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한 가지 장르로는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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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훗날 <심야의 만일야화>에서 콘텐츠로 태어날 이야기의 원석입니다.
공모전 출품을 위해 창작된 오리지널 스토리이기도 합니다.
도용이나 2차 가공보다는 눈과 마음으로만 즐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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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체 분위기
공간은 은숙이네 집 거실.
하우스 조명은 따뜻한 톤. 실제 오프닝이 시작되면 TV 불빛처럼 차갑고 스팟 조명만 켜짐.
[암전. 은희에게만 핀 조명 ON]
희 (굳은 표정으로 관객석의 누군가를 바라보며)
기분도 그런데…
오늘은 사람이나 하나 죽여볼까?
희 [잠시 정적]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지니야, 셋플릭스 틀어줘.
[전체 조명 ON]
[정지해있던 은숙, 소파에서 우아하게 빨래를 개고 있다.]
숙 (은희를 보지도 않고)
언니, 갑자기 쳐들어와서는 무슨...
사람을 죽인다고 난리야.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네.
골랐어?
또 무서운 거 골랐지? 그럼 나 같이 못 봐. 알잖아.
희 지니야... 셋. 플. 릭. 스.
(잠시 멈춤)
(리모컨을 관객석으로 겨누고 짜증스럽게 누르며 흔든다.)
희 야, 숙아. 이거 또 안돼.
숙 언니, 우리 집은 지니 아니고 짱구라니까.
짱구야, 셋플릭스~
[셋플릭스가 켜지는 두둥- 효과음.]
숙 봐, 되잖아. 그나저나 무슨 일 있었어?
기분이 왜 ‘그런데’야.
TV랑 싸우지 말고 와서 앉아봐.
이럴 때 로맨틱 코미디 한 편 보면 기분이 몽글몽글 좋아져.
희 (뒤로 돌아 소파로 향하다가 뒤편의 포스터를 보며)
야, 숙아... 나는 니네 집에 있는 포스터만 봐도 막 온몸이 가려워.
(낯간지럽다는 듯이 몸을 부르르 떨며) 으으으~~~
오늘은 뭔가… 피 튀고, 사람 죽고, 미친 사람들 나오는 거나 보자.
숙 달달하고 좋기만 하고만, 괜히 왜 심통이래?
(은희가 소파에 푹 하고 안자 리모콘으로 TV스크롤을 내리며)
왜 뭔데, 갑자기 캐리어까지 싸들고 왜?
싸웠어? 집 나왔어? 아님, 형부가 집 나가래?
희 (캐리어를 잠시 쳐다보다가) 싸우긴.
야, 차라리 싸우는 게 나아.
그럼 화해라도 하지.
답답해서. 숨 좀 트이려고 친정 간다고 하고 나왔어.
숙 뭐야, 근데 왜 여기로 왔어?
친정 간다고 했다며.
희 안 그래도 강릉 가려고 터미널까지 갔는데,
(잠시 머뭇) 갑자기… 니 얼굴이 생각났어.
야, 친정이 별거냐. 돌아왔다는 느낌 들면 친정이지.
우리 집, 알잖아. 말 섞으면 꼭 싸움 나서 툭하면 너네 집으로 피신 갔었잖아.
아마 우리 집에서 잔 날보다 너네 집에서 잔 게 더 많을걸?
(얼굴을 들이밀며) 그래서 왔어. 내 친정 보고 싶어서.
숙 (감동 받았지만, 티 안 내려고 노력하며)
갑자기 쳐들어와서 왜 명대사 날리고 그래.
그런 대사 하면, 내가 뭐,
응? 울컥이라도 할 줄 알고?
숙 (살짝 눈물 닦으며 장난스레)
뭐 먹고 싶어? 엄마가 뭐 해줄까?
희 먹고 왔다.
이 시간에 쳐들어오면서 그 정도 염치는 있지.
술이나 한잔하면서 영화 보자. 옛날처럼.
숙 그래요, 그럽시다.
(관객석의 어딘가를 가리키며) 저거 뭐야? 새로 나왔나 봐.
‘나는 니가 지난 여름에 결혼한 걸 알고 있다?’
희 웃긴다. 그거 코미디야, 호러야, 뭐야?
알고 있는데 어쩌라고? 청첩장 못 받아서 화났데?
그래서 삐진 사람이 막 다 죽이고 다니는... 뭐 그런 건가?
(리모콘 뺏으며)
이거 보자.
숙 그래, 좋아, 뭐든. 오늘은 언니 좋을 대로 해.
언니 촉으로 갑시다.
(리모콘 버튼 누르는 동작)
[배경에서 가상의 영화 OST가 시작된다.]
희 상현이는 늦나 봐?
숙 때마침 오늘 야근이래.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귀찮아 죽겠어.
종일 “지금 뭐 해?‘, ”밥은 먹었어?“, 뭐 먹었어?”, “사진 찍어서 보여줘.” 계속이야.
희 어머, 스윗하네. 너네 결혼 몇 년 차지?
아직도 대한민국에 이런 달달한 것이 남아있구나?
