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프로이드Freud> 1962년
1962년 존 휴스턴 감독이 '안나 O' 케이스를 각색하여 <프로이트: 비밀스런 열정>이라는 영화를 만들었고 사르트르도 각본에 참여했다. 몽고메리 클리프트가 프로이트 역을, 데이비드 맥컬럼과 수재너 요크가 그의 환자들 역을 맡았다. 프로이트를 다룬 영화로는 <프로이트의 마지막 세션>(2024), <담배 가게의 프로이트>(2018), <데인저러스 메소드>(2012), <프로이트의 모든 비밀>(1962), <프로이트: 정신 분석의 아버지>(1962), <프로이트의 살인해석>(2020),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이 있다.
“젊은 시절에 내가 정신분석을 완전히 경시했다는 사실을 나는 쉽게 부인할 수 없다. 이에 대해서는 내가 계급 투쟁에 대해서 맹목적일 정도로 무지했던 것처럼 변명이 필요하다. 변명을 늘어놓자면 나는 계급 투쟁을 부인한 부르주아였다. 그리고 프랑스인이었기 때문에 프로이트를 거부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장 폴 사르트르-
함께 읽어야 할 책: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불안과 억압>, <새로운 정신분석 강의>.
[빌헬름 옌젠의 ‘그라디바’에 나타난 망상과 꿈]
그런데 꿈의 가치를 논하는 이러한 논쟁에서, 작가들은 고대인들, 미신을 믿는 일반 민중들, 그리고 <꿈의 해석>을 쓴 나와 같은 편에 서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작가들이 상상력으로 만들어 낸 인물들에게 꿈을 꾸게 할 때, 그들은 인간의 생각과 감정들이 꿈 속에서도 계속된다는 일상적인 경험을 따르고 있는 것이고 인물들이 꾸는 꿈을 통해 그들의 정신 상태를 묘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가들은 나를 도와줄 수 있는 누구보다도 귀한 원군이라고 할 수 있고 그들의 증언은 매우 높게 평가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작가들은 우리들이 학교에서 배운 보잘것없는 지식으로는 미처 생각하지도 못했던 하늘과 땅 사이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것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앞서 있는 사람들인데, 특히 심리적인 문제에 있어서 그렇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가 탐구를 시작하지도 못한 영역을 창작의 원천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꿈이 본성상 뭔가를 의미한다는 사실의 편을 드는 이들 작가들의 입장이 조금만 더 분명했으면 하는 바람이 없는 것은 아니니 안타깝기만 한 것이다! 그래서 좀더 세련된 어떤 이들은 작가는 꿈의 정신적 의미를 옹호하지도 거부하지도 않는다고 이의를 제기한다. 작가는 사람이 잠을 잘 때, 그의 의식 안에서 여전히 활동하고 있는 자극들이 잠들기 전에 남은 마지막 여파로 어떻게 잠든 의식 속에서도 활동하는지를 지적할 뿐이라는 것이다. (P12-13)
학문이 가르쳐 주는 것은 죽은 것만 보도록 하는 고고학적인 관점이고 그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모든 소리는 철학자들의 죽은 언어다.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이 영혼과 감정과 가슴으로 생각하는 것을 도와주지 못한다. 이 욕망, 그것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잘 모르겠으나, 이 욕망을 지니고 있는 자는 이곳으로 와야만 한다. 정오의 그 불타는 적요(寂寥) 속에서 유일하게 숨쉬고 있는 생명, 그대는 이곳으로 와 몸의 눈을 버리고, 육체의 귀를 버려야 할 것이다. 그때 (...) 죽은 자들은 잠에서 깨어나리라. 폼페이는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P22)
물론 이후에 전개되는 이야기를 보면 주인공인 고고학자의 모든 심리적 움직임이 <망각>으로 종결되었는지는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마치 내부에서 어떤 거센 저항이 일어난 것처럼, 외부에서 아무리 강한 충격을 주어도 떠오르지 않는 회상하기 힘든 망각이 있다. 이런 종류의 망각을 심리학에서는 <억압>이라고 부른다. 작가가 우리들에게 보여 주고 있는 망각도 이런 <억압>인 것처럼 보인다. 전체적으로 보아 어떤 한 인상이 망각되는 것이 정신 현상 내에서 그 인상을 기록하고 있는 기억의 흔적이 사라지는 것과 관련이 있는지를 우리는 확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반면에 <억압>의 경우는 이러한 상식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추억이 소멸된 것과는 관련이 없는 것이다. 억압된 것은 단지 기억이라는 형태로만 의식에 떠오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억되지 않으면서도 작용할 수 있고 어떤 효과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억압된 것은 어느 날 외부의 충격을 받아 그에 상응하는 정신적 결과들을 보이게 되는데, 이 결과들은 망각된 기억이 변형된 것이거나 그 잔존물들인 것이다. 이런 식으로 보지 않으면 외부로 드러난 결과들은 이해 불가능한 것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그라디바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노르베르트 하놀트의 환상들 속에서 우리는 그가 조에 베르트강과 어린 시절에 나누었던 우정과 관련된 억압된 기억들의 잔존물들을 식별해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한 사람의 에로틱한 감정들이 억압된 인상들에 연결되어 있을 때, 또 그의 애정생활이 억압에 의해 침윤되었을 때, 억압된 것이 위의 경우와 유사하게 특이한 규칙성을 지닌 채 회귀한다고 기대해 볼 수 있다. (P44)
이미 앞에서 우리는 어린 시절에 조에와 맺었던 관계들에 대한 노르베르트 하놀트의 기억이 <억압> 상태에 있다는 점을 지적했고 그 기억을 <무의식적> 기억이라고 불렀다. 이제 그 의미가 서로 상통하는 두 용어 사이의 관련성에 잠시 주목해 봐야 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설명을 제공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무의식>이 의미가 넓은 개념이라면 <억압>은 좁은 의미를 갖고 있는 개념이다. 억압된 모든 것은 무의식적이다. 그러나 모든 무의식적 것이 억압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만일 노르베르트 하놀트가 부조를 보면서 조에의 걸음걸이를 기억해 낼 수 있었다면, 이전에는 무의식적이었던 기억이 활동적으로 되면서 동시에 의식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이는 그 기억이 이전에 억압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을 일러 준다. <무의식>이라는 말은 순수하게 묘사적인 용어고 여러 면에서 불명확하고 또 말하자면 정태적(靜態的)인 용어이기도 하다. 반면에 <억압된 것>은 정신적인 힘의 작용을 표현하는 역동적인 용어다. <억압된 것>이라는 말 속에는 모든 정신적 움직임들은 표출되려는 경향이 있다는 뜻이 들어 있다. 의식적인 것이 되려는 움직임도 이 표출되려는 것들 중의 하나다. 동시에 이 <억압>이라는 말 속에는 표출되려는 힘과 반대되는 힘이 있다는 뜻도 들어 있다. 즉, 정신적 움직임의 한 부분을 금지할 수 있는 저항이 있다는 뜻도 들어 있는데, 의식적인 것이 되려는 움직임도 이 저항을 받아 금지되어야 하는 것들 중의 하나다. 억압된 것의 두드러진 특징은 바로 그 강렬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의식에 도달할 수 없다는 데 있다. 하놀트의 경우에 있어서도 부조를 보는 순간부터 억압된 무의식, 한마디로 말해 억압된 것의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P61-62)
꿈의 또 다른 규칙에 따르면, 어떤 꿈을 꾸고 난 이후 꿈에서 보았던 이미지들이 현실에서도 실재한다는 믿음이 평상시와는 달리 유난히 오래 지속되어서 또다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면, 그것은 꿈에서 보았던 이미지들이 너무나 생생해서가 아니라 그러한 지속성 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정신 행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정신 현상은 꿈의 내용에 대한 하나의 보증이라고 볼 수 있는데 꿈을 꾼 사람의 내부에 꿈을 꾼 것과 정말로 똑같은 무언가가 있고, 그래서 그 보증을 믿는 것이 옳다고 말하는 정신적 움직임이다. 꿈의 이 두 가지 규칙에만 의존해도 우리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꿈은 그토록 찾아 헤맸던 그라디바가 있는 곳에 대한 정보를 주었다. 그리고 이 정보는 현실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P73)
그 역시 꿈을 꾸면서도 정말 어처구니없는 꿈이라고 스스로를 비난하며 이 꿈을 부정하려고 했고 꿈을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쳤다. 그러던 중 그는 조롱하는 듯한 울음소리를 내며 나타나 도마뱀을 입에 물고 사라진 눈에 보이지 않는 새 때문에 잠에서 깨고 만다.
