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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오함, 깊이감, 깨달음 이란 무엇일까?

by 김경섭

심오함, 깊이감, 깨달음에 관하여


복잡하고 알쏭달쏭 어려운 것이 심오한 것은 아니다. 아무리 난해해도 그나마 책임감 있는 답이라도 있으면 괜찮은데, 잔뜩 헝클어 놓고 완전 무책임하게도 애초부터 답이 있을 리 만무한 막 던진 문제인 경우는 너무나 많다.

때로는 아주 간단하고 쉬운 것이 심오한 것 일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쉬운 모든 것이 다 심오할 수 또한 없다. 그만큼 모호하고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 ‘깊이’라는 문제이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깊이에의 강요> 에서, 한 평론가가 자신의 작업에 던진 “깊이가 없다.”라는 말에 좌절해 계속해서 고민하다가 결국 자살하게 되는 한 예술가의 이야기가 나온다.


깊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다. 땅을 파서 십미터가 깊은 것인가? 백미터가 깊은 것인가? 십미터도 일미터에 비하면 깊은 것이고, 백미터도

1키로미터에 비하면 얕은 것이다. 그렇듯 어떠한 예술 작품도 비판을 하자고 달려들면, ‘깊이’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게 된다. 깊이의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자기가 상정한 기준보다 얕다고 하면, 그냥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음을 완벽하게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물론 평론가 또한 어떤 작가의 작업이 깊지 않음을 완벽하게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냥 누군가가 깊이가 없다고 하면 그에게는 깊이가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 사람이 힘을 가진 사람이라면 또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정답인양 주워듣고 마치 감기가 전염되듯이, 앵무새처럼 깊이가 없다고 따라 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깨달음 또한 굉장히 모호하고 주관적이다. 도대체 얼마만큼을 이해해야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 수가 있을까? 어떤 사람은 작은 것 하나 이해하고 세상의 본질을 이해한 것 같은 만족감을 느낄 수가 있는 것이고, 어떤 사람은 마냥 자신이 없고 세상이 높아 보여, 남들보다 많이 이해하고도 끝없이 불안해하고 다른 무언가를 기대하며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낄 수도 있는 데 말이다.


‘깨달음’은 과연 존재하는가?


사람들은 답을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에 대해서 누군가는 그것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기대를 하고 초인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허상이다. 깨달음. 이 얼마나 막연하고 밑도 끝도 없고 기준도 없는 말인가? 어떤 한 가지 사안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은 존재한다. 내가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득도 후에 얻었다고 하는 세상 전체에 대한 깨달음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석가모니가 얻었다고 하는 그것이나, 돈오돈수 돈오점수 할 때 그 깨달음 말이다. 그것은 너무나 주관적이고 모호한 것이다. 어떤 이는 세상의 1을 이해하고 세상을 다 알았다고 뿌듯해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100을 알고도 세상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세상이 백만까지 있는 것인지 천만까지 있는 것인지의 기준도 대답도 없는 것이지 않은가?


깨달았다고 생각하면 깨달은 것인가?


깨달은 것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깨달았다고 생각하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각자 저마다의 기준으로 이해할 뿐이지, 그것을 완벽하게 증명하고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마찬가지로 아느냐 모르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적절한 지점과 중용이 중요한 것 같다. 너무 안다고 생각하면 독단론에 빠진 하룻강아지가 될 수 있고, 너무 모른다고 생각하면 괜히 잔뜩 쫄아서 위축된 치와와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세상은 기싸움이고 포커게임과도 같다. 싸움 잘한다는 이들의 반 이상은 진짜 싸움 잘하는 이들이 아니다. 싸워보지도 않고 쫄아서 기권패한 이들에 의해 부전승으로 올라간 자들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막상 싸우면 보통 이상이거나 매우 잘하는 실력일 수도 있는데, 그저 겁이 많고 자기 비하에 갇혀서 웅크리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이야기로 유명한, 깨달음의 대가 성철 스님이 이야기한 선승 5계이다.


1. 하루 3시간 이상 자지 마라.

2. 아무 이야기도 하지 마라.

3. 책 보지 마라.

4. 간식하지 마라. (졸린다.)

5. 돌아다니지 마라.


자. 대단한 깨달음이 전해지는가?


나는 그 깨달음 별 거 아니라는 깨달음이 전해져 온다. 위대한 사상가나 종교인들도 과대평가되어 부풀려진 이미지 일수도 있다는 깨달음. 대단한 신비감과 억지 경외감을 갖지 않아도 된다는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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