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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 Oct 11. 20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고 싶었던

영화 <너는 여기에 없었다>를 보고


매년 오늘을(10월 11일) 맞이하는데 잊는다. 이렇게 추웠나? 이맘때쯤? 매년 놀란다. 그리고 매년 이맘때쯤 어떤 옷을 입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옷걸이 앞에서 속옷만 입은 채 한참을 서 있는다. 




일단은 날씨 얘기로 시작했다. 며칠 전 본 영화 얘기를 하기 위해서. 나는 무엇이든 써야 써지는, 생각을 하게 되는 사람인지라. 내가 며칠 전 본 영화는 린 램지 감독의 <너는 여기에 없었다>라는 영화다. 







이 영화는 몸살을 유발한다. 몸과 마음이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끙끙 앓게 될 것만 같다. 혹시라도 환절기에 컨디션이 좋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 영화 관람을 좀 미루는 게 좋을 것 같다. 나는 영화가 끝나고 저녁을 먹을 때까지 몸이 좀 쑤시고 어깨가 뻐근했다. 동생과 뜨끈한 우동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나니 그제야 좀 나아졌다.




이렇게 표현하는 이유는 이 영화는 고통을, 주인공의 괴로움을 관객으로 하여금 체험시키기 때문이다. 긴 설명이 아니라 음악으로, 음향으로, 주인공의 몸으로, 얼굴로, 순간순간 떠오르는 트라우마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언제 주인공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지 모를 상황으로. 벼랑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 같은 주인공의 상황만으로도. 




주인공 조에 완벽하게 몰입했다. 이 영화에서는 내가 주인공에게 감정 이입을 한 것이 아니라 그를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으로서 몰입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괴로웠다. 늘 죽음의 예행연습을 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 마치 죽지 못해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비닐을 얼굴에 뒤집어쓴 채 자살 연습을 하는 그를 다시 삶으로 끌어들이는 건 늘 엄마의 목소리다. 조는 과거의 심각한 트라우마 때문에, 트라우마로 인한 괴로움 때문에 이 생에서의 삶을 끝내고 싶어 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그에겐 돌봐드려야 할 엄마가 있다. 죽음의 문턱에서 늘 그의 이름을 부르는. 




나는 전반부까지 그렇게 보았다. 그는 언제든 목숨을 끊고 싶어 하지만 차마 늙은 어머니를 혼자 두고 떠날 수가 없어서 억지로 생을 이어가고 있는 거라고. 언제든 죽을 사람이라고. 그런데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면 볼수록 그가 살고 싶어한다고 느꼈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엄청난 고뇌를 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느꼈다. 어머니의 존재는 그에게 하나의 핑계가 되어주었다. 그가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되어주었다. 




어떤 사건의 여파로 얼굴이 퉁퉁 부어오른 조의 얼굴은, 작은 알약 하나 넘기기 힘들어하는 그의 모습은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나의 얼굴이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침을 삼킬 때마다 괜히 아픈 것 같았다. 그 퉁퉁 부어오른, 멍이든 얼굴로 다시 죽음의 늪에서 걸어 나온 조가 너무나도 안쓰러웠다. 거의 죽음의 직전에서 또 다른 핑계를 찾아 나오는, 자신은 죽어야만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살고 싶어 하는 그의 무표정한 얼굴이, 거대한 몸뚱이가 안쓰러웠다. 




트라우마는 마음먹는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트라우마가 된 기억은 내가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내가 원하지않는 순간에 마치 불꽃처럼 파박거리며 내 눈앞에 나타났다 사라진다. 잔상이 튀어 오르는 것은 찰나이지만 여운은 길게 남는다. 그만큼 괴롭다. 빨리 벗어나고 싶지만 마치 늪처럼 더욱 명확한 기억 속으로 나를 끌어들인다. 그런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던 조는 거기에 죄책감까지 끌어안고 있다. 자신 때문에 누군가가 죽었다는 죄책감. 그래서 그는 더욱 자신이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만 자꾸만 산다. 




이 영화에서 조의 삶은 질기다. 지독한 트라우마에도, 하나 밖에 없던 혈육이자 자신이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이유였던 어머니의 죽음에도, 자신을 다시 한 번 살게 해준 또 다른 목적이 끝났음에도 그는 목숨을 끊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울부짖는다. 자신의 나약함을 탓하며 그제야 운다. 모든 일이 끝난 후에.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지독한 트라우마와 죄책감에 시달리던 그가 비로소 그것에서 벗어나게 된 것 같은 장면. 다시 태어나는 것 같은 장면. 나는 그를 바라보는 게 너무 괴로웠던 나머지 나의 추측이 맞길 바랐다. 그런 의식으로 그는 다시 태어난 거라고. 비로소 과거에서 벗어나 아름다운 햇살이 반짝이는 현실로 태어난 거라고. 




하지만 또 한편으론 죽어야만 그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그는 그렇게 죽음을 선택했기에 비로소 다시 모든 걸 잊고 다시 태어날 수 있었던 거라고. 정말 죽어야만 진정성을 인정받아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거라고. 어쩌면 살아 있는 동안은 벗어나기가 힘든 거라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이런 식으로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감독의 인터뷰를 보니 그는 ‘부활’을 생각했다고 한다.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빠뜨릴 수 없는 얘기는 단연 주인공 조, 배우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에 대한 얘기이다. 일단 그는 완벽하게 외모를 변신시켰다. 나는 그가 주인공 조라는 걸 알고 봤는데도 도무지 그의 모습에서 예전의 그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거대해진 몸, 거칠어진 피부와 표정, 얼굴과 몸 전체를 덮어버린 것 같은 수염. 그는 등장, 존재만으로도 보는 이들을 압도시켰다. 별다른 연기를 하지 않는 것 같은데도 그는 아주 큰 스크린 전체를 장악했다. 아니 영화관 전체 공기를 압축시켜버렸다. 숨을 크게 쉬지 못할 정도로. 동생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주인공이 호아킨 피닉스인지 몰랐다고 한다.




그는 마치 ‘존재’로 연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떤 질감이랄까. 몸뚱어리라고 표현해야 할 것 같은 거대하고 두툼한 몸, 비대칭 몸매, 걸음걸이, 무표정. 이렇게 설정된 ‘조’라는 인물로 변신한 호아킨 피닉스의 존재만으로도 영화가 힘차게 달려나가는 것 같았다. 대사도 거의 없고 음악도 최소한으로 사용했는데도 그의 등장 등장이 시시때때로 나의 감정을 변화시켰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배우가 있다니. 계속 보기를 미뤄두고 있었던 <마스터>를 어서 빨리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액션 영화를 기대한다면 안 보는 게 낫다. 액션은 흑백 CCTV 화면으로, 소리는 웬 잔잔한 팝송으로, 흑기사 역할은커녕 한발 늦은 청부 업자로 대체된다. 이 영화는 온전히 한 인간의 내면을 다룬다. 그와 함께 고통을 겪을 각오가 되어 있지 않다면 보지 않는 게 좋다. 반면 아주 깊은 물속에 들어와 앉아 있는 것처럼 온전히 이 영화 안에 갇혀 농도 짙은 몰입의 맛을 느껴보고 싶다면 강력하게 추천한다. 




덧붙이자면 타인의 트라우마로 인한 고통을 지켜보면서 조금은 위로를 받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마치 다른 이에게 괜찮다는 말을 건네면서 그것이 진짜 '괜찮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 것처럼. 물론 완전히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의 트라우마로 인해 단절되어 버린 나의 현재를 혹은 미래를 잠시 상상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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