이 꿈 역시 위험을 무릅쓰고 해석해 보아야 할까? 다시 말해 이 꿈 역시 잠재된 생각들이 왜곡되면서 생긴 것이라고 간주할 수 있을까? 해석은 이 경우 꿈 못지않게 어처구니없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꿈의 어처구니없는 속성이야말로 꿈이 충분히 의미 있는 정신 활동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주장의 논거가 되어 왔다. 이 주장에 따르면 꿈은 정신적 요소들이 한정하는 어떤 목적 없이 한낱 자극에 의해서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꿈에도 역시 꿈의 해석이 제공하는 정형화한 방법을 적용시킬 수 있을 것이다. 표면적인 꿈속에 나타난 눈에 보이는 전체에 연연해 하지 말고 내용의 모든 부분을 분리해서 고려하고 각 부분이 어떻게 해서 꿈꾸는 자의 인상들과 기억들과 자유 연상들에서 연유하는지를 찾는 것, 이것이 꿈의 해석이 일러 주는 해석의 기술이다. 하지만 하놀트를 꿈꾼 사람처럼 불러다가 조사를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인상들에 의지하는 선에서 만족해야 할 것이고 우리 자신의 연상을 그가 한 것들로 간주할 때도 결코 확신은 할 수 없을 것이다. (P92-93)
[무대 위에 나타나는 정신 이상에 걸린 등장 인물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 이래로 극(劇)의 목적은 관객의 마음속에 <공포와 연민>을 불러일으켜 <감정을 정화(靜化)시키는 데 있다고 생각되어 왔다. 만일 극의 목적이 그렇다면, 우리는 이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여간해서 쾌락이나 즐거움을 누릴 수 없는 지적 활동의 영역에서 농담이나 재미가 쾌락이나 즐거움의 원인을 제공할 수 있는 것처럼, 극은 우리의 정서적인 삶의 영역에서 쾌락과 즐거움의 원천을 드러내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일차적으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분명 <울분을 풀어냄으로써> 자신의 감정을 지워 버리는 과정일 것이다. 그럼으로써 얻어지는 즐거움은 완전한 감정의 해소에서 비롯되는 안도감이나 위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즐거움이 다른 한편으로는 감정 해소 과정에 수반되어 일어나는 성적 흥분과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어떤 감정이 움직여 일어날 때마다 부산물처럼 따라 나타나는 성적 흥분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몹시 바라 마지않는 심리 상태의 가능성을 한껏 드높여 준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관객으로서 관심을 가지고 어떤 광경이나 연극을 지켜본다는 것은 놀이를 통해 어린아이들이 어른이 하는 일을 자기들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서투른 희망을 충족시키는 것과 같은 효과를 성인들에게 가져다 준다. 여기서 관심을 가진 관객이란 경험이 적은 사람, 스스로를 <그 어느 의미 있는 일도 일어날 수 없는 가엽고 불운한 존재>로 느끼는 사람, 세상사의 중심에서 자신의 인격으로 꿋꿋하게 서고자 하는 야망을 이미 오래전부터 일찌감치 거두어들인 사람, 그래서 더더욱 모든 일을 자신의 욕망에 따라 느끼고, 행동하고, 해결하고 싶어하는 사람 --간단히 말하면 발 주인공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 이다. 그런데 극작가나 주인공역을 하는 배우가 바로 그 관객에게 스스로를 주인공과 <동일시>하는 것을 허용함으로써 그가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물론 극작가나 배우가 그에게 유보시켜 놓은 것이 있다. 사실 관객은 극에서 나타나는 그런 영웅적인 행위가 자신에게는 불가능한 일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런 영웅적인 행위를 하기에는 너무도 큰 아픔과 고통과 엄청난 두려움이 뒤따르고, 따라서 행위에 따른 즐거움은 전혀 기대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관객은 자신의 생명은 <하나밖에 없는> 생명이라는 사실과, 역경에 맞선 그런 영웅적 투쟁을 <단 한 차례> 벌이다가도 목숨을 잃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관객이 극에서 즐거움을 얻는다면 그것은 바로 환상에 기초한 것이다. (P131-132)
[작가와 몽상]
문학적 성향의 최초의 흔적들을 찾아야 한다면 어린아이들에게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어린아이가 가장 애착을 느끼고 몰두하는 것은 놀이다. 어쩌면 우리는 놀고 있는 아이야말로 자기만의 세계를 창조하고 있다는 면에서, 혹은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세계의 사물들을 새로운 질서에 맞추어 자신의 취향에 따라 배치하고 있다는 면에서 마치 한 사람의 시인처럼 행동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아이가 그 세계를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잘못일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로 아이는 자신의 놀이를 진지하게 여기고 있으며 엄청난 양의 감정을 놀이 속에 쏟아 붓는다. 놀이의 반대편에 있는 것은 진지함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일 것이다. 유희 세계에 모든 감정을 집중시키면서도 아이는 현실과 자신의 유희 세계를 구별할 줄 알 뿐만 아니라, 현실 세계의 가시적이고 촉지할 수 있는 사물들을 상상적인 대상과 상황들과 연결 짓는 것을 좋아한다. 어린아이의 <놀이>를 <몽상>에서 구별시켜 주는 것 역시 바로 이러한 연결 고리다.
