 흘리는 가운데, 어느덧 5시가 훨씬 넘고 있었다. 

 한편 같은 시각 계엄군들은 터미널에서 발생한 부상자를 실어나르는 택시기사들에게도 폭력을 휘둘렀고, 이에 대한 기사들의 분노가 다음 날 시위의 또 다른 주축으로 작용했다. 사실 이날 아침부터 택시기사들을 주축으로 한 운전기사들은 공수부대의 잔혹한 진압에 대한 불평을 쏟아내었는데, 멈추라는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거나 부상자들을 병원에 싣고 간다는 이유로 계엄군에게 곤욕을 치른 기사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분노한 운전기사들은 각자의 대형버스와 택시를 이끌고 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했다.    

  

오후 2시 20~30분경 광주역, 공용터미널, 서방삼거리에서 3공수부대가 화염방사기를 쏘아 여러 명의 시민들이 그 자리에서 타죽었다.     


 오후 5시 30분 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한 운전기사들이 각자의 대형버스와 택시를 이끌고 무등경기장에 집결했고, 일제히 금남로로 향하며 전조등을 켜고 경적을 울리면서 천천히 이동했다.     

오후 6시경 시위대는 그때까지 공수부대원들과 맞서면서 대치하고 있었고, 시민들은 "내 자식 살려내라, 살인마 전두환은 물러가라", 군은 38선으로 복귀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광주매일신문의 기자들은 사람이 죽는 광경을 보고도 신문에 싣지 못함을 한탄하며 일제 사표를 제출했고, 거리에서는 투사회보를 비롯한 시민들의 대안 언론들이 배포되었다.      


오후 6시 40분경 대형버스와 택시 행렬이 금남로에 도착했고, 시민들은 차량시위를 맞이하며 열광해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했으며, 몇몇 사람들은 차량안이나 위에 올라가 태극기를 흔들며 구호를 외쳤고, 서로 어깨동무를 하면서 기쁨을 나누기도 했다. 곧 차량과 사람들이 뒤섞여 시위 대열을 이루며 금남로를 가득 채웠다. 시위대는 대형버스를 앞세워 공수부대의 저지선을 돌파하고자 했다. 

 당시 금남로에 있던 제11공수여단 제61대대와 제62대대는 급한 대로 도로변의 대형화분대로 군중을 막아섰다. 그러고는 최루탄을 마구 쏘면서 시위대에 달려들어 차량의 유리를 깨고 차량안의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연행하는 방식으로 시위를 진압했다. 

 오후 6시 55분경 광전교통 소속 '전남 아 3706호' 버스가 가로수와 바리케이드를 들이받고 멈추자 계엄군들이 달려들어 10여 명을 두들겨 패 끌고갔다.      

 오후 7 차량시위대와 군인들 간의 격렬한 충돌이 벌어져 수십 명이 크게 다쳤지만, 아직 시위대는 공수부대의 저지선을 깨뜨리지 못했다. 

 한편 광주 시내는 물론이고 외곽 지역까지 시위로 달아올랐다. 시위대는 제봉로, 충장로, 학동, 방림동, 산수동, 지산동, 유덕동, 광천동, 화정동 등지에서 열띤 시위를 벌였고, 전남도청이 위치한 금남로를 목표로 점차 시내로 모여들었다.      


 오후 8시 40분경 시민들은 시민들의 시위와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탄압에 대해서 전혀 보도하지 않은 방송에 분노해 광주 MBC 건물에 화염병을 던졌고, 광주 KBS 건물에도 난입하여 방송을 중단시켰다. 또한 시민들은 광주 전역의 파출소와 소방서 등을 점거했고, 결국 광주시청도 시민들의 손에 넘어갔다. 

 결국, 이렇게 되니 시간이 갈수록 고립되는 것은 공수부대였다. 이들은 광주역과 전남도청 부근만 점령한 채 밀려들어오는 무수한 시민들의 분노를 막아내야 했다. 시민들은 조금씩 공수부대원들을 조여오며 공수부대를 몰아내기 위해 싸웠다.      


 밤 9시경 저녁이 깊어지며 시민들은 광주역과 전남도청 부근을 포위하고 다방면으로 간격을 좁혀나갔는, 먼저 전남도청으로 통하는 4개의 큰 길목으로 시위대가 자동차를 저지선으로 접근시키며 군인들을 위협했다. 

 밤 9시 5분경 경찰이 저지선을 뚫고자 오는 버스 1대 안으로 최루탄을 발사했고, 놀란 탑승자들이 버스를 뛰쳐나가는 바람에 버스가 저지선에 있던 함평경찰서 출신 경찰 4명을 치어죽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시위대의 과격한 공세와 진압 측의 실수가 함께 빚어낸 안타까운 사건이었는데, 놀란 사람들은 후에 가두방송에 나선 여성들의 도움으로 이 사고로 인한 경찰 부상자를 이송할 때 길을 비켜주었다. 그럼에도 시위는 계속 이어져 계엄군과 시민들은 쉴 새 없이 최루탄과 돌을 주고받으며 충돌했고, 수십 대의 차량이 불길에 휩싸일 정도로 격렬했는데, 역시 가두방송에 나선 여성들의 도움으로 시위대는 더욱 열기를 띠어갔다.     


 밤 9시 50분경 광주 MBC 건물이 끝내 불에 탔고, 광주역과 부근 도로에서는 광주역 전투라고 불리어질 정도로 시민항쟁의 정점을 찍고 있었다. 

 광주역에서는 제3공수여단이 방어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무수한 시위군중이 모여들어 광주역을 일제히 포위했다. 시민들은 역시 자동차를 이용해 저지선을 뚫으려 했다. 시위군중들이 사용한 방식은 트럭이나 버스의 가속기에다가 무거운 돌을 매달고 운전대를 고정시킨 채로 저지선에 보내는 것이 었는데, 자동차들은 광주역 앞의 분수대나 저지선에 부딪혀 멈췄고, 뒤에서 오는 차량이 앞에 부서진 차량들을 계속 들이박으면서 차량들은 뒤섞여 굉음을 내며 부서지고 폭발했으며, 심지어 휘발유 드럼통이 든 트럭을 실어보내 폭발시키기도 했다. 

 이제 계엄군이 시민들을 공격하는 상태에서 시민들이 계엄군에 맞서서 계엄군을 공격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른 것이었는데, 물론 계엄군도 그런 공격 와중에 잡힌 시민들에게 야만적인 폭력을 가했다.     


 밤 10시경 저지선을 뚫던 트럭 1대가 광주역 근처의 주유소를 들이박고 전복됐는데, 이 때 최초의 계엄군 사망자가 발생했고, 계엄군은 궁지에 몰린 군인들에게 최루탄에 더해 실탄까지 공급하면서 더욱 과격한 진압에 나설 준비를 하였다.     


 밤 11시 20분경 계엄군은 마침내 군중을 향하여 총기로 위협하며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 군대는 절대 국민에게 총을 겨누어서는 안됀다.”는 군인정신을 바로 가르치지 않은 결과로 일어난 군인이 국민에 행한 최초의 집단 발포였고, 군인에게 상명하복을 국가에 대한 충성으로 잘못 가르친 어긋난 군인 교육의 결과였다. 

 집단 발포는 자정을 넘겨 새벽까지 이어졌고, 이 과정에서 4명이 사망하고 6명이 부상을 당했다.  

    

⑥ 5월 21(): D+3     


 새벽 2 계엄군 측에서 광주로 통하는 시외전화를 끊어버렸고, 제3공수여단은 광주역에서 철수를 시작했다. 계엄군 측은 계엄군 철수 과정에서 일어나는 시위를 진압하기 위하여 20사단을 증파하여 광주로 내려보냈는데, 20사단은 광주에 도착하자마자 시민들의 거센 저항을 받았고, 제3공수여단은 시위대를 돌파하느라 2시간이 넘는 시간을 소요하여 새벽 4시 반에 철수를 완료하였다.      


 새벽 4시 반 광주역은 이처럼 새벽까지 이어진 치열한 공방전 끝에 마침내 군중들의 손에 넘어갔다. 

 시민들은 기쁜 마음으로 광주역에 진입하다가 죽은 채로 널부러져 있는 시신 2구를 발견했다. 시신을 리어카에 싣고 위에 태극기를 덮은 시위대는 크게 분노했고, 리어카를 시내로 끌고 가며 계엄군의 만행을 시민들에게 알렸다. 이것을 본 시민들은 더욱 격분하였다. 

 한편 금남로에서의 시위는 새벽에도 계속되고 있었고, 아침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전처럼 금남로로 모여들어 5만명 이상이 되었다. 그렇게 시민들은 21일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시위를 끝내지 않았다. 밤부터 새벽까지 광주 시내에서는 고함 소리, 비명 소리, 함성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오전 8시 45분경 마침 5월 21일은 부처님오신날로 공휴일이어서 아침이 다가오자 더욱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인산인해를 이룬 가운데, 광주역에서의 발포 사실이 전해지면서 시민들의 분노는 더욱 커졌고, 광주 시내는 온 거리가 시민들의 함성과 분노로 가득했다.

 결국, 같은 시간 20사단의 지휘 차량 14대가 시위대의 공격에 의하여 탈취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차량을 탈취한 사람들은 그 차량을 타고 시내로 나갔고, 일부는 아시아자동차 공장에 가서 버스, 지프, 군용트럭, 장갑차 등 260대여 차량을 탈취하였다.


오전 10 도청 앞 광장에 군용 헬기들이 왔다 갔다 하기 시작했고, 전남도청 근처 상무관에 주둔하던 제11여단 61대대 군인들에게 공개적으로 실탄이 지급되었다. 

 같은 시간 전남대학교 정문과 후문에서 전체 5만여 명의 시위대가 집결하여 공수부대의 철수와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시위 규모는 점점 커졌고, 지원을 나온 시민들과 차량들이 합류하여 계엄군을 압박했다.      


오전 10시 45분경 장경태 도지사가 경찰 헬기를 타고 "12시까지 계엄군을 철수시키겠다."며 시위대에 해산을 권유했다.

 상황은 점차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시민들의 숫자는 더욱 더 불어만 갔고, 일부 시위대는 광주 일원은 물론이고 전남의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계엄군의 만행을 알리며 시민들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시민들은 혼연일체가 되어 시위에 나섰다. 학생들과 시민들은 서로를 격려하며 시위에 동참했고, 동네에서는 동별로 시민들에게 음식을 제공하였다. "4.19 의거를 계승하라", "전남인은 궐기하라" 는 등의 내용이 실린 전단들이 살포되었으며, 시민들 사이의 모금도 이뤄졌다.      


 오전 11 10만에 달하는 민중이 금남로를 가득 채웠다. 시민들은 "비상계엄 해제"와 "전두환은 물러가라."는 내용의 플래카드를 차량에 달거나 직접 들고 시위에 나섰다. 차량들도 100여 대가 군중들 사이에서 시위에 동참했다. 그러는 동안 시민들과 계엄군 간의 사이 간격이 점차 좁혀져서 이제 격차는 몇십 미터가 채 지나지 않았다. 

 정오가 되자 도지사의 선무방송을 듣고 공수부대를 철수하겠다는 약속을 믿은 시민들은 정오가 되어도 계엄군이 물러나질 않자, 일부가 속았다고 판단해 흥분하기 시작했다.      


 정오 12 계엄군은 최루탄을 쏘고 총을 발포하여 시위대를 잡아들이고 해산시켰다. 이 일로 인해 최소 2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을 당했다. 총을 맞고 죽은 사망자 중에는 임신 8개월의 임산부였던 최미애 씨가 있었고, 그녀의 죽음으로 인해 그녀의 뱃 속에 있던 아이도 얼마 가지 않아 죽었다. 도청 앞에서의 집단발포로 시민들은 생존을 위해 경무장을 시작했다.      


 오후 12시 45분경 시민들은 "우리가 낸 세금으로 휴전선 지키라고 했더니, 국민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라고 주었다."면서 광주세무서에 불을 질렀고, 이어서 노동청과 광주 KBS, 광주 MBC 건물까지 방화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시민들은 세무소 내에 있던 예비군 무기고에서 카빈 소총 17정을 탈취하기도 했는데, 이미 군부대에서 실탄을 빼돌린 뒤라 빈 총에 불과했다. 

 한편 금남로의 인파는 전남도청 주변을 에워싸는 도로까지 꽉꽉 채우고 있었다. 계엄군은 시민들을 해산시킬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도청 주위의 방어에만 신경 쓰고 있었다. 시민들은 계속 계엄군과 마주보며 철수 구호를 외치면서 시위를 이어갔다. 

 시위 맨 앞에는 전옥주가 전날처럼 가두방송을 진행하며 시위를 이끌고 있었는데, 전옥주가 공수부대의 철수를 주장하던 그 때 누군가 계엄군 측과의 협상을 주장했다. 그러자 군의 사과와 시민의 명예회복이 이뤄진다면 타협하자는 여론이 군중들 사이에서 일기 시작했다. 이에 전옥주는 대치 중인 공수부대 지휘관들에게 가서 도지사와의 면담을 요구했고, 지휘관들이 이를 허락하면서 전옥주를 포함한 시민대표 4명이 도지사를 만나러 전남도청 안으로 들어갔다. 

 도청 안에서 시민대표들은 구용상 광주시장과 장형태 전남도지사를 만났다. 대표들은 장형태에게 “① 유혈사태에 대한 도지사의 사과, ② 연행된 시민들과 학생들을 즉시 석방하되 여의치 않으면 소재파악이라도 해줄 것, ③ 공수부대는 21일 정오까지 시내에서 철수할 것, ④ 전남북계엄분소장과의 협상을 주선할 것” 등을 요구했다. 

 장형태는 “①항은 적극 수용, ②항과 ③항은 자신의 소관이 아니지만 적극 건의, ④항은 반드시 성사되도록 주선하겠다.”고 답했다. 대표들이 협상 결과를 시민들 앞에서 직접 발표해 달라고 부탁하자 장형태는 이를 수락했다. 마이크가 준비되는 사이 구용상 광주시장은 시민들을 달래본다며 나갔다가 시민들에게 비난만 받았다. 그러나 장형태는 끝내 시민들 앞에 나오지 않았다. 도지사가 나오지 않자 시민들은 격앙되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시민들과 계엄군 간의 간격은 좁아졌고 상황은 점점 정면충돌로 비화할 조짐을 보였다.      


 오후 12시 55 협상은 깨어졌고, 시위대 대표가 나서서 다시 계엄군에게 퇴각을 요구했다. 그러나 계엄군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다시 일촉즉발의 상황이 되었다. 

 오후 12시 58, 시위대원들이 광성 관광버스 2대를 몰고 공수부대원들이 있는 도청광장을 들어와 분수대를 빙빙 돌았다. 그러자 공수부대는 즉각 사격을 가했고, 그 중 1대를 운전하던 기사가 즉사하고 버스는 분수대 옆에서 멈춰섰다. 그 직후 아시아자동차 공장에서 시민들이 탈취한 해병대용 장갑차 1대가 뾰족한 앞머리를 내세운 채 전속력으로 질주해 들어왔다. 공수부대원들의 대열은 황급히 흐트러졌다. 그렇게 대열을 무너뜨리고나서 장갑차는 유유히 도청 광장을 빠져나갔고, 이 와중에 계엄군 1명이 장갑차에 깔려 사망했다.      


