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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 네이사의 <뷰티풀 마인드>

영화 <뷰티풀 마인드> 2001년

by 노용헌

영화 <뷰티풀 마인드>는 브라이언 그레이저, 론 하워드가 공동제작한 2001년 아카데미상 작품상 수상 작품. 게임 이론으로 1994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실존 인물 존 내시의 전기를 바탕으로 한 천재적 인물의 혼란스러운 내면과 주변 인물의 인간애를 보여주었다. 23살의 나이로 매사추세츠공과대학의 교수로 임용되었던 조 내시 역으로 러셀 크로우가 열연했으며, 제74회 아카데미상 작품상, 감독상, 여우조연상, 각색상을 수상했다.


수학자들의 생애를 다룬 몇 권의 전기 책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뷰티풀 마인드(A Beautiful Mind: The Life Mathematical Genius and Nobel Laureate John Nash, 2001)

실비아 네이사(Sylvia Nasar)가 쓴 책으로, 수학 천재이자 노벨상 수상자인 존 내시(John Nash)의 생애를 다뤘다. 존 내시의 일대기에 따르면, 그는 수학 천재임에도 수십 년 동안 정신분열증에 시달렸으며, 정신적으로 무너져 가는 과정에서 직업을 잃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극복하고 결국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이 책을 원작으로 하여 영화가 제작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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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수학자 모두는 약간 미친 겁니다(The Man Who Loved Only Numbers: The Story of Paul Erdos and the Search for Mathematical Truth, 1999)

폴 호프만(Paul Hoffman)이 쓴 책으로, 집도 아내도 없이 모든 삶이 오직 수 하나로만 이뤄진 수학자 폴 에어디시에 대한 이야기로 전개된다. 60년 이상 2개의 여행 가방에 옷가지 몇 개와 수학노트만 넣고 수학문제를 찾아 여러 국가를 떠돌아다니던 에어디시는 하루에 19시간을 생각과 연구에 몰두하는가 하면, 당시의 유능한 과학자들과 함께 공동연구를 하기도 하였다.


불완전성(Incompleteness: The Proof and Paradox of Kurt Godel, 2005)

레베카 골드스타인(Rebecca Goldstein)이 쓴 책으로, 불완전성 정리와 놀라운 발견을 한 천재 쿠르트 괴델의 괴팍하고도 처절한 삶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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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포브스 내쉬 주니어(John Forbes Nash, Jr.) 수학 천재이고, 합리적 행동 이론을 창안했으며, 생각하는 기계를 꿈꾸었던 그는 동료 수학자 손님을 맞아 거의 반 시간 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때는 1959년 봄, 어느 평일의 느지막한 오후였다. 5월인데도 벌써 찌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존 내쉬는 병원 휴게실 한쪽 구석의 안락의자에 파묻히듯 앉아 있었다. 옷차림에는 아랑곳하지 않아, 혁대를 매지 않은 바지 위로 나일론 셔츠가 축 늘어져 있었다. 탄탄한 체구는 헝겊 인형처럼 느른했고, 매끈한 이목구비에는 표정이 없었다. 그는 하버드 대학 교수인 조지 매키(George Mackey)의 왼쪽 발끝만 물끄러미 바라보며 거의 움직이지도 않았다. 이따금 이마로 흘러내린 길고 검은 머리칼을 불현 듯 손으로 빗어 넘기곤 할 뿐이었다. 매키는 침묵에 짓눌려 꼿꼿이 앉은 채, 휴게실 문들이 죄다 잠겨 있다는 사실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매키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부드럽게 말하려고 했지만 다소 퉁명스럽게 말이 튀어나왔다.

“어떻게 자네가..... 이성과 논리적인 증명에 몸 바친 수학자인 자네가.... 외계인이 자네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는 허황한 얘기를 믿을 수가 있단 말인가? 어떻게 외계 생물체가 자네를 차출해서 이 세상을 구하려고 한다는 허황한 얘기를 믿을 수가 있단 말인가? 어떻게 자네가....?”

마침내 존 내쉬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어떤 뱀이나 새처럼 차갑고 태연한 눈길로 매키를 응시하며 단 한 번도 눈을 깜빡거리지 않았다. “왜냐하면”하고 그는 남부 특유의 느릿한 말투로 나직하게, 독백하듯 말했다.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착상이든, 수학적 착상이든, 내게 떠오를 때는 똑같은 길을 오기 때문이지. 그러나 어떤 착상이든 진지하게 따져볼 수밖에.” (P15-16)


정신분열증에 걸린 사람을 일반적으로 미쳤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옳지 않다. 맹렬히 흥분하거나 줄곧 기분이 급격하게 바뀌는 미친 사람의 정신착란(madness)과 정신분열증은 다르다. 정신분열증 환자는 예컨대 알츠하이머병 환자나 두뇌 손상자와는 달리, 영구적으로 방향 감각을 잃고 혼란 상태에 빠지는 일이 없다. 어느 정도 현실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을 수 있으며, 대개는 실제로 파악하고 있다. 병에 걸려 있는 동안에도 내쉬는 미국과 유럽을 두루 여행했으며, 법적인 도움을 받았고, 복잡한 컴퓨터 프로그램 작성 기법을 배우기도 했다. 정신분열증은 오늘날 양극성 장애(polar disorder)로 불리는 조울증과도 구별되는데, 과거에는 두 증상의 차이를 거의 구별하지 못했다. (P29)


인간 내쉬가 악몽 같은 상태에 옥죄어 있을 때,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유령처럼 프린스턴 대학에 출몰해서 칠판에 뭔가를 끼적거리고, 종교 문헌이나 뒤적이고 있을 때, 그의 이름은 경제학 교과서에, 진화 생물학 기고문에, 정치과학 논문에, 수학 저널에 두루 등장하기 시작했다. 내쉬라는 이름은 그가 1950년대에 발표한 논문이 그대로 인용됨으로써 부각되기보다는, 많은 학과목의 기초 개념이 될 정도로 너무나 널리 받아들여지고 너무나 친숙해져서 특별히 어디에서 인용했다는 것을 언급할 필요조차 없게 된 개념들에 덧붙여진 형용사로써 부각되었다. “내쉬 균형(Nash equilibrium)”, "내쉬 협상 해법(Nash bargaining solution)“, "내쉬 프로그램(Nash program)", "데지오르지-내쉬 결과(De Giorgi-Nash result)", ”내쉬 확장(Nash blowing-up)". 신판 대형 경제학 백과사전인 <뉴 팔그레이브>가 1987년에 간행되었을 때, 편집자들은 이렇게 주석을 달았다. 경제학을 휩쓴 게임 이론이라는 혁명은 “폰 노이만과 내쉬의 기초 수학 정리에서 비롯했으며 그 이상의 새로운 정리는 없다.”

게임 이론가 내쉬가 기하학자 내쉬 혹은 해석학자 내쉬와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럴 정도로 폭넓은 이종 분야에서 내쉬의 아이디어가 영향력을 더해가고 있을 때에도, 인간 내쉬는 여전히 베일에 가려 있었다.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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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필드는 주변에서 무성하게 자라는 “하늘빛 치커리”의 들판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오늘날에도 큰 거리는 물론 골목길까지 치커리투성이다. 그러나 이 소도시가 생기게 된 것은 굽이치는 언덕들마다 석탄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외딴 소도시인 블루필드를 에워싸고 있는 산은 “버지니아 혹은 웨스트 버지니아의 산 가운데 가장 야성적이고 가장 울퉁불퉁하며 가장 낭만적인 산”으로 알려져 있다. 노포크-웨스턴 사는 1980년대에 “우격다짐으로 무식하게” 로아노크에서 블루필드에 이르는 철도를 놓았다. 블루필드는 애팔래치아 산맥 가운데서도 거대한 포카혼타스 석탄층의 동부 가장자리에 위치한 요지였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블루필드는 엉성하게 만든 전초기지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곳에서는 유태인 상인과 흑인 건설 노동자와 테즈웰 카운티 농부들이 힘겹게 살아갔다. 백만장자가 된 탄광업자들은 대부분 10마일 떨어진 브램웰에 살았는데, 이탈리아와 헝가리 혹은 폴란드계 이민 노동자들과 잦은 갈등을 빚었다. 탄광업자들은 존 루이스 등 전미국 탄광노조 지도자들과 협상을 벌이곤 했는데, 종종 협상이 결렬되어 유혈 파업과 직장 폐쇄에 이르기도 했다 --그러한 실정은 존 세일리스의 영화 <매이트원(Matewan)>에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존 내쉬의 부모가 결혼했던 1920년대에는 블루필드의 모습도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고 있었다. 시카고와 노포크를 연결한 철도가 직접적인 변화의 이유였다. 중간 기착지인 블루필드는 교통의 요충지가 되어, 화이트칼라 계층의 관리자, 변호사, 소규모 사업가, 목사, 교사 들이 운집하게 되었다. (P45)


독자적인 한 인간의 형성에는 온갖 이상하고 사소한 변수가 개입함으로써 인성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그 모든 변수의 개입을 막고 틀에 박힌 규범만 따른다면, 개인은 다중이라는 중립적 회색지대에서 길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것은 인류의 좋은 자질을 계승하는 진실된 방법이 아니다. ..... 인생은, 그 찬란한 인생의 자질은, 남들의 규범에 따름으로써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다같이 허기와 갈증을 느낀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향한 허기와 갈증인지, 언제, 어떤 식으로 닥쳐오는 허기와 갈증인지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당신만의 인생을 설계하라, 그 설계에 따라 결정까지, 당신 나름의 결정까지 나아가라.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인생의 문 밖에 주저앉아 누군가 차임벨을 울리는 소리를 들을 뿐, 당신 자신의 차임벨을 울릴 만큼 성숙하지 못할 것이다.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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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의 책은 대중적으로 인기가 있으면서 지적으로도 매혹적인 데가 있다. 어린 수학자들을 사로잡았던 수학 문제들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아직도 심오하고 아름다운 문제들이 많은데, 그중에는 열네 살의 아마추어 소년 수학자가 풀 수 있는 문제도 있다고 호언장담한 점도 그렇다. 페르마 (Pierre de Fermat)에 대한 얘기는 특히 내쉬를 사로잡았다. 페르마는 시대를 통틀어 더없이 위대한 수학자 가운데 한 명이었지만 더없이 보수적인 17세기 프랑스 판사이기도 했는데, “조용하고 근면하고 파란 없는” 생애를 보낸 인물이다. 뉴턴과 함께 미적분을 발명했고, 데카르트와 함께 해석 기하학을 발명했던 페르마의 주된 관심사는 정수론, 곧 “고등 산수”였다. 정수론은 “우리가 말을 배우는 것과 거의 동시에 입에 올리게 되는, 하나, 둘, 셋, 넷, 다섯.... 등의 정수들 사이의 관계를 탐구한다.”