창조적인 작가는 결국 놀이를 하는 아이와 동일한 것을 하고 있다. 그 역시 몽상적 세계를 창조하고 있는 것이고 그 세계를 진지하게 여기고 있다. 다시 말해, 현실과 자신의 몽상적 세계를 선명하게 구분하면서도 창조 행위에 엄청난 양의 감정을 쏟고 있다. 우리들이 사용하는 언어 속에는 어린아이의 놀이와 시인의 창조 행위 사이의 이러한 유사성을 일러 주는 흔적들이 남아 있다. 언어는 재현될 수 있는 유형의 대상과 연관되어 있을 것을 요구하는 상상적 글쓰기의 형식에 Spiel(놀이)이라는 이름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 단어는 Lustspiel(희극), Trauerspiel(비극)이라는 말들 속에 들어 있고 또 이러한 극들을 공연하는 사람을 Schauspieler(배우)라고 부른다. (P144-145)
사춘기를 지나 청년이 되면 놀이를 중단하여 언뜻 보기에는 그가 놀이에서 얻을 수 있었던 쾌락을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적 삶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는 한 번 경험한 쾌락을 포기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없다는 사실 또한 알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우리는 그 어느 것도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대상을 바꿀 뿐인 것이다. 다시 말해 단념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부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은 단념이 아니라 한 대상을 다른 것으로 바꾸는 대체 작업인 것이다. 대용물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 청년이 놀이를 더 이상 하지 않을 때 그는 현실적인 대상과의 고리 외에 아무것도 포기한 것이 없다. 이제 그는 <놀이>를 하는 대신 자신의 <몽상>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는 구름 잡는 이야기 속에서 모래성을 쌓는 것이다. 흔히 <비몽사몽>이라고 하는 꿈을 꾸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의 어느 순간에서든 이런 몽상의 세계를 그려 보았던 때가 있었을 것이다. 이 사실을 사람들은 오랫동안 모르고 있었고, 따라서 그 중요성을 낮게 평가해 왔다.
성인의 몽상은 어린아이의 놀이보다 관찰하기가 훨씬 어렵다. (P146)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유년의 기억]
일상 생활을 관찰해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당한 양의 성충동(Sexualtrieb)을 성공적으로 자신들의 직업 활동으로 우회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성적 충동은 이러한 공헌을 하기에 매우 적합한데, 그 까닭은 성충동이 승화될 수 있는 본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성충동은 즉각적으로 충족되는 대신 비(非)성적이고 때로는 매우 높은 가치를 지닌 목적으로 대체될 수 있는 상태에 있다. 한 사람의 유년기를 통해, 곧 그의 정신 발달의 역사를 통해 어린 시절의 가장 지배적인 충동이 성충동임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이러한 과정이 입증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또한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도 이것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성인의 성생활에 있어서는 쇠락의 조짐이 눈에 띄게 나타나는데, 이는 곧 성적 활동의 한 부분이 다른 지배적인 관심사에 의해 대체되었다는 것을 일러 준다.
어린아이들에게 그렇게 심각한 충동이 있다거나 성적 충동이 있다는 사실을 일반적으로는 믿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이러한 가정을 다 빈치를 지배했던 탐구 본능에 적용하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따를지도 모른다. (P182)
내가 알기에 레오나르도는 자신의 유년에 대한 기억을 오직 단 한 번 그의 과학 논문 속에서 언급하고 있다. 독수리의 비상(飛翔)을 다루고 있는 글 속에서 레오나르도는 갑자기 글을 멈추고는 아주 먼 어린 시절의 기억을 좇아간다.
내가 이렇게 독수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인 것만 같다. 아주 어렸을 때의 기억인 것 같은데, 요람에 누워 있을 때 독수리 한 마리가 내게로 내려와 꽁지로 내 입을 열고는 여러 번에 걸쳐 그 꽁지로 내 입술을 쳤던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어린 시절의 기억은 너무나도 기이한 기억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우선 그 내용이 그렇고, 이 기억의 배경이 되는 나이도 그렇다. 젖먹이 시절의 사건을 기억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지만, 이 기억은 확실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어쨌든 이러한 레오나르도의 기억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 다시 말해 독수리가 꽁지로 아이의 입을 열었다는 것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 지어낸 이야기 같다. 따라서 우리는 이 기억에 대해 위에서 제기한 두 가지 의심을 해소시켜 줄 수 있고 우리가 판단을 내리는 데 좀더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다른 생각을 갖게 된다. 이 독수리 장면이 꼭 레오나르도의 기억일 필요는 없다. 그것은 그가 훗날 품게 된 환상(Phantasie)으로서 자신의 어린 시절로 옮겨 놓은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P188-189)
레오나르도의 독수리 환상을 정신분석의 시각에서 살펴보면 이 환상이 그렇게 엉뚱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 곧 드러난다. 예를 들어 우리는 꿈속에서 그와 유사한 상황을 자주 경험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으며, 따라서 고유한 언어로 이루어진 이 환상을 일반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해석해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때 해석은 에로틱한 경향을 띠게 될 것이다. 꽁지인 <coda>는 이탈리아 어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언어에 있어서도 남성의 성기를 지칭하는 수많은 상징들 중의 하나다. 환상의 내용은 --독수리가 어린아이의 입을 열고 꽁지를 쑤셔 넣었다-- 상대방의 입 안에 성기를 삽입하는 성행위의 일종인 펠라치오를 나타낸다. 그런데 레오나르도의 환상은 매우 철저하게 수동적인 위치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뿐만 아니라 그의 환상은 일정한 꿈들과 유사할 뿐만 아니라 여자들의 환상이나(성 체위에서 수동적인 여자의 역을 맡아 하는) 수동적인 동성애자의 환상과 유사하기도 하다. (P192-193)
독수리 머리를 한 이 모성 신은 대부분 이집트 인들에 의해 남근이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몸은 두 젖가슴을 통해 여인으로 묘사되지만 동시에 이 모성 신은 발기된 상태의 남성기를 갖고 있다. 요컨대 우리는 이렇게 해서 레오나르도의 독수리 환상에 나타난 것과 똑같이 여신 무트에게서도 모성과 남성성이 혼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레오나르도가 책을 통해 어미 독수리의 양성성(兩性性, Bisexualität)을 알고 있었다고 추측함으로써 이 모성과 남성성의 혼합이 과연 설명될 수 있을까? 이런 가능성의 의심스럽다고 해야 한다. 레오나르도가 접근할 수 있었던 자료들에는 이 야릇한 양성성에 대한 언급은 없었을 것이다. 이 모성과 남성성의 일치는 오히려 모성과 남성성 양쪽에서 함께 작동하고 있는, 그러나 아직 알려져 있지는 않은 공통된 동기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할 것이다. (P204)