 오후 1시 정각 도청 옥상의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러퍼졌다. 시민들이 애국가를 부르고 있는 그 순간 수백 발의 총성이 일제히 울러퍼졌다. 처음에는 공포탄인지라 사람들은 놀라 숨었다가 다시 나왔다. 그러자 이제는 진짜로 시민들을 향한 조준사격이 이루어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총탄을 맞고 쓰러지는 가운데, 저격수들은 '앉아 쏴', '서서 쏴', '엎드려 쏴' 자세로 금남로의 비무장 시민들을 향해 총탄을 마구 난사했고, 사방에 선혈이 낭자했다. 시민들이 동요하면서 금남로는 아수라장으로 변했지만, 발포는 10여 분 동안 이어졌다. 

 결국, 시위대는 무기를 구하려 했는데, 광주 시내에서는 이미 무기가 회수된 뒤였기에, 무기를 구하러 전남지역 각 방면으로 흩어졌고, 광주 외곽, 화순군, 나주시, 해남군, 영암군 등 시외 지역으로 진출해 경찰서와 무기고를 점거하고 무장했다. 당시 무기고 같은 장소들은 시민들이 찾기 쉬운 곳에 있었기에 조직적인 무기 탈취가 가능했다.      


오후 1시 10분경 일련의 사격이 끝나자, 1,000여 명의 시민이 다시 모여들어 금남로로 향했다. 그 중 5~6명의 청년들이 대형 태극기를 들면서 구호를 외치고 애국가를 부르면서 뛰쳐나갔다. 그러자 도청 주변의 건물에 숨어 있던 저격수들이 조준 사격을 가해 청년들은 모두 총을 맞고 쓰러졌다. 시민 몇이 뛰쳐나와 쓰러진 이들을 수습하자, 또 다른 청년 대여섯명이 태극기를 들고 뛰쳐나와 시위를 하다 쓰러졌다. 이후에도 똑같은 상황이 여러 번 펼쳐졌다. 그 때마다 사람들이 총에 맞아 쓰러져 갔다. 이 끔찍한 광경은 주변의 시민들이 뛰쳐나오려는 사람들을 뜯어말리고서야 멈추었다.    

  

오후 1시 30. 한 장갑차가 맨 위에 웃통을 벗은 채로 "광주만세"를 외치는 청년을 싣고 도청광장으로 돌진했는데, 계엄군의 조준사격으로 그 청년은 머리가 고꾸라지며 죽었다. 조준사격은 비단 시위를 하는 사람들에게만 가해진 것이 아니었다. 주변을 지나가던 사람이나 주변 건물에 있던 사람들 가리지 않고 조준사격을 하여 총에 맞았다. 

 전남대생 김광석 씨는 점심을 먹고 금남로로 나왔다가 친구가 총을 맞고 쓰러지는 걸 보았다. 김광석 씨는 친구를 병원으로 옮기려고 일으켜 세우다가 뒤이어 날아온 총탄에 가슴을 맞고 쓰러졌고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졌다. 

 충장로 입구 도심(Do-sim) 빌딩 5층에선 어린아이들이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내다보고 있었는데, 건물주 황호정 씨가 이를 막고 창문을 닫으려다 총탄 세례를 받고 숨졌다. 금남로 광주우체국 자리에 있었던 나라서적 창업주 역시 이 저격으로 서울대에 다니던 둘째 아들을 잃었다. 사실 이들은 그냥 창문을 열고 내다본 민간인들이었지만, 진압군들에게는 사진채증 우려가 있는 잠재적인 목격자 등등 어떤 식으로든지 시위대에 동조할 사람들로 비춰졌던 것이다. 

 계엄군은 캘리버50 기관총을 난사했고, 심지어는 헬기까지 동원하여 군중을 해산시키고자 총탄을 퍼부었다. 이렇게 전남도청 앞에서 벌어진 집단발포 등 21일에 발생한 계엄군의 발포로 최소 54여명이 사망하고 50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계엄군의 발포는 공수부대의 주둔지였던 전남대학교 앞에서도 벌어졌다.     


오후 2시경 국방부장관실에서 열린 회의에서 국방장관 주영복, 보안사령관 전두환, 수경사령관 노태우, 특전사령관 정호용 등이 참석하여 계엄군의 집단 발포와 총기 사용을 정당하기 위한 결정인 ,“ 5월 23일 이후 자위권 발동 폭도소탕 작전 의명 실시”가 의결되었다.     


오후 2시 15분경 광주 시위대 200여 명이 여러 대의 차량을 탄 채로 목포에 도착했다. 이들은 시가지를 행진하면서 연신 구호를 외쳤고, 목포 시민들의 궐기를 촉구했다. 

 목포는 김대중의 정치적 고향이기도 했고, 동시에 광주 다음으로 시민운동이 활발한 곳이었다. 그래서 목포 시민들은 여기에 호응하여 시위대를 형성했다. 몇몇 경찰들이 시위대를 막으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 동안 목포 지역 기독교청년회와 앰네스티 소속원들은 KBS목포에 들어가 대민 방송을 시도했고, 특히 목포 지역의 대표적인 사회운동가 안철씨의 주도하에 시위대를 이끌었으며, 저녁부터는 시위는 점차 과격해져 시청, 파출소, 세무서 등을 파괴했다.    

 

오후 3 화순군, 나주시, 해남군, 영암군 등 전라도 각 지역으로 가서 그곳의 민주화 운동가와 함께 무기를 탈취하여 무장한 광주 시민 시위대가 속속 광주로 돌아왔다. 

 시위대가 광주에 도착하여 얻은 무기를 분배하여 시민들을 무장시켜 시민군(市民軍)이 탄생했다. 

 처음으로 시민군이 광주에 출현한 것은 21일 오후 3시가 넘어서였다. 이 때부터 시위는 계엄군과 시민군의 대립으로 바뀌었다.  물론 시민군이 체계적인 훈련과 압도적인 화력을 가지고 있던 계엄군을 물리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럼에도 시민군은 전남대학교병원 옥상에 LMG 2정을 위협용으로 설치하는 등 계엄군을 물리치고자 나섰다. 교전은 저녁때까지 도청 근처, 전남대 의대 근방, 노동청, 공원, 금남로 등지에서 격렬하게 벌어졌다.

 한편, 이때까지도 각 언론사에서는 광주의 상황에 대해서 이미 인지를 하고 있었지만, 신군부의 압력에 의해 쓰여진 기사를 전혀 보도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보도되더라도 실상은 철저하게 가려진 채 보도되었다.      

오후 4시 30 국방부 장관실에 회의가 열려 군의 자위권 행사를 천명하는 담화문을 발표하기로 했다.

 이때까지 광주 시내 곳곳에서는 여전히 시민군과 계엄군의 시가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당연히 급조된 시민군들이 정예군인 공수부대의 전투력을 이기길 어려웠고 시민군의 피해가 막심했지만, 시민군은 처절하게 저항했다. 

 시민들의 이러한 유례없는 대규모 저항에 계엄군 지휘부는 계엄군을 광주 외곽으로 전환 배치하여 광주를 포위하여 진압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오후 5시경 계엄군이 광주 외곽으로 철수하였는데, 이 때 계엄군은 혹시 모를 시민군의 공격을 막고자 기관총을 사방에 난사하면서 퇴각하였고, 이 때문에 그 사격에 맞아 사람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으며, 심지어 계엄군의 차량에 치여 사망하는 사례도 있었다.

 이 때 계엄군은 경찰 및 도청 직원들에게는 따로 통보하지 않고 자신들만 빠져나갔는데, 뒤늦게 사태를 인식한 안병하 경찰국장이 이들에게 철수하라고 통보했고, 그래서 도청 직원들과 경찰들 특히 약 1,500여명의 전경 병력도 도청에서 빠져갈 수 있었다. 철수하던 전경 병력을 시민군이 포위한 적도 있었지만, 다행히도 시민군과 경찰들은 크게 적대감이 없어 큰 충돌 없이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었고, 계엄군이 물러난 저녁부터 시위는 점차 과격해져 시청, 파출소, 세무서 등을 파괴했다. 

 광주 외곽으로 철수한 계엄군은 KBS 광주방송총국 산하 비아송신소를 장악하고, 시민군에게 무기 반납 및 투항을 요구하는 선무방송을 내보냈는데, 특히 정부에서 제작한 대한뉴스를 보면 '빨갱이들의 폭동'으로 방송하고 있다. 

 광주 밖에서 살고 있거나 광주에 친지가 있는 광주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외치다 처참하게 학살당하면서 빨갱이로 몰리고 있는 안타까운 광주시민의 소식을 어떻게든 주위에 알리고자 했지만, 계엄 상황에 연일 민주화운동으로 인한 데모가 계속되고 군인들이 대학가를 봉쇄하고 있는데도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사건 당시 서울에서 한 택시운전사와 함께 광주로 동행 잠입해 현장을 취재했던 북부 독일방송 도쿄 지국 소속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와 헤닝 루모어가 사건의 진상을 세계에 알렸다.      

 한편 공수부대는 광주로 들어오는 고속도로와 지방도로 등 주요 진입로를 통제하였는데, 신군부가 광주에서의 시위가 더 이상 확산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고, 광주가 외부와 접촉하는 것을 막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3공수여단은 광주 동쪽의 남해안 고속도로와 호남고속도로를 차단했고, 7공수여단과 11공수여단은 광주 남쪽의 광주-화순 간 도로를 차단했으며, 20사단은 광주의 서쪽과 북쪽 부근의 광주-목포 간 도로를 차단했다. 이 외에도 국군통합병원, 505보안부대, 전투병과교육사령부, 송정리 군 비행장, 광주교도소 등의 중요 지역들도 삼엄한 경비가 이뤄졌다. 계엄군은 각 도로를 봉쇄하고 주변의 산간지역이나 농촌지역까지 통제하며 지나가는 차량이나 시민들을 막아섰다. 이 때문에 시민들은 계엄군을 피해서 몰래 광주를 오가야 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계엄군은 봉쇄작전을 시민들에게 제대로 통보하지 않았다. 게다가 시민들을 제지하는 방식도 폭력적이었다.   

 계엄군은 광주를 철저히 봉쇄했을 뿐만 아니라, 광주로 오가는 차량에 대해 사격도 실시했다. 이 때문에 전남 여러 지역을 누비다가 돌아오는 시민군들과 무고한 시민들이 피해를 입었다. 대표적인 피해를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광주 서구 백운동 효천역 부근에서는 20사단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효천역 부근에 있는 죽령산과 매봉산에 매복하여 통행하는 차량들에 무차별 사격을 가했고, 이 일로 박재영(25세), 왕태경(27세)이 목숨을 잃었다. 광주로부터 담양으로 돌아가려는 마을주민 차에도 총격이 가해져 임은택(35세)과 고규석(37세)이 살해당했다. 3공수여단이 주둔하던 광주교도소에서도 무수한 희생이 발생했고, 또한 교도소 부근을 지나가던 최열락(27세)과 김병연(18세)도 살해되어 광주교도소 부근에 암매장되었는데, 그뿐만 아니라 이전에 사라졌던 연행자와 실종자들도 주변에 암매장 당한 채로 발견되었다. 그들의 신원은 이명진(36세), 이용충(35세), 민병열(31세), 서만오(24세)으로 아마 광주교도소에 온 전후로 살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외에도 안병섭(22세)과 서종덕(17세)도 목숨을 잃었고, 또한 최연소 부상자도 여기서 발생했다.  

    

오후 7시경 놀랍게도 국영방송이나 마찬가지였던 KBS를 통해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타 지역에 최초로 알려졌다. 

 당시 KBS 보도국 편집차장이었던 장두원이, 군부의 위협에도 진실을 알려야 된다는 사명감에 "보안사의 승인을 받았다."고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기꺼이 보도를 승인해주어, 약 40분 정도에 걸쳐서 광주에서의 상황이 상세히 보도된 것이었다. 그 이후로 방송 종료 직전까지는 여러 방송사에서 광주의 상황에 대한 보도를 시작하였고 각 신문사에서도 호외를 돌리기 시작했지만, 계엄군이 각 언론사 데스크진들과 기자들에게 촌지를 돌리는가 하면, 진실을 보도하는 기자와 언론사주에게 고문을 하겠다고 위협하는 식으로 채찍과 당근을 병행하는 조치를 썼고, 따라서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던 국민들의 의심도 사그라졌다.


오후 7시 30 계엄군 측에서는 자신들의 집단발포와 총기 사용을 정당화하고자 계엄사령관 이희성의 이름으로 군의 자위권 행사를 선포했고, 동시에 각 공수부대원들에게 자위권 발동 지시가 하달되었다. 광주에 파견된 계엄군들에게 자위권 발동은 곧 합법적인 발포명령이었다.      


오후 8시경 광주 시내 곳곳에서 계엄군 잔여세력과 시민군 간에 시가전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시민군은 아무도 없는 전남도청을 장악했다. 

 전남도청 안에는 계엄군과 경찰이 버리고 간 물품들이 아무렇게나 버려진 채로 있었다. 시민군과 학생들은 그 물품들을 일일히 정리하고 분류하고 자기들이 사용했다. 또한 도청 내 상황실의 전화를 이용하여 광주 지역의 시민군들과 연락 체계도 마련하였다. 이를 통하여 광주 내부의 상황은 물론이고 계엄군의 동향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그 밖에도 사망자와 부상자 사진과 명단을 도청 부근에 붙여놓아 시민들이 볼 수 있도록 했고, 일반 시민들과 학생들도 받아들여 취사· 행정·수습위원회 지원·대민방송·홍보를 돕도록 했다. 

 헌데 시간이 흐를수록 도청을 드나드는 사람들 중에는 계엄군이 파견한 정보요원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이 목격되었다. 그러자 학생들은 상황실 출입을 통제하고 업무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증명서를 발행하여 돕겠다고 말하여 상황을 정리하였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움직임도 이어갔다. 


 ⑥ 5월 22(): D+4     


 18일부터~22일까지 나흘간 이어졌던 유혈사태가 끝나고 평온이 찾아온 금남로는 간간이 들려오는 총성을 제외하고는 조용한 가운데, 도청 내에서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하는 '학생수습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이 위원회는 전남대학교 3학년생 김창길을 위원장으로 하여 김종배 등 10여 명의 학생들이 참여했고 대민업무를 주로 맡았다. 

 이때 새벽부터 시민들이 계엄군을 몰아내고 광주를 되찾았다는 승리의 쾌감으로 흥분하여 거리로 나와 광주 거리는 들뜬 시민들로 붐비고 있었는데, 공권력의 부재 상태에도 불구하고 학생수습위원회와 시민들은 시민자치공동체로서 나름대로의 인간애와 질서를 실천하며 서로를 도왔다. 

 먼저 학생수습위원회와 시민들은 18일부터 21일까지 이어진 치열한 충돌로 인해 어지러워진 거리를 자발적으로 청소했는데, 22일 새벽만 하더라도 부서지고 불에 탄 차량들과 바리케이드 잔해, 핏자국 등으로 거리가 얼룩져 있던 것을 청소도구를 가지고 나와 쓰레기들을 쓸고 닦았고, 크레인을 가지고 와 전소된 차량들을 끌어내어 처리했다. 


 오전 7시경. 시위대원 중 하나였던 김원갑은 시민군들이 머무르고 있던 광주공원으로 달려가 공수부대와 맞서려면 대열의 정비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시민군들이 여기에 동의하면서 김원갑을 비롯한 몇몇 청년들이 주도적으로 나서 시민군을 재배치했다. 또한 시민군이 징발하여 사용하던 78대의 차량도 지역별로 나누어 순찰, 중간 업무연락, 환자 수송, 시체 수송 등의 구체적인 임무를 하달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시민군들은 광주 시내 곳곳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수십 명씩 조를 짜서 차량을 지원받아 광주 각 지역을 방어했으며, 200여 명의 병력은 도청을 경계하게 됐다. 

