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 담는 글을 쓰다 보면
나와 가장 가까이에서 만나는 어린이들에 대해
글을 쓸 때가 있다.
주로 소소한 교실 에피소드를 쓰곤 하는데,
어린이들에 대한 글들을 쓸 때
흔히 듣는 얘기가 있다.
"교실에서 그렇게 따뜻한 일만 있어서 좋겠어요."
솔직히 말하자면 교사가 된 지 11년 차이지만
늘 따뜻하고 좋은 일만 있었던 해는
한 번도 없었다.
어린이들은
말랑하고 따뜻하며 귀엽지만
어리기에 날 것의 성격을 띨 때가 있다.
충동조절이 어렵고
원하는 것이 왜 이루어지지 않는지
진심으로 의아해한다.
심지어 우리 집에 있는 딸 1명과도
매일 좋은 일만 있기가 어려운데,
거의 30명에 가까운 어린이들이 북적이는 교실에서
어떻게 매번 말랑하고 즐거운 있만 있을 수 있겠는가.
나는 내가 받는 월급의 절반 정도는
'제때에 잔소리한 몫'으로 받는 것이 분명하다고
믿고 있는 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몇 가지 일들만 선별해서
글을 적은 건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실제로 존재하는 어린이'이기 때문이다.
어린이에 대해 쓰다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건
‘쓰지 않아야 하는 윤리’이다.
너 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에
어린이에 대해 짧은 문장으로 정리하는 일은
언제나 경계해야 할 일이었다.
아픔이나 실수,
아직 덜 다듬어진 자람의 결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교사로서 기록해야 하는 행동발달 사항이나
보호자와의 소통을 위한 기록과는 다르다.
이런 교사의 기록과는 달리
모든 사람 앞에서
누군가의 성장 과정을
너무 이른 시기에 조명하는 일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개그우먼 원소윤은 예능 프로그램 '적수다'에서
‘다정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다정함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 것 같아요.
일반적으로 발산하는 다정을 많이 생각하는데,
좀 수렴하는 다정도 있는 것 같아요.
곁에서 지켜주고, 함구하고...
아는 티를 내는 다정이 있는가 하면
모르는 척하고, 기다리고,
그런 종류의 다정도 있는 것 같아요.
개그맨 원소윤
그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교사이자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다정은
그 두 번째 종류의 다정에 더 가까운지도 모른다.
아는 것을 모르는 척해주고,
때로는 기록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지켜주는 다정.
그중에서도
반짝이고 빛나는 모습들을 발견하면
잊지 않고 부지런히 적어주는 다정.
나는 그 다정 속에서
어린이들이 스스로 성장하길 바란다.
그래서 쓰지 않는 문장들을 품고,
조용히 기다린다.
언젠가 그 아이가
자신의 언어로 스스로를 써 내려갈 날이 올 테니까.
모든 다정이 말과 글로 남아야 하는 건 아니다.
어떤 다정은 침묵 속에서 더 단단해지고,
기록되지 않아도 오래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