소수(1보다 큰 정수 p가 1과 p 자신 이외의 약수를 갖지 않을 때의 p. 이를테면 2, 3, 5, 7, 11, 13, ....)에 관한 유명한 페르마의 정리 하나를 증명한 내쉬는 일종의 계시를 경험했다. 다른 수학 천재들, 그 중에서도 특히 아인슈타인이나 버트란트 러셀 등도 어릴 적에 유사한 계시를 경험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아인슈타인은 열두 살 때 유클리드(Euclid)의 세계를 처음 경험했을 때의 “경이”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주장들이 있었다. 예컨대 한 삼각형의 세 수선(垂線 altitudes)(각 꼭지점에서 마주 보는 변과 수직되게 그은 직선)은 한 점에서 만난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한 명제는 결코 자명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 주장들은 한 점 의혹의 여지도 없이 명명백백하게 입증될 수 있었다. 그러한 명료함과 확실성은 내게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주었다. (P58-59)


내쉬는 카네기에서의 3년차이자 마지막인 해에 더핀의 강의를 들었다. 내쉬는 19세에 이미 성숙한 수학자로서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더핀은 이렇게 회상했다. “그는 뭐든지 구체적인 것으로 환원하려고 했습니다. 기존에 알고 있던 것과 연결시켜서, 그것을 먼저 감각적으로 느낀 다음 본격적으로 문제 해결에 들어간 거지요. 그건 라마누잔이나 푸앵카레가 쓰던 방법입니다. 라마누잔은 마음으로 문제를 파악하고 답을 알아낸다고 주장했습니다. 푸앵카레는 버스에서 내리면서 위대한 정리 하나를 떠올렸다고 말했지요.”

내쉬는 아주 일반적인 문제들을 좋아했다. 재치가 필요한 아기자기한 문제는 그리 잘 풀지 못했다. 라울 보트는 이렇게 회상했다. “그는 대단히 몽상적인 인물이었습니다. 한번 생각하면 끝이 없었지요. 그가 생각에 잠기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들은 아예 책을 펼쳐 들었습니다.” 또 와인버거는 이렇게 회상했다. “내쉬는 누구보다도 많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 우리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연구하고 있었죠. 그가 가진 지식의 양은 엄청났어요. 정수론에 대한 박식함은 혀를 내두를 정도였습니다.” 또 시겔은 이렇게 회상했다. “그는 디오판투스 방정식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그런 게 있다는 것을 우리는 들어보지도 못했는데, 그는 벌써 연구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 일화를 통해 볼 때, 수학자로서 내쉬가 평생 지녔던 관심사의 대부분 --정수론, 디오판투스 방정식, 양자역학, 상대성원리 등-- 은 십대 후반에 이미 그를 매료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P7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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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의 수학과 건물도 부귀하고 근접하기 어렵다는 인상을 주었다. “파인홀(Fine Hall)은 세계의 수학과 건물 가운데 가장 호화로울 것입니다.” 한 유럽계 학자가 부럽다는 듯이 말했다. 그것은 박공 구조의 신고딕풍 빨간 벽돌과 판석으로 된 성채였다. 그 스타일은 파리의 콜레주 드 프랑스와 옥스퍼드 대학을 연상시켰다. 파인홀의 초석에는 납 상자가 하나 들어 있는데, 납 상자에는 프린스턴 수학자들의 작품 사본과 작품 제작의 도구들 --연필 두 자루, 분필 하나, 당연히 지우개도 하나-- 이 담겨 있다. 파인홀은 위대한 사회학자 소스타인 베블런의 조카인 오스왈드 베블런이 설계했는데, 수학자들이 “떠나기 싫은” 성소로 만들려고 했다. 이 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어둑한 석조 화랑은 혼자서 거닐거나 수학적 한담을 나누며 교제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원로 교수를 위한 아홉 개의 “연구실(studies)” --사무실(offices)이라고 하지 않는다!-- 은 조각이 된 패널벽, 눈에 안 띄는 서류 캐비넷, 제단처럼 열리는 칠판, 동양의 양탄자, 육중하고 호화로운 가구 들을 갖추고 있었다. 빠르게 발전하는 수학 사업의 긴박감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각 교수 사무실마다 전화가 놓여 있었고, 화장실마다 독서용 전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3층의 도서관은 수학 저서와 저널에 관한 한 세계 최고였고, 24시간 개방되었다. 테니스를 좋아하는 수학자들은 운동 후 집에 들렀다가 사무실로 돌아갈 필요가 없었다. 사무실 인근에 있는 테니스 코트에는 샤워장이 딸린 탈의실도 있었기 때문이다. 1921년에 개관했을 때, 한 대학생 시인은 파인홀을 “목욕도 할 수 있는 수학 컨트리 클럽”이라고 묘사했다.

1948년에 프린스턴은 수학자의 요람이었다 --화가와 소설가에게 파리가, 정신분석학자와 건축가에게 비엔나가, 철학자와 극작가에게 고대 아테네가 요람이었던 것에 비견될 수 있다. (P86-87)


괴팅겐 대학의 독일인 수학 천재 데이빗 힐버트(David Hibert)는 수학 혁명을 일으켰다. 힐버트는 1900년에 유명한 계획을 하나 추진했는데, 그 목적은 “정해진 방법에 따라 기계적으로 해답을 얻을 수 있도록 모든 수학을 공리화”한다는 것이었다. 괴팅겐 대학은 기존의 수학을 좀더 확실한 토대 위에 올려놓자는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사학자 로버트 레너드는 이렇게 썼다. “힐버트 계획은 20세기 초 수학의 위기에 대한 반작용으로 등장했다. 이 계획의 목적은 수학자들이 분발하여 칸토어 집합론을 깨끗이 정리하여, 수학을 일정수의 확고한 공리라는 반석 위에 올려놓자는 것이었다. .... 이로써 수학은 일대 방향 전환을 하여 추상성을 더욱 강조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직관으로부터는 갈수록 멀어졌다 -- 여기서 직관이란 직선과 면으로 이루어진 우리의 일상 세계에 대한 직관이다. 수학 용어도 직접 경험 차원의 직관적 내용(intuitive content)을 걸러내고, 이론 차원의 상황적 문맥(context of situation)내에서 공리로 단순 정의되는 쪽으로 나아갔다. 말하자면 형식주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P91)


천재는 환경과 무관하게 출현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믿음이다. 예를 들어, 위대한 인도 수학자 라마누잔의 전기를 썼던 로버트 캐니겔은 이렇게 주장했다. “젊은 시절, 라마누잔은 교사 자리도 얻지 못하고 다른 수학자들과 완전히 격절된 채 5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런데 그 역경은 오히려 경이적인 발견을 이룩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라마누잔의 부고를 쓴 하디(G.H. Hardy)는 그런 견해를 “가소로운 감상주의”라고 일축했다. 케임브리지의 수학자이자 라마누잔과 절친했던 하디 자신도 과거에는 천재가 환경과 무관하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지만, 라마누잔이 33세의 나이에 세상을 뜨자 이렇게 썼다. “라마누잔의 비극은 그가 요절했다는 것이 아니다. 그가 불운하게 보낸 5년의 세월 동안, 그의 천재성이 오도되고 탈선되어, 방향 감각조차 잃을 정도였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비극인 것이다.”

프린스턴이 대학원생들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면서도 창조성에 가차없는 압력을 가한 것은, 내쉬와 같은 기질이나 스타일을 지닌 수학자에게는 더없이 적절한 교육 방식이었다. 내쉬의 진정한 천재성의 증거를 최초로 이끌어내는 데에는 그런 교육 방식보다 더 바람직한 것이 있을 수 없었다. 그것은 내쉬가 입학한 후 몇 달 만에 뚜렷이 입증되었는데, 행운이라면 행운일 수도 있었다. 그가 특히 필요로 했던 것을 안성맞춤으로 제공해주는 적소(適所)에, 그리고 적시(適時)에 입학했다는 것은 커다란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진정한 일류급의 훈련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짐으로써, 그의 독자적 정신력과 야망과 온전한 독창성은 날개를 달게 되었다. (P107-108)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아이디어가 폭풍처럼 내 정신을 강습해왔다. 나는 그것들을 걷잡을 수 없었고, 시간이 없어서 작은 편린밖에 다룰 수 없었다.” 내쉬도 아이디어가 넘쳐흐른 것 같다. 스틴로드는 이렇게 썼다. “대학원 1년차였을 때, 내쉬는 평면 위의 단순 폐곡선의 한 특징을 나에게 제시했다. 그것은 1932년에 와일더(Raymond Wilder)가 내놓은 것과 근본적으로 같은 것이었다. 얼마 후 그는 연결성(connectedness)의 기초 개념에 바탕을 둔 위상수학의 공리 체계를 고안했다. 나는 그에게 윌리스의 논문을 참고하라고 말해주었다. 2년차에 그는 내게 새로운 호몰로지 군(homology group)에 대한 정의를 내놓았다. 그것은 호모토피 고리(homotopy chains)에 바탕을 둔 라이데마이스터 군(Reidemeister group)과 똑같은 것으로 입증되었다.” 이러한 내쉬의 아이디어는 조숙한 학생의 총명함을 과시하기 위한 두뇌 연습 수준의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그것은 수학적으로 흥미롭고 중요한 아이디어였다.