숙 아니야, 언니. 나도 연애할 때는 자상하고 섬세하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이건 뭐 거의 30분에 한 번씩 연락 와.
얘, 일은 안 하나 봐.
[카톡!]
숙 (폰을 슬쩍 보며) 이거 봐. 또 왔어.
숙 (한숨 쉬며) 언니, 나 어떨 땐 진짜 조금… 부담돼.
희 혹시 의처증 같은 거 아니야?
어디 못 나가게 하고, 누구 만나냐 체크하고, 통제하고 그러는 거 아니야?
아니다. 너 혹시 집에 막... 절대 들어가면 안 되는 방 있고 그런 거 아니니?
밤만 되면 상현이 혼자 막 어디로 사라지고 그러는 거 아니야?
집이 조금씩 어두워지고, 불 깜박깜박하고.
그래? 그런 거야?
숙 (웃으면서 단호하게) 아냐, 언니. 진정해.
그런 장르 아니야.
진짜 노멀. 그리고 우리집 LED야. 안 깜빡깜빡해.
그런 쪽 아니고.
음... 응, 내가 화장실이라도 가잖아?
그러면 쪼르르 와가지고, 문밖에서 “자기야~ 아직 멀었어? 언제 나와?” 이런 쪽이야.
어제는 밖에서 노래도 지어 부르더라니깐? 뮤지컬처럼?
희 (표정 굳음)
…그건 더 무서운데? 어디 똥도 편하게 못 싸겠네.
나오냐? 그 상황에서?
숙 아유, 내 말이!
내가 분리수거 하러 나가면 같이 따라 나오고,
부엌에 내가 컵 하나만 꺼내러 가도…
뒤에 딱 붙어서 졸졸졸졸. 이건 뭐...
희 (말을 끊으며 심각하게) 야, 숙아.
숙 응?
희 그거… 의처증 아니다.
숙 거봐, 내가 뭐랬어. 그런 쪽 아니라니까.
날 너~무 사랑ㅎ-
희 (단호하게 은숙의 말을 끊으며) 아니. 그거도 아니야.
병원 데리고 가.
동물병원. 니네 남편… 강아지야.
숙 (손에 있던 빨래를 떨어뜨림. 소파 두드리며)
아, 언니~ 웃겨 죽겠네, 진짜.
정말 이럴 거야? 울렸다, 웃겼다?
희 (은숙의 몸을 돌리며) 왜?
울다가 웃으니까 엉덩이에 변화가 생기는 거 같애?
어디 봐봐.
숙 그만, 그만!
잠깐만. 나 상현이 답장해줘야 돼. 안 보내면 얘 난리나.
진짜 강형욱 불러야 될 수도 있어.
희 (은숙의 폰을 슬쩍 훔쳐보며)
야, 고 단어 몇 개 보내면서 하트가 몇 개냐?
부담 어쩌구 해놓고는 아주 그냥 사랑이 넘치시는구만.
숙 언니, 하트는 문장 부호야. 쉼표, 마침표 같은 거라고.
하트 붙였다고 사랑이 넘친다고 생각하면 안 돼. 사랑은 사랑대로 표현 해야지.
언니네는 안 그래?
희 우린 둘 다 하트 붙이면 큰일 나는 줄 알아.
청혼할 때나 붙이는 거야. 하트는.
숙 어휴, 삭막해라.
아무리 호러 스릴러 매니아라라도 그렇지. 그렇게 살면 나는 막 슬플 것 같애.
언니네는 로맨스가 없어. 로맨스 좀 채워봐요.
희 로맨스? 무슨 로맨스?
뭐 너 좋아하는 그 영화 뭐냐?
그거처럼 스케치북 들고 사랑놀음이라도 하라고?
숙 언니, 러브 액츄얼리!
명작이지. 그래, 그런 게 로맨스고, 낭만이지.
언니네는 그런 게 좀 필요해.
희 야야, 그게 무슨 로맨스냐.
그거 민폐야, 민폐. 그리고, 응?
그 영화에서 그거 남의 집 와이프한테 찾아가서 그러는 거 아니야?
그게 뭐 하는 짓이야?
그거 남편이 몰랐기에 망정이지.
알면 바로 장르 바뀌는 거야.
나 같았으면 도끼로 그냥... 아오!
크리스마스라고 뭐 도끼 맞으면 안 죽는다니?
숙 그나저나, 언니.
스케치북은... 말이 그렇다는 거고.
중요한 건 언니네는 로맨스가 좀 필요하다는 거야.
그러니까 언니가 생각하는 로맨스는 뭐야?
일단 들어나 보자. 그게 뭐든 좀 해볼 필요가 있어.
희 내가 생각하는 로맨스?
숙 응, 언니가 생각하기에 영화에서 가장 로맨틱하고 멋진 장면. 들어나 봅시다.
희 글쎄... (잠시 생각하다가 떠올랐다는 듯이) 있지. 나도 그런 거.
숙 뭔데? 뭔데?
희 아 몰라 됐어. 뜬금없이 무슨 로맨스냐.
숙 로맨스가 뜬금이 어딨어. 다 지금이지.
