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17주 차
성인이 된 후로도 꽤 자주 다쳐서 메디폼을 상시 구비 중인데, 어느 순간부터 넘어져 찰과상을 입는 일이 크게 줄었다. 최근 몇 번의 여행에서는 메디폼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그대로 가지고 돌아와 아깝기도 했더랬다.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 기력이 없어진 탓에 천천히 움직이게 되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넘어질 것 같은 순간에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는 스킬이 늘어난 것 같기도 하다. 그런고로 정말로 오랜만에 꽈당 넘어졌다는 이야기다.
계절적으로 어둡고 쌀쌀해지면서 아침에 일어나기가 힘들다. 침덧과 울렁거림으로 자정이 훨씬 지나서야 잠드는 생활 패턴도 문제다. 몇 달만 버티면 휴직이니 에라 모르겠다 하는 마음가짐도 물론 문제다. 아무튼 기상 시간은 점점 뒤로 밀리고, 양치하다 구역질이 나오기 시작하면 집을 출발하는 시간은 더 늦어진다.
요즘 늘 입는 옷은 두껍고 긴 치마에 후리스 조끼다. 청바지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는데 그렇다고 살이 많이 찐 것은 아니라 일단 고무줄 치마를 입는다. 임산부를 위한 옷은 아니라서 고무줄만 헐겁게 묶어 적당히 흘러내리게 둔 채 애매하게 다닌다. 당연히 보폭이나 걸음걸이가 평소 같지 않을 수밖에 없다.
그 와중에 양손에 사과와 빵을 들고 종종거리며 뛰다가 혼자 스텝이 꼬였다. 어디에 걸린 것도 아닌데 균형을 잡지 못했고, 손으로 땅을 짚지 못한 채 바닥을 굴렀다. 팔, 다리, 배, 오만 곳이 땅에 쓸렸다. 옷으로 감싸이지 않은 손등이 파여 피가 철철 흘렀고, 데굴데굴 굴러가는 사과가 보였다.
그래도 직장인은 아무튼 출근해야 한다. 담임교사는 망할 아침 조례를 해야 해서 5분도 늦을 수 없다. 1교시 수업도 해야 한다. 속으로 수십 번 욕하면서 해야 할 일들을 마친 후에야 가까운 산부인과로 갔다. 진정이 안 되었는지 혈압이 140이 나왔다. 초음파로 아이 심장 박동과 태반을 확인하고 손등과 팔꿈치를 소독하고 나서야 혈압이 정상 범위로 내려왔다.
병원에 다녀온 후에도 마음이 계속 불안했다. 아직 태동이 제대로 느껴지는 시기가 아니라서, 초음파를 보지 않으면 태아에 대해 감을 잡을 방법이 없다. 잘 있을 태아라면 엄마가 뭘 해도 알아서 잘 있고, 그렇지 않은 태아라면 엄마가 아무리 조심해도 잘못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아이가 잘 있을지 궁금해서 또다시 초음파를 보러 가고 싶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태어난 후에도 이런 일들의 연속일 거란 생각. 사실 아이는 생각보다 어릴 때부터 삶에 필요한 많은 것들을 스스로 할 수 있는데, 문제는 조바심 내고 걱정하는 엄마의 마음일 지도 모른다.
임신 초기 단계에서는 엄마의 혈액에서 유래한 체액이 양막으로 스며들어와 양수가 만들어진다. 임신 중기부터는 태아의 오줌에 의해 양수량이 늘어난다. 임신 14주 차에 100mL 정도이던 양수량은 임신 후기에 1L까지 늘어난다. 양수가 태아의 움직임을 보호하고 체온을 유지시켜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엄마의 배가 부딪히거나 엄마 피부에 온도 변화가 있어도 태아는 대체로 안전한 편이다. 대신 충격으로 인해 태반이 떨어지거나 자궁이 수축할 수 있으니 산부인과 진료를 받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