내쉬는 늘 문제를 찾아다녔다. 밀너의 말에 따르면, “그는 미해결된 문제들이 무엇인지 환히 꿰고 있었다. 그 가운데 중요한 문제가 무엇인지 여러 사람에게 물어 재확인을 하곤 했다. 그는 아주 야심에 찬 계획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연구를 하는 데 있어서도 내쉬는 강한 자신감과 자만심을 보였다. 이를테면,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아인슈타인을 찾아가서, 양자이론을 수정할 몇 가지 아이디어 초안을 제시한 일까지 있었다.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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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이 더욱 힘을 쏟은 것은, 빛과 중력 현상을 하나의 이론으로 통합하는 것이었다. 한 전기학자가 말한 대로, 그는 “우주가 한쪽은 상대성이론으로 다른 한쪽은 양자역학으로 두 쪽이 나는 것”을 결코 용인할 수 없었다. 70회 생일 직전까지도 아인슈타인은 우주의 다양한 힘과 입자들 모두에 적용할 수 있는 일관된 단 하나의 원리를 찾아내려고 애썼다. 소위 “통일장이론(unified field theory)"이라는, 생애 마지막이 될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쉬는 아인슈타인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면담을 신청했다. 그것은 내쉬의 야망과 환상이 어느 정도인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프린스턴에 입학한 지 고작 두어 주 지났을 무렵, 내쉬는 펄드홀의 아인슈타인 사무실을 찾아가서 면담 신청을 했다. 그는 조수에게 아인슈타인 교수와 토론하고 싶은 아이디어가 있다고 말했다. (P126)


내쉬는 당시 “중력, 마찰, 복사”에 대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다고 후일 회고했다. 그는 광자(photon) 따위의 입자가 공간을 이동할 때, 광자의 요동치는 중력장이 다른 중력장들과 상호작용을 하기 때문에 마찰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착안했다. 그러한 직감을 이론적으로 충분히 따져보았던 내쉬는, 면담 시간 동안 줄곧 칠판 앞에 서서 방정식을 써가며 설명을 했다. 아인슈타인과 케메니도 칠판 앞에 서 있었다. 토론은 족히 한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결국 아인슈타인이 히죽 웃으며 한 말은 이렇다. “젊은이, 물리학을 좀더 공부해야겠어.” 내쉬는 아인슈타인의 충고를 곧바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신의 아이디어를 논문으로 남기지도 않았다. 그러나 젊은날 물리학에의 외도는 평생의 관심사로 지속되었다. 물론, 통일장이론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연구처럼, 딱히 이렇다 할 열매를 맺지는 못했다. 그런데 수십 년이 지난 후, 한 독일 물리학자가 내쉬와 유사한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P127)


가장 인기를 끈 것은 크리그스필이었다. 체스의 사촌격인 크리그스필은 프러시아에서 한 세기 동안 인기를 끈 게임이었다. <죄수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라는 책을 쓴 윌리엄 파운드스톤(William Poundstone)의 말에 의하면, 이 게임은 18세기에 독일군사학교의 교육용 게임으로 고안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프랑스와 독일 국경지대 지도에 3천 6백 개의 네모 칸을 그어놓고 게임을 했고, 이후 게임판은 다양하게 발전했다. 부다페스트에서 성장한 폰 노이만은 형제들과 크리그스필 게임을 했다. 그것은 그래프 종이 위에 성곽과 고속도로, 해안 등을 그려놓고 정해진 규칙에 따라 군대를 전진 후퇴시키는 게임이었다. 크리그스필은 남북전쟁 후 미국에도 선을 보였다. 그러나 “너무 어려워서 수학자가 아니면 쉽게 익힐 수 없는 게임”이라고 어떤 장교가 불평했다는 것을 파운드스톤이 자기 책에 인용해놓기도 했다. 파운드스톤은 이 게임을 외국어 학습에 비유했다. 1930년대에 프린스턴 두레방에 등장한 이 게임의 버전은 체스판 세 개를 가지고 하는 것이었다. 그 중 하나는 양 선수의 움직임을 정확히 볼 수 있는 것이었는데, 심판만 그것을 볼 수 있었다. 두 선수는 등을 맞대고 앉아 있어서 상대의 움직임을 알 수 없었다. 심판은 그들에게 군대의 움직임이 규칙에 맞는지 틀리는지 알려주고 죽은 말을 들어내는 역할만 했다. (P135-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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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늦겨울의 어느 날 아침, 내쉬는 대학원 안뜰에서 자기보다 키가 좀 작고 탄탄한 체격의 게일과 말 그대로 부닥쳤다. “게일! 완벽한 정보로만 이루어진 게임의 예를 내가 찾아냈어.” 내쉬가 난데없이 말했다. “이 게임에 운이라는 건 없어. 순전히 전략만 있지. 처음 두는 사람이 항상 이길 수 있다는 건 입증할 수 있지만, 어떤 전략으로 이길 것인지는 말할 수 없어. 처음 둔 사람이 졌다면 그건 실수 때문이지. 하지만 완벽한 전략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어.”

내쉬의 설명은 늘 그렇듯이 너무 간략했다. 그는 6각형이 들어찬 마름모꼴의 게임판이 아니라 체스판으로 그 게임을 설명했다. “네모 칸들이 수직이나 수평으로, 또 대각선으로 인접해 있다고 치자구.” 그렇게 말한 그는 게임 방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P138)


내쉬는 파인홀에서 회자된 수학의 새 분야 하나에 눈을 뜨게 되었다. 게임 이론. 그것은 1920년대에 폰 노이만이 개척한 것이다. 게임은 인간의 합리성이 발휘되는 단순화된 무대장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게임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합리적인 인간 행동에 관한 체계적인 이론을 구축하려는 하나의 시도가 바로 게임 이론이다.

폰 노이만과 오스카 모르겐슈테론이 공저한 <게임 이론과 경제행위> 초판이 발행된 것은 1944년이었다. 당시 터커는 파인홀에서 게임 이론에 대한 인기 높은 새 세미나를 개최하고 있었다. 미해군은 대잠수함 전투 때 게임 이론의 가치를 알게 되어 프린스턴의 게임 이론 연구에 돈을 쏟아 부었다. 프린스턴과 고등학문연구소의 순수수학자들은 사회과학 혹은 군사 용도로 쓰인 이 새로운 수학 분야를 “하찮은 것”, “한때의 유행”, “천한 것”쯤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프린스턴의 학생들 대다수에게는, 폰 노이만과 관련된 다른 모든 분야가 그랬듯이, 이 분야도 대단히 매력적으로 보였다.

쿤과 게일은 언제나 폰 노이만과 모르겐슈테른의 책 얘기만 했다. 내쉬는 터커 세미나의 첫날 연사 가운데 한 명이었던 폰 노이만의 강의를 들었다. 그 분야에 해결되지 않은 흥미로운 문제가 아주 많다는 사실에 내쉬는 매력을 느꼈다. 그는 곧 매주 목요일 오후 5시에 열린 터커 세미나의 단골이 되었고, 오래지 않아 “터커파”로 분류되었다. (P149-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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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이론과 경제행위>는 학생들 사이에 “바이블”로 통했다. 이 바이블은 수학적으로 혁신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폰 노이만의 경이적인 최대 최소 정리를 초월하는 새로운 정리를 담고 있지는 못했다. 그러한 사실을 내쉬는 일찌감치 파악한 것이 분명하다. 내쉬가 보기엔, 폰 노이만이 새 이론을 사용했다고는 하지만 경제학의 주요 현안을 전혀 해결하지 못했고, 게임 이론 자체도 그리 발전시키지 못했다. 게임 이론을 경제학에 적용했다지만, 그것은 경제학자들이 여태껏 씨름해온 문제들을 재진술한 것에 불과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게임 이론을 가장 잘 전개한 부분이 2인 제로섬 게임만을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 분량이 책의 3분의 1에 달한다. 그런데 제로섬 게임은 총체적 갈등 상황의 게임이기 때문에 사회과학에는 거의 적용될 수가 없었다. 또 2인 이상의 게임에 대한 설명은 불완전하다-- 이것 역시 책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폰 노이만은 다자간의 게임에도 해결책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했다. <게임 이론과 경제행위>의 마지막 80쪽은 비제로섬(non-zero-sum) 게임을 다루었다. 그런데 폰 노이만은 그런 게임도 제로섬 게임의 형식으로 환원하고 말았다. 잉여분을 소비하거나 결손분을 보상해주는 허구의 참여자를 도입했던 것이다. 후일 존 하사니(Johm C.Harsanyi)는 이렇게 논평했다. “그러한 도입이 비제로섬 게임을 대충 논의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지만 완벽한 논의로써는 미흡하다. 그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경제행동에서 실제로는 비제로섬 게임이 더 쓸모가 많기 때문이다.”

내쉬처럼 야심에 찬 젊은 수학자에게, 폰 노이만 이론의 허점이나 결함은 오히려 유혹적이었다. 광파(光波)가 헤엄치는 공간으로 추정되었던 에테르 층이 부재한다는 당혹스러운 사실이 알려졌을 때, 젊은 아인슈타인은 유혹을 느끼고 연구에 들어갔다. 마찬가지로 내쉬는 즉시 그 문제를 숙고하기 시작했다. 폰 노이만과 모르겐슈테른이 새로운 그 이론의 가장 중요한 시험대라고 말했던 그 문제를...... (P156-157)


내쉬가 첫 논문을 쓴 것은 대학원 두 번째 학기 때였다 --그 논문은 현대 경제학의 훌륭한 고전이 되었다. “협상 문제(The Bargaining Problem)”는 특히 젊은 수학자에게 대단히 현실적인 논문 주제이다. 그러나 탁월한 수학자가 아니고는 그런 주제에 도전해볼 생각을 품을 수 없었다. 내쉬는 카네기 공대 시절 경제학이라고는 한 과목밖에 수강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 논문에서 그는 경제학의 가장 오래된 문제 가운데 하나인 협상 문제에 대해 “전적으로 새로운 각도”에서 접근했고, 그지없이 놀라운 해결책을 제시했다. 인간의 행동이 사실상 체계적으로 분석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오랫동안 경제학자들은 인간의 행동이 심리학 분야에 속하므로 경제적 추리의 범위를 넘어선다고 생각해왔다. (P158)

전쟁인가? 평화인가? 경제적 경쟁이라는 “멍석(Maud)"을 깔고 싶어하는 사람이 묻는다. 답은 둘 다이다. 계약 당사자들간에 계약이나 협정이 맺어진다면 평화이고, 다른 계약자들의 동의 없이 일부 계약자들만 계약을 맺는다면 전쟁이다.