희 아이고, 그래요. 공주님. 맨날 로맨스라 좋으시겠습니다.
숙 언니~~
희 한니발.
숙 뭔발?
희 한니발 렉터가 클라리스한테 편지 보낼 때. 그때 엄청 로맨틱했다고.
숙 아, 뭐야~ 미쳤나 봐.
그거 식인 살인마 아니야?
아니, 로맨스 얘기하는데, 정신병자 얘기를 왜 끼얹는 거야.
희 너, 그 영화 보기는 했어? 내용은 기억나?
(한니발 렉터 목소리를 흉내 내며)
“클라리스, 가장 강한 원소들은 원소주기율표 가운데에 나와 있소.
대략 철과 은의 중간쯤에 위치하지. 철과 은의 중간이오.
내 생각엔 그것이 당신과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소.”
크, 어떠냐? 이런 게 로맨틱한 고백이지.
숙 (이건 무슨 상황이지? 하는 표정을 짓는다.)
희 숙아, 사람이 말이다.
누군가에게 진짜로 빠지는 순간은
그 사람이 나를 진짜로, 제대로, 응?
끝까지 보는 순간이야.
포장도 없고, 과장도 없고. 딱… 본질.
로맨스 영화는 상대를 이상화하잖아.
아름다운 오해. 아주 그냥 예쁜 착각.
숙 (한숨 쉬며) 아, 진짜. 낭만을 이렇게까지 폭파하는 사람도 드물 거야.
희 낭만?
스케치북 들고 유부녀한테 고백 박는 게 낭만이면, 나는 렉터할래.
“내가 진실한 너를 봤다. 응?
그리고 너는 지금 시련을 견딜 만큼 강하다.”
거기는 이런 이해와 지지와 응원이 있잖아.
숙 (어이없어 웃음) 아니, 로맨스랑 낭만 얘기하는데 강함이 왜 나와.
그냥 좋아한다, 사랑한다, 이런 감정이 있어야지.
희 좋아한다, 사랑한다, 이런 말은 누구나 해.
까놓고, 야, 좋을 땐 무슨 말을 못 하냐?
하지만 상대를 진정으로 이해해 주는 건 정말 어려운 거야.
그건 진짜 마음이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는 거다.
숙 언니 진짜 무슨 일 있구나?
그래서 나온 거야?
이해와 지지 못 받아서?
희 아니, 오빠는 잘못한 게 없어.
그게 문제야.
잘못한 게 없으니까 내가 왜 힘든지도 모를 거라는 거지.
(한숨을 쉬고, 정적)
희 너도 알잖아. 우리 오빠 과묵한 거.
옛날엔 그게 참 멋있었거든?
말 없고, 조용하고…
뭐랄까, 그… ‘침묵으로 다 아는 사람’. 그... 어른 느낌 있잖아?
숙 으이그, 언니-
그거 영화 속에서나 멋있는 거 알지?
희 그러니까~ 그러니까 말이다.
살아보니까… 이건 뭐 대답도 없고, 반응도 없고.
그리고 요즘은… 그게 유난히 크게 느껴지더라고.
숙 어머, 아무 반응이 없어?
언니한테 무관심해?
희 아니, 무관심한 건 아닌데...
숙 형부, 바람 난 건 아니겠지? 잠자리는 해?
왜, 남자들은 바람나면 그쪽부터 소홀해진다잖아.
희 아우우우~~~ 야!
말 안 하고 아낀 에너지. 그쪽으로 다 쓰고 있어.
그쪽은 좀 과묵했으면 좋겠어.
숙 어우야~~~ 뭡니까? 김은희 씨.
자랑을 이런 식으로 하시는 겁니까?
희 오해야. 절대 자랑 아니다.
그나저나 우리 근데 지금 왜 영화 보기로 해놓고 수다만 떨고 있다니?
집에 맥주 있어?
숙 네네, 있습지요. 소녀 집에 쌀은 떨어져도 맥주는 또 안 떨어지지요.
(일어나 무대 밖, 부엌으로 향하며) 맥주 가져올게.
언니, 근데... 그래도 형부한테 여기 왔다고 말은 해야지 않을까?
희 그치, 말은 해줘야겠지.
근데 이게 참 그래.
별 거 아닌데... 오늘따라 이상하게
괜히 ‘응’ 뭐 이렇게 대답 오면 되게 서운할 거 같아서.
못 보내겠어.
숙 (무대 밖에서 맥주 갖고 들어오며)
그래? 그럼 대답 길게 할 수밖에 없는 말을 하면 되지.
희 그게 뭐야? 그런 게 있어?
숙 아이참, 그럼 그런 것도 안 해보고 과묵하다고 서운해하는 거야?
으트케? 오늘 가르침 좀 드려? 말어?
희 뭔데? 어떻게 하는 거야. 시범 좀 보여주시죠.
숙 (맥주 내려놓고 은희의 폰을 덥석 집으며)
일단. 폰 줘봐.
서운할 것 같은 말엔 미리 불길을 차단하면 되는 법이지.
