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우리가 숨겨온 비밀>
예전에 홍콩에 살 때 집에 헬퍼를 들여 지낸 적이 있는 저는, 최근 넷플릭스에 공개된 덴마크 드라마 <우리가 숨겨온 비밀>을 보고 유달리 착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름은 '오페어'지만 실상은 헬퍼 제도와 유사한 점이 많고, 거기서 발생하는 문제들도 홍콩에서 직, 간접적으로 경험한 것들과 너무도 유사했기 때문이에요 [1].
오페어를 동등한 가족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고 본인들 언어로 흉을 보는 장면, 나이 든 부자 고용주의 정부처럼 지내며 백인 사회에 편입되고 싶어 하는 오페어, 남자 고용주 혹은 그들의 사춘기 자녀들과의 관계에서 빚어질 수 있는 미묘한 성(性) 문제 등.. 이 드라마는 덴마크가 배경이지만 유사한 제도를 가진 어떤 사회에서든 공통적으로 드러날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한국도 최근 필리핀 가사도우미 시범사업을 벌이고 있으니, 그저 남의 나라 얘기라고 할 수도 없지요.
또, 정작 자신의 자녀는 키우지 못하고 본국에 두고 와서는 다른 나라에서 남의 아이를 키우는 상황도 마음이 불편한 문제입니다. 저희가 홍콩에 살 때 고용했던 헬퍼는 자신의 자녀가 넷이나 있었지만 모두 성인이었는데, 제가 그분을 고용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점이기도 했습니다. 아이를 두고 온 엄마에게 차마 내 아이를 봐달라고 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에요.
저는 미국에 살 때는 반대의 경험도 했었습니다. 그림을 배우고 싶어 문화센터 같은 개념으로 성인 미술 수업에 다닌 적이 있는데요, 선생님을 비롯하여 학생 모두는 미국인이었습니다. 저만 빼고요. 그런데 첫날, 선생님이 제게 오더니 "너 오페어니?"하고 물으시더군요.
그때만 해도 오페어가 뭔지도 제대로 몰랐던 저는 몇 번이고 되묻고 나서야 상황을 알았습니다. 나쁜 의도는 아니고, 오페어의 경우 학생 기록에 따로 표시하는 관행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물으신 것이긴 하지만, 그 순간 '여기서 나는 남들과 다르게 보이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주 뒤늦게 이 드라마를 보고 과거의 미술 수업이 떠오르더군요.
사실 드라마의 주인공도 친절하고 양심적인 고용주지만, 마지막에는 결국 자기 자신과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오페어에게 등을 돌리게 됩니다. 필리핀으로 돌아가서 아이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라고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건 지극히 고용주의 입장에 불과하지요. 오페어 엔젤은 세실리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에요." 운이 좋아 부자 나라에서 태어나고, 그중에서도 특히 유복한 환경에서 삶을 꾸려 나간 그녀는 본인의 노력과는 관계없이 오페어의 삶과는 전혀 다른 선택지들을 마주하고 삽니다.
저도 타향살이를 할 때는 가진 것 없는 소수 인종으로 비추어졌지만, 홍콩에서 헬퍼를 고용했을 때도, 내 나라에서 편한 삶을 누리고 있는 지금도 분명 '럭키'한 사람일 겁니다.
자연이라는 행운
드라마에 나오는 소년들의 삶이 유달리 복에 겨워 보이는 이유가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집 주변을 둘러싼 울창한 숲입니다. 일부러 조성한 정원이 아닌, 자연 그대로의 초록색 물결. 물론 드라마에서는 내용상 다소 으스스한 장면도 연출되지만, 정상적인 소년들이라면 그 숲에서 얼마나 즐겁게 뛰어놀 수 있었을까요. 활도 쏘고, 탐험도 하고, 나무도 타는 우리 집 뒤뜰의 아름다운 숲이라니. 세실리아도 숲에 면한 야외 테이블에서 다과도 즐기고, 일도 하는데요, 완벽하게 관리된 그 야외 공간의 뒤에는 분명 오페어나 가사 도우미의 묵묵한 노동이 존재함을 알기에 씁쓸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언뜻 생각하기에 저개발국의 아이들이야말로 자연에 더 가까이 살아갈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같은 선진국이지만 미국에서는 인종이나 소득 간 자연을 접하는 격차가 존재한다고 하고요("네이처 갭(Nature Gap)"이라고 합니다 [2]), 영국에서도 빈곤 아동의 자연 접근성 문제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진 적이 있지요. 저소득층 아동 중 8명 중 1명은 자연을 경험한 적이 없으며, 이는 근처에 녹지가 없거나 교통비 부담 등으로 인한 것이라고 해요.
또, 가디언 지에 2024년 실린 기사에 따르면, 아프리카 도시의 아동들은 환경오염과 건강 문제에 직면한다고 합니다 [3]. 특히 급격한 도시화와 규제 부족으로 인해 천식 같은 폐질환이 늘어나고 있다고 하죠. 자연과의 접촉이 어린이들의 집중력 문제나 행동 문제, 발달 등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들도 있는데, 저소득층 어린이들은 애초부터 출발선상이 다른 데다 자라나는 환경도 불리한 셈이지요.
드라마의 비고와 오스카는 부유한 나라의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난 덕에, 자연과도 훨씬 더 의미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단 겁니다. (물론 오스카처럼 자라난 건 자연도 어쩔 수 없었나 봅니다)
자연을 치료약 삼은 한 해의 경험은 나에게 인간이 온전하려면 자연 풍경 속에 있어야 한다는 확신을 주었다. 태초부터 인간과 땅 사이에는 강력한 유대가 있었다. (...) 작가 리처드 루브는 사람들, 특히 아이들이 야외에서 보내는 시간이 줄어들면서 건강 문제를 겪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루브는 이를 자연 결핍 장애라고 부른다. 채집 수렵 생활을 하던 우리의 조상들은 하루 중 상당 시간을 물가나 숲 속에서 보냈다. 최초의 농부들이 정착하여 땅을 경작하면서 인간의 삶은 물줄기와 숲, 주변에 서식하는 동식물 등 여러 환경요소와 더욱 긴밀하게 연결되었다. 인간은 그렇게 진화해 왔다.
-에마 미첼, <야생의 위로> 중
중간에 세실리아가 회사에 출근해서 덴마크 작은 회사의 친환경적인 이미지를 강조하라고 지시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지속가능성이나 ESG도 결국은 부자 나라의 사치에 지나지 않는 걸까요. "You know nothing about my world."라는 엔젤의 말대로 운이 좋은 우리는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에 대해 조금도 알지 못하니까요.
기후변화와 환경 파괴는 저소득층, 저개발국의 아이들에게 일상에서 자연을 접할 기회를 더욱 박탈할 것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드라마였습니다.
[1] 참고로 덧붙이자면, 엄밀히 말해 오페어와 헬퍼(가사도우미)는 상당히 다른 제도입니다. 그러나 제가 드라마에서 본 모습(아이를 돌보고 가사를 돕고, 가족 구성원과 의사소통하며 지내는 모습)은 헬퍼와 아주 유사하다고 느꼈어요.
[2] https://www.americanprogress.org/article/the-nature-ga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