 다음에는 기동순찰대가 조직되었다. 기동순찰대는 말 그대로 무장 상태에서 차량을 타고 다니며 계엄군의 공격을 막는 역할을 하는 부대였다. 이들은 외곽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상황을 살폈고 광주를 방어하는데 힘썼다. 이렇게 조직된 시민군에 참여한 사람들은 대부분 노동자, 학생 등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이들은 혹시나 광주 시민들에게 불안을 줄까 싶어서 조심스레 행동하였다. 도청에서는 혼잡한 상황을 극복하고자 학생들과 청년들이 나섰다.      


오전 8시 10 전남도청 2층 부지사실에서 정시채 부지사 등을 포함한 간부들과 직원들, 그리고 광주 지역의 민주인사들과 유지들이 만남을 가졌다. 정시채 부지사는 10여 명의 지역 인사들에게 사태수습에 나서 달라고 부탁하며 계엄사령부와의 협상을 통한 사태수습을 제안했다. 

 9 시민들은 점차 전남도청 앞 광장으로 향했고, 도청 앞 광장에 모여 오고 가면서 삼삼오오 서로 이야기를 나누거나 투사회보를 읽으며 대략의 정보를 파악하기도 했다. 


10 금남로와 도청광장은 전날처럼 다시금 인파로 채워졌고, 시민들은 무언가 희망적인 소식이 있기를 기다렸다. 

10시 30분경 군 측의 헬기가 나타나 시민들을 폭도로 몰고 자수를 종용하는 내용의 방송을 하는 한편, 시민들에게 총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가 질서를 회복하자는 내용의 전단을 뿌려 시민들을 공분케 했다. 시민들은 제대로 된 수습방법에 대한 언급도 없이 무조건 무장을 해제하고 항복하라는 군의 명령에 심한 거부감을 느꼈고, 그 사이 시민군의 조직화가 이루어졌다.      


 정오 12 YWCA 직원들과 송백회 회원들이 도청 옥상의 국기게양대에 검정색 천으로 조기를 만들어 달았고, 천으로 3천여 개의 검은 리본도 만들어 시민들에게 나누어줬다.


오후 12시 30분경 시민군과 15명의 지역 인사들이 모여 '5.18 수습대책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에 참여한 사람은 이종기, 이기홍, 천주교 광주대교구 조철현 비오 신부, 최한영, 윤영규, 신용순, 장휴동, 홍남순, 박윤종, 천주교 광주대교구장 윤공희 빅토리노 대주교 등 신부, 목사, 변호사, 기업주, 관료, 교수 등의 다양한 출신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5.18 수습대책위원회 수습위원들은 이종기를 위원장으로 하고, 토론 끝에 “① 사태수습 전에는 군 투입하지 말 것 ② 연행자를 전원 석방할 것 ③ 군의 과잉진압을 인정할 것 ④ 사후 보복을 금지할 것 ⑤ 상호 책임을 면제할 것 ⑥ 사망자에 대해 보상할 것 ⑦ 이상의 요구가 관철되면 무장을 해제하겠음”이라는 내용의 사태수습을 위한 7개 조항을 결의했다. 


오후 1시 30 5.18 수습대책위원회 수습위원들이 상무대의 전남북계엄분소로 가서 소준열 분소장을 만나 협상을 진행하였다. 하지만 소준열 분소장은 상부와의 논의가 필요하다면서 협상에 소극적으로 임했다.

 결국, 첫 번째 협상은 성공적이지 못했지만, 수습위 위원들은 무기 회수를 시작했는데, 이때 광장에서는 시민들이 도청에서 발표한 사망자 명단과 인적 사항을 발표할 때마다 모여들어 혹시 자신의 가족이나 친인척이 있을까 확인하고 있었다. 


 오후 3 도청 앞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시민궐기대회가 열렸다. 

 사람들이 도청 광장에 앉아 있던 중에 한 사람이 일어나 자신이 목격한 바를 시민들에게 알렸는데, 그것을 시작으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차례로 올라가 18일 이후부터 자신이 겪은 이야기들을 하나씩 풀어놓았다. 마이크도 없이 이뤄지는 상황이라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시민들은 열심히 경청하고 울고 웃으며 박수를 쳤다. 

 3시 48분경 한창 시민궐기대회가 진행 중이던 광장에 태극기가 덮혀진 관에 들어간 시신 18구가 운구되었다.      


오후 4~5시경 국군통합병원 인근에서 제20기계화보병사단 소속 계엄군이 “국군통합병원을 확보해 폭도들의 접근을 막겠다.”는 명분하에 갑자기 뜬금없이 주변의 민간인들에게 무차별 묻지마 총기난사 학살을 시작했고, 그러자 시민군들이 응사했는데, 이 때문에 군인 한명이 사망하고 민가에 살거나 길을 지나가던 민간인들이 총에 맞아 8명이 목숨을 잃었다.      


 오후 5시 40분경에는 23구가 다시 광장 내로 운구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분위기는 과열되었고 더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느새 도청광장과 금남로에는 10만의 시민들이 모여들어 궐기대회에 참가하였고, 대회는 자정을 넘어 다음날까지 이어졌다.


 이날 힌츠페터 기자는 2차 잠입 후 보강 취재하여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독일 본사에 보냈으며, 이 다큐멘터리는 80년대 독일에서 유학하던 천주교 신부들이 녹화해서 국내에 들여와 당시 광주의 참상을 고발하는데 큰 역할을 했고, 이 때문에 그는 푸른 눈의 목격자라는 이명을 얻게 되었는데, 이후 위험을 무릅쓰고 취재에 나선 위르겐 힌츠페터는 대한민국의 언론상인 송건호 언론상의 2회 수상자이자 현재까지도 유일한 외국인 수상자가 되었다.      


⑦ 5월 23(): D+5


새벽 00:40 계엄군이 랜턴을 잠깐씩 비치며 조선대 뒷산의 지원동 숙실 부락 냇가를 지나가다 시민군과 마주쳐 총격전이 벌어졌다. 

 숙실부락에서 계엄군 본부까지 약 1백50 미터 정도의 거리였고, 시민군중 숙실마을 6조와 무등육아원의 7조와는 약 70-80미터 거리밖에 안 됐는데, 그곳에 매복해 있던 6조와 7조가 계엄군을 향해 사격을 했고, 이에 다른 조 까지 발사하기 시작하자 계엄군 역시 총을 쏘았던 것이다. 

 양쪽에서 불꽃 튀기는 접전이 벌어졌는데, 칠흑같은 밤이었지만 양쪽에서 날아온 총탄에 의해 마치 여름 날 반딧불이 날아든 것처럼 주위가 훤했다. 약 20-30분 정도의 격전이 있었고, 배고픈다리까지 계엄군이 쏜 총알이 날아와 다리 난간에 구멍이 뚫렸다. 한참 후 어느 쪽이 먼저 사격을 중지했는지 모르지만 총성이 그쳤다.     

새벽 01:00 시위대가 해남에서 광주 방면으로 나가다 옥천면 소재 우슬재에서 길에 매복중이던 계엄군 1개 중대에 포위되었는데, 계엄군이 M16과 LMG를 난사하고 수류탄 투척해 시위대 20명 이상 사망하고, 다수 부상자와 생존자 몇 명만 빠져나갔다.     


 새벽 5시 20 광주 국군통합병원에서 공수부대대원에게 칼에 찔려 실려온 전재서 씨가 사망했다. 

 전재서씨는 전날인 5월 22일 밤 공수부대원에게 연행되어 헬기에 실려 가서 전교사 연병장에 내리던 중, 왼쪽 귀 뒷부분을 칼로 찔렸고, 헬기로 곧바로 광주 국군통합병원에 후송됐는데, 몇 시간 뒤 결국 죽었다고 한다. 전교사 전투발전부장 김순현 준장과 전교사 작전참모 백남이 대령 등 현장에서 있던 계엄군이 직접 목격하고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에다 “당시 공수부대원의 행동을 제지하려 했는데 술냄새를 풍기며 자신한테 대들었다.”고 증언했는데, 당시 공수부대원들의 군기가 얼마나 개판인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확인해 보니 전재서 씨는 22일에 국군통합병원에 도착하고 23일 새벽 5시 20분에 죽었는데,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확인해 보니 우측 두부(귀 뒷부분)에 찔린 상처가 있었다고 한다.     

새벽 6. 지난 날부터 시작된 궐기대회가 밤새도록 계속되고, 시외곽지역에서 들려오는 간헐적인 총성 때문에 여전히 긴장감을 씻어버리지 못하는 가운데, 고등학생들을 비롯한 수백여 명의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솔선수범하여 거리를 청소하였다. 

 거리가 깨끗해지자 시장 주변에서는 아낙네들이 길가에 솥을 걸고 밥을 지었고, 그렇게 지은 밥은 거리를 돌아다니던 시민군들에게 무료로 제공되었으며, 이렇게 광주시가 안정 되찾아가는 가운데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불탄 자동차의 잔해와 시체는 길옆으로 치워진 채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학생들은 장례반, 총기회수반, 차량통제반 등으로 나뉘어 수습에 들어갔는데, 장례반은 시체 43구가 안치돼 있는 도청 뒤뜰에 사망자 가족들의 신원을 확인하고 안으로 들여보냈고, 가족들은 사망자 중 신원 미확인자를 찾기 위해 우왕좌왕하며 아우성을 쳤다.

 한편, 도청을 중심으로 한 빌딩 앞에는 전날보다 더 많은 대자보가 나붙기 시작했고, 이날 처음으로 시민군이 전일빌딩 앞에 민주시민 강령'을 공고하면서 시민군이란 말이 대중화되었다. 

 시민군이 발표한 4개항으로 된 민주시민 강령에는 “① 시민은 시민군을 믿고 적극 협조합시다. ② 시민군은 위장된 계엄군 및 불순분자를 주의합시다. ③ 질서회복에 힘씁시다. ④ 평소 생활로 복귀합시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월간조선, 1985. 7)     

 같은 시간 해남. 안동리 군부대 앞 국도상에서 시위버스 1대가 군의 총격으로 전복해 다수가 사망하고 중경상 입었다.     


새벽 6:10 계엄군이 해남 우슬재 고개에서 광주로 가던 시위대 7,8명을  총격해 시위대 2명을 검거되고, M1 1정과 카빈 실탄 55발 노획되고, 나머지는 부상을 당한 채 도망쳤다. (계엄사 상황일지)     

  당시 현장에 있었던 강석신의 진술에 의하면, “ 당시 시위대 7, 8명이 광주로 가려고 트럭을 타고 가던 중 해남 우슬재에 도착했을 때, 용변을 보기 위해 잠시 차를 세우고 근처 도로변에서 용변을 보고 있는데, 고개 마루에서 청년 1명이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며 '동지들! 어서 오시오'라고 소리쳤다. 무슨 일이 있나 보다고 생각하고 그쪽으로 가려는데 일행 중 누군가가 '저 사람 사복을 입었으나 총도 M16이고 군인인 것 같다. 아무래도 군 첩자일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살펴보니 머리에 수건을 둘렀으나 머리가 짧아 보여 더욱 의심스러웠다. 어찌할 바를 몰라 망설이던 나는 트럭 있는 곳으로 갔다. 그때였다. 오른쪽에 있던 산에서 총알이 빗발치듯 날아왔다. M16 자동소총 소리였다. 나는 재빨리 적재함으로 올라가 머리를 감싸고 엎드렸다. 총탄이 차를 뚫고 들어와 오른쪽 발가락을 관통했다. 운전을 하던 선배가 차를 돌려 군인들의 사정거리를 벗어났으나 모두 부상당한 뒤였다. 나는 강진 도립병원으로 갔다. 그 병원은 부상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가 공격당한 우슬재에서 다른 차량도 여러 차례 습격을 받아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것이라고 했다." 라고 증언했다.      


오전 7:00 금호고교 부근에서 공수부대 3명이 학생 2명과 할머니를 살해하고 도주했고, 계엄사는 이 공수부대 3명을 시민군으로 발표했다. (광주 민주 항쟁을 기록한 황석영과 전용호의 저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에서는 ”정부가 이 사건을 시민군의 행위로 책임 전가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같은 시간 해남. 복령리 국도상에서도 군과 총격전이 벌어져 시위대 1명이 사망했다.      


오전 08:00 담양으로 나가던 시위대가 교도소의 경비계엄군에 의해 저지당해 교도소 앞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교도소는 시외로 나가는 분기점에 자리하고 있어 시위대가 교외로 오갈 때마다 교도소 경비계엄군에 의해 차단당하면서 공격을 받곤 했는데, 이 사건에서 시민 3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했다. 특전사 전투상보는 “1/2톤 탑승한 폭도 6명이 기관총을 난사하면서 교도소로 접근. 50 미터 전방의 바리케이드에 봉착, 진출하지 못하자 11대대에서 즉각 응사. 2명 사살, 4명 부상을 입고 도주”로 기록하고 있다. (광주민주항쟁 기념위원회가 발간한 ‘아! 광주여 민족의 십자가여!’에서는 지나가던 시위대를 계엄군이 공격한 것이라는 반대의 주장을 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홍인표씨는 “대한통운 대형 트럭에 4,5명의 시민이 타고 교도소 앞을 지날 때 교도소에 있던 계엄군들이 그들을 향해 사격을 가했다. 시민 3명이 사망하고 2명은 총상을 입고 교도소로 실려왔다. 이날 오후에는 장갑차 1대가 정문 앞에 정차하자 계엄군이 총을 쏴서 그 차에 있던 2명이 사망했다고 동료가 말해줬다. 이렇게 죽은 사람의 시체는 헬기가 와서 어디론가 싣고 갔다." 고 증언하였다.     


오전 08:30 조선일보 서청원 기자가 확인한 사망자 명단을 발표했고(월간조선, 1987. 5), 남도예술회관 벽과 충장로 방향 YWCA 부근 벽에 사망자 명단과 부상자들의 흑백사진이 부착되었다. 

“도청 뒤뜰 43구- 이중 이름이 확인된 사람이 ‘임규수, 김호중, 정민구, 정학근, 홍성기, 나종기, 정창용, 조남진, 조사천, 이상자(여), 김재환, 박기현, 임순춘, 양주섭, 전종호 등 17명이고, 미확인이 26명이었다. ”

“전남대 22구- 이중 이름이 확인된 사람이 김안복(36), 김정웅(39), 박기웅, 이세호, 박기형(16), 신정대, 최승희(여21), 김재수, 김호중, 정민규(23), 최영호 등이고, 나머지는 미확인이었다.      

 한편, 도청 앞 맞은편 상무관에는 30여 구의 죽은 시체가 무명천에 덮어 나란히 안치되었고, 입관하지 못한 시체도 수십 구 있었는데. 도청은 상무관 입구에 분향소를 설치 행방불명자 명단을 접수해 입원환자와 사망자의 명단 대조하며 확인했는데, 도청 정문에 '수습대책위원회'라는 띠를 어깨에 맨 청년들이 사망자를 확인하려는 시민들을 주민등록증 대조 후에 통과시켰고, 가족이 확인한 시체는 상무관으로 옮겨 안치시켰다.     


오전 09:00 녹두서점에 모인 교수, 학생들이 오후 3시에 도청 앞 광장에서 시민궐기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한 후, 궐기대회에 필요한 앰프, 마이크 시설 등의 물품은 YWCA로 가서 준비했고, 버스를 이용해 시내 각처를 돌아다니면서 오후 3시에 도청 앞 광장에 시민궐기대회가 열리게 됨을 알리고 다녔다.     

 같은 시간 함평에서는 버스 4대, 트럭 2대에 탑승한 4백여 명이 시위 개시했는데, 시위대는 본부를 함평경찰서로 결정하고, 영광으로 통하는 도로와 함평다리 입구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자체경비에 들어갔고, 목포에서는 오전 8시부터 시민들이 목포역에 집결해 '목포시민 민주화투쟁위원회'가 구성되어 시위에 나섰고, 휴교령으로 중.고생들도 시위에 참가했다.      