희 (맥없이 폰을 빼앗기며) 야, 잠깐만. 아니…
숙 (빠르게 화면 열고 타이핑하며)
봐봐, 언니가 평소에 본론만 이야기하니까
형부가 ‘응’, ‘아니’ 하고 끝나잖아.
근데 ‘있잖아.’ 하나 보내고, ‘말해도 돼?’ 하나 보내면.
사람이 아무리 과묵해도 이건 절대 단답 못 해!
이건 무조건 장문이야.
희 아니 그게 뭐야.
숙 보냈어! (당당하게) 됐다!
자, 이제 형부가 얼마나 길게 답을 하—
[카톡!]
숙 왔어!
(핸드폰 보며) 뭐야, 물음표 하나?
형부, 너무 하는 거 아니야?
나 못 참아! 언니, 나한테 맡겨. 내가 오늘 아주 그냥...
희 야! 그만해. 괜히 이상하게 만들지 말고.
숙 (이미 타이핑 시작)
됐고! 과묵한 사람일수록 이런 거 해줘야 해.
말문을 트여줄게, 내가.
오늘 우리 헬렌 형부한테 설리반 선생님이 돼줄게.
희 뭔 소리야 그게…
숙 언니, 남자들이 제일 약한 말이 뭔지 알아?
희 글쎄? 뭐지?
‘앉아봐, 얘기 좀 해.’?
숙 아우, 언니!
희 왜~ 우리 오빤, 이 말만 하면 갑자기 엄청~ 약한 척해.
숙 아니, 아니, 그런 장르 아니고요.
희 그럼?
숙 “고. 마. 워.”
남자는 이 세 글자면 나이 상관없이 뇌가 확 트여.
희 트이고 자시고. 내가 뭘 고마워해?
지금 나 지금 기분 안 좋아서 나온 건데?
숙 그래서 더 먹혀!
고마운 게 없으니까 이게 위력적인 거야.
(타이핑 하며 입으로 따라 읽는다)
‘있잖아, 오늘 문득 생각났어.’
‘고마워.’
보냈다!
희 왜 마음대로 고맙대? 뭐가 고마운데!
숙 몰라! 형부가 알아서 떠올리겠지.
자, 이제 기다리-
[카톡!]
[둘이 동시에 폰을 쳐다본다]
숙 ‘갑자기?’
좋았어! 형부, 흔들렸다.
지금 형부 머릿속에 ‘뭐지?’ ‘왜지?’ 물음표 백만 개 떴을 거야.
여기서 조금만 밀어붙이면 돼.
희 에에? 뭘 밀어붙여!?
숙 (이미 타이핑하며) ‘그냥… 다.’
‘다 고마워.’
‘오빠, 그날 생각나?’
보냈다!
희 야~ 무슨 날을 만들고 있어!!!!!
그날이 뭔데!?
숙 언니, 모든 커플에게는 ‘그날’이 있거든?
형부가 알아서 찾아낼 거야.
이제 형부 머릿속엔 ‘그날’ 후보만 백만 개 떠다닐걸?
[카톡!]
희 (바짝 긴장해 폰을 든다.)
‘그날?’
숙아, 오빠가 나한테 되묻는데?
이거 어떻게 수습해!?
숙 됐어, 언니.
이제 발동 걸린 거야.
희 무슨 발동…?
숙 남자들 특유의 공포야. ‘나만 기억 못 하는 특별한 날’에 대한 공포.
지금 형부 머릿속에 언니랑 만난 지난 10년이 순식간에 돌아가고 있을 거야.
희 너, 이거 어떻게 수습하려고 그래.
내가 심통 나서 나온 건데, 내가 사과하게 생겼어.
숙 쉿! 자, 이제 필살기 들어갑니다.
‘오빠, 우리... 비록 말로 안 해도 통하는 거 있잖아.’
‘기억나지?’
(적막)
[카톡!]
함께 (긴장하며 동시에 화면을 본다.)
숙 (소리 죽여 읽는다)
‘기억나지, 그럼’
함께 어…?
희 뭐가 기억나…?
숙 언니, 기억난대!
[카톡!]
숙 (점점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뜨거웠지, 우리. 그날.’
함께 (할 말을 잃은 표정)
희 숙아.
아무래도 내가 모르는 날이 있는 것 같아.
뭐야, 이거 왜 나 모르지?
숙 (진지하게) 그게… 언니가 아는 ‘그날’ 말고, 형부가 아는 ‘그날’일 수도 있지.
희 뭔 소리야.
숙 뭐랄까, 언니 인생에서 삭제된 확장판 같은 거.
감독이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서 잘라낸 부분.
희 그게 뭐야, 싫어어어어!
그만해. 이제.
숙 오케이, 내가 마무리해 줄게.
희 야 잠깐만-
숙 (빠르게 타이핑)
응… 나도 생각… 나…
됐어.
희 잠깐!!
너 지금 뭐 했어, 방금???
숙 (멍…) 왜?
희 너 지금 끝에 하트 붙였잖아.
‘응, 나도 생각나♡’
숙 어? 아… 그렇네. 이게 완전 습관이 돼서. 하하하하...