어머니를 향한 사랑은 계속해서 의식 내에서 발전할 수가 없다. 억압되기 때문이다. 사내 아이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억압한다. 이는 자신을 어머니의 위치에 놓아 어머니와 일치시킴으로써, 또 훗날 새로운 사랑 대상(Liebeobjekt)을 선택할 때 자기 자신을 모델이 될 수 있는 인물로 간주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아이는 이렇게 해서 동성애자가 되는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는 완만하게 진행되는 변화인데, 청소년이 된 아이가 사랑하는 소년들은 대체 인물들에 지나지 않는, 다시 말해 어머니가 자신을 사랑했듯이 아이가 사랑한 자기 자신의 분신들에 지나지 않음으로, 동성애자는 자가 성애로 되돌아 간 것이다. 아이가 나르시시즘(Narziβmus)에 기초해 사랑 대상을 선택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 인들은 그 어느 것도 거울 속에 비친 자기 자신의 모습만큼 그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주지 못했고 그래서 스스로 변신하여 같은 이름의 꽃이 되어 버린 미소년을 신화 속에서 나르시스라고 불렀다. 나르시시즘에 의해 동성애자가 된 자는 무의식적으로 어머니의 기억 형상(Erimmerungbilder)에 고착되어 있다는 주장은 좀더 심화된 심리적 연구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억압되어 아이는 이 사랑을 그의 무의식 속에 간직하게 되고 이때부터 그는 어머니에게 고착된다. (P212)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비상을 꿈꾸는 것인가? 정신분석학의 대답은 난다는 것, 혹은 새가 된다는 것은 다른 욕망이 위장된 것으로, 이 욕망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언어와 사물에 대한 많은 탐구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호기심 많은 아이들에게 황새같이 큰 새가 아기들을 물어 왔다고 이야기한다면, 또 고대인들이 날개 달린 남근(男根)을 묘사했고 인간의 성교를 지칭하는 가장 흔한 독일어 표현이 새(Vogel)라는 말에서 파생된 <교미하다(voglen)>이고 나아가 이탈리아 인들에게 있어 남성의 성기가 다름 아닌 <새(uccello)>라는 말로 지칭되고 있다면, 이 모든 것들은 날고 싶다는 욕망이 꿈속에서는 성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강력한 욕망이 표현된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러 주는 몇 가지 단편적인 예일 뿐이다. (P247)
[세 상자의 모티프]
셰익스피어의 극 작품에 나오는 즐거운 장면 하나와 비극적인 장면 하나를 통해 나는 최근 한 작은 문제에 봉착하여 그 문제를 풀 수가 있었다.
즐거운 장면이란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장면으로 구혼자들이 세 개의 작은 상자들을 앞에 놓고 선택하는 장면이다. 아름답고 총명한 포샤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세 개의 작은 함들 중에서 좋은 것을 선택하는 사람을 배필로 맞아들이기로 했다. 세 개의 함은 각각 금과 은과 납으로 만들었다. 좋은 함이란 안에 신부의 초상화가 들어 있는 함이었다. 금함과 은함을 고른 두 구혼자들은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이 떠났고, 바사니오라는 세 번째 청혼자는 납으로 만든 함을 골랐다. 이렇게 해서 그는 약혼자를 얻게 되었는데 운명이 걸린 시험이 시작되기 전에 젊은 처녀의 마음은 이미 납으로 만든 함을 선택한 구혼자에게 기울어져 있었다. 두 구혼자는 각자 자신이 선택한 금속을 칭찬하고 다른 두 금속은 깎아 내리면서 자신이 내린 선택에 대해 설명했다. 세 번째 구혼자는 이렇게 해서 가장 까다로운 해명을 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된다. 금과 은에 비해 납이 훨씬 좋다고 말해야 했는데 할 말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어거지를 쓴다는 인상을 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환자를 만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우리가 실제로 분석해 나가면서 이 연설을 직접 들어 본다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선택을 합리화시키기 어려운 이 연설의 배후에 숨어 있는 몇 가지 비밀스런 동기들을 예감할 수 있을 것이다.
상자들의 선택이라는 신탁 이야기를 만들어 낸 사람은 셰익스피어가 아니다. 단지 그는 이 이야기를 <게스타 로마노룸(Gesta Romanorum)>이라는 여러 이야기들 중에 하나를 다시 따왔을 뿐인데, 이 텍스트의 이야기 속에서는 황제의 아들을 차지하기 위해 한 처녀가 같은 선택을 하게 된다. 여기서도 행운을 가져다 주는 금속은 세 번째 금속인 납이었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도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 기원에서 파생된 것을 가려내고 또 해석하도록 요구하는 오래된 모티프가 문제라는 점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금, 은, 납이라는 세 금속 사이의 선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첫 번째 추론은 슈투켄(Ed. Stucken)의 확언에 의해 이미 끝나 있는 상태인데, 그는 그의 전문 영역을 훨씬 벗어나는 이야기를 하는 도중 같은 주제를 다룬 적이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 사람의 신분은 그들이 선택한 것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모로코의 왕자는 금을 선택했는데 이것은 금이 그에게는 태양이었기 때문이다. 스페인의 아라곤 지방에서 온 왕자가 은을 골랐다면 은이 그에게는 달을 뜻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바샤니오는 납을 선택했다. 납은 별들의 자손들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는 에스토니아의 민간 설화인 <칼레비포그(Kalewipoeg)>에 나오는 한 일화를 인용했다. 실제로 이 일화 속에서 세 사람의 구혼자들은 각각 태양과 달과 별의 아들로 등장하고 있고 <납을 택한 청년은 북극성의 장남으로 나온다.> 그리고 젊은 처녀는 역시 이번에도 세 번째를 선택한다. (P267-269)
늙은 왕 리어는 살아 있을 때 세 딸이 자신을 사랑하는 정도에 따라 왕국을 나누어 주기로 결심했다. 두 명의 딸. 고네릴과 레간은 아버지에 대한 자신들의 애정을 지칠 줄 모르고 드러내며 자찬했던 반면에, 셋째 딸인 코델리아는 일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리어 왕은 이 셋째 딸의 사려 깊고 은근한 애정을 알아 보고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해주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셋째 딸의 애정을 몰라보았고 코델리아를 멀리 내쳐 버린 후 나머지 두 딸에게만 왕국을 나누어 주었다. 이로 인해 단지 그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불행해진다. 이것 역시 세 여인 사이에서의 선택이라고 볼 수 없을까? 세 여인들 중 가장 젊은 여인이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고 따라서 그 누구보다도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여인이 아닐까?