경제학의 제1원리는 모든 행위자가 자기 이익에 따라서만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 원리의 작용은 두 국면에서 검토될 수 있다. 즉, 행위자가 자기 행위에 영향을 받는 타인들의 동의를 얻어 행동하느냐, 아니냐가 그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첫 번째 국면은 평화이고 두 번째 국면은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P160)


폰 노이만을 만나 참담한 경험을 한 며칠 후, 내쉬는 데이빗 게일을 찾아가 말했다. “폰 노이만의 최대 최소 정리를 일반화하는 방법을 찾아낸 것 같아. 아이디어의 기본적인 골격을 말하자면, 2인 제로섬 해법에 있어서 양자를 위한 최선의 전략은.... 바로 그것에 전체 이론이 기초하고 있지. 그리고 그건 참여자가 다수일 때도 적용되니까 제로섬 게임이어야 할 필요도 없어,” 게일은 내쉬의 말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그걸 균형점(equilibrium point)이라고 부를 거야.” 내쉬는 끝까지 지속되는 경향이 있는 자연적 휴지점(natural resting point)을 균형이라는 개념으로 파악했다. 폰 노이만과 달리 게일은 내쉬의 논점을 이해했다. “음, 괜찮은 박사논문감이야.” 게일이 말했다. 게일은 내쉬의 아이디어가 폰 노이만의 제로섬 게임의 개념보다 실세계 상황에서 훨씬 폭넓게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꿰뚫어 보았다. 훗날 게일은 이렇게 말했다. “내쉬의 개념은 군비 축소 문제에도 적용될 수 있는 일반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게일은 여러 가지 적용 가능성보다는 그 아이디어의 우아함과 보편성에 매혹되었다. “그 수학은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수학적으로도 완벽했구요.” (P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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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이론의 전체 구조는 두 가지 정리를 기초로 삼고 있다. 폰 노이만의 최대 최소 정리(1928)와 내쉬의 균형 정리(1950)가 그것이다. 내쉬의 정리는, 그의 생각처럼, 폰 노이만의 정리를 일반화시킨 것으로 볼 수도 있고, 급진적인 일탈로 볼 수도 있다. 폰 노이만의 정리는 완전한 대립 게임, 곧 2인 제로섬 게임에 대한 이론의 초석이 되었다. 그러나 2인 제로섬 게임은 실제 세계와 사실상 관련이 없다. 전쟁 상황에서도 거의 언제나 협력에 의한 소득이 있기 마련이다. 내쉬는 협력 게임과 비협력 게임의 차이를 뚜렷이 했다. 협력 게임은 참여자가 다른 참여자에게 합의를 강제할 수 있는 게임이다. 바꾸어 말하면, 참여자들을 단일 집단화해서 특정 전략에 완전히 예속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비협력 게임에서는 그런 집단적 구속이 불가능하다. 강제적인 합의도 없다. 내쉬는 협력과 경쟁이 혼합된 게임을 포함시켜 이론을 확대시킴으로써, 게임 이론이 경제학은 물론, 정치학, 사회학, 진화 생물학 등에도 적용될 수 있는 길을 여는데 성공했다. (P174-175)


1950년대 초의 랜드는 전무후무한 집단이었다. 그것은 독창적인 두뇌 집단이자 이상한 혼성 집단이었다. 러시아보다 우세한 전력을 갖기 위해 --혹시 그런 전쟁 억지책이 실패할 경우에는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가공할 신무기인 핵폭탄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의 문제를 합리적으로 분석하고, 최신의 수량화 방법을 적용하는 것, 그것이 이 집단의 유일한 임무였다. 랜드의 사람들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기 위해 거기 있었다 --미래학자 허먼 칸(Herman Kahn)의 유명한 말이다. 이 집단에는 수학과 물리학, 정치학, 경제학의 최고 인재들이 모여 있었다. 랜드는 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Foundation)> 시리즈의 모델이기도 했다-- 이 소설 속의 랜드식 집단에는 초이성 사회과학자, 곧 정신역사학자들로 가득한데, 주된 임무는 카오스로부터 은하계를 구하는 것이다. 랜드의 가장 유명한 사상가인 칸과 폰 노이만은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의 모델로 알려져 있다. 랜드의 전성기는 10년 정도에 불과했지만, 인간의 갈등을 관찰하는 랜드의 방식은 20세기 후반의 미국 국방정책의 기틀이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미국 사회과학에 지속적이고도 뿌리 깊은 영향을 미쳤다. 랜드가 발족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때문이었다. 당시 미군은 사상 처음으로 과학자와 수학자, 경제학자들을 징집해 활용함으로써 전쟁 승리에 한몫하도록 했다. (P189-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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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펜하이머는 맨하튼 프로젝트의 과거 책임자였고 고등학문연구소의 소장이었다. 결국 오펜하이머는 매스컴의 집중 조명을 받아 비밀 취급 인가를 박탈당했다. 표면상의 이유는 오펜하이머가 젊은 시절 좌익 활동에 연루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당시 폰 노이만과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증언했듯이, 오펜하이머가 수소폭탄 개발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결국에는 매카시도 비난의 대상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랜드의 소심하고 편집증적인 보안유지 분위기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당시 랜드는 미공군과 원자력 위원회의 돈으로 꾸려가고 있었고, 수소폭탄과 대륙간 탄도 미사일 작업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수학자들이 연구하는 과제는 기밀사항으로 분류된 것도 아니었지만, 분류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랜드는 비밀취급인가에 대해서 아주 까다롭게 나오기 시작했다. 사실 당시의 랜드에는 리처드 벨맨(Richard Bellman)과 같은 괴짜들이 많았다. (프린스턴 수학 교수였던 벨맨은 각종 공산당 활동에 연루되었는데, 소련의 스파이였던 줄리우스 로젠버그와 에델 로젠버그의 사촌과 우연히 만난 사건을 포함해, 대부분 우연히 연루된 것이었다.) (P200)


징병 위험을 성공적으로 비켜 지나간 내쉬는 이제 순수 수학자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논문 작성에 들어갔다. 다양체(manifold)라고 불리는 기하학적 대상에 관한 문제는 당시 수학자들의 큰 관심을 끌고 있었다. 다양체는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방법이었다. 워낙 새로운 탓에 유명 수학자들도 더러는 그것을 제대로 정의조차 하지 못했다. 해석학의 선두주자였고 뛰어난 교수였던 살로몬 보흐너는 프린스턴 대학원 강의에서, 다양체를 정의하기 시작하다가 수렁에 빠지곤 했다. 그는 정의 내리길 포기하고 한 차례 분통을 터트리고는, “이만하면 자네들 모두 다양체가 어떤 건지 알았을 거야.”하고는 다른 얘기로 넘어가버렸다.

1차원에서는 다양체를 직선이라 할 수 있다. 2차원에서는 평면이라고 할 수 있다. 혹은 입방체나 풍선이나 도넛 등의 표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물제 위의, 관찰이 유리한 어느 한 점에서 바라볼 때, 가까운 주변부가 완전히 규칙적이고 정상적인 유클리드 공간처럼 보인다는 것이 다양체의 특징이다. 여러분이 하나의 점으로 축소되어 도넛의 표면 위에 앉아 주위를 둘러본다고 생각해 보라. 여러분은 평면 원반 위에 앉아 있는 것처럼 느낄 것이다. 1차원으로 내려가서 곡선 위에 앉아 있다면, 주변의 선이 직선으로 보일 것이다. 여러분이 3차원 다양체 위에 앉아 있다면, 좀 난해하긴 하지만, 여러분의 주변 공간은 공의 내부처럼 보일 것이다. 바꿔 말하면, 물체가 아주 멀리서 나타나는 방식과 여러분의 근시안적인 눈에 나타나는 방식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1950년 무렵, 위상수학자들은 눈에 보이는 모든 대상을 위상수학적으로 재정의해가며 다양체 연구에 대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2차원의 대상은 위상수학적으로 모두 정의가 되었지만, 말 그대로 없는 게 없을 정도인 3차원과 4차원 대상은 오늘날에도 전혀 정확히 묘사되지 못했다고 할 정도로, 다양체는 종류가 너무나 다양하고 그 수가 거의 무한하다. 다양체는 물리학 문제에서 아주 폭넓게 나타나는데, 특히 우주론의 다양체 문제는 다루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다. 푸앵카레가 참석한 1885년의 수학 경시대회에서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국왕 오스카 2세는 난해한 것으로 악명 높은 3체문제(three-body problem)를 출제했다. 다양체가 특히 부각되는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해와 달과 지구처럼 3천체의 궤도를 예측하는 것이 필요하다.

내쉬가 다양체 문제에 매료된 것은 카네기에서였다. 그러나 그의 아이디어가 분명한 모습을 띄게 된 것은, 프린스턴에 와서 스틴로드와 정기적인 대화를 나누면서부터인 것 같다. 내쉬의 노벨상 수상 약전을 보면, 다자간 게임의 균형 연구 결과를 얻었던 1949년 가을에 그는 또 “다양체(manifold)와 실 대수 다양체(real algebraic varieties)에 관한 멋진 발견”을 했다. 내쉬가 다자간 게임의 균형 아이디어를 들고 폰 노이만을 찾아갔다가 박대만 당한 후, 박사논문감으로 고려했던 것이 바로 이 다양체 문제였다. (P232-234)


대수 다양체(algebraic varieties)는 다양체(manifolds)와 마찬가지로 기하학적 대상이다. 그러나 대수 다양체는 하나 혹은 그 이상의 대수방정식으로 기술되는 점들의 궤적(locus of points)으로 정의되는 대상이다. 따라서 x²+y²=1은 평면 위의 원을 나타내는 반면, xy=1은 쌍곡선을 나타낸다. 내쉬의 정리는 다음과 같다. k차원의 매끄러운 콤팩트 다양체 M이 있다고 할 때, R²ᵏ⁺ˡ에는 실 대수 다양체 V와 V의 연결된 성분(connected component) W가 존재하여, 이 W는 M과 미분 동상(diffecomorphic)인 매끄러운 다양체가 된다. 쉽게 말하면, 그 어떤 다양체에서도 대수 다양체를 발견할 수 있으며, 그 대수 다양체의 한 부분은 필수적으로 원래의 대상과 일치한다고 내쉬는 주장한 것이다. 그런 다양체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더 높은 차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내쉬는 주장했다.

