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이 되면 요술을 부리는 도시, 파리. 어느 밤 실제꾼 적 있는 꿈만 같다. 우디 알렌, 자신의 꿈에서 영감을 얻은 것일까. 파리와 사랑에 빠진 남자의 달콤한 시간여행, 미드나잇 인 파리는 아마도 삶에 지친 우디가 스스로에 바치는 일종의 헌정서사 일지도.
나름 의미 있는 미션을 위해 그의 원픽, 오웬 윌슨과 블럭버스터급 유명인사들이 극 중 인물로 대거 등장한다. 그들은 일명 재즈시대라 불리는 1920년대의 아티스트들. 피츠제럴드, 헤밍웨이, 피카소, 달리. 한마디로 그 시대 대표 예술가들이 뭉쳤다. 거트루드 스타인, 루이스 브뉘엘, 만 레이, 로트렉, 드가, 고갱 등이 합세한다.
소설가 지망, 할리우드 시나리오 작가인 주인공 길(Gil)은 약혼녀 이네즈와 파리 여행 중. 길을 잃고 홀로 헤매던 어느 밤, 길은 우연히 멈춰 선 택시에 합승하게 되고 90년 전 파리의 나이트씬으로 직행한다. 그곳에서 예술한다고 얼쩡대며 방황하는 미국인들과 마주치는데 믿을 수 없게도 그들은 젤다 & 스콧 피츠제럴드와 헤밍웨이. 별들의 향연에 눈과 입이 쩍 벌어졌는데 번뜩이는 개성이나 스타성보다 예측불가한 그들의 치기와 우유부단함에 다소 어정쩡해진다.
천재라는데 들어앉아 집필하지 않고 와이프에 이끌려 흥청망청 술에 쩌는 피츠제럴드, 술이라면 지지 않을, 전장의 상흔으로 몸부림치는 외로운 늑대 헤밍웨이. 자칭 베스트라는데 진정 최고가 되고자 본인에게 거는 최면인 건지 술기운을 빌린 순간의 호기로움인지 헤밍웨이의 대사는 꽤나 분방하고 호탕하다.
“No subject is terrible if the story is true. If the prose is clean and honest and if it affirms courage and grace under pressure.”
“If you’re a writer, declare yourself the best writer - but you’re not the best as long as I’m around.“
피카소는 자신이 그린 그림에 대한 거트루드의 거침없는 비평에 뽀로통하고 감당 못할 예술가적 기질의 소유자로 그려지는 한편, 달리는 어쩌다 리노에 꽂혔는지 넋 나간 사람처럼 말끝마다 리노 타령이다. 비극이라면 비극, 코미디라면 코미디, 그들의 예술혼은 현실과 초현실의 경계를 흩트리고. 달리의 친구, 만 레이는 현재와 과거, 두 개의 세상에 사는 게 뭐가 이상하냐고 반문한다. 인간의 심장보다 더 초현실적인 것은 없다며.
시대를 막론하고 가장 불모지는 내가 서있는 이 땅이고 또 가장 몹쓸 시간은 내가 사는 이 시대여야 하나. 인간이란 각자의 이유로 힘들고 또 각자의 역량으로 그 힘듦을 헤쳐나가는 존재일 터. 길은 약혼자의 신분을 잊고 피카소의 애인, 애드리아나와 사랑에 빠진다. 그 시대에 머물 수만 있다면 헤밍웨이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소설다운 소설도 써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우연히 탄 마차로 길과 애드리아나는 벨 에포크(1890년대)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 시대야말로 예술의 황금기라 선언하며 이번엔 애드리아나가 돌아가기를 거부한다. 반면 물랑루즈에서 만난 화가 드가와 고갱은 황금기는 두말할 필요 없이 르네상스라고 단언한다. 노스탤지어 증후군에라도 걸린 듯 예외 없이 모두가 현재 부정, 과거 예찬이다. 이때 길은 클릭한다. 인생 자체에 만족이 없듯 현재에 만족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작가로서의 삶이 선명해지고 비극과 불만족 투성인 인생이 그럼에도 살아갈 가치가 있음을 글로 쓰고자 하는 길. 과거에 더 행복하리란 환상을 버려야 비로소 가치 있는 글을 쓸 수 있다고 믿게 된 길은 애드리아나에 작별을 고한다. 과거를 산다는 것 자체가 미친 생각이기에. 사랑한다고 믿었던 이네즈에도 이별을 통보하기에 이르는데 며칠 동안의 시간여행이 그의 인생을 뿌리째 뒤흔든 셈이다. 허탈한 길. 그래도 해피엔딩. 변화란 바람직하고 모두가 꿈꾸는 무엇이기에. 내 안에 있기에 언제든 다다를 수 있는 초현실, 그런대로 살가운 현실, 그런게 그렇다고 웅얼대며 추적추적 비내리는 파리의 밤 속으로 사라지는 우디의 뒷모습을 상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