이제 똑같은 상황을 소재로 갖고 있는 신화와 민담과 문학 작품들의 다른 많은 장면들이 자연스럽게 우리의 머릿속에 떠오를 것이다. 목동 파리스도 세 여인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세 번째 여인을 선택했다. 신데렐라 역시 같은 방식으로 두 언니들을 물리치고 왕자님에게 가장 사랑을 받았던 셋째였다. 프시케 또한 아퓔레의 이야기 속에서 세 자매 중 가장 나이 어리고 아름다운 셋째였다. 인간이 된 아프로디테처럼 숭상을 받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의붓어머니에 의해 신데렐라처럼 학대당하기도 했던 프시케는 한데 뒤섞여 자루에 가득 담겨 있는 씨앗들을 골라내야만 했고, 작은 동물들의 도움에 힘입어 일을 마칠 수가 있었다(신데렐라의 경우에는 비둘기들이 도왔고 프시케는 개미들이 도왔다). 좀더 광범위한 탐색을 해보고자 한다면 누구든지 핵심적인 동일한 특징들을 간직하고 있는 같은 모티프가 변형된 형태로 반복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P270-271)
호머가 기록한 가장 오래된 그리스 신화에서는 오직 모이라 한 신만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의인화하고 있었다. 이 유일한 여신 모이라가 세 명의 자매로 이루어진 무리로 (드물게는 두 명의 여신들로 이루어진 무리로) 변모하는 과정은 아마도 모이라의 여신들과 근접해 있던 다른 신들, 즉 미의 세 여신이나 시간의 여신들과 유사성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시간의 여신들은 비와 이슬을 내리는 천계에 사는 물의 신들이었고 또 비를 내리는 구름의 신들이기도 했다. 그런데 구름은 직조된 천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에 그로부터 이 여신들에게는 베를 짜는 여신이라는 성격이 부여되었고 이는 바로 모이라의 세 여신의 특징이 되어 버린다.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쬐는 지중해 인근의 지방에서 땅의 비옥함은 비와 직결되는 문제였다. 이런 이유로 시간의 여신들은 초목의 여신들로 변하게 된다. 아름다운 화초들과 먹음직스러운 과일들은 모두 이 여신들의 보살핌 덕택이었고 사람들은 세 여신에게 많은 온화하고 우아한 면모들을 부여했다. 세 여신들은 계절을 대표하는 신들이 되었고,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3이라는 숫자로는 충분히 표현할 수 없는 경우임에도 불구하고 여신을 표현하는 데 3이라는 성스런 숫자가 쓰이게 된 것 같다. 실제로 고대인들은 초기에는 겨울, 봄, 여름 세 계절만을 구분했었다. 가을은 훗날 그리스-로마 시대에 와서야 추가된다. 예술에서 자주 시간의 네 여신을 형상화해 낸 것도 이때다. (P277-278)
작가는 죽어 가는 한 늙은 사내로 하여금 세 여인들 중에서 한 여인을 선택하도록 해서 이 오래된 선택의 모티프를 좀더 우리들 가까이에 다가오도록 했다. 작가는 욕망의 변화에 의해 훼손된 신화에 의지함으로써 과거를 거슬러 올라갔고, 그러면서 다시 훼손된 부분을 손질했다. 이 손질을 통해 신화의 옛 의미는 다시 표면으로 떠올랐고 마침내 우리 역시 모티프에 등장하는 세 여인에 대해 개연성 있는 우의적 해석을 할 수가 있었다. 여기에 해석된 것은 남자가 여인과 맺게 되는 피할 수 없는 세 가지 관계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생식자, 동반자, 그리고 파괴자가 세 여인의 이미지들이다. 혹은 이 세 이미지는 남자의 일생을 줄곧 관류해 흐르는 어머니의 이미지일 것이다. 최초에 어머니가 있었고 이 어머니의 이미지에 맞추어 그는 사랑하는 여인을 선택했고, 마지막으로 그를 자신의 품속으로 다시 끌어들이는 대지(大地)라고 하는 어머니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 늙은 사내가 이전에 어머니에게 받았던 사랑을 다시 한 번 그대로 손에 넣으려 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오직 운명의 세 여인 중 세 번째 여인만이, 이 침묵하는 죽음의 여신만이 그를 품속으로 안아 들일 것이다. (P284-285)
[미켈란젤로의 모세 상]
미켈란젤로의 모세 상은 좌상(坐像)인데, 몸통은 정면을 향해 있고 얼굴은 힘 있는 수염으로 덮혀 있다. 두 눈은 왼쪽을 향해 있고 오른발은 지면에 놓여 있는 반면 왼발은 서 있어서 발가락만이 지면에 닿아 있을 뿐이다. 오른팔은 석판(石板)들과 수염들 사이에 놓여 있고 왼팔은 배 위에 놓여 있다. 조각에 대한 좀더 정확한 묘사를 하고자 한다면 차차 이야기해야 할 것을 미리 말해야만 할지도 모른다. 여러 비평가들의 묘사는 이상하게도 부정확하다. 이해할 수 없었던 부분 또한 부정확하게 느껴졌고 부정확하게 묘사된 것이다. 그림(Grimm)은 다음과 같이 썼다. <십계명 석판은 오른팔 아래에 놓여 있는데 이 오른손은 수염 속에 빠져 있다.> 뤼프케(W.Lϋbke) 또한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 <충격을 받은 그는 오른손을 물결치며 흘러내리는 듯한 멋진 수염 속에 빠뜨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슈프링거 역시 다음과 같이 썼다. <모세는 두 손 중 한 손(왼손)을 그의 몸에 붙이고 있고 반면 다른 손 하나는, 무의식적으로 그랬던 것처럼, 힘 있게 물결치는 수염속에 빠뜨리고 있다.> 유스티(C.Justi) 역시 오른손의 손가락들이 <요즈음 사람들이 종종 흥분했을 때 시계줄을 만지작거리는 것처럼> 수염을 만지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뮌츠 역시 수염을 만지작거리는 것으로 보았다. 토데는 <세워진 석판들 위에 있는 오른손의 단호하고도 차분한 자세>에 대해 말했다. 토데는 오른손에서조차 유스티와 보이토(C.Boito)가 원했던 것과 같은 흥분 때문에 일어난 행동을 간파해 내지 못하고 있다. <손 하나는 거인(巨人)이 옆으로 머리를 돌리기 이전에 놓여 있었던 그 자리에서 그대로 수염 속에 고정되어 있다.> 야코프 부르크하르트(J.Bruckhardt)는 <그 유명한 왼손은 따지고 보면 이 수염을 몸에 고정시키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다른 할 일이 없다.>고 한탄하기까지 한다. (P294-295)
<언제나처럼 여기서도 그에게 중요한 것은 한 성격 유형을 묘사하는 것이었다. 그는 신의 법을 지상에 세우는 입법자로서 자신이 띠고 있는 사명을 의식하고 있으면서도 인간들의 몰이해에 직면한 한 정렬적인 인류의 인도자를 조각하려고 했다. 이러한 행동적인 인간을 조각하기 위해서는 의지력을 부각시키는 것 이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는데, 이것은 틀어져 있는 머리, 근육의 긴장, 오른발의 자세 등에서 표현된 바 있는 그대로, 외적인 평온을 가로질러 가고 있는 움직임을 부각시킴으로써 가능했다. 이것은 메디치 가의 성당에 있는 줄리아노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현상들과 동일한 것들이다. 이러한 전반적인 특징 부여는 정신적 갈등을 부각시킴으로서 이루어졌는데, 인간 일반을 묘사하려고 했던 천재 예술가는 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당시의 일반적인 법칙과 맞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분노, 경멸, 고통 등의 정서적 충격들은 전형적인 표현을 획득하기에 이른다. 만일 이러한 전형적 표현을 얻지 못했다면 모세와 같은 한 초인(超人)의 본질을 드러낼 수 없었을 것이다. 성서가 제공하는 특징들에 형상을 부여하고 또 교황 율리우스 2세가 그에게 남긴 개인적인 인상들과 나아가서는, 나 또한 이 점을 믿는 바이지만, 사보나롤라의 저돌성이 그에게 남긴 인상 등에 형상을 부여함으로써 미켈란젤로는 실재했던 한 역사적 인물을 조각한 것이 아니라 불굴의 에너지를 가진 한 특이한 성격형을 창조했던 것이다.>
이러한 토데의 설명에 다음과 같은 크나크푸스(H.Knackfuss)의 지적을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모세 상이 자아내는 신비한 효과의 본질은 자세에서 나오는, 내면적 격정과 외면적 평온함의 예술적 대비에 있다.>
나는 토데의 설명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그러나 뭔가가 미진하다는 느낌이 없다. 아마도 주인공의 심적 상태와 자세로부터 나오는 대비 사이에, 다시 말해 <외면적 평온>과 <내면의 동요> 사이에 좀더 긴밀한 관련이 존재해야만 하는지도 모른다. (P306-307)
인간 모세는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화를 잘 내는 다혈질의 인간이었다. 한 이스라엘 인을 구타하는 이집트 사람을 그가 때려 눕힌 것도 이러한 그의 갑작스러운 분노 때문이었고, 또 같은 이유로 해서 그는 이집트를 떠나 사막으로 도망가야만 했다. 그가 신이 직접 쓴 두 개의 율법 판을 부수어 버린 것도 똑같이 감정이 폭발했을 때다.