희 너 미쳤어? 그거… 그거 지금 완전…
숙 아니, 언니.
하트는 그냥 문장 부호 같은 거라니까. 쉼표 같은 거라고!
이제부터 언니도 좀 써.
희 (한숨을 내쉬며) 은숙아...
그 속이 비어있는 하트는... 우리… 신호야.
숙 신호…?
희 응. 그거... 그거 하자는 신호.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하... 폰 줘 이제. 그만해.
[카톡! 카톡! 카톡! 이번에는 은숙 폰이 연달아 울린다.]
숙 (폰을 보지도 않고 손사래)
아, 얘 또 시작이네…
희 (은숙의 폰을 뺏어 읽으며)
‘자기야 뭐해?’
‘은희 누나 왔어?’
‘둘이 뭐해?’
‘또 영화 봐?’
야, 숙아. 답해줘라~ 애 궁금 하대잖니~
숙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아씽~ 나 진짜… 오늘은 그냥 조용히 언니랑 맥주 마시고 싶은데…
(잠시 고민하다가 은희가 들고 있는 은숙의 폰을 손으로 민다.)
숙 언니. 강아지 한 마리… 키워볼래?
희 (깜짝 놀라서) 뭐? 뭔 소리야 갑자기.
숙 (폰을 더 들이밀며)
내가 오늘 형부 사람 만들어서 돌려줄게.
언니가 상현이 좀 맡아줘.
얘 요즘 계속 이래.
언니가… 잠깐만 상대해줘.
희 야~ 니 강아지 니가 다독여야지.
지금 어디다 대고 ‘임보’야.
숙 언니, 부탁이야.
언니 원래 강아지 잘 다루잖아.
희 (어이없음) 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은숙 폰이 또 울린다.]
[카톡]
희 ‘자기야, 나 오늘 이상하게 불안해.’
‘꿈에서 자기가 나 두고 계속 걸어가더라.’
‘아무리 불러도 돌아보지도 않고.’
희 나름 불안한 이유가 있었고만.
숙 불안?
희 응.
왜, 그런 거 있잖아.
너무 좋아서 두려운 거.
상현이는 내가 좀 다독여 볼게.
형부 오해부터 좀 풀어줘 봐. 지금 하트 때문에 잔뜩 기대하고 있을 거다.
희 (타이핑 하며) ‘응, 언니 왔어. 맥주 마시면서 영화 보고 있어. 걱정 마’
[카톡!]
희 ‘하트도 없고... 너무 덤덤해.’
‘혹시 화났어?’
(심각한 표정으로) 아이고야...
[은숙의 폰이 요동한다.]
희 봐봐. 이건 뭐 거의… 긴급재난 문잔데?
꿈 말고도 뭐가 더 있는 거 아닐까?
원래 이 정도였어?
숙 사실 며칠 전부터 좀 예민하긴 했어. 상현이.
내가 말실수를 좀 했거든.
[은숙이 들고 있는 은희 폰 메시지가 울린다 / 카톡!]
숙 (폰을 확인하고 놀라며 빠르게 숨긴다) 어머! 어머! 어머어어어!!!
희 뭐야? 왜 그래?
숙 언니... 내가 볼라고 본 게 아니고...
형부한테 답 보낼려고 했는데...
희 (폰 달라고 손짓하며) 왜~ 뭐~ 보여줘 봐.
숙 (폰에 품에 숨긴 채 도리도리 고갯짓을 하며) 아니, 그게...
희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손도 까닥인다) 괜찮아. 뭔데~
숙 (손으로 화면을 덮어 은희에게 건넨다.) 와... 형부... 사진이... 어후...
희 (폰을 확인하고는 딸꾹질을 시작한다) 딸꾹-
숙 (주변의 빨랫감을 쥐어짜며) 와우~ 언니, 아무래도 오늘 큰 사고 나겠어.
(잠시 정적)
희 (사진을 보다가 갑자기 혼잣말) 아... 설마...
숙아, 나 알 거 같아. 오빠가 얘기하는 그 날.
이제 보니까... 그날이... 그날인 거 같아.
숙 뭔데? 무슨 날인데?
희 오빠는 지금 그날을 재연하려는 거야.
숙 그니까~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니?
그때도 사진 보냈어?
희 뭐 때문에 그랬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언젠가 내가 오빠한테 다다다 쏴붙이고
방에 들어가서 문 잠그고 버틴 적 있었거든?
숙 언니한테도 그런 면이 있구나
희 그럼, 야! 나도 사람인데.
아무튼. 평소에 참 말 없고, 자기 얘기 어색해하던 오빠랑
방문 사이 두고 메시지로 많은 얘기 했거든.
그날, 정말 드문 일인데 서로 통한다는 느낌이 들어서,
마지막에 후끈 달아오른 적이 있었어.
숙 그리고?
희 그리고...
그때도 이렇게 대뜸 사진 보내고...
(은희가 갑자기 혼자 그날의 추억에 잠긴다.)
숙 보내고?
희 (뭔가 떠올라서 부끄러워한다) 하... 참...