오전 09:35 도청에 학생수습위원회 본부 설치해 수습대책위원회 조직을 개편했다.

 도청 도지사실에서 일반수습위원회는 당초 15명 중 5명이 사퇴하고 전남대생 10명, 조선대생 10명을 추가해 30명으로 늘리는 한편, 수습대책위원장에는 윤공희 대주교를 추대했다. 이때 수습위원으로는 고광표, 서정수, 조비오, 윤성원, 이홍길, 심홍순, 한완석, 박찬일, 문행두, 최한영 등이었다. 

 한편 남동천주교회 유치원에서는 김성용, 홍남순, 이기홍, 조철현, 조아라, 이애신, 위인백, 이영생, 조봉환, 장기언, 김천배 등과 회합, 조철현이 도청 상황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도청내 수습대책위원회는 무력하고 도청 안에서 폭도들이 무기를 들고 싸우는 것을 보면 성직자로서 같이 싸우지 못하는 것이 부끄럽다고 말하자 이에 모두 동조하고 계엄사에 요구할 ” ①광주사태는 공수단의 살상에 대한 광주시민의 정당방위 행위이다. ② 구속학생을 석방하라. ③ 공수단의 책임자를 처단하라. ④ 계엄군의 투입을 금지하라. ⑤ 시민, 학생 처벌 및 보복 엄금하라. ⑥ 계엄군은 사과하라. ⑦ 정부 책임하에 피해를 보상하라. ⑧ 무기는 자진회수 반납한다.“ 등 8개항을 결의했다.      

그 후 무기 회수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무기 회수에 반대하는 시민과 학생들이 수습대책위의 수습방안에 불만을 품고 도청 앞 광장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무기 회수를 둘러싸고 학생수습위의 '무기반납으로 사태를 해결짓자'는 주장과 '시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최소한의 요구조건이 관철된 상태에서 반납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서 의견대립이 일어났고. 타결이 되지 않자 회수된 무기 중 1백 정만 계엄사로 갖고 가 반응을 보기로 합의했다.    

 

 오전 9~10 상점과 상가들이 조금씩 문을 열고 손님을 맞았고, 시장도 정상적으로 문을 열어 물건을 팔기 시작했는데, 같은 시각 11공수여단이 주둔하던 주남마을에서 미니버스를 향한 학살이 발생하였다. 주남마을은 광주-화순 간 도로와 너릿재 터널 쪽으로 이어진 도로가 있어서 그 방향으로 가는 차량들이 계엄군의 공격을 받아 왔었는데, 군인들이 12인승 승합차를 공격해 탑승자 11명 전원이 사망했던 것이다. 


09:50~10:00. 31사단장이 함평지역 예비군 대대 방문해 게엄령80-7호에 의거 광주시내 변전소 확보를 지시해 광주변전소에 3공수 31사 병력을 투입했다. (전교사 작전일지)     

한편 목포에서는 '제2차 민주헌정 수립을 위한 목포시민 궐기대회'가 5만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개최되었고, '더 이상 김대중 선생을 탄압하지 말라. 김대중 선생은 우리 목포시민이 30년 동안 탄압받으면서 탄생시킨 목포가 낳은 이 민족의 지도자이다!'라고 주장하며 '우리 겨레와 자유민에게 보내는 목포시민 결의문' 낭독 후 시가를 행진했다. 당시 목포청년회의소에서 연단용 트럭을 제공하는 듯 위장하여 위원장의 연설을 막기 위한 납치를 시도했는데, 납치시도가 좌절되자 시위행렬을 방해했다.      


 오전 10:00 전남대학교 김상집, 정유아 등 3, 4명이 함께 동대학교 본관 뒤에 주차되어 있는 대학교 소유 전남 5가 1155호 스쿨버스 1대를 탈취해 구내매점에서 구입한 빵 1상자, 콜라 1상자 및 동대학교 발전실에 있는 앰프 1세트를 싣고 나와 시민군을 규합하기 위한 가두방송을 했다.     

 한편 같은 시간 영암시위대는 영암군 도포면 덕화리 소재 저수지 부근 노상에서 도포지서의 총탄을 경운기에 싣고 안전한 곳으로 대피중인 동면 예비군 중대장 김금호를 발견했는데, 시위대는 김금호를 총으로 위협하며 공포를 발사하여 경운기에 싣고 가던 카빈 및 M1 소총 총탄 2만 1천4백70여 발을 트럭에 옮겨 실어 이를 약탈했다.     


오전 10:30 광주시내 남녀 고교생 1백여 명이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태극기로 덮은 사망한 친구들의 시신과 함께 '우리의 소원은 통일' 등의 노래를 부르며 시위했다. (월간조선, 1985. 7)


10:40 도청내 시체 속에서 화염방사기로 그을린 듯한 시체 여러 구 발견. (아! 광주여 민족의 십자가여!)


11:00 광주세무서 지하실에 시체가 있다는 보고를 받고 김OO 씨 등 4명이 현지로 가서 확인한 결과 유방, 음부를 도려내고 얼굴을 난자당한 여고생의 시체가 있었다. 신원확인을 해본 결과 옷 컬러 속에서 학생증이 나왔다. 전남여고 2학년 학생 이O였다. 시체를 싣고 가서 확인하고 부모들이 시체를 인수했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오후 12~1시경 이 시간은 소설 ’소년이 온다‘의 주인공 문동호의 실제 인물인 문재학 열사가 가족들과 점심을 먹다 가족들에게 “형이 ‘밖은 계엄군이 언제 들이닥칠지 몰라 위험하니 나가지 말라.’고 했다.”고 말 한 후, 가족 몰래 시민군이 지키고 있는 전남도청으로 향했던 시간이다. 

    

오후 2시경 시민군 몇 명과 여성 노동자, 여고생 등 총 18명을 태운 미니버스가 왔는데, 이들은 오전9시~10시경의 학살을 모르고 있었다. 이들이 주남마을로부터 650m 정도 떨어진 곳에 왔을 때 군인들이 제지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붙잡힐 것을 염려한 버스는 멈추지 않았고, 곧 군인들은 차량을 향해 무차별 난사를 감행했다. 시민군 몇 명이 대응사격을 했지만 역부족이었고, 승객들은 총과 손수건을 흔들며 항복 표시를 했지만 사격은 계속되었다. 결국 18명 중에 15명이 목숨을 잃었고, 이후 살아남은 3명 중에 부상자 2명이 계엄군에 의해 사살됨으로써 최종적으로 홍금숙 1명이 유일하게 살아남았는데, 그 와중에 지원동에 살던 선종철(43)이 거리의 사람들을 귀가시키다가 살해당해 결국 18명이 살해되었다.       


오후 3 도청 앞 광장에서 제1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가 개최되었다. 전날인 22일의 시민궐기대회와는 달리 격식이 있던 이 대회에서는 애국가 제창, 묵념, 각개각층 주민들의 연설과 발언, 상황 및 정보 보고, 모금 등이 진행되어 15만여 명의 시민들이 참석했다. 

 특히 시민들의 발언이 눈길을 끌었는데, 노동자 대표로는 YWCA신협 직원 김영철이, 농민대표로는 해남군 출신의 농민 윤기현이, 고등학생 대표로는 최치수가, 시민대표로는 소설가 홍희담이 각각 나와서 계엄군의 만행을 성토하고 시민들의 단결과 투쟁을 촉구하는 발언을 해서 박수를 받았다. 

 장례 준비를 위한 모금도 즉석에서 이루어졌는데 1백만 원이 넘는 돈이 30분 동안 모였다. 또 사회자인 전남대학교 학생 김태종이 "이 나라 민주주의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피를 흘리고 싸워서 쟁취하는 것입니다."라고 외치기도 했다. 대회가 끝난 뒤 시민들이 자리를 뜨지 않은 가운데 고등학생들이 애국가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며 친구의 시신을 들고 운구하기도 했다. 

한편 광주시내에서 이처럼 자치공동체에 의해 안정을 되찾은 가운데, 해방광주의 향방을 두고서 무기 회수를 주장하는 온건파와 계엄군의 사과 및 재발방지를 주장하는 강경파 사이의 이견이 좁혀지지 않아 수습위원회 내에서의 갈등은 깊어갔다. 이런 의견 대립에 대하여 시민 대부분은 회수는 해야 하나, 무조건적인 반납은 반대하는 분위기였다. 수천여 정의 총기가 풀려 청소년들까지 무기를 들고 다니는 상황이 위험천만할 수 있다는 것에는 아무런 이견이 없었던 것이었다. 다만 무기를 반납하는데 있어서 제대로 된 협상 없이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수습위 위원들을 통한 무기회수는 계속되었다. 22일에도 수백 정이 회수되었으며, 23일부터는 조비오 신부, 변호사, YWCA 회장 등을 포함한 일단의 수습위원들이 광주 곳곳을 돌아다니며 시민군을 만나 무기를 회수할 것을 요청했다. 기동순찰대도 광주 지역 내의 지역방위대들을 만나 무기를 반납해달라고 했다. 대다수는 어쩔 수 없이 무기를 반납하고 해산했지만, 거기에 반발하는 시민군도 많았다. 특히 계엄군 간의 대치 상태가 계속 되고 있던 지역에서는 무기 반납을 끝까지 거부하였다. 실제로 광주외곽에서는 계엄군에 의한 도발과 학살 계속되고 있었다.      


 한편 시민군과 광주시민들은 광주를 정상화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광주가 봉쇄되어 원활한 물품 공급이 어려워 가격이 올라가기도 했지만, 상인들의 노력으로 상점과 시장에서 일체 비상상황에서 우려되는 매점매석 등의 행위가 발생하지 않아 시민들은 그럭저럭 버텨낼 수 있었다. 

 시민들은 부족한 혈액을 보충하기 위해 헌혈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당시 병원은 18일부터 이어진 계엄군의 폭력진압으로 인해 실려온 부상자들로 넘쳐났다. 병원은 이들을 치료하고 입원시킬 공간과 여력이 없어 애를 먹고 있었는데, 특히 부상자들이 피를 많이 흘려 혈액이 매우 부족했다. 이 소식이 들려오자 전남대학교병원, 광주기독병원, 적십자병원 등 광주 각지의 병원에 시민들이 모여들어 헌혈에 참여하였다. 노인들과 술집 아가씨들까지 헌혈을 요청할 정도로 시민들의 헌혈에 대한 동참은 대대적이었다. 병원들도 직접 구급차를 이끌고 가서 헌혈을 요청했는데, 그 때에도 주민들은 줄을 서서 헌혈을 했다. 무엇보다 시민들이 목말라 한 것은 정보였다. 

 들불야학 근처의 빈집에서 투사회보라는 정보지도 발간하기 시작했는데, 광주 시내의 모든 신문이 발행을 중단했기 때문에 시민들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지를 잘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윤상원을 필두로 한 들불야학의 구성원들과 학생들은 투사회보를 발행하여 시민들에게 사실을 알리려고 했다. 투사회보 제작팀은 광주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정보를 수집한 후에 등사기로 일일이 제작하여 수백에서 수천여 장을 제작했고, 광주 전역에 배포자들을 보내 시민들에게 소식지를 나눠주는 방식으로 뿌렸다. 투사회보에는 정확하지 않은 소식들도 있었지만, 정보의 부족함에 불편해하던 광주시민들에게는 소중한 대안언론이었고, 5.18 초기에 중구난방이었던 전단지와 소식지들을 하나로 통합하였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의를 지녔다. 투사회보는 들불야학 근처의 빈집에서 생산되다가 25일부터는 YWCA 건물 안에서 제작되었고, 21일부터 27일까지 총 10호가 만들어졌다. 

 시민군과 광주시민들의 치안에 대한 노력도 빛났는데, 도청에 주둔한 시민군의 식사는 여학생과 아줌마들이 맡아서 했고, 또 시민들이 집에서 가져온 주먹밥으로 해결하기도 했다. 또한, 치안유지를 위해 순찰대를 조직했는데, 순찰대에게는 총도 가장 좋은 것으로 지급하고 일반인과의 구별을 쉽게 하기 위해 도청에 있던 전경 복장을 지급하는 등 나름대로의 특권이 주어졌지만, 지프차를 25대만 남기고 그외 차량은 통제했는데, 이들은 주택가와 외곽지역을 순찰하고 계엄군의 동태를 파악했다. 시민군은 각 지역마다 체계적으로 편성되어 효과적으로 방어와 경계 임무를 수행하였고, 지역마다 지역방위대도 조직되어 백운동, 화정동, 동운동, 서방 삼거리, 산수동, 학운동 등에 배치되었다. 이렇게 시민군이 치안을 대신하니 비록 광주가 공권력이 부재하고 수천 정의 총기가 풀린 상황임에도 안전한 상태였다. 광주 시내의 은행이나 금은방, 보석점 등이 한 군데도 털린 곳이 없었으며, 강력사건도 경찰이 존재했을 때와 비교하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이것은 광주에서 일어난 시위와 여기에 참여한 광주시민들과 시민군들이 폭도가 아니라는 가장 직접적인 증거였다. 시민들도 궐기대회에서 이 점을 언급하며 자랑스러워 할 정도였다. 

 다음으로 중요한 일이 시체의 처리 문제였다. 시체처리반에 일한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고생이 많았다. 이들은 궂은 일을 마다 하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전남대 부속병원과 조선대 부속병원을 돌아다니며 신원이 파악된 시체는 입관시키고 신원파악이 되지 않는 시신은 지장을 찍어놓았다. 또 공수들이 21일 퇴각하면서 시체를 암매장한 장소를 찾아서 시체를 파오고, 각지에 흩어져 있는 시체를 도청으로 옮기는 일을 했다. 시체에 비해 관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합판으로 관을 만들어 입관시켰다. 시위 도중 희생된 시민들의 시신들은 처음에는 병원에 안치되었다가, 도청 근처의 상무관으로 옮겨졌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사망하거나, 암매장되었다가 발굴된 시신들도 동일한 과정을 거쳤다. 도청에서 일하는 시민군과 광주시민들은 시신들을 씻기고, 새 옷을 입히고, 태극기가 덮힌 관 안에 넣었다. 그리고 시신이 더 이상 썩지 않도록 방부제 처리를 했으며, 분향소를 상무관 안에 마련하였다. 수많은 시민들이 죽은 이들을 보고 추모하고자 상무관으로 몰려왔다. 수습위 소속의 학생들은 신분증 검사를 통하여 한 명씩 상무관 안으로 들여보냈다. 상무관 안에는 많은 숫자의 관이 있었고, 관마다 유가족들이 달라붙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시신의 상태도 참혹하여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대부분의 시신은 계엄군에게 곤봉·개머리판·군홧발로 두드려 맞거나 대검에 찔리거나 총에 맞았기 때문에 끔찍한 모습이었고, 게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그 시신들이 썩어가면서 더욱 더 충격적인 모습으로 변해갔다. 그걸 본 유가족들은 통곡했고, 이를 추모하는 시민들도 가슴 아파하였다.      

 시민군은 계엄사에서 회수된 총기를 반납할 것을 요구하자, ” ①광주사태는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에 대한 광주시민의 항거임을 인정할 것. ② 광주시민의 명예를 회복하고 부상자, 사망자의 피해를 보상할 것. ③ 구속자를 전원 석방할 것 등 3개항의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계엄사는 총기를 반납하면 요구사항을 들어주겠다고 했고, 조비오 신부와 김창길이 총기 5백여 정을 반납하자, 계엄사는 몇 명의 연행자를 석방시켰다.      

 시민군과 광주시민들이 슬픔 속에서 광주를 정상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가운데도 계엄군의 총격은 계속되었다.

