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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정 Jul 28. 2020

남편인가 구찌인가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돈은 안 쓰는 것이다


남편의 인생 모토이다


올해 나는 사십을 맞았다. 특별한 나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특별한 대우를 받으면 좋은 나이.

내 생일이 다가오던 날, 별로 진심을 담지 않은 남편의 질문 "생일이 다가오는데 뭐 갖고 싶은 거 없어?"에 나는 "나 사십인데 구찌 지갑 하나만 사줘라."라고 했다. 남편의 반응은 '들은 바 없음' 같았다고나 할까.


4월 말쯤. 집콕 생활이 좀 따분하여 별 목적 없이 친정 엄마와 딸과 함께 프리미엄 아웃렛에 갔다가 눈에 띄는 카드 홀더를 발견했다. 브랜드는 구찌. 어떻게 보면 촌스러워 보일 수도 있겠는데 또 어떻게 보면 세련된 화려함이 있어서 하나쯤은 갖고 싶은 아이템이었다. 20만 원대 중반이라 내 형편에 비싸긴 했지만 '구찌'라는 브랜드를 생각했을 때는 그렇게 납득이 안 가는 액수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남편과 상의 없이 예쁘다고 바로 살 만한 담력은 없었다. 하지만 자꾸 생각나고 갖고 싶고 해서 남편이 생일 선물을 묻던 날부터 "구찌 지갑 하나만 사줘라."타령을 했다.


주말 오후, 아이들이나 나나 집콕으로 미쳐갈 즈음 동네에 테라스가 있는 카페에 갔고 남편과 무슨 얘기 끝에

"그러니까 구찌 지갑 하나만 사달라고."라는 말이 나왔다.

"뭐 봐 둔 거 있어?"

"응, (저장해놨던 사진을 보여주며) 이거."

"이게 얼만데?"

"24만 원?"

"어? 정말? 이 코딱지가 20만 원이 넘는다고?"

"구찌인데 그 정도는 하지."

"그럼 사."


, 사라고 했어 지금?? 웬일이지, 하며 말을 못 이었다.


"나는 구찌 지갑이라길래 한 70~80만 원 하는 줄 알았지. 그 정도면 사."

"무슨 70~80만 원이야. 나 소박한 여자야."


속으로 생각했다. 이왕 이렇게 된거(?) 평생 숙원사업, 샤넬로 하나 사달라 할 걸.


생일이 있던 주간에 아웃렛에 갔지만 이미 품절이었고(하긴 한 두달 전에 보고 간 거니까), 나는 멘붕이 왔고, 남편은 다이소에도 예쁜 거 많던데 도대체 다이소랑 여기 물건이랑 뭐가 그렇게 다른 거냐며 핀잔을 주다가 도무지 내게 갱생의 여지가 없어 보이자 다른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보라고 하는 쪽으로 포지션을 바꿨다.


사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내 팔자에 구찌는 무슨 구찌냐 싶기도 하고 그래도 덤벼보고 싶지만 딱히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있어도 너무 비싸서 나는 실망을 넘어 실성으로 가고 있었다.


"나도 좀 안타깝네. 자기가 늘 말하듯 젊을 때 여행가야 그나마 사진도 예쁘게 나오고 잘 놀 수 있는 거니까, 하루라도 젊을 때 예쁘고 좋은 가방 갖고 다니는 거 좋다고 생각해. 그래도 우리가 버는 게 정해져 있으니 자기 갖고 싶은 거 사. 대신 앞으로 10년 동안은 생일 선물 생략하는 걸로? 응?"


앗. 이 남자가 왜 이러지. 나 지금 다른 남자 만나고 있나?

나에겐 명품이지만 남편에겐 사치품인 것에 남편이 이렇게 관대했던 적이 없는데.