숙 언니~ 보내고?
희 아... 그러고는...
(뭔가 떠오른 듯)
(혼잣말) 안돼.
안돼! 숙아! 폰 이리줘!
숙 왜? 뭔데? 나 무서워!
희 그날이 그날이 맞다면...
숙 맞다면? 왜 무슨 일이 생기는데?
희 영상통화가 올 거야!
[두 폰 모두 전화벨이 울린다.]
[따르르르릉!!!]
[삐리리리리리~]
(은희와 은숙이는 전화를 받지 못하고 망설인다.)
희 혹시 영통이니?
숙 (화면을 힐긋 보고) 설마 형부 벗은 거야?
[따르르르릉!!!]
[삐리리리리리~]
숙 받아야지 않을까?
희 받아서 뭐라 그래? 다시 입으라고?
[전화 벨소리 멈춤]
[잠시 정적]
[다시 두 폰 모두 전화벨이 울린다.]
[벨소리에 맞춰 조명이 점멸한다.]
[따르르르릉!!!]
[삐리리리리리~]
(점점 벨소리가 커지는 동안 둘 다 말없이 서로를 본다.)
[벨소리와 점멸하던 조명이 멈춘다.]
(잠시 침묵)
숙 끝났나?
[조명이 점점 차갑고 어둡게 변한다.]
[TV에서 호러 영화 같은 으스스한 음악이 점점 커진다.]
희 (인상 쓰며) 아… 잠깐!
얘까지 왜 이래.
너까지 이러면… 지금 감당 안 돼.
속씨끄럽게.
하나씩만 하자.
(리모콘을 집어 관객석을 향한다.)
[따르르르릉!!!]
[삐리리리리리~]
희 (은희가 리모콘 버튼을 누르려다 멈칫하고 한숨을 쉰다.) 하아...
[결국 은희가 리모콘 버튼을 끄자,
TV 효과음과 전화벨이 동시에 ‘툭’ 하고 끊긴다.]
[잠시 정적]
희 (주변을 둘러보다가 안심하고 천천히 리모콘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려는 순간)
[따르르르릉!!!]
[삐리리리리리~]
함께 깜짝이야!
[따르르르릉!!!]
[삐리리리리리~]
희 상현이 전화라도 받아야지 않을까?
숙 아니이~ 아니야!
상현이 목소리 들으면 나 짜증 낼 거 같아.
아니, 울 것 같아! 아니, 아무튼!
[벨소리 점점 볼륨 UP. 조명도 더 큰 폭으로 점멸.]
[따르르르릉!!!]
[삐리리리리리~]
희 어떻게 하지?
숙 언니, 끄자! 꺼!!
[따르르르릉!!!]
[삐리리리리리~]
희 진정해. 진정해.
숙 언니!
[따르르르릉!!!]
[삐리리리리리~]
희 진정하고...
숙 그럼 어떻게 해. 받아?
[따르르르릉!!!]
[삐리리리리리~]
희 지금 받으면 완전히 장르 바뀔 거 같은데?
숙 받지 마? 그럼 꺼?
[따르르르릉!!!]
[삐리리리리리~]
희 꺼! 꺼! 꺼!
[둘이 눈을 맞춘 후 동시에 폰 전원을 꾹 누른다.]
[벨소리와 조명 동시 ‘툭’ 하고 멎음]
(폰 전원을 끈 후 뒤집어서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다.)
(둘 다 소파에 축 늘어진 채로 앉는다.)
(둘 다 한동안 멍하니 각자 생각에 잠긴다.)
[깊은 정적]
숙 (작게 한숨 쉬며) 언니.
희 (멍한 표정) 응.
(정적)
숙 언니.
희 (멍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도로 앉으며) 숙아, 나 이혼당하면 어떡하지?
(좀 더 긴 정적)
숙 나도 걱정이야. 상현이가 나한테 질려하면 어쩌지?
희 우리…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걸까?
숙 나 무서워, 언니.
(정적)
희 (혼잣말처럼) 남편들만 서툰 줄 알았더니
우리도… 꽤나 서툰가 봐.
(둘 다 다시 한동안 생각에 잠긴다.)
희 (폰을 바로 돌려 꺼졌는지 확인하고 다시 내려놓으며 한숨) 하아...
(정적)
희 오빠는… 지금 자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소통하고 있는 거야.
저게 자기 방식의 절박한 사과라고.
숙 그냥 솔직하게 말하자.
이게 이럴 일이 아니잖아.
희 그치?
그래, 전화 켜고.
솔직하게 말하고. 사과하자.
[둘이 폰 켜는 효과음]
숙 막 메시지 폭탄으로 와있고 그러면 어떡하지?
희 우리가 만든 폭탄이니 맞아야지.
(정적)
[카톡! / 이전과 다르게 적당한 기본 볼륨으로]
희 (눈을 질끈 감고 한쪽 눈만 천천히 실눈을 떠 폰을 본다)
(웃는지 우는지 모를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다.)
숙 왜? 뭔데? 뭐래? 다 죽여버린데?
희 (점점 표정이 풀리며) 우리... 괜히 난리였나 봐.