 김상중씨의 증언에 의하면 16:00경 지원동 무등학교 부근의 주유소를 지나다 완쪽 옆구리에 계엄군의 총을 맞아 민가로 피했는데 계엄군이 거기까지 따라왔고, 집배원이던 김동식씨의 중언에 의하면 오후 3,4시경 화순으로 피난하기 위해 녹동마을(지원동)을 지나다 계엄군 소대병력 2개가 광주-화순간 도로변에 두줄로 서서 녹동마을을 향해 쏘는 총에 양쪽 대퇴부를 관통당했다.     


오후 5:00 도청 시민군들이 회수된 무기를 재지급하여 무장 '정부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강경한 대처로 돌아섰다

 전교사 작전일지에 의하면, 당시 계엄군은 재향군인회관 옥상에 LMG 설치하고 방송으로 폭도 주동자 도청 철수와 장소 이동을 명령했고, 시민군은 특공대를 편성하고 방석복을 착용해 계엄군 진입 시 반격태세에 들어갔는데, 이에 계엄군 차량통제반은 차량 통제를 위해 시민군이 타고 있는 모든 차를 도청으로 집결토록 하여 차량에 일련번호 1호~219호까지를 부여해 활동을 체계적으로 정비했다.    

  

오후 6:00 KBS-TV 방송을 재개했다. (월간조선, 1985. 7)

 같은 시간 특전사 전투상보에 의하면 같은 시간 지원동과 화정동에서 교전이 일어나 환자운송 차량이 총격 받아 3명 사망하고 10명이 부상당했고, 보성 버스 3대에 탑승한 시민군 94명이 자수해 회수품으로 M1 38정, 카빈 24정, LMG 1정, 실탄 449발, M1 194발, 카빈 255발, 기타 경찰장비를 노획하고, 주모자 6명 조사했다.     

오후 7:00 전교사 작전일지에 의하면 계엄군이 철수작전중 교도소 앞 삼거리 주유소를 지날 때, 트럭(2 1/2톤) 1대에 탑승한 시민군 43명이 카빈을 난사하며 접근해 교전이 벌어졌고, 계엄군이 시민군 1명을 사살하고, 2명을 생포했으며, 트럭 1대와 카빈 1정(실탄 14발)과 LMG 실탄 13발을 노획했다.      


밤 9:00 목포역 광장에서 시국성토대회가 열려 시내 남녀 중·고· 대학생과 시민 5만여 명이 횃불시위를 벌였는데, 여고생 2백여 명이 횃불을 들고 대열 중간에 서고, 남녀학생과 시민이 좌우로 선 횃불대열은 시내 20킬로미터를 보행 시위하면서 구호를 외쳤다. (월간조선, 1985 .7)

 한편, 같은 시간 나주,영산포. 시위대 중 일부는 이때까지 나주, 영산포, 강진군 성전면, 해남군 옥천면 등을 왕래하며 각 지역에서 참가한 농촌청년들(이들은 대부분 대도시에서 잡노동, 행상 등을 하다가 다시 고향에 돌아와 농사짓던 잠재실업군층)과 함께 광주지역 투쟁지원을 위해 여러 번 외곽지역 돌파를 시도하다가 많은 사상자를 냈는데, 이들은 광주 진입이 봉쇄되자 이때까지 계속 각 지방과 연결 시위를 주도했으나 헬기 정찰과 계엄군에 의해 거의 모두가 많은 사상자를 내고 체포되었다.

 전교사 상황일지에 의하면 이때 계엄군은 무등산 경계병력을 투입했다.   

  

밤 9:30 전교사 작전일지에 의하면 아세아자동차에 시민군 6명이 침입해 장갑차 1대를 탈취했다.     

밤 10:10 전교사 작전일지에 의하면 이때까지 광주시내 금남로, 백운동, 서방, 광천동, 산수동 등 시내 일원, 목포, 나주 등 도내 일원에서 시위가 계속되었고, 결국 시위 속에 날이 밝았다.     

 이날 수습위원들은 두번째 수습협상을 위해 상무대 계엄분소에 갔는데, 협상장소에 갔을 때 상무대 넓은 뜰에서 발진되고 있는 헬리콥터를 보면서 살벌한 분위기에 공포를 느꼈고, 부사령관인 김기석 장군이 수습위원들에게 '무장헬기와 탱크가 준비되어 있어서 광주를 진압하려 한다면 며칠 안에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인명살상을 하지 않으려고 군인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무기를 빨리 회수하여 반납해 달라'는 요지의 말을 하였다. 

 수습위원들은 '시민들을 지휘 통솔할 권한이 없으나 계엄사측에서 확실한 보장만 해준다면 목숨을 걸고 무기 회수를 하겠다'는 결의를 보였지만, 계엄사의 태도는 무기반납만을 요구하는 냉랭한 고자세였다. 수습위원들은 어떤 형태로든 계엄군을 설득한다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직감하고 답답하고 절박한 마음이 들었고, 피해를 당했지만 차라리 시민들을 설득하여 무력충돌을 피하는 마지막 가능성을 찾아볼 수밖에 딴 도리가 없다고 판단하고 그때부터 무기 회수 작업에 전력했다. [예수의 소화 수녀회 공동창립자인 조철현(비오)의 증언]  

    

한편, 이날 미국 국방부는 국군 20사단 병력이동 승인을 발표했고, 국내외에서는 미국이 끌고 온 미7함대 소속의 항공모함 코럴시호(USS Coral Sea)가 구설수에 올랐다. 

 광주시민들은 항공모함의 도착 소식을 듣자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이 민주화운동을 하는 우리들을 도우려 왔다면서 기뻐했지만, 이 배가 온 것은 민주화를 외치는 광주시민들을 도와주기 위함이 아니라, 자국 국민들을 대피시키고 북한에게 경고를 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사실상 방관자였던 미국의 이런 태도는 80년대의 민주화운동 중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과 같은 일이 벌어지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⑧ 5월 24(): D+6     


새벽 03:00 조비오 신부 등 수습위원 4명은 무기 회수를 위해 산수동, 학운동 다리, 계림동, 백운동 철길, 서방, 무등경기장, 화정동 공단 입구 등의 외곽지역을 방문했다.     


오전 08:00 무장한 학생들이 도청 출입을 통제하고, 통행증 소지자만 통행 허용. 광주시내 쌀, 채소가게 등에 생필품 품절. 무기 자진반납 시한 08:00에서 12:00로 연장. (월간조선, 1985. 7)

 KBS 라디오 방송 복구. 계엄분소장이 방송을 통해 “무기 소지자 중 광주시내 거주자는 국군통합병원에 반납토록 하고 기타 지역은 군부대와 경찰서에 반납하라. 무기를 반납하면 일체 불문에 부치겠으며 만약 시한까지 반납하지 않아 중대결심을 하는 괴로움을 없게 하도록 해달라'는 내용의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대부분의 시민들도 무기반납을 원했으며, 시민군은 전일빌딩에 무기회수반을 설치했다. (월간조선, 1985. 7)

 아침부터 시내 곳곳에 대자보, 사진, 플래카드 등이 나붙기 시작. 특히 수습위의 자세를 비난하는 대자보 붙음. (아! 광주여 민족의 십자가여!)

 목포시 선무활동, 시내 조기청소(방위병), 09:00까지 10개소 : 예비군 30, 경찰 20, 육군 5/23, 해군 1/15, 차량 7대)에 교통통제소 운용(계엄사 상황일지)

 광주 시가지에 시민학생수습대책위와 계엄군의 협상 내용을 인쇄한 유인물 살포했는데, 내용은 '계엄군의 과잉진압을 인정하며, 연행자 9백27명을 제외하고 모두 석방했으며, 보상계획 수립과 치료대책 완비, 사실보도에 대한 노력, 폭도나 불순분자라는 용어사용 중지, 비무장 민간인의 시외통행, 사태수습 후 보복금지 약속“ 등이었다. (신동아, 1985. 10)     


오전 09:00 시가지 작전투입 작전인 충정작전을 위해 부대 배치를 완료했다. (전교사 작전지시 80-8호. 5월 23일)

 광주시 상황은 수습위의 총기반환 활동으로 1만 7천여 정 중 6천여 정이 회수되었고, 차량 행렬이 현저히 감소했지만, 영업행위가 확대되고 시내 정돈된 상태였는데, 계엄사 20여 명이 공단 입구에 경계를 서고, 4명이 백운동 일대에서 검문과 연락임무를 수행했다 (계엄사 상황일지)

한편 목포에서는 헌병대 차량이 순찰하며 시민들을 위협하다, 시민들이 침묵으로 응대하자 도주했다.     


오전 09:10 증심사 입구 다리에 폭약 설치. (계엄사 상황일지)

09:15 조선대 뒷산에 공용화기 설치. (전교사 작전일지)

09:20 수습대책위원 및 학생수습대책위원회 합동 명의로 “질서유지, 총기, TNT 회수, 금남로 청소” 등을 내용으로 한 전단을 살포했다. 무기 3천여 정 회수하여 도청에 보관. (계엄사 상황일지)


09:25 시민군이 화순 쪽으로 통하는 학동의 대치지역에 시민을 설득하여 무장해제시키기 위해 갔다가, 계엄군의 총격을 받아 대치점 중간지역에서 총에 맞았는데, 시민 1명이 죽었음에도 계속되는 계엄군의 총격 때문에 시체도 끌어올 수 없었다." (월간조선, 1985. 7 조철현 증언)

09:30 광주경찰서 서장 인솔하에 총원 3백91명 중 64명이 집결해  대기했다. (계엄사 상황일지)     


오전 10:00 목포에서 '제3차 민주헌정 수립을 위한 목포시민 궐기대회'가 개최되어, 각 학교별, 동별 등 단체로 모여들자, 군 헬기가 '폭도들은 자중하고 시민들은 흥분하지 말라'는 내용의 삐라를 뿌리며 선무방송을 했다. 

 시민들은 대회장에서 '김대중 석방하라'는 혈서를 쓰고, 광주시민 영령을 위한 분향소를 설치했으며, 행정당국에 “경찰, 공무원은 정상근무를 할 수 있도록 준비할 것. 경찰은 시내에 나오지 말 것, 교통경찰만 시내버스 운행을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      


오전 10:30 호남고속도로(운암동 톨게이트 부근)상에 매복 중이던 기갑학교 병력 3/117이 사단에서 영광으로 복귀 중이던 31사단 96연대 3대대 2/29명을 폭도로 오인해 사격했고, 이 총격으로 사망 5명 중상 11(민간인 1명)명 경상 11(민간인 1명)이 발생했다. (계엄사 상황일지)

같은 시간 7공수여단과 1공수여단이 주남마을에서 20사단 61연대에 외곽봉쇄 임무를 인계했다. (특전사 전투상보)     


오전 10:50 학생대표들이 시민대표에게 지금까지 회수한 총기 3천여 정을 인계하고 시민대표가 이를 군에 전달하기로 일차 합의했으나, 학생대표간에 이견이 있어 아직 인계하지 못하고 이미 회수된 무기는 도청에 보관했다. 학생, 시민이 갖고 있는 남은 무기는 4천여 정이었고, 무기반납을 거부하는 학생과 시민들은 “절대로 무기를 반납하면 안된다, 무기가 없으면 우리가 어떻게 저항하느냐”며 반발했다. (월간조선, 1985. 7)

 한편, 목포역 광장에 학생 3백여 명이 서성거려 시가행진이 예상되었다. (계엄사 상황일지)     


오전 11:00 도청 앞 광장에서 시민궐기대회를 갖기로 했지만, 전날까지 도청 앞 대형 스피커를 통해 상황을 알려주는 방송이 중단되어 의견들이 서로 엇갈려 열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학생 시민들은 거리에서 발견한 시체 45구를 도청 앞으로 옮겨놓았고, 도청 국기 게양대에 조기를 게양했다. 

 한편, 학생수습대책위원회에서는 치안유지반원들을 동원해 차를 타고 다니면서 총기 소지자들에게 총을 내놓으라고 요구했지만 반발이 극심했다. 

 시내치안은 학생들이 맡고 있는데 전날 밤 학생들이 야간통행증을 발급해 통행증 소지자에게만 통과를 허용했고, 차량들도 3백여 대에 일련번호를 붙여 번호부착 차량만 운행토록 허가하고, 기타는 압류해서 도청 앞에 세워두었다. 도청, 시청 등 관공서에는 총을 든 학생이 경비를 서서 학생들이 발급한 '비'자 도장 찍힌 출입증 소지자만 통과시켰고, 학생들은 청년회의소, 라이온스 클럽, 여성단체 등 민간단체들과 예비군 요원에게 함께 치안유지에 나서자고 권고했다. (월간조선, 1985. 7)     


오전 11:10~12 시민대책위원인 신부, 변호사, 목사 등이 무기를 휴대하고 군과 대치중이던 화정동 시민군 38명과 지원동 시민군 13명 등을 도청으로 데리고 와 울면서 설득해 1시간 만에 무장해제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화정동 등 시외로 빠지는 6개 외곽도로에서는 아직도 일부가 무장해 군과 대치하고 있었는데, 특히 화정동 공단 입구에서는 20여 무장대원이 인근 서광제재소에서 옮겨온 대형 원목 1백여 개와 버스, 트럭, 지프차 등으로 바리케이드 치고 지키고 있고, 4백여 시민들이 현장에 운집해 있으며 대원들은 신분 확인 후 시내로 들어오거나 밖으로 나가는 시민을 통과시키고 있었다. (월간조선, 1985, 7)

 1만여 시민이 시체확인차 상무관에 운집했고, 학생들이 어깨띠를 두르고 안내했다. (계엄사 상황일지)

 광주시내 표정은 표면상 평온한 가운데 군데군데 시민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고, 일부 상가는 문을 열고 영업중이었다. 거리는 전날인 23일부터 시작된 청소작업으로 많이 깨끗해졌으나, 노동청 사무소 앞에는 지난 20일 밤에 불에 탄 차량 7대가 아직 뒤집힌 채 있었다. 시체가 안치된 상무관에는 학생 일부가 다음날(25일) 시민장으로 치르자고 주장하고, 도당국도 장례방침이 결정되면 시설 등을 지원하려고 했으나, 찾아와 울부짖고 있는 유족들과 타협이 안 되고 있는 형편이라 아직 미결의 상태였다. (월간조선, 1985. 7)

 김용균의 진술에 의하면 "점심 무렵 도청 숙직실로 갔는데, 거기에 계엄군의 무전기가 있어 주파수를 맞춰보니, 시체 3구 암매장한 계엄군이 “고등학교 신축 현장에서 교련복을 입은 고등학생 3명을 사살하고 시체를 산중턱 부근의 땅에 파묻었다.”라고 하는 내용의 무전 교신을 도청했다.     


 정오 12:00 사태수습이 급진전하여, 총을 들고 도청을 경비하던 학생들이 총기를 회수반에 내주었고, 학생, 시민들이 착용하고 있는 헬멧, 방석복 등 군경복장 및 장비도 '폭도로 오인받는 원인이 되고 있다' 하여 반납했다. 또한 중심가 일부 사무실 직원이 출근해 음식점과 다방 등도 영업을 시작했고, 광주역 직원들도 출근해 역장은 전화선을 연결하여 외부와 통화를 했으며, 광주시장을 비롯 전직원 출근해 영세민대책과 사후 수습에 나섰다.     


오후 1시경 도청 상황실에서 학생수습위원회가 열렸는데 학생수습위원회 부위원장이자 강경파인 김종배가 제시한 요구사항에 온건파 김창길을 비롯한 몇몇 수습위원들이 반발하였다.