내쉬의 연구 결과는 아주 놀라운 것이었다. 1996년에 내쉬를 국립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지명하자고 주장한 수학자들은 이렇게 썼다. “과거에는 매끄러운 다양체가 다양체(varieties)보다 훨씬 더 일반적인 대상이라고 가정되어 왔다.” 오늘날에도 내쉬의 연구 결과는, 다채로운 적용성을 접어두더라도 “아름다운” 혹은 “놀라운” 것이라는 인상을 수학자들에게 준다. (P237-238)


2년 후 시카고 대학 강의에서 내쉬는 자신의 첫 중요 정리를 설명하며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이 정리를 만든 것은 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말은 내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는 수학을 어떤 거대한 체계가 아닌, 도전적인 문제들의 집합이라고 본 수학자였다. 수학자를 분류하면, 문제 해결자와 이론가로 나눌수 있는데, 내쉬는 기질상 문제 해결자에 속했다. 그는 게임 이론가도, 해석학자도, 대수학자도, 기하학자도, 위상수학자도, 수리물리학자도 아니었다. 다만 그는 이들 학문 분야에서 근본적으로 아무도 업적을 달성하지 못한 영역에 가늠자를 맞추었다. 뭔가 발언할 수 있는 흥미로운 문제를 발견하는 것, 그것이 그에게는 중요한 것이었다. (P286)


매장은 어떤 기하학적 대상을 어떤 차원의 어떤 공간 속에 집어넣는 것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공간의 부분공간으로 만드는 것-- 이다. 풍선의 곡면을 예로 들어보자. 우리는 이것을 2차원 공간이 칠판 면에 집어넣을 수 없다. 그러나 3차원 혹은 더 고차원 공간의 부분공간으로 만들 수는 있다. 이제 좀더 복잡한 대상인 클라인 병(Klein bottle)의 경우를 들어보자. 클라인 병은 뚜겅과 바닥을 잘라낸 양철 깡통 같은 것의 윗부분을 잡아 늘려서 옆에 뚫은 구멍 속으로 집어넣어 밑부분과 연결시킨 것이다. 이 물체를 3차원 공간에서 만들어보면, 겹치는 면이 생긴다. 이것이 수학적 관점에서는 좋은 게 아닌데, 겹친 면 부근이 이상하고 불규칙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집어넣는 부분의 거리와 변화율 등 다양한 속성을 계산하려는 시도가 어렵게 된다. 그러나 이 클라인 병을 4차원 공간에 넣으면 겹치는 부분이 생기지 않는다. 3차원 공간에 넣어진 공처럼, 4차원 공간 속의 클라인 병은 완벽하게 단정한 모습의 다양체가 된다.

내쉬의 정리는 매끄러움(smoothness)의 특성을 갖는 어떤 종류의 곡면도 유클리드 공간에 매장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손수건 같은 다양체를 전혀 비틀지 않고 접을 수 있음을 입증했다. 내쉬의 정리가 진실일 거라고 기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사실상 누구나 그것이 틀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P288)


아들을 대하는 내쉬의 태도나 행동은 좀 이상할 정도로 일관성이 없었다. 아들의 탄생과 관련해서, 그는 같이 잔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여자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여느 젊은 남자와는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결혼으로 직행하는 빠른 길을 피해갔다. 애 아버지라는 것을 전력을 다해 부인하다가 여자친구의 생애에서 슬그머니 사라져버리는 흔한 길도 선택하지 않았다.

그가 이기적으로 행동했고, 매몰차기까지 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들을 가난에서 보호해주지 못했고, 어머니와도 떨어져 살도록 방치했다. 그런데도 자기가 아버지임을 인정하고 유대 관계를 지속하고자 했던 것에 대해, 그의 아들이나 다른 사람들은 후일 그것을 순전히 나르시시즘 탓으로 돌렸다. 그것이 부분적으로 사실이라 해도, 내쉬 또한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사랑하고 사랑받기를 원했으며, 힘 없는 작은 아이인 자기 아들에게 끌리는 마음을 어쩔 수가 없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내쉬가 존 데이빗의 인생에서 갑자기 사라져버린 1959년의 어느 날, 엉성하게 포장해서 뭉개진 소포가 배달되었다. 살짝 부서지긴 했어도 아름답게 만든 나무 비행기가 안에 들어 있었다. 존 데이빗은 후일 이렇게 회상했다. “예쁜 장난감이었어요. 발신인 주소나 쪽지 같은 것도 없었지만, 아버지가 보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P324-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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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사제지간으로 만났을 때의 앨리샤 처지에서 내쉬를 보면, 그녀가 내쉬의 어떤 매력에 끌렸는지를 상당 부분 이해할 수 있다. 조이스의 말에 따르면 “수학이 최고였다”는 MIT의 지적 위계질서 속에서, 내쉬는 제왕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앨리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 것은 내쉬의 잘생긴 얼굴이었다. 한 유명 여배우는 이런 신랄한 명언을 던졌다. “고추 달린 천재, 그거야말로 우리 모두가 바라는 것이 아닐까요?” 앨리샤가 내쉬를 거부할 수 없었던 것은 내쉬가 두뇌와 지위와 성적 매력을 모두 갖추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위의 명언은 잘 포착하고 있다. 도널드의 아내 허타 뉴먼은 다소 온건하게 같은 취지의 말을 했다. “그는 아주 유명하게 될 사람이었어요. 게다가 귀엽기까지 했죠.” 물리학과의 앨리샤 2년 후배인 에마 더셰인은 이렇게 말했다. “앨리샤는 그분을 멋쟁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분의 긴 다리가 아름답다고 생각했지요.” 내쉬는 다른 많은 수학자들과 달리 추레하지 않았다. 그는 늘 단정하게 머리를 빗었고, 옷은 빳빳하게 다려 입었고, 구두는 반짝였다. 그의 오만한 태도와 차가운 무관심은 오히려 그를 차지하고 싶은 마음을 더 부추겼다. 두 음절로 된 그의 이름은 그가 앵글로색슨의 후예임을 알려주어 그의 매력에 보탬이 되었다. 앨리샤는 후일 이렇게 말했다. “그는 아주 잘생겼어요. 지적이고요. 영웅 숭배의 대상이 될 만했어요.”

내쉬는 그녀를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앨리샤는 그의 관심을 끌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며 그해 내내 그를 쫓아다녔다. “조이스, 나랑 음악실에 가자.” 혹은 “조이스, 같이 워커 기념관에 가자, 내쉬가 보고 싶어.” 조이스는 이렇게 회상했다. “그녀는 그에게 구애했어요. 온갖 작전을 다 폈지요.” (P366-367)


엘리너는 앨리샤에게 전화를 걸어 남의 남자를 훔쳐가지 말라고 말했다. 아들 존 데이빗 얘기도 했다. 내쉬는 자기와 결혼할 예정이니까, 시간 낭비를 하지 말라고 말하기도 했다. 앨리샤는 만나서 얘기하자면서 엘리너를 집으로 초대했다. 엘리너는 찾아갔다. 앨리샤가 적포도주 한 병을 꺼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엘리너는 이렇게 회상했다. “그녀는 나를 취하게 하려고 했어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했죠. 우리는 존 얘기를 했어요.”

앨리샤는 엘리너가 간호사이고 거의 서른 살이 다 되었으며, 3년 가까이 내연의 관계를 맺어왔다는 것을 알고, 그 관계가 별것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녀는 충격받지 않았다. 남자들은 정부를 두고 아이까지 낳기도 하지만, 결혼만큼은 같은 계층의 여자와 한다. 그 점에 대해 그녀는 자신만만했다. 앨리샤는 엘리너가 전화를 걸어 자기를 비난했다는 것이 오히려 기분 좋았다. 앨리샤는 그것을 “중요한 존재가 되기 시작했다”는 신호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P375-376)


내쉬는 1996년 마드리드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양자이론 수정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비물리학자이지만 선험적으로 어리석은 일은 아닙니다. 아인슈타인도 하이젠베르크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을 비판한 바 있으니까요.”

내쉬는 그해 고등학문연구소에서 머문 짧은 기간에 주로 물리학자와 수학자들을 만나 양자이론을 논의했다. 그가 특히 누구를 논의 상대로 선택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프리먼 다이슨, 한스 레비(Hans Lewy), 에이브러햄 페이스(Abraham Pais)등이 최소한 그 한 학기 동안은 연구소에 머물고 있었다. 당시 내쉬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보여주는 기록은 오펜하이머에게 보낸 사과 편지밖에 없다. 내쉬는 자신의 목표를 분명히 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내가 볼 때 하이젠베르크 논문 가운데 가장 좋은 점은, 관찰 가능한 정량만을 연구한다는 한계를 설정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와 다르고 좀더 만족스러운, 관찰 불가능한 실체의 밑그림을 발견하고 싶다.”

