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수현

권태에 머무는 남자, 고통을 즐기는 여자

by 오수현




1.

쇼펜하우어가 말했다, 인생은 고통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진자(振子) 운동이라고. 무언가에 익숙해지면 권태로워서 괴롭고, 새로이 욕망하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괴롭다. 어느 쪽을 바라보든 괴로움뿐이니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우리 시시푸스는 여러모로 참 가여운 존재다.



2.

쇼펜하우어가 말한 진자는 벽시계 아래 매달린 시계추와 같은 것일까. 시간에 맞추어 똑딱똑딱 움직이는, 때가 되면 좌로 기울었다가, 다시 때가 되면 우로 움직이는 그라미처럼. 만약 그러하다면 나는 쇼펜하우어의 비유에 온전히 동의할 수 없겠다. 고통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우리네 진자는 자기 주인의 취향에 따라 확고한 편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어떤 사람은 고통을 더 즐기고, 다른 사람은 권태를 더 즐긴다. 아니 정확히는, 전자는 고통을 "덜' 괴롭게, 후자는 권태를 "덜" 괴롭게 여긴다고 해야겠다. (양쪽 모두 괴로운 건 마찬가지이므로, 여기서는 덜 괴로운 쪽을 택하는 게 곧 현명한 선택이다.)


불행에 관한 이러한 취향 차이는 또 자석과 같아서 마음속 진자 운동에 은 영향을 미친다. 힘을 가하면 혹 반대쪽으로 움직이기도 하지만 결국 자기가 익숙한 쪽으로 돌아고 마는 것이다. 언제고 익숙한 불행이 그나마 덜 괴로운 불행이므로.


3.

생각하기 나름이다. 권태라는 동전을 뒤집으면 그 반대쪽에는 '여유'라는 미덕이 숨어있다. 그가 그토록 고집스럽게 권태에 머무는 이유는 무엇인가. 권태가 그에게 여유를 가르쳤기 때문이다. 맹목적 미신과 무비판적 수용을 거부하도록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권태부터 벗어날 생각이 없다. 이 달콤쌉싸름한 우울이 그에게는 너무 감미로운 고로.


고통도 마찬가지다. 고통이라는 동전을 뒤집으면 그 반대쪽에는 '노력'이라는 미덕이 숨어있다. 그녀가 그토록 억척스럽게 고통을 부여잡는 이유다. 고통은 그녀에게 전략과 계획을 가르쳤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속에서 생존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래서 그녀는 오늘도 관성하는 고통에 자기 몸을 맡긴다. 이 강렬한 짜릿함보다 더한 자극을 그녀가 알지 못하는 고로.


4.

인간은 시간을 지배하기도 하고, 시간에 지배당하기도 한다. 그리고 한 개인의 불행 취향은 시간을 향한 그의 지배 성향을 암시한다.

권태에 머무는 자는 현재에 대한 사디스트다. 그는 현재를 굴복시켜 자기 취향에 맞춘다. 여기서 '굴복'이란 표현을 쓴 이유는 그가 온전히 현재에 산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온전히 현재에 사는 인간은 세상과 자신의 조화를 추구한다. 하지만 권태로운 인간은 세상을 자기 발 밑에 굴복시킨다. 그는 세상이 뭐라 하는지 궁금하지 않다. 오직 자신의 신념과 안위가 중요할 뿐이다. 그래서 그는 현재를 가학한다. 현재를 가학하 권태 속에 침잠한다.

동시에 그는 미래에 대한 마조히스트다. 왜냐하면 그는 미래에 대해 무기력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권태가 결국 자신을 어디로 이끌 것인지 알고 있다. 적어도 그의 무의식은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미래를 관념하는 게 괴롭다. 하지만 그럼에도 권태를 벗어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남몰래 그 아픔을 즐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는 다가오는 미래의 채찍질을 기다리며 도취된 행복감으로 우울을 삼킨다.

한편 고통을 즐기는 자는 그 반대이다. 그녀는 현재에 대한 마조히스트이며, 미래에 대한 사디스트다. 그녀는 자신이 미래를 완전히 지배할 수 있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다. 미래를 가학 하여 완전히 굴복시킬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오늘도 염려하고 고통받는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현재에 한없이 굴복한다. 자신이 금 무엇을 희생하고 있는지는 혀 인식하지 못한 채.


5.

익숙하지 않은 불행에 익숙해지기.

쇼펜하우어 말대로 인생은 괴로움의 연속이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즐기는 편이 낫지 않을까? 이왕 시작한 진자 운동을 만끽하기 위해선 양쪽 불행 모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어느 한쪽만 고집해서는 반대쪽 불행이 지니고 있는 '미덕'을 영영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권태가 고통으로부터, 고통이 권태로부터 한 수를 배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하여 권태는 땅을 일구 땀방울의 가치를, 고통은 놓아주는 자유함을 배울 수 있다면 마나 좋을까. 양쪽 불행에 모두 익숙한 자는ㅡ불행이라는 현상 자체에서는 자유로울 순 없겠지만ㅡ적어도 그날그날 일용할 불행을 삼켜내며 하루를 살아낼 수 있 것이다.

오늘치 일궈야 할 땅이 아직 제법 남았다. 다시 쟁기질을 시작해야겠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수현(修賢)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