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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정보와 지식은 가능한가?

by 김경섭

완벽한 정보와 지식은 가능할까?


다른 사람과 논쟁을 하거나 다툴 때, “정확한 게 맞냐?”, “제대로 알아본 것 맞냐?” 하는 핀잔과 공격에 맞닥뜨릴 때가 있다. 더욱 자신감 있게 그 말을 하면 상대방을 위축시키기 좋은 무기이기도 하고, 부정확한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 정확한 자료와 출처, 그리고 그것들의 권위를 반복해서 확인하기도 한다.


자료의 출처와 정확성, 그런 것들이 부족할 때는 자신감이 줄어들고 위축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검증된 자료와 권위가 실린 증거들을 갖추려고 노력을 한다. 그런 부분에서 최소한의 노력도 없이, 아무 데서나 들은 부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과 논쟁을 하다 보면 답답하기도 하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자료와 정보의 객관성이나 중요성에 대해서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정말로 어떤 정보가 정확한 것이냐는 근본적 질문과 미술에서 과연 정확한 정보가 얼마나 존재하느냐는 회의주의적인 생각을 말해 보려는 것이다. 권위라는 것은 우리에게 힘을 갖지만 항상 진실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까미유 끌로델에 대한 자료 조사를 한다고 해보자. 술자리나 동료와의 대화에서 주워들은 이야기로 그녀의 삶이 이러저러했다는 말을 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출처가 명확한, 말의 책임감을 좀 더 갖는 곳에서 나온 말이 더 사실에 가까울 확률이 높기는 하다. 누군가 어디서 하는 말들을 듣고 그것들을 짜깁기해서 하는 말보다는, 기록과 흔적이 남는 정보가 더 사실에 가까울 확률이 높다. 그리고 인터넷에도 수많은 그저 의견과 가짜 정보들이 넘쳐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더 깊이 자세히 공부하고 말에 대한 책임감을 더욱 갖게 되는, 예를 들면 책이라든지 예술가 관련 논문이라든지 그런 곳을 출처로 하는 정보가 더 사실에 가까울 확률이 높다.


하지만 잘못된 사실을 아무런 책임감도 갖지 않은 채로 게재하는 책이나 논문들도 있을 것이다. 그것보다는 더 권위가 있고 검증이 된 곳은, 인지도와 신뢰도가 높은 권위가 실린 서적이나 예술가에 대한 공식적인 자료와 권리를 가지고 있는 곳일 것이다. 아무래도 그런 곳으로부터 확인된 자료가 더 공신력을 갖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렇게 올라가고 올라간 곳에서 나온 자료라고 할지라도, 완벽한 팩트 곧 ‘진실’이라는 것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진실이라는 믿음과 진실로 규정되는 권위는 있겠지만, 결국 인간의 말에 의해 전해지고 기록되는 것일 뿐이다. 어떤 목적과 시점이 개입될 수밖에 없는데, 무엇을 완벽한 진실이라고 정의할 수가 있단 말인가?


이쯤까지 오면 “너무 의심이 많은 것 아니냐?”, “그럼 도대체 무엇을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어떤 것도 확실한 것이 없다면 무슨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인데?” 하고 말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무슨 말이든 해도 된다.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고 주장하는 것도 자유이다. 하지만 그렇게 철석처럼 믿고 있는 진실이라는 것도 사실은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까미유 끌로델이 했다는 말이 녹음된 형태로 증거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지 않나? 물론 그런 증거가 없으니 모두가 다 사실이 아니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사실을 토대로 구성이 시작될 것이다. 하지만 사실이 아닌 것들도 중간중간 섞여 들면서, 신의 영역에서만 알 수 있는, 실체적 진실과는 다른 이야기로 충분히 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일들은 세상에서 많이 일어나는 일들이다.


똑같은 사안을 두고 전혀 다른 이야기들이 존재할 수가 있는데 어떤 것이 진실이라고 쉽게 이야기할 수가 있겠는가?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를 조선일보에서 기록하는 것과 한겨레신문에서 기록하는 것이 완전히 다를 텐데 말이다.


‘상대주의적 역사관’ 과도 같은 이야기이기도 하고, 파고 들어가다 보면 “과연 진실이라는 것은 존재하는가?”, “어디서부터가 진실인가?” 의 물음과 마주치게 된다.