택시 탔데. 11분 뒤 도착.
맛있는 거 사 들고 온 데.
나 여기 왔다고 얘기 안 했는데? 뭐지, 이 시츄에이션은?
[이번에는 은숙이 폰, 카톡!]
[따뜻한 느낌이 들도록 조금씩 조명 색온도 조정]
숙 ‘불안해서 형님한테 연락드렸어.
그랬더니 은희 누나 오늘 많이 힘들어 보였다고 잘 좀 챙겨주래.
나도 퇴근해서 이제 집으로 가. 이따 봐.’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춘다.)
숙 둘이 얘기했네.
희 그 과묵한 양반이, 그런 긴 문장으로 말했다고?
생일 때 손 편지 써달라니 ‘은희야, 생일 축하해’ 달랑 쓰던 오빠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둘 다 헛웃음)
숙 이거 뭐야? 웬 뜻밖의 전개?
그런데 갑자기 마음은 왜 이렇게 편해?
희 약간 그거 같네.
스릴러 한참 몰아치다가… 관객들 숨 한번 쉬라고 넣어주는 장면.
숙 혹시... 우리도… 그런 걸 기대했던 거 아닐까?
언니가 오늘… 친정 찾아온 것처럼.
[은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대신 소파에서 등을 기대 조용히 숨을 고른다.]
(정적)
희 (혼잣말처럼) 나는...
집에서 누가 내 얘기 길게 들어준 적이 별로 없어서,
말 안 해도 다 알아주는 사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반만 이룬 줄 알았어.
말 안 하는 사람만 생긴 줄 알았지.
갑자기 오빠한테 되게 미안하네.
희 (혼자 생각해도 웃김) 풉-
웃긴 게... 우리 시댁 가면... 오빠랑 똑같다?
다들 밥 먹으면서 한마디도 안 하거든.
TV도 뉴스만 보고.
특히 그 집 남자들, 한마디 하는 게 무슨...
참치 집에서 특수 부위 한점씩 내주는 건 줄 알아.
희 (소파에 깊게 앉는다.)
(그러다 갑자기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몸을 일으키며)
숙아, 그러고 보니 보통 의처증이나 집착남들은
'누구랑' 있냐고 묻잖아.
'남자랑 있냐?', '딴짓하냐?'.
근데 상현이 메시지는 그냥 니가 '거기 잘 있는지'만 물어봐.
마치... 니가 사라질까 봐 겁먹은 애처럼.
상현이 어릴 때 뭐... 어디 혼자 갇히거나 방치된 적 있었데니?
숙 아니야. 그런 건 전혀 없대.
그냥… 기질이 예민한가 봐.
사람 표정이나 변화 같은 거 잘 캐치하는 애 있잖아.
좋은 쪽도, 나쁜 쪽도…
순식간에 착- 그런 타입.
희 아… 그게 좋기만 한 건 아니구나.
그래서 더 불안할 수도 있겠네.
숙 생각해보면 스윗한 것도 그 기질 때문인 거 같아.
잘 캐치하니까 잘 챙기고, 잘 걱정하고… 그러다 어떨 땐 오바하게 되는 거지.
얘는 말이야… 내가 한숨을 반 박자만 길게 쉬어도 알아채.
그거 가지고 ‘무슨 일 있어?’ 물어보는 애야.
평소엔 그 센스가 참 좋다가도, 가끔은 너무 귀신같아서 힘들어.
(정적)
숙 언니도 알잖아. 나 평생 로맨스 영화만 보고 산 거.
나는 결혼이… 사랑의 종착역인 줄 알았어.
맨날 서로 다정하고, 하루하루 감동이고, 낭만이고…
그래서 상현이 처음 만났을 때
“아, 이 사람이 내 환상의 증명이다!”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었어.
숙 (뭔가 불편한 듯 몸을 뒤틀며)
근데 결혼은… 돌밥돌밥이더라.
돌아서면 밥하고, 돌아서면 밥하고.
아주 그냥 인생이 밥하고 설거지하는 거야.
같은 장면만 반복해서 나오는 예술영화 마냥.
희 그래도 다행이네. 예술영화라서.
숙 (못 들은 척하며) 그러다가 며칠 전에 내가 영화보다가
그렇게 중얼거렸나 봐.
"이런 줄 알았으면... 결혼 안 했을텐데...“
(한숨)
사실 난 기억도 잘 안 나. 상현이가 말해줘서 알았지.
희 불안한 애한테 폭탄을 던졌구나.
숙 (크게 한숨을 쉬며) 그때부터 심해진 거 같아.
그래서 내가 나쁜 사람인 것 같아서 미안하기도 하고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못마땅한 것도 사실이고,
상현이 이러는 것도 너무 부담스럽고 귀찮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희 그러길래 내가 뭐랬니? 아름다운 오해, 예쁜 착각. 응?
낭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까지 가줘야... 낭만이지.
숙 (잠시 뜸 들이며) 언니.
이 얘기… 나도 결혼하고 나서야 들은 건데.
