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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3장.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간

by 김영웅

1부. 3장.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간


유경은 세 아이의 엄마이자 한 남자의 아내로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싫다는 말을 잘하지 못했고, 남들에게 피해 주는 말이나 행동은 그 누구보다도 예민하게 먼저 반응했다. 자기 검열이 지나치게 심한 편이었던 것이다. 그런 나날들이 결혼 후에는 더욱 고착되어 마치 그 캐릭터가 자신의 원래 모습인 것처럼 굳어지고 있었다. 유경은 굴레에 갇힌 것만 같았다. 착한 사람 콤플렉스에 빠진 것 같았고, 가끔은 망가지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사람들은 상대를 늘 배려해 주는 사람이라고 칭찬을 마다하지 않았지만,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광대짓이라도 해서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들곤 했다. 남이 정의하고 남이 칭찬하는 내가 아닌 내가 알고 나만이 아는 진정한 나를 찾고자 하는 열망에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유경은 동수가 쓴 글을 수십 번은 족히 읽었던 것 같다. 단지 그 글이 좋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렇게 쓰고 싶다는 욕망 때문도 아니었다. 이유는 잘 몰랐다. 그저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글로 뚝딱 표현하는 동수가 뭔가 달라 보였고, 동수처럼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을 글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잖아도 유경은 몇 년 전부터 어떤 사건을 계기로 글쓰기에 대한 어떤 열망을 가지게 되었고 새벽마다 짬을 내어, 비록 자주 흐지부지되었지만, 글을 쓰려고 애쓰고 있었는데, 때마침 동수와의 만남이 주어졌던 것이다. 유경은 동수가 요구한 글을 그날부터 새벽에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아 쓰기 시작했다. 그동안 보이지 않던 어떤 세상의 문이 열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글을 고치고 또 고치며 동수와의 만남 하루 전에 효영보다 먼저 단톡방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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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새벽, 나를 얻는 시간


두 살, 네 살, 여섯 살. 두 살 터울의 어린 세 아이를 키우던 시절, 무엇보다 간절했던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혼자만의 시간이었다. 오롯이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참으로 절실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좀 더 일찍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새벽 5시, 곤히 잠들어 있는 아이들 틈에서 조용히 몸을 일으키고, 행여 아이들이 깰까 봐 살그머니 거실로 나와 불을 켠다. 그렇게 시작된 ‘홀로’의 시간이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읽었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 마음속에 울리는 이야기들을 글로 남기기 시작했다. 이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집안일을 하며 아이들과 종일 부대끼다 보면, 내가 그 이른 시간에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글을 썼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 시간을 지키고 싶었다. 내가 지켜내는 이 시간이 언젠가는 나를 지켜줄 것이라는 기대와 믿음이 내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읽고, 생각하며, 쓰는 시간. 나를 가장 가깝게 만나는 시간이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침묵 속에서 또렷이 들리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간, 그 작은 쉼이 내게 기댈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때로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나의 부끄러운 모습, 불완전함으로 가득한 나를 마주해야 할 때도 있었지만, 그 시간을 통해 나는 나 자신을 수용하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그 노력은 나를 넘어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와 공감으로 이어졌다. 겉으로 보이지 않는 내면, ‘너머’를 볼 수 있는 마음의 공간과 여유를 갖게 해 주었다.


그렇게 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나는 어느덧 ‘꾸준히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과연 내가 계속할 수 있을까?’ 반신반의하며 시작한 일이, 이제는 나에게 없어서는 안 될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상이 되었다. 반복되는 그 시간을 통해 무엇을 얻었느냐 누군가 내게 질문한다면, 나는 자신 있게 대답할 것이다. ‘그 시간만큼의 나를 얻었다’라고.


하루 중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간, 이른 새벽이다. 고요하지만 가장 선명한 시간. 쓰러진 나를 일으키고 회복해 가는 시간. 오늘이라는 현실 속에서 영원을 꿈꾸는 시간. 그 축적되는 순간들 속에서 나는 여전히 나를 얻고 있다.


