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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S. 버로스의 <퀴어>

영화 <퀴어> 2025년

by 노용헌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네이키드 런치(Naked Lunch)’(2025)가 34년 만에 4K 국내 최초 개봉을 앞두고 있는 만큼 원작 소설 작가 윌리엄 S. 버로스에도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퀴어’ 역시 윌리엄 S. 버로스의 동명 자전적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윌리엄 S. 버로스는 잭 케루악, 앨런 긴즈버그 등과 함께 전후 경제적 풍요를 누린 1950년대 미국에서 기성세대의 질서와 규칙, 가치관 등에 염증을 느낀 청년들이 음악, 여행, 음주, 약물, 동성애 등을 즐기며 질서에 반기를 들었던 ‘비트 세대(Beat Generation)’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하나다. 윌리엄 S. 버로스와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는 ‘인터존’의 실제 배경인 모로코 탕헤르에 함께 가 소설의 발자취를 따라가본 것은 물론, 윌리엄 S. 버로스는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영화화 소식에 “그 누구보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가 영화화를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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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영화와 문학 분야에서 파격과 실험 정신으로 독보적이었던 두 대가들이 만난 만큼 '네이키드 런치'는 “크로넨버그와 버로스의 기괴함의 시너지가 합쳐진, 이 영화는 차원이 다른 걸작이다!”(The Washington Post), “매혹적이지만 까다로우며, 동시에 기막히게 재미있는 작품!”(Variety) 등의 해외 유수 매체들로부터 호평받은 만큼 34년 만의 첫 국내 개봉에 더욱 기대감이 증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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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자는 스스로의 이미지를 그다지 높게 보지 않는다. 가장 더럽고 초라한 옷을 입고, 다른 사람의 눈길을 끌 필요를 전혀 느끼지 않는다. 탕헤르에서 중독자로 지내는 동안 나는 ‘엘 옴브레 인비지블(El Hombre Invisible)’, 즉 ‘투명 인간’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런 자기 이미지 분열은 종종 이미지를 마구잡이로 열망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빌리 홀리데이는 텔레비전 시청을 멈추었을 때 자신이 중독에서 벗어났음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내 첫 소설 『정키』에서 주인공 리는 조화롭고 자족적인 인물,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로 가는지 잘 알고 있는 인물로 등장한다. 『퀴어』에서 리는 분열되고, 절박하게 만남을 바라고, 자신과 자신의 목적에 전혀 확신이 없는 인물이다.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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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에 함께 들어갈 이 글을 쓰기 시작하자, 엄청난 거부감에 몸이 마비되었다. 작가가 마주하게 되는 구속복 같은 장벽. 『퀴어』의 원고를 훑자, 읽지 못하겠다는 생각만 든다. 나의 과거는, 운이 좋은 사람만 탈출할 수 있는 독이 든 강이었다. 기록된 사건들이 벌어진 뒤 이미 긴 세월이 지났어도 보자마

자 위협을 느끼게 되는 독이 든 강. 『퀴어』에 대해 쓰기는커녕 읽기조차 힘들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다. 말 한마디 몸짓 하나에 진저리가 난다.” 억지로 들여다보려 하자 이 거부감의 이유가 더 명확해진다. 이 책이 만들어진 동기는 내가 전혀 언급하지 않은, 사실은 애써 피한, 어떤 사건이다. 1951년 9월, 내가 아내 조앤을 총으로 쏘아 죽게 만든 사고다.(P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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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는 어떤 관계에서도 친밀감을 원했다. 칼에게서는 친밀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청년은 정중하게 리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이해하는 듯했다. 칼은 리가 자신에게 성적 관심을 품고 있다는 사실에 처음에는 조금 주저하다가 결국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칼이 리에게 말했다. “우리가 안 만날 수는 없으니까. 내가 다른 것들에 마음을 바꿀 수밖에 없네요.”