상현이 어렸을 때, 엄마 심부름 갔다가 집에 돌아왔는데
아무리 초인종을 누르고 문을 두드려도 문을 안 열어주더래.
그래서 울고 있는데 모르는 아줌마가 다가오더니 문을 열고 들어가더래.
희 (깜짝 놀람)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숙 순간, 얘가 ‘나만 두고 식구들이 이사 간 건가?’
이 생각이 번쩍 들었다더라고.
희 정말? 이사 가버린 거야?
숙 그 영화 있잖아. 벌새…
거기서 주인공이 다급하게 문 두드리면서 엄마! 엄마! 부르는 그 장면.
그거 보고 상현이… 혼자 펑펑 울더라고. 영화관에서.
희 그럼 상현이도 다른 집 잘못 찾아간 거야?
영화처럼? 야, 놀랐잖아!
숙 그러고 보니 걔가 결혼식 끝나고 첫날 밤에도 비슷한 얘기 하긴 했어.
자긴 혼자 있으면, 사람들이 그대로 나타나지 않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데.
희 그래서?
숙 그래서… 화장실 문 앞에서 기다리는 거야.
처음엔 장난이었는데, 하다 보니 그러면 안심이 되더래.
평소엔 부담스럽다가도 이렇게 생각나면... 좀 짠해.
겁나서 문 두드렸을 꼬마 생각나서.
(잠시 생각)
숙 누가 그러더라.
결혼은… 둘이 사는 게 아니래.
둘이 데리고 온, 마음속 어린아이까지 넷이 사는 거래.
희 야, 그럼 결혼이 무슨 식스센스냐?
숙 갑자기 무슨 말이야?
희 보이지 않는 애들이 하나씩 더 있다며.
(둘이 웃는다.)
희 (갑자기 뭔가 깨달았다는 듯이 호들갑 떨며)
야! 나 이제 너 때문에 오빠랑 그거 할 때마다 생각날 것 같잖아!
막 하고 있는데, 애 둘이서 조용히 보고 있는 거!
숙 아, 진짜! 언니 때문에 못 살아!
왜 얘기가 그런 쪽으로 튀어!
지금 약간 감동이었는데!
(둘이 정신없이 웃는다.)
숙 (호흡을 애써 가다듬으며) 언니.
희 (감동 때문인지, 폭소 때문인지 알 수 없는 눈물을 닦으며) 어.
숙 이따 남편들 오면… 뭐라고 하지?
희 글쎄. 미안하다고 해야 돼나?
그 말은 하기 싫은데. 낯간지럽잖아.
숙 그냥 오늘 좀 외로웠다고 얘기하자.
솔직하게. 그건 사실이잖아.
희 그런 말을 어떻게 해.
나는 영화 분석하고, 비평하고, 이런 말은 잘하겠는데
감정 표현은 영 서툴러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잘못 전달될 때도 있으니까. 무서워.
숙 근데 나는 언니 말하는 거 좋던데?
아까도 여기 와서는 ‘친정’이라고 했잖아.
그 말 한마디에 다 있었어. 언니의 외로움이랑, 언니의 용기랑.
희 그런가? 모르겠다.
그냥 시트콤 한 편 찍은 셈 치자고 할까?
숙 갑자기 왠 시트콤?
희 오늘 우리 말이야.
원했던 장르는 이게 아닌데 결론은 코미디 됐잖아.
분명 로맨스로 시작했는데...
스릴러 됐다가, 스릴런가 싶으면 코미디 됐다.
오늘 하루, 엉망진창 장르잖아.
숙 (웃음) 정신없긴 했지. 아까 형부, 어후~
희 (못 들은 척하며) 근데 그게…
뭐였든, 그냥 좋았어.
오빠니까, 너니까, 상현이니까.
그거면 됐지.
(잠시 정적)
숙 (은희를 한 번 안았다가 떨어지며) 그러게.
무슨 장르인지는, 다 끝나보면 알겠지?
인간 김은희, 그녀의 결혼 생활은 무슨 장르였는가?
희 제일 마음에 드는 건…
우리 얘기, 엔딩은 아직 아니라는 거지.
오히려 이제 시작이 아닐까.
오빠한테 내 장면도 더 많이 보여줘야 할 것 같아.
숙 됐네, 그럼.
장르는 나중에 붙이자.
이다음에 다~ 끝나고. 마지막에.
숙 자, 언니.
(은숙이 은희에게 리모콘을 건네며, 손을 지긋이 잡고 어루만진다.)
이제, 또 마저 봅시다.
[은희가 스크린을 향해 리모콘 버튼을 누르고 외친다.]
희 (리모콘을 들며 잠시 숨을 고르고)
짱구야! 다음 얘기, 계속 틀어줘.
[셋플릭스가 켜지는 두둥- 효과음.]
[관객에게 다음 이야기를 넘기듯 무대 조명 OUT, 관객석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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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훗날 <심야의 만일야화>에서 콘텐츠로 태어날 이야기의 원석입니다.
공모전 출품을 위해 창작된 오리지널 스토리이기도 합니다.
도용이나 2차 가공보다는 눈과 마음으로만 즐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