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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이라는 늪.

쌀국수는 처음이야.

by 단아한 숲길

엄마가 다시 늪에 빠지셨다. 우울이라는 늪은 깊고 깊어서 손을 잡아끌어올려도 다시 미끄러져 내려가곤 한다. 그 모습을 보면 슬프지만 엄마 앞에선 애써 밝은 기운을 끌어올린다.

엄마 손을 꼭 잡으며 밝은 에너지를 주입한다며 얍! 기합을 외치기도 한다. 그런 딸의 모습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으시는 엄마...

엄마는 우울해질수록 미안하다는 말을 많이 하신다. 딸이 나 때문에 고생하네. 미안해. 하시면 미안하다는 말은 그만해요. 하나도 안 미안해. 난 엄마와 함께 하는 시간이 감사한걸요 한다. 우리의 대사는 자꾸 반복된다.


엄마와 점심을 먹으러 가기 전에 어떤 메뉴가 좋을지 의논한다. 아무거나라고 하시다가 평소 좋아하시는 국밥집을 떠올리셨다. 그렇게 국밥집을 향해 가다가 길가에 쌀국숫집 간판을 보시고는 갑자기 쌀국수를 먹고 싶다고 하신다.


오래전에 남편과 한 번 와봤던 집 같다. 검색해 보니 평이 좋아서 주변에 주차를 하고 들어갔다. 쌀국수와 갈비밥과 반미를 주문했다. 반미는 포장. 베트남에서 이주해 오신 분들인가 보다. 딱 봐도 베트남 사람들. 남자분은 한국어가 서툴다. 가게를 둘러보니 베트남 식료품과 동남아스러운 장식이 가득하다. 베트남에 있는 어느 가게로 순간 이동한 기분이다.


음식이 나왔다. 쌀국수를 좋아해서 자주 먹는데 이 집 쌀국수는 유난히 맛있다. 엄마는 오늘 쌀국수를 처음 먹어본다고 하셨다. 드셨던 기억이 사라진 건지 정말 처음 드시는 건지 알 수 없지만, 괜히 코끝이 찡해온다.

평소 드시던 음식 위주로 드시고 새로운 음식을 일부러 찾아드시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앞으로 새로운 음식을 탐색해서 맛보게 해 드려야겠다. 어쨌든 엄마가 맛있게 드시고 만족해하시니 기분이 참 좋다. 자식이 맛있게 먹는 모습만 봐도 배 부르다는 말에 부모님이 맛있게 드시는 모습만 봐도 배부르다는 말을 추가해야 할 듯.


하얀 쌀밥에 갈비구이를 곁들인 갈비밥도 맛있게 먹었다. 오이를 하트모양으로 장식한 게 귀여웠다. 마지막 갈비 한 조각을 서로 양보하다가 결국 엄마가 드셨다. 나는 정말 배 불러서 드시라고 했고 엄마는 배부르지 않은데도 배부른 척하며 내게 먹으라고 하셨다. 엄마라서 희생한 세월이 이미 산같이 쌓였는데도 여전히 자식 먼저 생각해 주시는 모성. 그 숭고한 사랑을 먹고 내가 자랐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예쁜 카페를 발견했다. 밖에 쌍화차 광고가 걸려 있어서 마음이 끌렸다. 엄마, 우리 쌍화차 마시러 갈까요? 하니 집에 가서 차 마시면 되지 왜 굳이 돈을 쓰냐고 하신다. 엄마, 가끔은 우리도 분위기 좋은 데서 차 마셔요. 가끔이니까 괜찮아 라고 한다.


엄마는 못 이긴 척 동행하신다. 우리는 쌍화차와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카페 인테리어가 따스한 느낌이어서 마음에 쏙 든다. 내가 좋아하는 원목가구가 가득한 곳. 원목을 보면 자연에 안기는 듯한 느낌이다. 쌍화차도 너무 맛있다. 여러가지 견과류가 고소하게 씹혀서 더 좋다. 커피는 쏘쏘.

우리 모녀가 이렇게 다정하게 마주 앉아 대화 나누며 웃을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곧 팔순 되시는 엄마를 보면서 마음이 묵직해진다. 지금껏 엄마와 함께 한 세월에 감사하면서도 더 욕심내고 있다. 부디 건강하게 10년 더... 요즘 들어 최근의 기억들을 잊곤 하는 엄마... 스마트폰으로 잘 처리하던 일을 이제는 어려워하면서 낮은 한숨을 내쉬는 내 어머니.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으나 혹같은 우울증 떨쳐내고 맘껏 행복하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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