그러나 리는 관계를 더 이상 진전시킬 수 없음을 곧 깨달았다. ‘상대는 미국 아이야. 이 정도까지 왔으면 끝까지 갈 수도 있잖아? 물론 칼은 퀴어가 아니긴 해. 하지만 협조적인 사람들도 있잖아? 그렇다면 장애물이 뭘까?’ 리는 결국 답을 추측했다. ‘칼은 자기 어머니가 좋아하지 않을까 봐 더 이상 못 나가는 거야.’ 리는 이제 정리할 때임을 알아차렸다. 오클라호마시티에 살던 유대인 동성애자 친구가 떠올랐다. 리가 그 친구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왜 여기 살아? 원하는 곳 어디서도 살 만한 돈이 있잖아?” 대답은 이랬다. “내가 멀리 이사하면 우리 어머니는 죽어.” 리는 할 말을 잃었다.

어느 오후, 리는 칼과 함께 암스테르담 애비뉴 공원 옆을 걷고 있었다. 갑자기 칼이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고 리에게 악수를 청했다. “잘 지내요.” 칼은 그렇게 말하고 전차로 달려 갔다.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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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는 코아윌라로 내려갔다. 발걸음을 쉬지 않았다. 강도 현장에서 도망치듯 빠르고 과감하게 걸었다. 벨트 밖으로 뺀 빨강 체크 셔츠, 턱수염과 청바지, 고국을 떠난 사람들이 늘 입는 차림새의 사람들을 지나쳤다. 허름하다고 할 만한 평범한 옷차림을 한 일군의 젊은이들도 지나쳤다. 리는 그 사람들 사이에서 유진 앨러턴을 보았다. 앨러턴은 키가 크고 아주 말랐다. 광대뼈가 나오고, 입술은 크고 연붉었으며, 황갈색 눈은 술에 취했을 때 희미하게 보라빛으로 빛났다. 금빛 갈색 머리는 햇빛을 받아 염색을 한 듯 더욱 밝아 보였다. 눈썹은 곧고 짙었으며, 속눈썹도 짙었다. 아주 어리고 깔끔하고 순진한 동시에 꾸민 듯한 느낌에 섬세하고 이국적이며 동양적인 인상을 주는 모호한 얼굴. 앨러턴이 단정하고 깔끔한 적은 없었지만 누구도 앨러턴을 보고 지저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터였다. 때로 반쯤 정신을 놓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무심하고 느긋했다. 누가 한 뼘 옆에서 귀에 대고 말해도 듣지 못할 때가 많았다. 리는 씁쓸히 생각했다. ‘니코틴 결핍 증후군이겠지.’ 리는 앨러턴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미소를 지었다. 앨러턴은 놀란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미소는 짓지 않았다.

리는 약간 풀이 죽은 채 계속 걸었다. “이쪽으로 가면 수확이 있을지 몰라. ‘아 베르....’” 사냥개처럼 식당 앞에서 몸이 굳었다. ‘배고파..... 뭘 사서 요리하기보다 여기서 사 먹는게 빠르겠어.’ 리는 배고플 때나 술이나 모르핀이 필요할 때 참을성이 없어졌다. (P3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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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는 충동적으로 갑자기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앨러턴은 반 블록 앞에 있었다. 리가 앨러턴을 따라잡았다. 앨러턴은 돌아섰다. 치켜세운 눈썹은 펜으로 그은 양 검고 곧발랐다. 놀라고 약간 경계하는 표정이었다. 리가 제정신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리는 필사적으로 둘러댔다.

“아까 메리가 롤라스에 있었다고 말하려는 것뿐이야. 메리가 나한테 부탁했어. 이따가 5시쯤에 십아호이에 있을 거라고 전해 달래.”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다. 메리가 롤라스에 들렀고 리에게 앨러턴을 못 보았느냐고 묻기는 했다.

앨러턴은 마음을 놓았다. “아, 고마워요.” 이제 꽤 다정하게 물었다. “오늘 거기 가요?”

“그럴 거 같아.” 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재빨리 몸을 돌렸다.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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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리는 매일 5시 십아호이에서 앨러턴을 만났다. 앨러턴은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과 친하게 지내는 데 익숙했고, 리와 만나기를 기대했다. 앨러턴은 리처럼 대화하는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때로 리가 나타나면 다른 모든 것은 깜깜해지는 듯, 리에게 중압감을 느끼곤 했다. 리를 너무 자주 만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앨러턴은 구속을 싫어했다. 그래서 사랑에 빠진 적도, 절친한 친구를 사귄 적도 없었다. 이제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리가 나한테서 바라는 게 뭘까?’ 리가 퀴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퀴어라면 어느 정도 분명하게 여성스러운 면이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앨러턴은 리가 자신을 관객으로 여긴다고 결론지었다. (P50)


리는 문간에 서 있었다. "어쩌나, 뭐가 잘못됐을까? 술은 많이 안 마셨잖아." 잔에 물을 따라서 앨러턴에게 건넸다. "이제 괜찮아?"