모세의 성격에 대해 이러한 이야기들이 전해져 내려올 때, 이 이야기들을 그를 해치려는 의도적인 이야기로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이런 이야기들 속에는 일정한 한 시대에 살았던 한 위대한 인물에 대한 인상들이 간직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교황의 장례 기념물을 제작하면서 전혀 다른 모세, 다시 말해 역사적 인물이나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 속의 인물보다 훨씬 더 위대한 모세를 만들어 내려고 했다. 그는 부서진 율법 판의 모티프에 수정을 가해서, 모세가 화를 이기지 못해 율법 판들을 부순 것으로 묘사하지 않았으며 반대로 율법 판들이 부서질지도 모른다고 우려해서 자신의 분노를 삭히는 모세를 묘사했던 것이다. 어쨌든 적어도 그의 분노는 행동으로 옮겨 가는 도중에 억제되고 만다. 이렇게 함으로써 미켈란젤로는 뭔가 새롭고, 초인적인 것을 모세 상에 끌어들였고, 주인공의 강인해 보이는 육체적 볼륨과 힘이 넘쳐나는 듯한 근육질 등은 인간으로서 다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정신적 성취에 대한 육체적 표현이다. 스스로를 바친 위대한 사명을 위해 자신의 격정을 누르는 이 행위는 인간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한 빼어난 성취다.
미켈란젤로의 조각에 대한 해석은 이쯤에서 끝내야 할 것 같다. (P324)
[덧없음]
얼마 전 어느 여름날. 나는 말없이 과묵한 한 친구와 아직 나이는 젊지만 이미 명성을 날리고 있던 한 시인과 함께 환한 미소로 우리를 반기는 듯한 시골길을 산책한 적이 있었다. 그 시인은 주변 풍광의 아름다움에 대해 연신 찬사를 아끼지 않았지만, 그 아름다움 속에서 환희의 기분을 누리지는 못하였다. 그는 이 모든 아름다움이 결국엔 소멸되고 말 거라는 생각. 모든 인간적인 아름다움과 인간이 창조해 냈거나 창조할 수 있는 모든 아름다움이나 장관과 마찬가지로 겨울이 오면 그 자연의 아름다움도 사라지고 없을 거라는 생각에 착잡한 심정이었던 모양이었다. 달리 말하면, 그가 사랑하고 찬미했던 모든 것들이 그에게는 덧없음의 운명으로 가치를 손상당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아름답고 완벽한 그 모든 것이 소멸과 쇠퇴의 길로 나아간다는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우리 마음에 두 가지 서로 다른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하나는 그 젊은 시인이 느꼈을 것과 똑같은 가슴 저미는 낙심이며, 또 하나는 그 명백한 사실에 대한 저항이다. 가령 이렇게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다! 자연과 예술의 이 모든 아름다움, 우리 감각의 세계와 외부 세계의 그 모든 아름다움이 진정 그 허망한 무(無)로 사라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너무 무감각하고, 그리 되리라는 운명 예단으로 그런 사실을 믿지 못할 뿐이다. 이 아름다움은 지속될 수 있으며, 파괴의 모든 세력들을 다 이겨 낼 수 있을 것이다. (P335-336)
우리가 상실해 버린 다른 소유물들이 아무리 쉽게 무너지고 무력하게 소멸되어 갔다고 해서 그것들이 진정 우리에게 무가치한 것이 되어 버린 것일까? 많은 사람들은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소중한 것들이 그렇게 영속적이지 않음이 드러났기에 그냥 체념할 수밖에 없다는 마음을 지닌 그런 사람들이 실은 단순히 상실한 것에 대한 슬픔의 상태에 있는 것일 뿐이라고 믿는다. 우리의 슬픔이란, 그것이 아무리 고통스러운 것일지라도, 결국엔 자연히 끝나고 만다. 잃어버린 그 모든 것들을 그냥 단념할 때 슬픔은 스스로를 소진하며, 우리의 리비도는 다시 자유롭게 되어(우리가 젊고 적극적인 한) 잃어버린 대상과 똑같은, 아니 그보다 더 소중한 새로운 대상을 찾게 된다. 전쟁으로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는 희망을 품어 본다. 일단 슬픔이 끝나고 나면, 설혹 문명의 산물이 얼마나 허약한 것인가를 알게 되었더라도, 그 풍요로운 산물에 대한 우리의 소중한 마음에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것이다. 전쟁이 파괴해 놓은 것들을 우리는 다시 세우게 될 것이고, 그것도 전보다 더 튼튼한 기초 위에, 더욱더 오래 지탱할 기반 위에 세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P339)
[정신분석에 의해서 드러난 몇 가지 인물 유형]
욕구 불만이 심해지면 인간은 신경증 환자가 된다는 명제를 우리는 정신분석적 작업을 통해 얻을 수 있었다. 문제가 되는 욕구 불만은 물론 리비도와 관련된 욕구 불만이고, 이 명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긴 논의가 요구된다. 왜냐하면 신경증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한 인간의 리비도적 욕망들과 우리가 자아라고 부르는 부분 사이에 갈등이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자아는 자기 보존본능(Selbsterhaltungstrieb)의 표현이면서 자신의 존재에 대해 갖고 있는 이상들을 포괄하고 있다. 병적인 갈등은 리비도가 자아에 의해 이미 오래전에 초월되고 금지된, 따라서 영원히 자아에 의해 금지된 길과 목적을 향해 내달릴 때만 나타난다. 그리고 이상적인 자아-동조적 만족의 가능성을 박탈당할 경우에만 실제적인 쾌락 충족의 박탈과 상실은 이렇게 해서 비록 유일한 조건은 아니라 하더라도 신경증의 첫 번째 조건이 된다. (P354)
[괴테의 ‘시와 진실’에 나타난 어린 시절의 추억]
괴테의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되돌아가서 다른 아이들을 관찰함으로써 얻게 된 것들을 <시와 진실>의 어린 시절 속에 끼워 넣고 본다면, 우리는 자칫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었던 수미일관한 논리가 괴테의 어린 시절 속에도 형성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 논리란 다음과 같은 것이리라. <나는 운이 좋은 아이였다. 태어났을 때 사람들은 나를 죽은 것으로 알았으나 운명이 나를 살려냈다. 운명은 나 대신 동생을 제거했고 나는 그래서 어머니의 사랑을 나누어 가질 필요가 없었다.> 이러한 어린 시절에 이어 괴테의 기억은 다정하고 고요한 영혼처럼 다른 방에 살다 돌아가신 할머니에 대한 기억으로 넘어간다.