 여기서부터 학생수습위원회 내에서는 온건파 김창길과 강경파 김종배의 갈등이 표면화되었고, 둘의 갈등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론의 근본적 차이에서 기인하고 있었는데, 김창길은 무조건 무기 반납 후 수습을 주장했고, 김종배는 납득할 수 있는 협상을 통한 수습을 주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광주 내 재야 및 운동권과 관련된 윤상원과 정상용은 김종배와 접촉하여 힘을 모으고자 했고, 한편 21일 남동성당에서 모임을 해왔던 재야 인사들도 수습위의 활동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오후 2시 30 제2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도 전날인 23일의 1차 대회처럼 재야, 운동권, 녹두서점, 들불야학 인사들의 영향력이 작용해 시민들의 많은 호응을 얻었는데, 궐기대회에 참여한 10만여 명의 시민들은 수습위의 태도가 미온적이고 투항적이라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러자 수습위는 계엄사 측과의 협상내용을 인쇄하여 배포하거나 기기 설치를 방해하고 전기를 끊는 등, 궐기대회에 대해 곱지 않은 태도를 보였다. 또한 계엄군이 파견한 정보요원들도 집요하게 궐기대회를 방해하려고 했다.   이에 분노한 청년들은 전투경찰이 쓰던 가스차의 마이크와 스피커를 이용해 수습위를 규탄하였다. 여기에 다양한 시민들이 참여하여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나누었고, 시민들이 도움을 주면서 궐기대회는 무사히 치러졌다.

대회 도중에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 잠시 중단되었는데, 사회자가 "이 비는 원통하게 죽은 민주영령들이 눈을 감지 못하고 흘리는 눈물입니다."라고 말하자 시민들은 비를 맞으면서 대회를 재개하였고, 얼마 후 비가 그치자 분수대에 전두환이라 써진 허수아비를 데리고 와 화형에 처했다. 전두환 허수아비가 불에 활활 타자 도청 앞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만세를 부르면서 열렬히 환호했고, 전두환 허수아비의 화형식 장면은 위르겐 힌츠페터를 비롯한 외신기자들이 취재 및 촬영을 통하여 세계에 알려졌다.      


 오후 6 제2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가 끝이 났고, 저녁에는 도청 상황실에서 열린 학생수습위원회에서 다시 무기 반납을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 

 김창길과 김종배는 팽팽하게 대립했고, 역시나 둘의 생각은 평행선을 달렸다. 회의에 참가한 사람들이 무기를 반납하자는 기세를 보이자, 시민군 중 하나였던 박남선이 분개하여 의자를 집어던지면서까지 무기반납에 반대하였는데, 일부 온건파 학생들은 무기반납을 거부하는 강경파를 보고 수상하다며 간첩 아니냐고 의심하기도 했다.      


 ⑨ 5월 25(): D+7     


 새벽 1시 학생수습위원회가 이 시간까지 이어졌고, 여기서 온건파 학생 몇 명이 수습위원회 대열에서 이탈하여 학생수습위원회 기구는 일부 변화를 거쳤다. 그러나 여전히 김창길을 비롯한 온건파와 김종배를 비롯한 강경파가 각각 위원회에 남아 있었고, 따라서 온건파와 강경파 간의 갈등이 완전히 봉합된 것은 아니었다. 

 한편, 이 시간에 강경파가 전남도청 아래에 위협용으로 모르는 사이 보관 중이었던 TNT와 다이너마이트가 군 측에 의해 제거되었다. 

 학생수습위원회는 아침까지 이어졌고, 계엄군 측 정보요원들의 공작도 심해져갔다.     

 

오전 8 한참 학생수습위원회가 계속 되던 중, 시민군 중 하나였던 장계범(23세)이라는 사람이 갑자기 "독침이다."라고 소리치곤 쓰러졌고, 옆에 있던 정향규(23세)라는 사람은 그를 도우려고 상처에 입을 갖다댔다가 역시 쓰러졌으며, 놀란 사람들이 둘을 전남대학교병원으로 이송하였는데, 이른바 독침사건이다. 

 독침사건이 사건이 터지자 몇몇 사람들이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고 간첩운운하며 대열에서 이탈하기도 하였지만, 사건의 진상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풀렸다. 

 장계범은 자신이 방심한 사이 독침을 맞았다고 주장했지만, 얼마 치료도 받지 않고 병원에서 퇴원하여 종적을 감추었고, 그의 진단서에는 의식에 아무런 이상이 없었고, 약물중독에 대한 이상증세 또한 없다고 적혀 있었다. 게다가 같이 실려온 정향규는 미처 도망치지 못하고 시민들에게 잡혀 취조를 받았는데, 여기서 그는 자신이 장계범과 짜서 이 사건을 일부러 조작했다고 자백했다. 그리하여 이 사건은 계엄군 측이 벌인 조작사건으로 결론내려졌다.      


오전 10 재야인사, 운동권 학생들이 YWCA 2층 총무실에 모여서 서로 의견을 나누었다. 

 윤상원과 정상용은 수습위원회의 태도를 비판하고 새로운 투쟁조직의 건설을 주장하였는데, 그들은 무조건적인 무기 반납은 사태 수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서, 싸움은 우리가 할테니 어른들은 우리들을 지원해 달라고 호소했다. 

 여기에 재야인사들의 의견은 양분되었는데, 몇몇은 민주화를 위한 계속적 투쟁의 필요성을 느껴서 이들의 제안을 지지했고, 몇몇은 지도부가 있다하더라도 계엄군의 압도적 화력 아래 분쇄되어 많은 희생이 생길 것을 염려해 반대하였다.  

    

 오후 2 재야인사, 운동권 학생은 점심 식사 후 천주교 광주대교구 남동성당에서 다시 모였다. 

 재야인사들은 2시간 동안 수습위와 사태수습의 향방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인 끝에 기존의 수습위원회에 참여하기로 했는데, 이때의 수습위원회는 이종기, 명노근, 조철현 비오 신부만 남고 전부 이탈한 상태여서 재야인사들이 참여하자 보다 강경한 태도를 띠게 되었고, 새로 구성된 수습위는 곧바로 재야인사 중 천주교 광주대교구 김성용 프란치스코 신부가 한 제안을 토대로 ‘최규하 대통령 각하께 드리는 호소문’을 채택했다. 

     

오후 3 도청광장에서 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가 열렸는데, 참가인원은 5만여 명으로 전번에 비해서는 절반으로 줄었지만, 여전히 열광적인 분위기였다. 

 시민들은 각 동별로 피켓을 들고 모여서 분수대를 중심으로 둘러앉아 대회를 열었다. 주최 측을 통해 피해상황이 중환자 520명, 경상자 2,170명, 사망자 70여 명으로 파악되어 시민들에게 공개되었고, 궐기대회 도중에는 많은 성명서들이 발표되었는데, 특히 시민군의 이름으로 발표된 “우리는 왜 총을 들 수 밖에 없었는가?”는 계엄군의 만행에 분노한 시민들이 어떻게 21일 무장봉기를 일으켰는지를 잘 설명해주었다. 

 그러나 이날에도 온건파와 강경파의 갈등은 이어졌는데, 윤상원은 항쟁파인 김종배와 박남선 둘을 만나 서로의 힘을 합치기로 하였고, 학생수습위 내의 강경파 인사들과도 접촉하였다.      


오후 7시경 윤상원을 비롯한 강경파는 도청 식산국장실에서 새로운 항쟁지도부를 만들기로 결정하자, 온건파인 김창길은 "도대체 어떻게 할 생각이냐"며, "광주를 피바다로 만들 작정이냐"면서 비난했다. 

 이에 강경파와 온건파 간의 언쟁이 벌어졌다. 김창길은 "무기를 놓고 당장 도청을 떠나자"고 말했고, 윤상원은 "여기서 죽으면 죽었지 총을 놓지는 못하겠다"면서 버텼다. 결국, 김창길은 학생수습위원장 직을 내려놓고 도청을 빠져나갔고, 온건파 인사들도 대열을 이탈하였다.   

   

오후 10 결국 강경파를 중심으로 한 민주투쟁위원회(학생시민투쟁위원회)가 출범하였는데, 민주투쟁위원회는 본격적인 항쟁지도부의 첫 출발이었다. 민주투쟁위원회의 첫 안건은 수습활동으로 인하여 약해진 시민군과 외곽경비를 강화하는 것이었는데, 그래서 예비군 동원령을 내려서 외곽경비를 보충할 계획을 세웠고, 또한 도청 지하 무기고에 있는 다이너마이트를 이용해 계엄군과의 협상을 진척시켜 보자는 제안도 나왔다. 한편 시민군에서는 대학생들을 일원으로 모으는 홍보활동을 했는데, 여기에 70여 명의 청년들이 모여들어 YWCA에서 간단한 교육을 받고 투입된 후, 시민군과 수습위, 항쟁지도부를 돕거나 도청과 인근 지역을 방어하는 일을 맡았고, 물론 일반 시민들 중에서도 시민군에 들어온 사람도 많았다.

 다음 안건은 시민의 합동장례식에 대한 것이었는데, 3일 후인 5월 28일에 도민장으로 치르기로 하였다. 

 다음 안건으로 시민들의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다양한 방안들을 검토하였는데, 여기서는 시내버스 정상 운행, 공무원 및 경찰 비무장 근무, 상가 및 시장 정상 운영, 지역 언론 정상 가동, 동네별 피해상황 파악, 유류 사용 통제, 시민군 재편 등이 제안되었다.   

   

 한편, 이날 계엄군과 정부 측에서는 육군회관에서 회의를 열고 상무충정작전이라는 구체적인 진압작전을 마련하고 시행 날짜는 5월 27일로 정했다.     


 ⑩ 5월 26(): D+8     


 새벽 4시경, 계엄군이 화정동에서 농성동 방면으로 진출했고, 이 소식을 들은 도청 내의 시민군은 계엄군을 막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가자, 홍남순 변호사, 이기홍 변호사, 김성용 프란치스코 신부, 이성학 장로, 조철현 비오 신부 등 17명의 수습위원이 서로 모여 회의를 했다. 여기서 김성용 신부는 "우리가 먼저 탱크 앞에 가서 죽자."면서 수습위원들을 이끌고 계엄군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시민들이 그 뒤를 따르면서 긴 행렬이 행진했는데, 훗날 사람들은 이를 두고 죽음의 행진이라 불렀다. 

 수습위원들과 시민들의 행렬은 1시간 정도 행진하여 농성동에 다다랐고, 계엄군의 탱크와 대치하였다. 수습위원들은 군인들에게 군대를 후퇴를 요청했고, 군인들이 후퇴하면서 위기는 일단 넘겼다. 

 위기를 넘긴 수습위원들은 상무대 전교사로 가서 4시간 30분 동안 계엄군 측과 협상을 벌였지만, 계엄군 측은 이미 진압작전을 다 세워놓은 뒤였기 때문에 무엇 하나 꿇릴 게 없었기에 "오늘 중으로 무기를 넘기고 해산하라."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오전 9시경 결국, 수습위원들은 빈 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고, 항쟁지도부는 다음날 새벽에 계엄군이 몰려올 수도 있는 상황에  오후의 궐기대회를 오전으로 옮겼다     


오전 11 제4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가 열렸는데, 갑작스러운 시간 변경에도 불구하고 3만여 명의 시민들이 도청광장 앞에 모여들었다. 

 시민들은 이 대회에서 계엄군의 진입이 군과 수습위 간의 협상을 위반한 것이라고 비난했고, 국기에 대한 경례·묵념·상황 보고 등을 거쳐 대한민국 국군과 최규하 대통령을 향한 메세지를 발표하였다.

또한 민주주의를 열망하고 시민들을 고취시키는 시 2편이 낭송되었고, 시민들은 시가 한 구절 낭송될 때마다 똑같이 따라하며 음미하였다. 

 또한 항쟁지도부의 주도로‘80만 민주시민의 결의’가 발표되었는데, 여기서 항쟁지도부와 시민들은 '수습' 아닌 민주화를 말함으로써 항쟁의 목적이 민주주의를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오후 1시까지 궐기대회는 이어졌고, 대회 후에는 시민들이 일제히 일어서 가두행진에 나섰다. 시민들은 스쿨버스를 앞세우고 금남로를 행진하여 광주공원, 전남대병원 등을 거쳐 다시 되돌아왔다. 시민들은 “우리는 싸움을 포기할 수 없다, 무기 반납은 절대로 안 된다, 살인마 전두환을 찢어죽이자.”는 구호를 외쳤다.   

   

 오후 2 도청 내무국장실에서 항쟁지도부는 구용상 광주시장을 만나 9가지의 사항을 요구하였는데, “ ① 1일 백미 1가마씩 제공 ② 부식 및 연료 제공 ③ 관 40개 제공 ④ 구급차 1대 지원 ⑤ 생필품 보급 원활히 ⑥ 치안문제는 경찰이 책임지라 ⑦ 시내버스 운행 ⑧ 사망자 장례는 도민장으로 ⑨ 장례비 지원”으로 전날 항쟁 지도부가 논의를 했던 것들이었다. 

 부지사실에서는 정시채 부지사, 유족 대표 등과 함께 5.18 당시 희생된 사람들의 장례식 문제를 논의했는데, 여기서 장지는 망월동으로 하고, 날짜는 5월 28일로 잡았다. 

 한편 같은 시각 도청 식산 국장실에서는 시민군 기동타격대가 조직되었는데, 이전의 기동순찰대를 이어받는 것이어서 기존의 기동순찰대원 대부분이 참여했다. 약 40~70명 정도의 인원에 7조까지 조직된 이 기동타격대는 6개 조는 기동순찰대의 업무를 그대로 이행하였고, 나머지 한 조는 예비부대로 편성되었다. 이들은 낙오되거나 잠입한 군인들을 체포하여 군부대로 보내주었고, 순찰 활동을 도맡았다. 

     

 오후 3 제5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가 마지막으로 개최되었는데, 이 궐기대회에서는 수습위원들의 절망적인 협상결과가 발표되었고, 시민들은 계엄군의 진압이 임박했다는 불안감을 지울 수가 없었는데, 그럼에도 많은 시민들이 연단에 올라서서 자신의 겪은 이야기들을 했다. 

 어떤 이는 폭도들이 난동을 부린다는 언론 보도만 믿고 무서워 나오지 않았는데, 실제로 나와보니 보도와는 다르다면서 놀라워했다. 누군가는 8.15 광복부터 현재까지의 정치경제적 문제점에 대해 성토했다. 그런가하면 무등산 증심사에서 왔다는 한 스님은 “살생을 금하는 불교의 승려가 살상이 불가피한 싸움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여 눈길을 끌었다. 이 대회에서는 오전에 있었던 대회에서 발표된 글들이 재차 발표되었으며, 보다 온건한 투로 4개 항목을 호소하기도 했다. 

 궐기대회가 끝날 즈음 항쟁지도부는 오늘밤 계엄군이 공격해올 가능성이 크다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궐기대회 이후 5천여 명의 시민들은 금남로를 거쳐 계엄군과의 대치지역까지 이동하여 행진하고는 도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런 피 어린 애절한 호소와 저항은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오후 5 도청 대변인실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외신 기자회견이 열렸는데,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이 10여명의 외신기자들 앞에 섰고, 통역은 미국선교사 집안의 인요한(John Linton)이 맡았다. 

 윤상원은 기자들 앞에서 항쟁지도부의 입장, 계엄군 측과의 협상결과 보고, 피해상황 등을 알려주었고,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와 국제적십자사에게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해달라고 부탁하였다. 3시간의 기자회견 동안 윤상원은 "우리는 오늘 여기서 패배하지만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입니다."라며 계엄군에 맞서 싸울 것임을 천명했다. 한 기자가 “항복할 것이냐, 싸우다 죽을 것이냐?”고 묻자, 윤상원은 "최후까지 싸울 것이다"라고 답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본 ‘볼티모어 선’의 블래들리 마틴 기자는 그에 대해 "죽음의 예감 속에서도 최후의 날까지 싸우리라는 다짐이 얼굴에 잘 나타나 있다"고 증언했다. 