"예, 그런 것 같아요." 앨러턴은 다시 침대에 누웠다.

리는 손을 뻗어서 앨러턴의 귀를 만지다가 얼굴 옆쪽을 어루만졌다. 앨러턴은 손을 위로 올려서 리의 손을 감싸고 꽉 쥐었다.

"이 스웨터 벗자."

"좋아요." 앨러턴은 스웨터를 벗고 다시 누웠다. 리는 구두와 셔츠를 벗었다. 앨러턴의 셔츠 단추를 풀고 손으로 갈빗대와 배를 어루만졌다. 앨러턴의 몸은 리의 손가락 아래에서 경직되었다. "세상에, 말랐네."

"몸집이 아주 가늘어요."

리는 앨러턴의 구두와 양말을 벗겼다. 앨러턴의 벨트를 풀고 바지 단추를 풀었다. 앨러턴이 몸을 둥글게 웅크렸고, 리는 앨러턴의 바지와 속옷을 아래로 당겨 벗겼다. 리도 바지와 속옷을 벗고 앨러턴 옆에 누웠다. 앨러턴은 적대감이나 혐오감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리는 앨러턴의 눈에서 기묘한 무관심을, 동물이나 어린아이에게서 볼 수 있는 냉정한 평정을 보았다.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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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를 되찾느라 온종일을 보냈다. 전당표도 앨러턴이 잃어버리고 없었다. 두 군데 사무실을 가야 했다. 관리들은 고개를 저으며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리는 미끼로 200페소를 더 꺼내 보였다. 결국 이자와 이런저런 비용을 더해 모두 400페소를 냈다. 리는 앨러턴에게 카메라를 건넸고, 앨러턴은 아무런 말도 없이 카메라를 받았다.

두 사람은 침묵 속에 십아호이로 향했다. 리가 들어가서 술을 주문했다. 앨러턴은 사라졌다. 한 시간쯤 지난 뒤 앨러턴이 와서 리 옆에 앉았다.

“저녁 같이 먹을래?” 리가 물었다.

앨러턴이 말했다. “아니, 오늘 밤엔 일해야 해요.”

리는 암울했다. 충격을 받았다. 토요일 밤의 온기와 웃음이 사라졌는데 그 이유조차 알 수 없었다. 사랑이나 우정에서 리는 말하지 않아도 직감으로 알 수 있는 관계, 무언 속에 생각과 감정을 주고받는 관계를 만들려고 늘 애써 왔다. 이제 앨러턴이 느닷없이 문을 닫았고, 리는 몸으로 아픔을 느꼈다. 자기 몸의 일부를 다른 사람을 향해 망설이며 내밀었다가 그 내민 곳이 잘린 기분이었다. 리는 피가 흐르는 지스러기를 믿기지 않는 듯 바라보며 충격에 휩싸였다.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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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아닌 다른 게 들겠죠.”

“난 같이 지내기에 까다로운 사람이 아냐. 서로 만족스럽게 협의할 수 있어. 너한테 손해될 건 없잖아?”

“자주성이 손해를 입죠.”

“누가 네 자주성을 간섭하겠어? 원한다면 남아메리카 여자 전부랑 자도 돼. 일주일에 가령 두 번만이라도 이 아빠를 다정하게 대하기만 하면 돼. 과한 부탁은 아니잖아? 마음대로 떠날 수 있게 왕복 티켓을 사 줄게.”

앨러턴이 어깨를 으쓱했다. “생각해 보죠. 일이 아직 열흘 남았어요. 일이 끝날 때 확답할게요.”

‘일이라……. 그 열흘 급여를 내가 주지.’ 리는 그렇게 말할까 생각하다가 대신 “알았어.”라고 말했다.