‘안다’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떠한 지식을 입력하고 있다는 뜻 일수도 있고 무언가를 이해했다는 뜻일 수도 있다. 여기서는 후자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 한다. ‘감각질’ 개념이나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자기만의 상자’ 와도 상통하는 내용인데, 그것들이 내용과 방향에 관한 이야기라면 나는 정도와 깊이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안다’, ‘이해했다’는 것의 사전적이고 객관적인 의미는 있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쓸 때는 결국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들은 20% 정도만 이해해도, 자신감과 포만감을 가지고 그것을 “이해했다.”, “안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95%를 이해해도 무언가 불만족을 느끼고 끊임없이 의심을 한다. 그리고 자신은 “정확히 이해한 것인지 모르겠다.”, “아직은 잘 모른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두 시간 공부하고 흡족해하며 “열심히 했다.”라고 말하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열 시간을 공부하고도 “난 너무 게을러. 최선을 다하지 않았어. (열두 시간 할 수도 있었는데.)” 하고 말하는 학생이 있는 것과도 비슷하다.


그러면 “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알고 있는 사람이고 “모른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모르고 있는 사람인가? 그것은 아닐 것이다. 마치 스스로가 “저는 착하고 참 성실한 사람입니다.” 또는 “난 정말 나쁜 놈이야.”, “난 너무 게을러.”라고 자책하며 말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딱 그렇다고 볼 수 없듯이, ‘안다’, ‘모른다’라는 표현도 결국 말하는 사람의 규정 내지 태도일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나 그거 안다.”라고 주장하는 강한 눈빛과 에너지의 사람에게 끌리고 장악당하기도 하고, 때로는 과도한 자신감과 확증편향적 독선 그리고 사기꾼적인 결과에 염증을 느끼기도 한다. 그리고 또, “잘 모르겠다.”라고 하는 사람의 자신감 없는 태도에 실망해서 기대가 안 되고 믿음이 안 가기도 하고, 때로는 겸손하고 솔직한 그런 태도에 감명받아 더 신뢰를 갖기도 한다.


결론은 ‘안다’고 말한다고 해서 다 안다고 볼 수는 없으며 ‘모른다’고 말한다고 해서 꼭 모른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무식함에 대한 항변


어차피 모든 인간은 평생을 공부하고 아무리 많은 지식을 입력해도 이 세상 모든 지식의 1%도 습득하지 못한다. 상대적 유식과 무식이 있을 뿐이지 절대적 유식은 누구에게도 불가능하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충분히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자기가 모르는 99%의 공간을 보며 자신의 무식함을 부끄러워하고 한탄할 수가 있는 것이고, 평균 이하의 지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무런 조급함과 열등감도 없이 “이 정도 알면 되는 것 아니냐?”며 자존감 넘치고 평안하게 살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결국 대체로 다 거기서 거기, 도토리 키재기 정도라고 본다. 종종 편차가 좀 크게 우월하거나 열등한 사람이 존재하지만, 그것도 우주적 시점에서 보면 결국 미미한 차이일 뿐이다. 아주 지식이 많은 사람과 아주 무식한 사람의 지식의 양을 10000대 1 정도로 가정을 한다면, 가까이서 보면 10000배나 차이가 나니까 굉장한 차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유식한 사람도 우주적 관점에서 보자면 아주 무식한 사람이고 둘의 차이는 0.00001대 0.000000001이 되고 만다. 이렇게 되면 10000배의 차이지만 그 둘을 비교하고 우등과 열등으로 나누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어지냐는 것이다.


결국 또 허무주의로 흘러서 어차피 다 죽을 건데 공부할 필요 없다고 극단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공부는 필요한 것이고 어차피 사라질 존재이지만 나도 죽을 때까지 주어진 내 용량 한도 내에서 공부를 계속해서 할 수밖에 없다.


난 그저, 각자 알고 있는 영역이 다른 것이고 지식의 총량은 상대가 더 많을 수도 있는데 내가 아는 어떤 지식 한 가지를 상대가 모른다고 해서, 승기라도 잡은 것 마냥 “그것도 모르냐? 참 무식하다.”라고 상대를 무시하고 뿌듯해하는 인간들의 어리석음과 교만함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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