수십 년 후 정신과의사들 앞에서 한 강연에서, 그는 자신의 정신병 발병이 그런 밑그림을 발견하려는 시도 탓이었다고 말했다. 양자 이론의 모순을 해결하려는 그의 시도는 1957년 여름에 시작되었는데, 그것은 “모르긴 해도 너무나 방대했고 심리적으로도 불안한” 시도였다. (P411)


내쉬가 얼마나 낙담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즈 메달이 수학 분야의 노벨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 동료 수학자들에게 최고라고 인정을 받는 트로피 중의 트로피인 것이다. 노벨 수학상은 없다. 물리학이나 경제학 등과 같은 노벨상 분야에 아무리 결정적인 역할을 한 수학적 발견을 했다고 해도 그런 발견만으로는 노벨상을 수상할 자격이 없다. 사실 필즈 메달은 노벨상보다 더 귀한 것이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초에는 그 상이 4년마다 한 번에 보통 두 명의 수학자에게만 수여되었다. 이와는 달리 노벨상은 해마다 수여되었고, 세 명이 상을 나눠 갖기도 했다. 전통적으로 필즈 메달 수상자의 연령을 40세 이하로 제한하고 있는 것은, “젊은 수학자들을 독려”하고 “장래의 연구”를 진작시키겠다는 목적을 명문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필즈 메달은 노벨상과 달리 상금이 수백 달러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 인센티브라는 건 보잘것없다. 하지만 필즈 메달은 중견 수학자로서 일류 대학 교수직과 막대한 연구기금, 최고의 연봉을 즉각적으로 보장받는 보증서와도 같은 것이어서, 이 상을 받지 못하는 것은 일견 커다란 불이익으로 비칠 수도 있다.

이 상은 국제수학연맹(International Mathematical Union)이 시상하는데, 이 연맹은 4년에 한 번씩 열리는 국제수학자회의(International Congness of Mathematicians)를 주관하는 기구이다. 최근 이 기구의 회장이 말했듯, 필즈 메달 수상자 선정은 “더없이 중요한 과업이며 더없이 무거운 책임이 따르는 일”이다. 노벨상 심사와 마찬가지로 필즈 메달 수상자 선정 과정은 엄격히 비밀에 부쳐진다. (P418)


39세에 폐결핵으로 죽은 리만은 4차원 추상기하학을 비롯한 많은 유산을 남겨놓았다. 특히 4차원 기하학은 나중에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이론을 구축할 때 사용한 것이다. 지리학자들이 사실적인 지구의 지도를 작성하기 위해 2차원 평면 기하학에서 3차원 입체 기하학으로 옮겨가야 했듯이, 아인슈타인은 우주의 지도를 그리기 위해 3차원 기하학에서 4차원 기하학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리만이 널리 기억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까다로운 가설 때문이다. 이 가설을 증명하거나 반증한다면 정수론과 해석학 분야의 극히 까다로운 많은 문제를 풀 수 있게 된다. 벨이 썼듯이, “전문가들은 리만 가설이 옳다는 쪽을 선호한다.”

내쉬가 리만 가설을 얼마나 오랫동안 숙고했는지는 말하기 어렵다. 아마도 뉴욕에 머물던 그해 말쯤 이 가설에 대해 뚜렷한 관심을 갖게 된 것 같다. (P427-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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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1월, MIT 수학과는 투표를 해서 내쉬에게 종신직을 주기로 결정했다. 몇 주 후, 내쉬가 “신경쇠약”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마틴은 내쉬의 다음 학기 강의 부담을 없애주기로 결정했다. 대학 당국이 내쉬의 질병에 대해 알게 된 것이 부담스럽긴 했지만, 앨리샤는 그 소식을 듣고 크게 마음이 놓였다. 그런 조치가 내쉬의 스트레스를 덜어줄 테고, 곧 신경쇠약도 나을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내쉬를 어째야 할지 결정한다는 것은 아주 곤혹스러운 문제였다. 종종 아주 말짱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의 증상이 나타났다 사라졌다하는 것을 보고, 수학과 동료나 대학원생들도 그의 병이 그리 심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의 수학은 더 이상 이치가 닿지 않지만”, 그의 성격은 “그리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았다”고 지안-카를로 로타는 회상했다. 여러 날 동안 모든 것이 전과 다름없어 보이면, 앨리샤는 자기가 섣불리 판단해서 공연히 호들갑을 떨며 불필요한 조바심을 낸 것이나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곤 했다가도, 내쉬가 다시 기괴한 행동을 보이면 가슴이 철렁했다. (P464)


그날 밤 맥린 병원의 당직의사는 내쉬에게 “자원 입원 서류”에 서명을 하라고 독촉했다. 내쉬는 거절했다. 세계 평화를 위한 위대한 운동이 진행중이고, 그는 지도자이기 때문이라고 그럴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스스로를 “평화의 왕자”라고 칭했다. 병원에서는 그에게 퇴원 청원을 할 권리 등의 법적 권리가 있음을 알려주었다. 일차 진단서가 작성되었지만, 그 내용은 내쉬와 논의되지 않았다. 판사에게 열흘간의 강제 입원을 요청하는 양식도 작성되었다. 이어 내쉬는 벨냅 원 병동으로 안내되었다. 그 병동은 맥린 캠퍼스의 북쪽, 행정 건물의 바로 위쪽에 있는 저층의 벽돌 건물이었다.

내쉬는 휴게실에서 공중전화를 사용했다. 변호사가 아니라 지포라 레빈슨에게 전화를 걸었다. “존은 어떻게 하면 그곳을 벗어날 수 있는지 알고 싶어했어요. ‘내게서 악취가 난다’면서 샤워를 하고 싶다는 말도 하더군요.” 지포라가 말했다. (P471)


그해 7월, 파리는 물론이고 온 유럽이 찌는 듯 무더웠다. 신문은 연일 무더위 소식을 보도했다. 주차해놓은 차가 폭발하기도 했는데, 순전히 자연발화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고 보도되었다. 차의 뒷유리창이 확대경 구실을 해서 뒤에 얹어놓은 신문에 불이 붙었다는 것이다. 파리의 분위기도 날씨만큼 뜨거웠다. 소외감과 환멸을 느낀 미국인들과 자칭 ‘침묵하는 세대(Silent Generation)’의 유배자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알제리 전쟁도 계속 격화되어, 우익 테러리스트들은 폭탄을 던지고 민간인을 학살하고 고문을 자행했다(이 테러리즘은 알제리 독립 투쟁의 일환이었다. 프랑스는 1830년에 해적 기지를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알제리의 일부를 점령한 이래, 토지를 몰수하고 식민지 지배를 확대해갔다. 꾸준히 독립투쟁을 해온 알제리는 1954년 11월에 ‘민족해방전선(FLN)'으로 뭉침으로써 ’알제리 전쟁‘이 시발되었고, 1962년 7월에 독립을 달성했다). 파리는 대규모 시위와 파업, 폭발 등으로 공황에 빠졌다. 그리고 핵무기 경쟁의 최근 소식 --소련의 대륙간 탄도미사일에 대해 이제 미국이 미사일 대 미사일로 대응할 수 있다는 미국측 성명-- 은 세계가 자연발화보다 더 치명적인 또 다른 전쟁으로 치닫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았다.

이처럼 뜨겁고 긴장된 정치 상황이 혹시 내쉬의 정신에 영향을 미쳤다면, 환멸감을 불러일으키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뚜렷한 목적의식을 불러일으켰다고 할 수 있다. 내쉬는 과거에 지녔던 모든 사회적 자아의 흔적을 일소하겠다는 욕구로 들떠서, 자기만의 “특별한” 지식에 따라 행동했다. 그는 자기 판단이 전적으로 옳다고 확신하고, “어리석은” 생각을 그만두라는 앨리샤의 어떠한 호소도 일축해버렸다. 교수직을 사퇴하고, 케임브리지뿐만 아니라 아예 미국을 떠나버렸고, 수학을 버리고 정치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수없이 껴입은 낡은 옷가지와 도 같은 자신의 낡은 정체성을 훌훌 벗어 던지고 싶어했다. (P497-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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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정부와 세계 시민이라는 관념이 세상을 휩쓴 것은 내쉬가 대학원을 다닐 무렵이었다. 내쉬가 학창시절은 물론 그후에도 탐독했던 1950년대의 공상과학 소설에도 그런 관념이 배어 있었다. ‘하나의 세계(one-world)' 운동은 국제연맹이 사실상 와해된 1930년대에 시작되어,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후 미국인들의 의식 속에 폭넓게 자리잡았다. 프린스턴은 이 운동의 중심지였다. 아인슈타인과 폰 노이만 등 핵시대의 산파역을 한 물리학자와 수학자 들이 이 대학에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쉬와 같은 시기에 대학원에 다닌 존 케메니는 세계연방주의자(World Federalists) 리더였다 --총명하고 젊은 이 논리학자는 아인슈타인의 조수였고, 후일 다트머스 칼리지의 총장이 되었다.

내쉬의 상상력에 불을 지른 ‘하나의 세계’ 주창자는 내쉬처럼 독불장군인 개리 데이비스였다. 데이비스는 제2차 세계대전 때 폭격기 조종사로 참전했고, 그후에는 브로드웨이 배우로 활약했다. 사회동맹의 지도자로 유명한 마이어 데이비스의 아들인 그는 1948년에 파리의 미국 대사관을 찾아가 미국 여권을 반납하고 미국 시민권을 포기했다. 이어 그는 국제연합이 자기를 “최초의 세계 시민”으로 선포해줄 것을 촉구했다. 데이비스는 “전쟁과 그 소문이 매스껍고 넌더리가 나서” 세계 정부를 수립하고 싶어했다. “모든 신문이 그 일화를 1면 기사로 뽑았다.”고 칼럼니스트인 아트 버크월드가 파리 회상기에 쓴 적이 있다. 앨버트 아인슈타인과 영국 국회의원 18명, 장 폴 사르트르와 알베르 카뮈를 비롯한 수많은 프랑스 지식인들이 데이비스지지 성명을 냈다.

내쉬는 데이비스의 뒤를 따를 작정이었다. 미국의 지나친 초애국적 분위기에 등을 돌리고 “최대 저항의 길”을 선택하려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의 철저한 소외감과 맞아떨어졌다. 문화 규범에 대한 그런 “극단적 반대”는 정신분열적 의식 발달의 품질보증서 격으로 간주되어 왔다. 조상을 숭배하는 일본에서는 극단적 반대의 대상이 가문일 수 있다. 카톨릭을 믿는 스페인에서는 교회일 수 있다. 내쉬의 경우에는 과거의 자기 존재에 대한 혐오감과 자기 표현의 욕구가 서로 강하게 맞물렸다. 그래서 자기 존재를 지배해온 낡은 법을 폐기하고, 말 그대로 자기만의 새로운 법으로 대체함으로써, 과거에 그가 몸담아왔던 법적 패러다임으로부터 영원히 이탈하고자 했다.