앨러턴의 신문사 일은 임시직이고, 앨러턴은 너무 게을러서 어떤 직업도 계속할 수 없었다. 따라서 앨러턴의 대답은 ‘아니오’라는 의미였다. 리는 열흘 뒤에 앨러턴을 설득하기로 마음 먹었다. ‘지금은 강요하지 않는 게 좋겠어.’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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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약이야. 먹었더니 죽고 싶을 만큼 구역질이 나더라. 토하고 싶은데 토할 수도 없어. 아주 괴로운 아스파라그라스인지 뭔지 여하튼 그런 거 알레르기 같아. 결국 페요테가 털뭉치처럼 단단하게 뭉쳐서 위로 올라오더니 내 목을 막아. 참을 수 없이 끔찍한 느낌이었어. 취하는 효과는 괜찮지만 그렇다고 그 불쾌감을 보상할 정도는 아니야. 눈가가 붓고 입술도 부풀고, 얼굴이나 감각이나 인디오처럼, 아니면 인디오가 그럴 것이라고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돼 버려. 그러니까 말이지, 원시적으로 되는 거야. 사물의 색들이 더 진해지지만 납작하고 평면적이 돼. 모든 게 페요테 식물처럼 보여. 그 밑에는 악몽이 숨어 있어.

페요테를 하고 나면 꾸는 악몽이 있어. 다시 잠들 때마다 악몽이 꼬리를 물어. 이런 꿈도 꿨어. 내가 광견병에 걸렸어. 거울을 보는데 얼굴이 변하고 늑대처럼 울부짖기 시작해. 이런 꿈도 있어. 내가 엽록소 중독이 되는 거야. 또 다른 엽록소 중독자 다섯 명과 내가 마약 상인을 기다리고 있어. 우리는 녹색으로 변해서 엽록소를 끊을 수가 없어. 한 방이면 완전히 녹아내리지. 우리는 식물로 변하고 있어, 정신병에 대해서 뭐라도 아는 거 있어? 조현병은?”

“별로 없어요.”

“조현병 사례 중에는 ‘자동 복종’이라고 알려진 현상이 있어. 내가 ‘혀 내밀어.’라고 말하면 넌 복종하지 않을 수 없는 거야. 내가 말하면, 아니, 어떤 사람이 말하더라도 넌 그대로 따라야 해. 그림이 그려져? 멋진 그림이지. 물론 명령을 내리는 사람이 자신이어야 멋진 그림이 되지. 자동 복종. 합성 인공 조현병. 명령하기 위한 대량 생산품. 그게 러시아의 꿈이야.

미국도 그리 별다르지 않고. 두 나라 관료들이 바라는 건 똑같아. 통제. 초자아, 즉 통제 기관은 광포해졌고 치료가 불가능해. 우연히도, 조현병이랑 텔레파시는 연관이 있어. 조현병이 있는 사람은 텔레파시에 아주 민감해. 그렇지만 전적으로 ‘수신자’지. 연관성을 알겠어?” (P107-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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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은 주재료가 어떤 뿌리채소와 바나나인 것을 감안하면 꽤 맛있었다. 저녁을 먹고 난 뒤 코터의 아내가 말했다. “여보, 이분들은 피곤할 거예요.”

코터는 레버를 돌려서 전원을 얻는 플래시로 길을 안내했다. 대나무 널빤지로 지은 80센티미터 너비의 오두막이었다. “두 사람 다 여기서 자면 될 거요.” 코터가 말했다. 코터 부인은 매트리스 대용으로 담요 한 장을 오두막에 깔았다. 이불로 쓸 담요를 한 장 더 주었다. 리는 벽 쪽으로 누웠다. 앨러턴은 바깥쪽에 누웠다. 코터가 모기장을 쳤다.

리가 물었다. “모기가 있어요?”

코터가 짤막하게 말했다. “아니, 흡혈박쥐요. 잘 자시오.”

“주무세요.”

리는 오래 걸어서 근육이 아팠다. 아주 피곤했다. 앨러턴의 가슴에 한 팔을 얹고 몸을 바싹 붙였다. 몸이 맞닿아 따뜻해지자 리의 몸에서 깊고 부드러운 감정이 솟구쳤다. 더 가까이 껴안고 앨러턴의 어깨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앨러턴은 짜증스레 움직이며 리의 팔을 밀쳤다.