그런데 내가 이미 다른 곳에서 언급했듯이. 어떤 사람이 자신이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때 그는 이 생각으로 인해 평생 동안 정복자의 감정 상태를 갖게 된다. 이 감정은 성공에 대한 확신이기도 한데, 실제로 이런 감정이 성공을 가져오는 경우가 드문 것은 아니다. 아마도 괴테가 <나의 힘은 어머니와 나의 관계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표현을 알고 있었다면 자서전을 시작하기 전에 한 줄 인용했을 것이다. (P397-398)
[두려운 낯설음]
우리가 다루려고 하는 <두려운 낯설음> 또한 이러한 영역들 중의 하나다. 이 감정이 공포감의 일종이고 극도의 불안과 공황 상태를 불러일으키는 감정이기도 하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또한 이 단어가 그것에 정확한 정의를 줄 수 있다고 해도 언제나 정의된 의미대로만 쓰여지는 않는다는 점 역시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 이 말을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불안을 자아내는 것을 지칭하기 위해서도 쉽게 혼동해서 사용하곤 한다. 그러나 왜 우리가 이 말을 하나의 특수한 개념적 용어로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해 근거를 제시해 줄 수 있는 하나의 뚜렷한 단서가 이 말 자체 속에 숨어 있다고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일반적인 불안을 자아내는 것들 속에도 들어 있으면서 동시에 <이상하게 불안하게 하는 것>을 구별할 수 있게 해주기도 하는 이 공통의 단서가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자. (P403-404)
우리들의 가슴 속에 불안한 낯설음이라는 감정을 강렬하고도 선명하게 불러일으키는 사람들과 사물들, 또 인상들과 사건들과 기타 여러 상황들을 자세히 살펴보려고 하는 우리로서는 우선 적절한 예를 하나 들면서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옌치는 <어떤 한 존재가 겉으로 보아서는 꼭 살아 있는 것만 같아 혹시 영혼을 갖고 있지 않나 의심이 드는 경우, 혹은 반대로 어떤 사물이 결코 살아 있는 생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연히 영혼을 잃어버려서 영혼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드는 경우>를 자신의 주장을 입증해 주는 적절한 예로 보여 주고 있다. 이런 예들을 들면서 그는 밀납 인형, 마네킹, 자동 인형들에서 우리가 받는 인상들을 근거로 제시한다. 옌치는 나아가 간질 발작이나 미친 사람들의 행동거지들도 같은 맥락으로 본다. (P412)
어느 더운 여름날 오후 나는 이탈리아의 한 작은 도시의 인적 없는 작은 골목을 거닐고 있었다. 그때 나는 우연히 한 지역을 지나치게 됐는데 그 지역이 어떤 곳인지 궁금했지만 궁금증을 푸는 데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길가에 늘어선 집들의 창문가에는 화장을 한 여인들만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고, 나는 첫 번째 교차로가 나오자 서둘러 그곳을 떠났다. 그러나 안내자 없이 잠시 혼자 이리저리 배회하던 끝에 보니 처음에 내가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던 곳으로 문득 되돌아와 있는 것이었다. 다시 서둘러 그곳을 떠났지만 나는 다른 길을 통해 세 번째로 같은 곳에 되돌아오고야 말았다. 그때 나는 두려운 낯설음의 감정이라고 밖에는 달리 말할 수 없는 감정 상태에 사로잡혔고 잠시 전에 떠났던 광장으로 가는 길로 다시 접어들었을 때에는 행복한 기분이었다. 위에서 묘사한 상황과 근본적으로는 다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비의도적인 회귀에 있어서만은 공통점을 보이는 상황들도 동일한 괴로움이나 두려운 낯설음의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숲속이나 산에서 갑작스럽게 안개 같은 것을 만나 길을 잃었을 때 표지판이나 아는 길을 찾으려고 하는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러 번에 걸쳐 같은 장소로 되돌아오곤 할 때 역시 유사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혹은 낯설고 어두운 방안에서 문이나 전기 스위치 등을 찾으려다 여러 번 같은 가구에 반복해서 부딪칠 때도 비슷한 상황일 것이다. 마크 트웨인은 비록 그로테스크하게 과장을 하긴 했지만 이와 유사한 상황을 참을 수없을 정도의 우스꽝스러운 장면으로 변형시켜 놓은 적이 있다. (P428)
[17세기 악마 신경증]
우선, 숫자 9의 역할이다. 악마와의 계약은 9년 기한으로 되어 있다. 가장 믿을 만한 것인 포텐브룬의 신부가 쓴 보고서에는 이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는 9년 기한의 문서로 된 계약서를 제출했다(pro novem annis Syngraphen scriptam tradidit).> 1677년 9월 1일 날짜로 되어 있는 이 소개 편지는 동시에 계약 기간이 며칠 후면 끝난다는 것도 지적하고 있다. <게다가 이번 달 24일로 예정되어 있는 종료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 문서로 된 계약은 따라서 1668년 9월 24일에 작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숫자 9는 이 보고서에서 다른 용도로도 쓰이고 있다. 화가가 악마의 유혹에 무릎을 꿇기 전에 저항한 횟수도 9번 --nonies--이었다. 이 사실은 미미한 것이었기 때문인지 이후의 보고서들에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다음에 숫자 9는 신부의 확인서 속에 다시 나타난다. <9년 만에(post annos novem).> 마찬가지로 필사생 역시 그의 요약 속에서 <9년 동안(ad novem annos)>이라는 표현을 다시 쓰고 있는데, 이는 숫자 9가 우연이 아니라는 증거로 볼 수 있다.