동기는 이처럼 아주 추상적인 듯하지만, 계획 자체는 기묘할 정도로 구체적이었다. 그는 전향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미국인 여권을 좀더 세계적인 신분증으로 바꾸고 싶어했다. 즉, 자기를 세계 시민으로 선언해줄 신분증을 갖고 싶어했다. (P498-499)


그는 도시 외곽에 있는 작고 썰렁한 호텔방에서 대부분의 저녁 시간을 보내며 답장이 올 리 없는 편지를 쓰고, 결코 처리되지 않을 각종 청원서, 탄원서 등을 끝없이 작성했다. 낮에는 각종 관청의 대기실과 사무실을 찾아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홀로 지낸 다섯 달 동안, 내쉬의 애매모호하고 자기부정적인 노력은 카프카의 소설 <성(城)>에 나오는 토지 측량기사 K의 탐색을 빼닮은 것이었다. 문학작품 가운데 <성>만큼 정신분열적 의식을 잘 형상화한 작품도 달리 없을 것이다. 단지 K라고만 알려진 주인공의 유일한 인생 목표는 “어렴풋한 성의 심장부”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 성은 K가 도착한 미로 같은 마을 저편 높은 곳에 어렴풋이 보이지만 다가갈 수가 없다. 카프카의 소설에서, 측량하고 추산하는 것이 직업인 남자 K는 그 흐릿한 권위의 땅에 들어가고자 한다. 그것은 “명예롭고 안락한 인생을 누리려는” 욕구 때문이 아니다. “지고하고 아마도 천상적인 권위자의 입성 허락을 받음으로써 존재의 이유를 발견하기” 위해서이다.

내쉬는 삶의 몸부림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어떻게 삶을 통제하고 어떻게 인정을 받을 것인지 평생 탐색해왔다. 그러한 탐색은 사회 속에서만이 아니라, 상충하는 역설적 자아의 여러 충동 속에서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탐색은 이제 희화화되고 말았다. 꿈속의 생생한 장면이 잠깨어 있을 때의 막연한 생각과 연계되어 있듯이, 내쉬가 한 장의 서류, 곧 한 장의 신분증을 찾아 헤맨 것은 지난날 수학적 통찰을 찾아 헤맨 것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양자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그것은 카프카와 K의 차이에 못지 않다. 작품을 통제한 창조적 천재 카프카는 자기가 선택한 작가적 삶의 요구와 일상적 삶의 요구 사이에서 몸부림치며 치열하게 살았다. 그런데 카프카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K는 자신의 존재와 권리와 의무를 정당화해줄 한 장의 서류를 얻기 위해 무기력하게 헤매기만 한다. 망상은 단지 환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충동이기도 하다. 망상에 사로잡히면 자아와 세계 양자의 존재가 위태로워 보인다. 지난날 그는 온갖 생각에 질서를 부여하고 생각을 조절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온갖 생각의 단호하고 끈질긴 명령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P503-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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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쉬는 비좁은 호텔방에서 제네바에서의 마지막 한 주를 보냈다. 이때의 심정은 참담했다. 앨리샤도 없고 외부 규제도 없이 스위스에 혼자 있었지만, 카프카의 또 다른 소설 <변신(The Metamorphosis)>의 주인공처럼 그는 철저하게 유폐되어 있었다.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깨어보니 거대한 바퀴벌레로 변해 침대에 누워 있었다(이 책에서는 잠자를 바퀴벌레(cockroach))라고 했지만, 다른 책에는 보통 딱정벌레로 번역되어 있다. 원작에서 그레고르 잠자는 갑옷처럼 등이 딱딱한 집안 해충이다. 따라서 딱정벌레도 바퀴벌레도 오역이다. 원어로는 운거치퍼(ungeziefer)인데, 이는 빈대나 좀벌레 등의 집안 해충류를 뜻한다. 카프카는 출판사에 이렇게 말했다. ‘벌레 자체를 그림으로 묘사하면 절대 안 된다. 심지어 멀리서 보여줘도 안 된다.’ (이처럼 카프카는 구체적으로 이미지화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카프카는 <성>의 마지막 장을 집필하지 않았지만, 그의 친구이자 전기 작가인 막스 브로트에게 털어놓은 결말 구상에 의하면, K가 죽음에 이를 정도로 탈진해서 여인숙 침대에 누워 있는 장면으로 끝낼 예정이었다. 즉, “K는 몸부림을 그만두지 않겠지만, 그 몸부림 때문에 탈진해서 죽는다.” 내쉬 또한 몸부림을 멈추지 않았지만, 마찬가지로 이겨내지 못했다. (P512)


내쉬는 제6병동에 있을 때 유체역학 논문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내쉬가 늘 구름 위에서 논다고 다른 환자들이 놀리곤 했다.”고 보메커는 회상했다. 어떤 환자는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교수님, 빗자루 사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앨리샤는 매주 찾아갔다. 내쉬에게 외출이 허락되자, 그를 데리고 포크댄스 파티에 갔다. 내쉬에게는 한 주일 가운데 최고의 날이었다.

내쉬는 병세가 누그러진 것 같았다. 스스로에게는 물론 남들에게도 더 이상 위협을 가하지 않았다. 보메커는 그에게 퇴원을 추천했다. 일반적인 믿음과는 달리, “우리는 환자 수를 줄이기 위해 가능한 한 빨리 퇴원을 시켜야 한다.”는 것을 보메커는 강조했다. 내쉬는 7월 15일 퇴원했다. 33회 생일이 지난 지 한 달 만이었다. 그리고 몇 달 후 보메커는 고등학문연구소로 전화를 걸어, 오펜하이머에게 내쉬의 상태가 정상인지 물었다. 오펜하이머는 이렇게 대답했다. “의사 선생, 그건 이 지상에서 아무도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오.” (P543)


신체적 질병에서 어느 정도 회복한 사람은 과거의 활동을 재개하며 새로운 활력과 기쁨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여러 달 혹은 여러 해 동안 우주적이고 신성하기까지 한 통찰을 남몰래 지녀왔다고 느끼다가, 그러한 통찰이 더 이상 자기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 사람은 매우 다른 반응을 보이게 된다. 내쉬의 경우, 일상의 합리적 사고력을 회복하긴 했지만 그런 회복은 위축감과 상실감을 낳았다. 의사와 아내, 동료들은 그의 타당하고 명석한 사고력이 회복되었다고 환호했지만, 내쉬 자신은 타락했다고 생각했다. 노벨상을 수상한 후 자전적 에세이에 내쉬는 이렇게 썼다. “합리적 사고를 할 때, 우주와 한 개인과의 관계 개념에는 한계가 생긴다.” 그는 증세 완화를 즐거운 건강 상태로의 복귀라고 생각하기보다, “말하자면 강제된 합리성의 막간극” 정도로 생각했다. 유감스러워하는 그의 어조는 로렌스의 말을 상기시킨다. 로렌스는 “정신수학(psychomathematics)" 이론을 고안해낸 정신분열증 환자였는데, 러트거스 대학의 심리학과 교수 루이스 사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내가 지성을 회복했다고 생각해왔지만, 사실상 나는 점점 더 단순한 사고 수준으로 퇴행하고 있었다." (P544-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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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열증을 앓는 사람의 자살률은, 우울증 환자에 비해 크게 높고 일반인에 비하면 100배나 높다 --안타깝기는 하지만 자료를 통해 밝혀진 사실이다. 위험이 최고조에 달하는 것은 병이 가장 심할 때가 아니라, 치료가 성공을 거두었다고 선언된 직후이다. 자살로 내몰리는 심리 상태에 대해서는 제대로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지만, 짐작은 해볼 수 있다. 망상이 사라지는 대신 삶이 참담하다는 등의 다른 생각이 떠오를 때, 그리고 오랫동안 품어왔던 희망이 모진 현실과 충돌할 때, 아마도 자살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1963년 여름에 장-피에르 코뱅과 결혼한 루이사 코뱅은 그해 여름 내쉬와 처음으로 얘기를 나누었던 때를 잊지 못했다. 그들은 어떤 파티에서 만났다(아마도 내쉬는 외출 허가를 받아 잠시 집에 와 있었을 것이다). 내쉬는 루이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지 않으며, 목숨을 끊지 말아야 할 이유가 뭔지도 모르겠다고, 그런 생각을 내쉬가 실제 행동으로 옮기려 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그는 분명 깊은 우울증에 빠져 있었다. 앨리샤와의 화해 기대도 혼자만의 낙관에 지나지 않았다. 앨리샤는 자기와 조니(존 찰스는 이제 조니라고 불렸다)가 내쉬와는 떨어져서 살아야 한다고 고집했다. 그래서 내쉬는 스프루스 스트리트로 돌아가지 못하고 머서 스트리트 142번지에 방 한 칸을 빌렸다 --아인슈타인이 프린스턴 시절에 살았던 집에서 가까웠다. (P569-570)


정신분열증으로 규정되는 증후 가운데 망상증세는 끈질기고 복잡하고 강력하다. 망상이란 공감각적 현실을 극적으로 거부하는 잘못된 신념이다. 흔히 이 망상에는 지각이나 경험의 잘못된 해석이 포함되기도 한다. 망상이 야기되는 것은 주로 감각 자료의 왜곡 때문이거나 두뇌 속에서 생각과 감정을 처리하는 잘못된 방식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정신분열증 환자의 불가사의하게 왜곡된 논리는, 때로 기이하고 섬뜩한 망상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정신의 외로운 몸부림의 산물로 보이기도 한다. 워싱턴 DC의 세인트 엘리자베스 병원 연구자이자 <정신분열증에서 살아남기(Surviving Schtzophrenta)>의 저자인 풀러 토리(E. Fuller Torrey)는 정신분열증 증후를 이렇게 정의한다. 즉 그것은 “두뇌가 경험하는 것의 논리적 결과물”이며 “모종의 정신적 평형을 유지하려는 영웅적 노력”이다.