못 이기는 척 나는 콜을 외쳤고 이전보다 생기 있게 매장을 둘러보았으나 별로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스타벅스 서머 체어를 교환할 수 있던 마지막 주말, 동네 스타벅스는 재고 없음이라 사무실이 많은 판교 쪽의 스타벅스에서 드디어 막차 타고 서머 체어를 받은 뒤 판교에 간 김에 현대 백화점으로 갔다(가자고 했다). 홀린 듯 구찌 매장으로 갔고, 다소 비가 오던 날인데도 사람이 꽤 있었고, 심지어 앞에서 좀 기다리기까지 했다.

드디어 입장,

그리고 찾았다. 나의 뮤즈를!


내가 구찌 로고가 많이 프린트되어 있는 가방을 들어보자 남편은 "양아치 같아."라고 말해서 세상 창피하게 만들었는데 안내해주던 직원이 "좀 그런 이미지가 있죠." 하며 부드럽게 넘어갔다. 못 말린다. 그러다가 나도 마음에 들고 남편도 흡족해 하는 가방을 드디어 결제했다.



결제하는 그 순간이 비록 잠시이긴 했지만 그 잠시 동안 번뇌와 번민, 자기반성 등의 과정이 있었다. 내 월급보다 더 많은 액수의 가방. 나는 이 가방을 가질만한 인간인가, 명품백 들고 다니는 사람에게 나는 무슨 매력을 느껴왔나.

"그냥 안 살래. 이 돈이면..... 자기가 함께 와주고 같이 골라준 걸로 충분해."라고 남편에게 말함으로써 개념부인, 교양인으로 거듭나며 "역시 내 아내는 달라."라는 평을 들을 것인가.  


오노-

난 다르다고 할 만한 그런 여자가 아니다.

명품백 좋아하는 게 속물이라면 나는 속물이다.

비우고 버리는 연습을 하여 무소유, 미니멀리스트로 살 생각이 전혀 없다.

되도록이면 매일 들고 다닐 것이다. 다른 브랜드 다른 것도 더 많으면 좋아.



백화점에서 명품을 산 건 처음이다!

와우!

구찌 쇼핑백은 이렇게 생겼구나.

이런 상자에 넣어주는구나.

나 죽으면 관에 구찌 새겨달라고 해야지.


남편이 10년 운운하긴 했지만 그동안 남편을 보아온 나로서는 어떻게 구워 삶으면 10년을 5년 정도로 줄일 지 알고 있다. 남편도 자신이 내 손아귀 안에서 구워 삶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알지만 속아주고, 미안하지만 속이고, 속고 속이고 알고 모르고 한 우리의 시간을 "신뢰"라고 표현하고 싶다.




이제 우리는 좀 처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보이는 모든 행동, 내가 차려준 음식을 맛있게 먹는다거나 부탁하지 않은 화장실 청소를 한다거나 아이들의 목욕을 다 해줄때 그것을 나는 그가 나를 사랑한다는 표현이라고 믿고 있다.


남자친구를 잃고 남편을 얻었다. 결혼이라는 연애의 실패는 임신과 출산, 육아라는 거대한 형벌을 주었다. 엄청난 보람과 기쁨이 있는 만큼 괴롭고 고된 시간을 견뎌야 했다. 그 시간을 통과하자 기대도 상상도 못 했던 일이 일어났다. 비록 딱 한 번 이긴 했지만.

이 사람과 평생을 죽을 때 까지 이혼이 아니라면 방법이 없는 채로 그저 반려인간으로 살아야 하는게 숙제처럼 느껴진 적지만 이런 류의 이벤트는 아직 이 사람에게 기대할 것이 남아 있구나 미지의 세계가 아직은 더 있구나 하는 안도감과 긴장감을 더해 주었다. 내 남자 친구였던 남자 맞구나.


일단 살고 볼 일이다.

살아서 슬픔 끝에 올 즐거움을 맛봐야 한다.

살아 계세요.

일단은 살아 계세요.



구찌님은 잘 계시다.

남편을 사랑하지 구찌를 사랑하겠나.

그래도 구찌를 사랑한다.

남편을 사랑하긴 한다. 그렇게 사랑하지 않아서 그렇지 사랑은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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