숫자 9는 신경증 성 환상에 입각해서 볼 때 우리에게는 친숙한 숫자다. 그것은 임신 개월 수를 나타내는 숫자며 이 숫자가 나타날 때마다 우리는 임신 환상에 주목하게 된다. 물론 우리가 다루고 있는 화가의 경우에는 아홉 달이 아니라 9년이 문제다. 그렇지만 9라는 숫자는 그것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9년이라고 할 때의 9라는 숫자가 임신에서 이 숫자에 부여된 성스러운 성격을 상당 부분 갖고 있는지 아닌지를 과연 누가 알 수 있겠는가? 9개월과 9년 사이에서 방황할 필요는 더 이상 없어 보인다. 우리는 꿈을 통해 <무의식의 지적인 작업>이 숫자들을 얼마나 기기묘묘하게 사용하는지를 알고 있다. (P482-483)
[유머]
이러한 두 가지 특성, 즉 빠져나갈 수 없는 현실을 밀어내고 쾌락 원칙의 우월성을 확인하는 과정을 통해 유머는 정신병리 현상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퇴행적이거나 혹은 반항적인 과정과 근접해 있다고 할 수 있다. 고통의 가능성에 맞서 유머가 행하는 이러한 방어를 고려할 때 우리는 유머를 인간의 정신 활동이 고통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만들어 낸 일련의 많은 방법들 속에 포함시킬 수 있다. 신경증에서 출발해 광기 속에서 절정에 이르는 이 일련의 행위들에 우리는 또한 몰두, 도취, 엑스터시 등도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정신적 움직임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유머는 농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위엄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왜냐하면 농담은 쾌락을 얻는 데만 쓰이거나 그렇게 해서 얻어진 쾌락을, 공격성을 발휘하는 데만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유머러스한 태도, 다시 말해 고통을 거부하고 현실에 맞서 자아의 불가침성을 주장하고 또 쾌락의 원칙을 자신만만하게 확인하는, 그럼에도 같은 목적을 추구하는 다른 정신적 활동들과는 달리 정신 건강을 그대로 유지하는 이 유머러스한 태도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정신 건강과 유머는 혹시 서로 어울릴 수 없는 것들은 아닐까? (P512-513)
[도스또예프스끼와 아버지 살해]
도스또예프스끼가 지니고 있는 다양한 인간적 면모들 속에서 우리는 네 가지 모습을 구별해 낼 수 있다. 즉 그는 작가였고 신경증 환자였고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자로서 윤리주의자였으며 또 죄인이기도 했다. 우리를 당황케 하는 이 다양성 속에서 과연 어떻게 길을 찾아나가야 할 것인가?
그가 작가였다는 것은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가장 확실한 사실이다. 그는 셰익스피어에 버금가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은 지금까지 씌어진 가장 장엄한 소설이고 대심문관의 이야기는 세계 문학사상 가장 뛰어난 압권 중의 하나로 보아도 지나친 평가는 아니다. 그러나 정신분석은 불행하게도 창조적인 작가의 문제 앞에서는 손을 들 수밖에 없다.
도스또예프스끼가 갖고 있는 윤리주의자의 면모는 가장 쉽게 비난을 받을 수 있는 부분이다. 죄를 지은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아는 사람만이 가장 높은 윤리적 단계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이유를 내세우며 도스또예프스끼를 도덕적 인간으로서 가장 높은 경지에 도달한 사람으로 보려 한다면 이는 성급한 판단이다. 실제로도 의문이 생긴다. 자신 속에도 유혹이 있음을 깨달을면서 그 유혹에지지 않은 채 저항하는 사람이 윤리적이리라. 매번 죄를 지은 후 매우 윤리적인 덕목들을 앞세우며 뉘우치지만 반복해서 죄를 짓고 후회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이런 사람은 도덕성의 본질이 단념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윤리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실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P519-520)
도스또예프스끼의 복잡한 인성 속에서 우리는 세 가지 중요한 요소를 끌어내었는데, 하나는 양적인 것이었고 나머지 둘은 질적인 것이었다. 그의 놀라운 감정 충일 상태와 그를 학대-피학대 음란증적 인간 혹은 범죄자로 유도해야만 했었던 도착적인 충동들, 그리고 분석이 불가능한 나머지 하나인 예술가로서 그의 재능이 그것들이다. 이것들은 신경증과 관련을 맺지 않은 채 얼마든지 하나의 전체로 존재할 수 있었다. 실제로 신경증적이지 않은 상태에 있는 피학대 음란증 환자들이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충동들의 요구와 그에 길항(拮抗)하는(승화의 가능성들을 고려하지 않고 본다면) 금지들 사이의 역학 관계를 놓고 볼 때 도스또예프스끼는 흔히 <충동적 성격>이라고 불리우는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상황은 그가 신경증 환자였다는 사실이 개입하면서 불분명해진다. 신경증은 앞에서 지적했듯이 이런 조건 속에서는 피할 수 없는 것이었겠지만, 자아가 제압해야만 하는 합병증적 상황이 워낙 심각했던 만큼 쉽게 형성되기도 했다. 신경증이란 실제로 자아가 이러한 종합에 성공하지 못했고 종합을 시도하면서 자신의 전일성(全一性)을 상실했다는 신호라고 볼 수 있다. (P523)
도스또예프스끼의 경우가 그랬고 그의 특이한 죄의식과 자학적 행동들은 이상하리만치 강했던 그의 여성적 편향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도스또예프스끼의 경우를 정리해 볼 수 있다. 즉, 그에게는 특이하게 강했던 양성 소질이 있었고 또 특이하게 가혹했던 아버지에게 종속되지 않기 위해 그는 유난히 격렬하게 스스로를 보호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미 알려진 것들에 이 양성적 특질을 첨가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죽음의 엄습>이라는 이 조숙한 징후는 아버지와 자아의 동일시였고, 이 동일시는 초자아가 응징으로서 허락한 동일시이기도 했다. <너는 너 자신이 아버지가 되기 위해 아버지를 죽이고자 했다. 이제 너는 아버지가 되었다. 그러나 너는 죽은 아버지밖에는 될 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히스테리성 증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제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제 아버지가 너를 죽이고 있는 중이다.>라는 생각 역시 도사리고 있다. 자아에게 있어서 죽음의 증후는 환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남성적 욕망의 충족이면서 동시에 자학적 충족이기도 하다. 초자아에게 있어서 그것은 처벌을 통한 충족, 다시 말해 가학적 충족이다. 자아와 초자아라는 두 심급이 다시 아버지의 역을 맡고 있다. (P532)
[괴테와 정신분석]
괴테는 그 다재다능한 재능에 있어서 르네상스 시대의 대가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비교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괴테와 마찬가지로 다 빈치는 예술가이자 과학 탐구자였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이미지는 반복될 수 없는 것이며, 이 두 위대한 인물 사이에도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본성은 과학자적인 속성과 예술가적인 속성을 방해하며, 궁극적으로는 그 예술가적인 속성을 억눌렀습니다. 레오나르도가 불안한 심리를 보였다면, 그것은 그가 자신의 관심사의 영역에서 성적인 모든 것, 결국은 심리학 자체를 배제시켰던 그런 심리적인 억제 내지는 억압 때문이었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보면 괴테의 성격은 좀더 자유롭게 형성, 발전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P553-5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