현재 정신분열증이라고 부르는 증후는 한때 “조발성 치매”라고 불렸다. 그러나 정신분열증 환자의 전형적인 망상 상태는 알츠하이머병으로 알려진 치매 증상과는 거의 공통점이 없다. 치매 환자가 흐릿하고 혼란되고 무의미한 상태를 보이는 데 반해, 정신분열증 환자는 주로 과다의식, 신경과민, 섬뜩한 경계심을 보인다. 또한 지나친 몰두, 정교한 합리화, 교묘한 이론 등이 두드러져 보인다. 융통성이 없고 일탈적이며 자기 모순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생각이 무작위적인 것은 아니다. 애매모호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규칙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상한 노릇이기는 하지만, 일상 현실의 여러 국면을 정확히 이해하는 능력은 손상되지 않는다. 내쉬에게 올해가 몇 년이고 백악관 주인이 누구고 어디에서 사는가 등을 물어본다면, 그리고 그가 대답할 생각만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정확하게 대답했을 것이다. 내쉬는 더없이 초현실적인 생각을 품고 있을 때조차도 사실상, 그런 생각이 근본적으로 자기만의 개인적인 생각이어서 남들에게는 이상하거나 믿어지지 않을 게 분명하다는 아이러니한 자각을 지니고 있었다. “내가 지금 말하려고 하는 이 개념은.... 아마도 불합리하게 들릴 겁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편지를 그는 곧잘 썼다. 그의 문장에는 “....라고 여겨진다.”, “....하는 듯하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식의 표현이 빈번히 쓰였다. 그것은 사고실험을 하고 있거나, 그의 편지를 받은 사람이 자기 말을 다른 말로 바꾸어 이해하리라는 것을 이해한 듯한 태도였다. (P6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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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타고라스의 바지(Pythagoras' Trousers)>라는 수비학 역사서를 쓴 마가레트 베르트하임(Margaret Wertheim)은 이렇게 지적했다. “세상이 붕괴될 때 사람들은 수의 순서(rder of numbers)에 관심을 두게 된다.” 내쉬 또한 그의 세계가 붕괴되자 수비학에 대한 관심이 꽃피었다. 그것은 “신비하고 제례적이고 종교적인 개화” 같은 망상이 단지 광인들의 헛소리가 아니라, 혼란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의식적, 필사적, 흔히 절망적인 시도임을 또 다시 시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내쉬는 이름을 숫자로 치환시켜 그 결과에 노심초사하는 때가 많았다. 파인홀 도서관의 수석 사서인 피터 치프라는 이렇게 회상했다. “그는 어떤 숫자가 심각한 사태의 조짐이라면서 몹시 동요하곤 했습니다.” 프린스턴의 수학과 교수인 헤일 트로터(Hale Trotter)는 이렇게 회상했다. “내가 인사하면 그가 대화를 시작하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그가 무척 걱정하고 있던 것이 기억나는데, 미국 상원의 전화번호와 크레믈린의 전화번호가 너무 비슷하다는 것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셈을 정확하게 했지만, 그 셈의 논리는 광적인 것이었습니다.” (P618)


내쉬는 조러아스터교 신앙에 관심이 많았어요. 고대 이란의 예언자인 자라투스트라는 미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노란 낙타를 가진(즉 미친)” 사람이 결코 아니었지요. 그가 세운 종교는 세 가지 원칙을 토대로 한 것인데, 좋은 행동과 좋은 생각과 좋은 표현이 그것입니다. 불은 신성하고, 밝음과 어두움은 언제나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조로아스터교 사원에는 언제나 불이 타오르죠. 조로아스터교는 일신교입니다. 그런 저런 것을 확인하기 위해 내쉬는 우리에게 질문을 하곤 했어요. 가끔 우리는 도서관에서 같이 자료를 찾아 읽기도 했습니다.

이란에서는 외로운 사람을 동정하고 아주 안타깝게 여기는 경향이 강합니다. 우리는 그가 참 안되었다고 생각했지요. (P624-625)


내쉬가 그토록 오랫동안 심하게 앓고 난 후, 이제 “‘수학적 퍼스낼러티’를 갖는 정상적 범주 속”에 들게 되었다는 것은 무수한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내쉬는 정말 회복되었는가? 그렇게 회복된다는 것은 정말 희귀한 일인가? 모두가 알고 있듯 정신분열증이 불치의 병이라면, 그 “회복”이란 실은 내쉬가 정신분열증에 걸린 적이 없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1950년대 말부터 1970년대까지 내쉬가 보인 증후는 사실상 양극성 장애(조울증)였는가? (일반적으로 양극성 장애는 정신분열증에 비해 쇠약의 정도가 약하고 회복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다.)

내쉬의 정신병 기록에 바탕을 둔 재진단을 하지 않고는 결정적인 대답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오늘날 정신과의사들은 증후만으로는 “정신분열증 판정을 하지 못한다”는 데 동의한다. 또 오늘날의 정밀한 진단 기준으로도, 초기 증후만으로 정신분열증과 양극성 장애를 구분한다는 것은 여간 까다롭지 않다. 그런데도 내쉬의 최초 진단이 사실상 옳았으며, 내쉬가 오랫동안 심하게 정신분열증을 앓다가 극적으로 회복한 극소수의 사람 가운데 한 명이라고 믿을 만한 여러 가지 강력한 증거가 있다. (P648-649)


내쉬는 노벨상 수상 약전에서 이렇게 썼다. “핵심적인 첫걸음은, 내 은밀한 세계와 관련된 정치에 신경을 쓰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결심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신경을 써봐야 얻는 게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자, 종교적 쟁점과 관련된 것들, 이를테면 계몽하고 싶어하거나 계몽에 나서는 것도 포기하게 되었다.

나는 수학 문제를 연구하기 시작했고, 당시에 나타난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했다. 나는 도움을 받았다(내게 컴퓨터 시대를 열어준 수학자들에게서).” (P654)


노벨 경제학상은 일종의 의붓자식이다. 스웨덴의 기업가이자 발명가인 알프레드 노벨이 물리학과 화학, 의학, 문학, 평화 부문의 5개 상을 제정한다는 그 유명한 1894년의 유언장을 작성할 때, 그 음침한 학문(dismal science)(토마스 칼라일이 경제학을 비꼬아서 한 말)은 전혀 염두에 없었다. 경제학상은 거의 70년이 지난 후 제정된 것으로, 당시 스웨덴 중앙은해 총재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다. 경제학상은 이 중앙은행이 재정을 후원하고, 시상은 스웨덴 왕립 과학 아카데미와 노벨 재단이 맡게 되었다. 이 상은 사실상 노벨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알프레드 노벨을 추모하는 경제학 분야의 스웨덴 중앙은행상”이라고 하는 게 옳다. 그러나 일반인에게는 대동소이해 보인다. 초기 경제학상 수상자들 --폴 새뮤얼슨, 케네스 애로, 군나르 뮈르달(Gunnar Myrdal) 등-- 이 일반적으로 학계의 거인으로 인정받음에 따라 상의 권위가 높아지게 되었다. 그리고 적어도 아직까지는, 노벨상이 “과학자와 일반인 모두에게 탁월성의 궁극적 상징”이 되어왔고, 사실 경제학상 수상자도 “학자들 세계의 비세습 귀족”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P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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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다시 시작된 삶이지만, 내쉬가 꿈꾸고 있는 동안 시간은 멈추어 있지 않았다. 립 밴 윙클처럼(어빙 워싱턴이 쓴 <스케치 북>의 한 단편, 그 책에서 주인공은 어느 날 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세월이 20년이나 흐른 걸 알고 놀라게 된다), 오디세우스처럼, 그리고 다른 무수한 소설의 우주여행자들처럼, 깨어보니 뒤에 남긴 세상은 그가 없는 동안에도 쉬지 않고 흘러갔음을 알게 되었다. 빛나던 젊은이들은 은퇴하거나 죽어가고 있다. 아이들은 중년이 되었다. 가녀린 미녀였던 아내는 이제 60대의 중후한 여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으 칠순 생일이 성큼 다가왔다.

그에게는 이런 날들도 있다. 시간의 참혹한 유린으로부터 벗어났다고 느끼는 날들, 그 동안 접어두었던 것을 펼쳐들 수 있다고 믿는 날들, “30대나 40대에 해냈을 수도 있는 연구를 뒤늦게 60대나 70대에 하고 싶어하는 사람처럼!” 들뜨는 날들도 있다. 노벨상 수상 약전에 그는 이렇게 썼다.

통계적으로, 어떤 수학자나 과학자가 66세의 나이에도 부단히 연구를 계속해서, 이전의 업적에 새로운 업적을 보탠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그런 노력을 하고 있다. 일종의 휴가랄 수 있는, 부당한 망상적 사고의 25년이라는 공백기간을 가진 내 상황은 남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현재의 연구를 통해, 혹은 미래에 떠오를 어떤 새로운 아이디어로, 어떤 값진 것을 성취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있다. (P705-706)


이제 우리가 그의 얘기를 접는 이 순간, 그는 어쩌면 파인홀로 이어진 아이젠하트 문 밑을 총총히 지나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 아니면 거실 소파에 앨리샤와 나란히 앉아 대형 텔레비전으로 <닥터 후(Dr. Who)>를 보고 있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조니와의 체스 게임에서 지고 있거나..... 아니면 아내와 사별한 로이드 셰이플리를 위로하는 전화 통화를 105분쯤 계속하거나.... 아니면 피사에서 있을 강연 원고를 준비하고 있느냐고 묻는 해롤드 쿤에게 개구쟁이 같은 표정을 지어 보이거나..... 아니면 점심 쟁반을 들고 고등학문연구소의 수학 테이블에 앉아, 방금 캐링턴의 연애편지를 읽고 편지 쓰기의 악취가 사라진 시대를 한탄하는 엔리코 봄비에리에게 고개를 주억거려 보이거나.... 아니면, 천문학 강연을 들은 후, 밤하늘에 반짝이는 아득히 먼 별을 망원경으로 지그시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P719-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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