앨러턴이 말했다. “좀 치울래요? 잠이나 자요.” 앨러턴은 리에게 등을 돌리고 모로 누웠다. 리는 팔을 거뒀다. 쇼크가 와서 온몸이 굳었다. 천천히 자기 손을 자기 뺨에 댔다. 몸 안에서 출혈이 일어나는 듯, 깊은 상심을 느꼈다. 눈물이 얼굴에 흘러내렸다. (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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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 전문가의 얼굴이 꿈에서 볼 수 있는 텅 빈 얼굴로 변했다. 입이 떡 벌어지고, 오래된 상아처럼 딱딱하고 누런 이가 드러났다. 몸이 천천히 가죽 안락의자 깊숙이 미끄러져 내려가더니, 의자 등에 모자 뒤가 밀려서 모자 앞 챙이 눈 아래까지 내려왔다. 눈은 모자 그림자 속에서 번쩍이며 오팔처럼 광채를 내고 있었다. 추적 전문가는 ‘조니가 시장에서 돌아오지 않네’를 허밍으로 부르기 시작하더니 계속하고 또 계속했다. 허밍은 한 소절 중간에 갑자기 멈췄다.

추적 전문가는 바람 부는 거리에 내려앉는 음악처럼 띄엄띄엄 무기력하게 말했다. “이봐, 이런 일을 수없이 겪었지? 이런 쓰레기 같은 일을 겪은 뒤에야 사무실로 걸어 들어와서 다정 파이낸스에 돈을 갚으려는 하찮은 인간들이 가끔 있긴 하지.”

한쪽 팔을 휘둘러서 손등을 아래로 향하게 하여 의자 옆 팔걸이에 올렸다. 손가락 끝이 검푸르게 변한, 여윈 갈색 손을 천천히 펴자 1000달러짜리 누런 지폐 한 다발이 나왔다. 손을 돌려 손바닥을 아래로 한 채 다시 의자 깊숙이 몸을 뉘었다. 눈을 감았다.

갑자기 고개를 한쪽으로 떨구더니 혀를 쭉 빼물었다. 지폐가 하나씩 차례로 손에서 떨어지더니 구겨진 채 빨간 타일 바닥에 놓였다. 따뜻한 봄바람이 갑자기 휙 몰아쳐 더러운 분홍 커튼이 방 안으로 펄럭였다. 지폐들이 방에서 휘날리다가 앨러턴의 발에 내려앉았다.

어느새 추적 전문가가 몸을 곧추세웠다. 눈꺼풀 뒤로 가늘고 긴 빛 한 줄기가 지나갔다.

“쪼들릴 때를 대비해서 넣어 둬. 이 중남미 호텔들이 어떤지 알지? 돈을 갖고 다녀야 해.”

추적 전문가는 앞으로 몸을 숙여서 팔꿈치를 무릎에 댔다. 의자에서 싸우러 나가기라도 하듯, 갑자기 몸을 일으키고 그와 동시에 한 손가락으로 모자챙 앞쪽을 눈 위로 밀었다. 문으로 걸어가서 오른손을 손잡이에 대더니 그 상태에서 몸을 돌려 뒤를 보았다. 닳은 글렌 체크 슈트 라펠에 왼손 손톱을 닦았다. 움직일 때마다 슈트에서 곰팡내가 풍겼다. 라펠 뒤쪽과 바지 커프스에는 곰팡이가 슬어 있었다. 추적 전문가가 자기 손톱을 내려다보았다.

“아, 저기....... 너의, 음....... 계좌 말인데. 내가 조만간 다시 올 거야. 그러니까, 앞으로.....” 추적 전문가의 목소리가 모호해졌다.

“우리가 어떤 협약을 하게 되겠지.” 이제 목소리는 크고 명확했다. 문이 열리자 바람이 방 안에 몰아쳤다. 문이 닫히자 커튼이 다시 제자리를 잡았다. 누가 잡아서 올려놓은 듯 커튼 한 자락이 소파 위에 늘어져 있었다. (P149-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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