 한편 정시채 부지사는 오후 5시 경 항쟁지도부 인사들을 만나서 계엄군이 27일 들어올 것이라며 빠져나갈 것을 종용했다.      


오후 6시경 민주투쟁위원회의 마지막 회의가 열렸는데, 이 회의에서는 항쟁지도부 인사들과 재야 인사들을 포함해서 옛 학생수습위원회의 온건파 인사들도 모였다. 

 온건파인 김창길은 빨리 무기를 반납할 것을 촉구했지만, 강경파인 정상용과 김종배 등은 여기에 반대하고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그렇게 충돌하던 양측은 강경파 박남선이 권총을 빼들고 강경하게 나서며 무기반납과 투항을 주장하는 사람은 없애버리겠다고 소리쳤다. 


 밤 9시경 결국 김창길 등 온건파는 도청을 빠져나갔다. 한편 도청 부근에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남아 있던 200~300여 명의 학생과 시민들은 시민군에 편입되었으며, YWCA에는 70여 명의 대학생이 남아 투쟁을 돕기로 하였다. 그 사이 학생과 수습위원 11명이 계엄군 측을 방문하여 진압을 늦춰달라고 요구했지만, 군에서는 "무장을 해제하고 무기를 반납하라"면서 기한은 밤 12시까지라고 했고, 진압작전을 일방적으로 통보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편, 시민군은 결전을 준비하며 나이가 어린 학생들과 여성들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부탁했는데, 진압작전을 앞둔 시민군의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도청에서는 상황실, 조사반, 민원실, 지하 무기고 등의 구역에서 각 항쟁지도부와 시민군 간부들과 대원들이 포진해 있었다. 시민군의 취사와 홍보를 담당하는 여성들도 그곳에 같이 머물고 있었다. YWCA에서는 70여 명의 시민군들이 윤상원의 지도 아래 훈련을 받았고, 광주 시내에서는 50여 명의 기동타격대원들이 거리를 순찰하였다. 이 외에도 YMCA, 전일빌딩,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계림국민학교 등의 지역에서 적게는 10명, 많게는 수십여 명의 시민군들이 포진해 있었다. 

 시민군들은 최후의 저항을 준비하면서 가족들과 작별인사를 하기도 했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오기도 했다. 자정이 넘고 새벽이 되면서 시민군들은 계엄군을 기다리다 지쳐 잠이 드는 경우도 있었다.   

  

 ⑧ 5월 27(): D+9     


 0 계엄군은 상무충정작전을 시작해 광주 시내의 시외전화선을 차단하고 시민군 진압 작전에 돌입했는데, 이때가 5,18의 마지막 날이 시작된 시간이다. 

특공조들은 시민들의 반발을 피하고자 20사단 병력으로 위장하려고 녹색 군복을 입은 상태였고,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장성들은 진압작전에 참여하는 계엄군들을 치하하며 진압작전을 독려하였다.     

 특공조들은 5개 방향으로 광주로 접근하여 광주공원, 관광호텔, 전일빌딩 등을 점령하고 최종 목표지인 전남도청까지 완전히 장악한다는 작전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각 부대별로는 제3공수여단이 도청을, 제11공수여단이 관광호텔, 전일빌딩, YWCA를, 제7공수여단은 광주공원을 각각 작전지역으로 맡았다. 또 제20사단은 지원동→광주천→적십자병원→전남도청 남방, 지원동→전남대학교병원→전남도청 정문, 백운동→한일은행→전남도청 정문 등 3가지 경로로 들어오고, 제31사단은 화정동→양동→유동 삼거리→금남로→전남도청 정문 경로로 들어오기로 하였다. 이 작전을 위해 47개 대대 2만 317명이 광주로 들어왔고, 이 중 실제 전투에 참여할 숫자는 6,168명이었고 특수작전을 펼칠 병력은 317명이었다.       


 새벽 2 즈음 되어 계엄군의 동선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고, 지쳐서 잠든 시민군들은 모두 깜짝 놀라서 일어나 카빈소총과 총알을 대원들에게 배급하고, 도청 내의 여성들을 피신시켰다. 도청에서는 건물은 물론이고 주변 지역 구석구석에 시민군들이 포진하였다. YWCA에서는 투사회보 제작팀, 들불야학 구성원, 고등학생 등이 있었는데 어린 학생들과 여성들을 대피시키고 나니 30여 명이 남았다.

 기동타격대는 1조와 3조가 도청 부근을, 2조가 시외버스 공용터미널을, 5조가 광주역 부근을, 6조가 도청 옆 상무관을, 7조가 도청 안 2층에 각각 배치되었다. YMCA에서는 예비군들로만 별도로 4개 분대가 구성되어 도청과 계림동 방면으로 출동하였다. 시민군은 당시 상황실장 박남선의 지휘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행동했다.      

 새벽 3시 30 즈음에 시민군들의 배치가 끝이 났는데, 전체 340여 명 정도의 인원이었고,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은 민원실 2층 강당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계엄군이 조금씩 밀려오는 듯 그 사이에도 총소리가 가끔씩 들려왔다.  


 새벽 3시 50 홍보부에서 활동하던 박영순이 눈물을 흘리면서 마지막 방송을 하였다. 그녀는 도청 상황실 내의 방송실의 기기를 이용해 울먹이면서 방송을 했고, 방송은 도청 옥상의 스피커를 통해 광주 시내에 퍼져갔다. 깨어있던 시민들은 그 방송을 들었고, 두려움에 밖으로 달려 나오지는 못했으나 그 목소리를 잊지 못했다. 

 새벽 4시를 전후하여 방송은 계엄군의 진압이 임박하자, 기획위원 이양현이 전원을 내리면서 중단되고 말았다. 이 때에는 이제 계엄군들이 외곽지대는 물론이고 경고 방송을 하고 행진곡을 울리면서 광주 시내에 진입하여 각지의 시민군을 제압하며 전남도청을 옥죄고 있었다.      


 새벽 4 계엄군은 마침내 전남도청을 완전히 포위했다. 계엄군은 전남도청으로 난입하여 시민군들을 보이는 족족 공격하여 체포하거나 사살했다. 항쟁지도부와 시민군 간부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은 도청 민원실에 있다가 계엄군의 총을 맞고 살해되었고, 그와 함께 있던 김영철과 이양현은 체포되었으며, 정해직, 윤강옥, 정상용, 박남선 등도 계엄군에게 붙잡혀 도청 밖으로 끌려 나갔다. 수습위원으로는 유일하게 시민군과 함께 했던 이종기 변호사도 계엄군에게 포박당했다. 그렇게 도청 내의 각 구역은 하나씩 계엄군에게 점령당했고, 시민군들은 하나 둘 저항력을 잃어갔다.      


 새벽 5시경 계엄군은 "폭도들은 투항하라. 너희들은 포위됐다. 총을 버리고 투항하면 생명을 보장한다."라며 KBS를 통해 대대적으로 방송했다. 

 새벽 5시 10분경 계엄군이 전남도청을 완전히 장악하였고, 진압작전은 성공적으로 종료되었는데, 시민군 16명이 목숨을 잃고 200여 명이 체포되었고, 그에 반해 계엄군의 피해는 사망자 0명, 부상자 2명이 전부였다. 소설 ’소년이 온다‘의 주인공 문재학 열사가 목숨을 잃은 것도 이때다.

 같은 시간 전일빌딩, YMCA, 관광호텔에서는 시민군이 얼마 없었기에 계엄군에 의해 쉽게 제압되었다. 

 같은 시간 YWCA에서는 계엄군과 시민군 간 1시간 정도의 교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도청에서처럼 압도적인 화력을 가진 계엄군을 시민군이 이길 수 없었다. 결국 투사회보 제작을 담당하던 박용준이 피살당하고, 여러 명의 시민군들이 총에 맞아 심한 부상을 입었다. 

 같은 시간 광주공원에서는 10여 분 정도의 교전이 발생하여 시민군 1명이 사망하였다. 

 같은 시간월산동 부근에서는 충돌로 인해 7공수여단 출신 군인 1명과 시민군 1명이 사망하였다. 

 같은 시간 계림국민학교에서는 10여 분 간의 교전으로 15명의 시민군이 체포되었고, 근처에 있던 광주고등학교 수위 양동선(45)이 여기에 말려들어 총을 맞고 사망했다. 


새벽 6시경이 되자 광주 시내는 계엄군의 손아귀에 들어왔고, 시민군의 저항이 완전히 분쇄되었다. 

 진압 직후에 광주의 상황은 처참했다. 거리와 건물에는 사망자와 부상자가 여기저기 방치된 채 있었고, 핏자국도 무수히 많았는데, 계엄군들은 죽은 사람들을 끌어내어 한쪽에다가 모아놓았다.

 계엄군은 체포된 사람들에게는 무수한 구타를 가하며 줄을 세워 기합을 주었다. 그들은 시민군이 조금이라도 말을 듣지 않을 시에는 군홧발과 개머리판으로 마구 때렸고, 포박한 이들의 등에다가 '총기소지', '극렬', '실탄소지'라며 혐의를 빨간 펜으로 휘갈겼다. 시민군들은 그 상태에서 굴비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군용트럭을 타고 상무대 등으로 실려가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다. 

 계엄군은 20사단에게 도청을 인계하였고, 아침 동안 광주 시내에 남은 일부 시민군마저 모조리 잡아들였고, 거리마다 통행을 막고 검문을 실시했다. 그런 와중에도 계엄군의 발포가 이어져 이금재(29)와 김명숙(15)이 목숨을 잃었다. 모든 진압작전을 끝낸 계엄군은 철수하였고, 기갑학교 소속의 장갑차와 탱크들이 광주 시내를 한 바퀴 돌면서 위력시위를 가하였다.     


 오후 8시 50 끊겼던 시외전화가 다시 이어졌고, 경찰이나 공무원 등은 직장으로 복귀하면서 5.18은 끝이 났다.

 밤 9 KBS에서 방영한 KBS 9시 뉴스 방송에서 광주민주화 운동을 반국가 폭동으로 매도했는데, 이 뉴스는 군부의 언론통제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는지 단적으로 알 수 있는 방송자료이며, 이런 언론 매체들의 왜곡 보도는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전까지 전방위적으로 진행되었다. 


(3) 5.18 이후     


 5월 28 항쟁 직후 5.18의 진실을 알리려는 움직임이 일어나 70년대부터 반유신운동을 벌였던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이 5.18의 진실을 알리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같은 날 유족들은 '5.18광주의거유족회'를 결성하고 신군부의 탄압에 맞서며 모임을 열었다. 감시를 피하기 위해 모임 장소는 늘 바뀌기 마련이었지만 유족들은 군경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모임을 이어갔다.

 5월 29 정부는 항쟁 진압 이틀째되던 날 상무관에 안치되어 있던 시신들을 쓰레기차에 실은 채로 장례 절차도 없이 망월동 묘지에 매장했다. 

군경과 계엄당국은 미행, 감시, 납치, 격리, 감금, 체포, 협박, 회유 등 갖은 방법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방해하고 더 이상의 저항을 분쇄하려 들었고, 구속자들과 부상자들에게는 무자비한 고문이 자행됐으며, 유가족들은 폭도의 가족이라는 꼬리표를 달아야 했다. 하지만 이런 탄압에도 남은 자들의 투쟁은 계속되었다.      

 5월 30 서강대학교 학생이었던 김의기가‘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발표하고, 종로5가 기독교 회관 6층에서 투신하여 목숨을 잃었다.      


 5월 31 광주의 저항 시도까지 유혈진압으로 마무리한 신군부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약칭 국보위)라는 초법적인 기구를 설치하여 행정, 입법, 사법 삼권을 모두 장악하였다. 국보위 위원장은 최규하 대통령이었으나 바지사장에 불과했고, 모든 실권은 상임위원장 전두환과 신군부가 쥐었다.

 같은 날 계엄사령부는 민간인 144명, 군인 22명, 경찰 4명 등 합계 17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민간인 127명, 군인 109명, 경찰 144명이 부상당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이 발표를 믿는 시민들은 아무도 없었다. 

 실제 수많은 증언이나 단편적 에피소드들만 분석해도 이 통계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수치인지 알 수 있었다. 5.18 기간 중 오랫동안 집을 떠난 뒤로 실종 신고가 접수되지 않은 이들까지 합하면 최대 2000여 명이라는 주장도 있었으나 현재 확인할 길은 없다. 이렇게 5.18 당시 사망자 수가 제대로 집계되지 못한 이유는 당시 실시 20년이 채 안 된 주민등록제도 시행이 미흡해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지 않은 이들이 적지 않았고 신군부가 사상자 수를 은폐하기 위해 트럭에 싣고 암매장하거나 소각했기 때문이었다. 

 광주에서 침례회 목사로 일한 아놀드 피터슨은 당시 광주 인구가 75만 명이고, 광주의 각 침례교회에 출석자 2천 명 중 사망자가 2명이었으며, 당시 국군에서 일한 친구가 5.18 희생자를 832명으로 확인했다고 들은 것을 근거로 사망자는 800여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이후 신군부의 발표에서조차 사망자 수는 점차 늘어났으나 문제는 사망자 수가 아닌 학살 자체를 가벼이 보는 신군부의 태도였다.    

  

 6월 9 성남시의 노동자 김종태가‘광주 시민학생들의 넋을 위로하며’라는 유인물을 뿌리다가 끝내 분신하여 사망했다. 이외에도 학생들과 일반시민들은 개인적 혹은 조직적으로 5.18에 대한 유인물을 뿌리고 다녔다.      

 7월 22 당시 계엄사령관 이희성이 외신 기자회견에서 "광주 사태는 다른 나라의 관점에서 보면 '마이애미 폭동' 수준이다."라고 밝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무자비한 진압 이후 항쟁은 폭동으로 매도됐고 관련자들의 고통도 시작됐다.      


 9 개강 이후부터는 대학에서 유인물 중심의 저항이 여기저기서 벌어졌고, 외국의 유학생들은 신군부를 규탄하고 5.18을 추모하는 내용의 선언을 발표하기도 했으며, 광주에서는 종교계를 중심으로 진상규명 운동이 벌어졌다. 

한편 계엄당국은 재판 전에 구속자들에 대한 고문수사를 통하여 5.18이 북한과 연계되어 있고, 김대중이 이 사건의 배후라는 것을 조작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구타, 성고문, 인격모독을 포함한 고문이 자행되어 많은 이들이 고생해야 했고, 그러는 사이 구속자들에 대한 군사재판날짜가 다가왔다.    

   

 10월 5.18 구속자들에 대한 군사재판이 시행됐지만, 군사재판에서는 피고인의 변호사 접견, 진술조서 검토, 재판기일 발표 등 일반적인 재판이 요구하는 것들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404명이나 기소된 대형재판임에도 교실 한 칸보다 약간 넓은 공간이 재판장의 전부일 정도로 환경이 열악해 한 줄에 20~30명씩 빽빽하게 앉아 있어야 했고, 방청기회도 피고인당 1명으로 제한됐으며, 재판 진행도 뒤죽박죽이어서 계엄당국이 제시한 대부분의 공소사실의 진위가 반박되었음에도 법정은 요지부동이었고, 심지어 없는 사실마저 조작하여 공소사실에 집어넣기까지 하였다. 

 이런 재판에서 1심에서 사형 5명, 징역 5~20년 163명, 선고유예 또는 집행유예 80명이 선고됐다. 이러한 판결에 구속자, 변호인, 구속자 가족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항거했다. 우선 구속자들은 서슬퍼런 고문을 받았음에도 군사재판에서 시종일관 당당함을 보였고 감옥에 수감되었을 때도 힘을 모아 저항했다. 변호인들은 내란죄의 법리 상 문제를 꼬집어 5.18이 폭동이 아니라 "집권자의 독재를 거부한 시위"이자 "비조직 대중들의 저항운동"임을 역설했다. 또한 공소사실 내의 모순을 집어내어 수사관과 법관들을 쩔쩔매게 만들었다. 

 구속자 가족들은 감옥 밖에서 옥바라지와 석방운동에 나섰고 군경과 싸우면서 구속자들을 응원하였다. 곧 구속자 가족들을 중심으로 하여 '5.18구속자가족협의회'가 조직되었고 석방운동과 사형수 구명운동이 펼쳐졌다. 회원들은 여기저기에 탄원을 했으며, 국내외 유명인사들과 원로들을 방문하여 억울함을 호소했고, 심지어 전두환에게 탄원서를 보내기까지 했다. 또한 재판정에서 대대적인 항의를 벌이거나, 탄원서를 혈서로 쓰거나, 명동성당과 미국문화원에서 농성을 하거나, 전두환의 광주방문을 저지하는 등 다양한 투쟁방식을 동원하였다.      


 12월 19 대학생들과 가톨릭농민회 회원들이 5.18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규탄하며 광주 미국문화원에 불을 질렀고, 시인 김준태는 전남매일신문에‘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라는 시를 썼다가 검열당해 대폭 삭제되고 일신상의 불이익을 겪어야 했다. 

 한편, 대학가에서는 5.18에 대한 항쟁 측 기록물이 나돌았는데, 대표적인 팸플릿으로는 광주항쟁의 기록을 체계적으로 기록한 광주백서를 꼽을 수 있었다. 광주백서는 1980년 12월부터 조봉훈, 소준섭이 관련문헌 수집과 항쟁참가자들과의 인터뷰를 정리해 기록한 것으로 전국에 최초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광주학살의 진상을 알렸다. 그리고 어두운 골방에서 이 팸플릿을 읽은 학생들은 이제 몸을 일으켜 학살자 전두환 군부독재와의 투쟁에 나서게 되었다.  

 단행본으로는 황석영의 이름을 빌린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가 돋보였고,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넘어넘어'라는 약칭으로 불리며 대학생들 사이에 비밀리에 퍼져나갔는데, 매우 적은 케이스이지만 당시 계엄군으로 투입된 경험을 가진 일부 고등학교 교련교사가 학생들에게 증언한 당시 상황은 예상하다시피 극과 극으로 엇갈렸다.      


 1981부터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5.18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제가 망월동에서 열렸다. 

 같은 해 광주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을 시발로 대학가와 운동권에서는 본격적으로 반미운동이 시작됐다. 


 1982년 3월 18, 부산에서 문부식을 비롯한 일련의 대학생들이 오후 2시경 부산 미국문화원 건물에 불을 지르고 시내에 반미 성향의 유인물을 뿌린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이 일어났다. 미국문화원에서의 화재는 1시간 만에 진압되었으나, 동아대학교 학생 1명이 사망하는 불상사가 있었다. 이 사건은 커다란 파장을 낳아 학생들은 물론이고 이들을 도와준 혐의로 신부도 구속되어 정권 대 천주교의 대결로 치닫기까지 하였다. 

 같은 해 10월 12 수배자로 살다가 1982년 체포되어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어 옥중투쟁을 이어나가던 박관현이 단식투쟁을 하다 끝내 사망했고,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구속되어 옥중투쟁을 하고 있었는데, 그의 죽음으로 인해 수감자들은 물론이고 대학생들과 종교계에서 항의 시위가 발생했다

같은해 12 5.18 구속자 전원이 석방되었다.      


 1983 정부당국은 망월동 5.18 희생자 묘지의 이장을 강요하며 유가족들 간의 갈등을 조장하였다. 또한 위로금을 지급해준다면서 일부 유족들에게는 지급 대상에서 제외해버리는 기만도 일삼았다. 부상자들에게는 제대로 된 치료와 관리를 시행하지 않았으며, 구속자에게는 형편없는 대우를 행했다. 이에 유가족들은 정부의 탄압에 맞서 망월동 묘지를 지키고자 이장을 반대하며 투쟁하였다. 부상자들은 '5.18광주의거부상자회'를 결성하여 치료대책을 요구하며 청와대 상경투쟁을 벌였다. 

 같은 해 말 학원자율화로 학생운동이 다시금 역량을 회복하였다. 부활한 총학생회 및 학생운동단체와 함께하면서 학생들의 시위는 더욱 거세져갔다. 특히 5월만 되면 학생들의 저항은 유독 격렬해져 각지 대학에서 선언물 발표와 데모가 줄을 이었다. 학생들은 5.18을 기념하는 추모제를 개최했고 행사가 끝나면 으레 교내시위는 물론이고 가두시위까지 감행하여 전투경찰과 충돌, 돌멩이과 화염병을 던지며 일대 접전에 나섰다. 또한 5.18 관련자들과의 연대도 시도하여 망월동에서의 5.18 추모제에 참석하는 활동도 했다. 그런가하면 대학생들의 자결투쟁도 발생하여 적지 않은 수의 학생들이 5.18에 대한 진상규명과 전두환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목숨을 잃었다. 미국의 5.18 책임을 묻는 활동도 진상규명운동의 또 다른 한 축이었다.   

   

 1984년 11 '전남민주청년운동협의회(전청협)'가 조직되어 5.18 진상규명은 물론이고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요구했다.

 같은해 12월에는 전청협을 비롯한 5.18 관련자 단체들과 종교청년단체들이 연합하여 '전남사회운동협의회(전사협)'을 조직하였으며, 기성세대에서는 '광주5.18민중혁명희생자 위령탑건럽 및 기념사업 범국민운동추진위원회(5추위)'를 조직하여 보다 온건한 방식의 투쟁에 나섰는데, 이후 민주화운동 단체들도 속속 조직되어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이 만들어졌다. 또한 82년 12월 전원 석방된 구속자들이 들이 '5.18구속자협의회'를 발족시켜 진상규명운동이 벌어졌고, 대학가에서는 소위 5월투쟁이라는 5.18 관련 시위가 계속 발생했다. 유가족을 비롯한 5.18 관련자들의 진상규명 투쟁이 계속되자 두려운 정부당국은 갖은 탄압으로 대응했다.      


1985년 5월 23 함운경, 신정훈 등 서울지역의 5개 대학교 학생 73명이 서울 미국문화원 건물을 점거하여 나흘 동안 농성을 벌인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사건이 일어났다.

 학생들은 농성을 하는 동안 "광주사태 책임지고 미국은 공개사과하라."는 전단을 창문에 붙이는 등 미국의 5.18 책임을 규탄하였는데, 이 사건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이외에도 강원대생 성조기 소각 사건, 대구 미국문화원 폭발 사건, 제2차 광주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광주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사건, 부산 미국문화원 투석 사건 등 반미시위와 충돌은 80년대 내내 이어졌다. 5.18 진상규명운동은 이제 80년대 민주화운동에 있어서 하나의 주류가 되었다. 이제 5.18 관련자들과 민주화운동, 학생운동 간의 연대와 단결이 더욱 활발하게 펼쳐졌다. 5.18 관련자들은 자신들을 박해하려는 군경에 맞서 치열하게 싸웠고, 점차 전투적인 자세를 보였다. 대학생들과 재야도 공격적으로 나섰다.  

    

(4) 5.18의 결론과 후유증     


 한강 작가의 소설 ‘소년이 온다’는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 열흘간 있었던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의 상황과 그 이후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한강 작가의 소설 ‘소년이 온다.’가 5.18 왜곡인지 아닌지는 필자가 읽어보지 않았으니 알 수 없으나, 소설 속의 문동호가 역사 속의 문재학임은 사실이다.


 한강 작가의 소설 ‘소년이 온다.’가 그리고 있는 5.18이 왜곡인지 아닌지는 위에 올려진 역사적 사실에 따라 본인이 판단하시기 바란다. 하지만 판단하기 전에 이 두 가지 사실만은 알아야겠다.     


첫째, 광주에서 일어난 5.18 민주화운동을 신군부가 보낸 반란군이 학살로 제압하면서 서울의 봄은 막을 내렸고, 이로 인해 한국의 민주화가 6.10 민주 항쟁이 일어나는 1987년까지 미뤄지게 되었다는 사실인데, 이는 아래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객관화된 사실이고, 따라서 지나간 잘못을 스스로 인정하고, 오염된 진실을 바로잡는 철저한 자기반성이 필요하다. 

 1987년 6월 탄생한 항쟁의 대표 단체인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에서 밝힌 5.18에 대한 증언과 자료를 종합하면, “당시 모든 계엄군이 일괄적으로 범죄를 저질렀다고 볼 수는 없으나, 계엄군의 만행은 심각한 수준을 넘어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수준에 달했다.”는 것이 팩트인데, 반공주의라는 지배 이데올로기로 무고한 시민을 무차별로 학살한 반인륜적 행위를  합리화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2000년 5월 19일 MBC 스페셜 (충정작전, 그후 20년) 방송 내용에 따르면, “ 계엄군들이 빨갱이를 잡으라는 명령을 수행했다고 주장하지만, 눈에 보이는 무고한 광주시민 모두가 빨갱이가 아니라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일이고, 따라서 자신들이 저지른 집단광기에 대한 자기 합리화의 사례로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여 계엄군이 시민을 학살한 것은 사실이다.  

 국제인권감시단 아시아 지역 담당 지부에서는 계엄군을 나치돌격대에 비유하기도 했는데, 군인과 경찰은 법률에 따라 무력의 소유 및 사용을 정당하게 인정받는 집단이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국민의 존엄성과 인간의 고귀함에 대한 깊은 인식이 필요하고, 그래야 집단광기에 빠지지 않는 정신적 소양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5.18로 인한 공권력의 변화인데, 이것은 필자 개인의 생각으로 참고만 하시기 바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동시 창설된 육군은 비록 그동안 많은 잘못을 저질렀지만, 6.25를 통해서 그리고 5,16 군사혁명 이후의 경제개발을 통해 조금은 명예를 회복해 공권력이 되었는데, 5.18을 계기로 군은 똥통에 빠져 1993년 5월 김영삼의 하나회 척결로 한국 역사에서 군의 국내 정치 개입이 금기시되고, 민주화 시대가 되면서 차츰 검찰이 공권력이 되는 시대로 넘어가는데, 여기서 경찰이 친일 경찰의 역사 때문에 신뢰를 잃었는데, 검찰은 친일의 역사가 있으면서도 어떻게 살아남았느냐는 하는 것이고,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검찰의 역사를 살펴보아야 한다. 

 일본은 1876년 강화도 침략 때부터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려는 야욕을 불태우고 있었는데, 조선 정부는 1884년(고종 21) 청나라로부터의 독립과 조선의 개화를 목표로 급진개화파가 일으켰던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청나라의 군사를 개입시켜 3일 만에 실패로 돌아가게 하고, 또한 1894년(고종 31) 동학(現 천도교의 전신) 세력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민란이었던 동학농민운동을 일제를 끌어들여 진압한 이후, 일본은 그해 6월 21일 군대를 동원해 불법적으로 경복궁을 습격해 점령하고 고종을 감금했다. 

 당시 일본공사 오토리(大鳥) 공사는 조선정부에 이른바 내정개혁방안 강령 5개조를 강요했는데, 이 과정에서 군국기무처가 설치되어 김홍집이 총재관을 맡았고, 의정부 관제안이 1894년 6월 28일 가결됐으며 7월 20일에 정식으로 시행됐다. 이를 필두로 조선의 모든 제도를 일본식으로 전환시키려는 조치가 이뤄졌는데, 이것이 곧 갑오개혁이었고, 갑오개혁에 의해 일본식 재판소구성법(裁判所構成法)과 1895년 3월 '평리원(平理院) 검사국' 설치로 검사라는 개념이 도입되어 검찰에게 공권력이 주어졌다. 

 결국, 갑오개혁은 조선을 병탄하려던 일본이 먼저 조선에 일본식 제도를 강제로 적용해 근대화로 포장한 일제의 침략 도구로 만들려는 목적으로 강행된, 즉 조선 식민지화의 토대를 쌓기 위한 일제의 사전 공작이었던 것인데, 사실상 갑오개혁에 의해 그 야욕은 이미 절반 이상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결국, 갑오개혁의 주도자였던 김홍집은 조선인들로부터 왜대신(倭大臣)이란 비난을 받았으며, 일본 낭인들에 의해 명성황후가 피살된 을미사변으로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몸을 피한 아관파천 당시 성난 군중들에 의해 타살됐지만, 평리원 검사국은 일제 강점기 때 명칭이 '고등법원 검사국(고등재판소)‘가 되어 1912년 조선형사령을 제정하는 등 일제 주구가 되어 공권력을 행사했다. 

 조선형사령(朝鮮刑事領)의 핵심은 바로 검사와 사법경찰에게 예심판사에 준하는 강제처분권을 공권력으로 부여해 영장제도를 배제한 것이었다. 즉 검사가 현행범이 아닌 사건이라도 "급속한 처분이 요하는 때"는 공소 제기 전에 영장을 발부해 검증과 수색과 물건 압수를 하거나 피고인과 증인을 신문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또 검사에게는 20일 이내의 피고인 구류권도 허용해 판사의 영장 없이도 피의자를 일정 기간 구금한 채 강제 수사할 수 있게 한 것인데, 더구나 "급속한 처분이 필요한 때"라는 불명확한 규정으로 그 판단의 주체를 전적으로 검사에게 맡기고 있었다.

 결국, 조선의 식민지 지배를 위해 인신구속과 구금이 가장 필수적인 요소로 파악했던 일제는 조선 총독을 정점으로 총독이 식민지 검사를 임명하고 그 하부 보조기관으로 사법경찰관을 배치해 인신구속과 체포를 무소불위로 자행함으로써 식민지 통치 권력의 극대화를 꾀했던 것인데, 이 조선형사령이라는 악법에 의해 무수한 독립운동가들과 선량한 조선인들이 희생됐다.

 해방 후 일제 검사는 친일검사가 되었고, 일제 검사의 잔영 덕에 수사권까지 갖게 되어 일제강점기의 이러한 독소 조항은 해방 후에도 이어졌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경찰이 법원에 숨어 있는 검찰을 대신해 행한 악행으로 얻은 악명 높았던 일제 순사라는 이미지 때문에 경찰에는 수사권이라는 공권력을 줄 수 없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결국 국회는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한 경찰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검찰에게 공권력으로 기소권뿐 아니라 수사권과 수사지휘권까지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술했던 것처럼 6.25를 계기로 군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군이 권력층이 되어 검찰은 군의 시녀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5.18을 계기로 군의 힘이 약해지고 민주화 세력의 힘이 강해지면서 면서 정치세력의 시녀가 되어 공권력을 행사하면서 비로소 권력의 중심으로 가는 길이 열렸고, 민주화 세력이 곪아 터져가는 시점에 정치세력의 중심이 되면서 결국 권력을 얻게 된 것이다. 

 최근 검찰총장에서 일약 대통령이 된 검찰 출신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검사의 공권력이 특히 이상한 방향으로 행사되고 있는데, 일제로부터 민주화 시대까지 권력에 빌붙어 살아남기 위해 전전긍긍하면서 생겨난 검찰 특유의 상명하복과 끼리끼리가 강조되는 검찰의 이런 성향 때문이 아닌가 한다.     


       


 한민담서(韓民談書) 5-4. "6.25와 한강의 역사 왜곡의 진실"으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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