우연이었을까? 그 시간에 효영도 글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곧 단톡방에 올릴 참이었는데 유경이 먼저 올려버린 것이다. 효영은 동수보다 먼저 유경의 글을 읽었다. 전혀 다른 문체를 느꼈다. 몇 년 전부터 글쓰기를 한답시고 자랑 아닌 자랑을 하던 유경이 멋져 보였다. 진지하게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글이 좋았다. 효영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유경이 동기가 아니라 선배로 느껴졌다. 무언가를 성실하게 지속하면 뭔가 달라지는구나, 하는 동의가 되었다. 효영은 용기를 내어 유경에 이어 글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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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함에 관하여


쓸쓸함이 당신에겐 어떤 의미인가. 쓸쓸함의 사전적 정의는 <외롭고 적적하다>이다. 시끌벅적한 상황에서도 외로울 수는 있겠지만, 쓸쓸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적적해야 한다. 적적한 가운데 외로워야 비로소 쓸쓸함이다. 나는 쓸쓸함을 사랑한다.


초등학생시절, 방과 후 활동을 마치면 어김없이 축구공과 함께 운동장으로 뛰쳐나간다. 늦은 오후의 포근한 햇살이 비추는 시간. 친구들을 불러 모은다. 운동장은 이내 웃음소리로 가득해진다. 어느덧 하나둘 집으로 간다. 이번에도 내가 마지막이다. 퇴근하는 엄마를 기다린다. 골대를 향해 공을 차면 공을 건네줄 골키퍼가 없으니 공을 주우러 가야 한다. 공을 줍고 고개를 들면 파란색지붕의 강당이 보인다. 그 위로 벌겋게 물든 해가 아른거린다. 운동장도 붉게 물들고 세상은 고요하다.


그 당시에는 별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친구들이 떠나간 운동장에 홀로 남아있는 그 쓸쓸함이 싫었다. 노을을 감상하기는커녕, 초조하게 시계탑과 교문밖을 번갈아 볼 뿐이었다. 기다림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힘들다. 그러나 그 끝에 주어지는 달콤함이 있어, 기다림은 여전히 견딜만하다. 저기 엄마가 보인다.


지나간 시간은 어떻게 저장되는 걸까. 분명 싫었는데, 전혀 인상적이지 않았는데, 세월을 거쳐 아름다운 한 장면이 되곤 한다. 돌아갈 수 없는 어린 시절에 대한 애틋함때문일까. 붉게 물든 운동장에 홀로 있던 그 장면이 아름답게 기억된다. 그때 느꼈던 쓸쓸함도 내게는 아름다운 기억이 되어버렸다.


바다에 가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오는 일은 없다. 그 순간을 위해 가는 거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외로움의 시간, 해맑은 웃음과 활기찬 걸음이 온데간데없는 적적함의 시간, 내가 사랑하는 쓸쓸함의 시간이다. 파란색 바다너머로 붉은 해가 아른거린다. 해변도 붉게 물든다. 세상이 잃어 가는 빛만큼, 그만큼이 내 안으로 들어오나 보다. 가슴이 벅차오른다. 입가에는 야릇한 미소가 번진다.


노을 앞에서 나는 기다리는 사람이 된다. 떠나간 너는 언제 오려나. 하염없이 기다리니, 오라는 너는 안 오고 어둠이 찾아온다.


효영의 글을 가장 먼저 읽은 사람은 유경이었다. 비슷한 시간 비슷한 상념에 사로잡혀 있었을 효영을 생각하며 동병상련을 느꼈다. 그리고 효영의 글에는 뭔가 다른 게 있는 것 같았다. 마흔이 넘은 현재의 효영이 아닌 유경이 알지 못하는 수십 년 전 효영 어린이가 눈앞에 그려지는 듯한 인상을 받았던 것이다. 차이점이 무엇일까 고심하다가 떠오르는 단어가 있었다. 묘사였다. 유경의 글에는 없거나 약한 부분이 바로 묘사였던 것이다. 유경은 자신의 글이 효영의 글에 비해 다소 관념적일 뿐만 아니라 되뇌는 듯한 느낌을 준다고 느꼈다. 수십 번 고치고 고쳤건만 보이지 않던 점들이 효영의 글을 읽고 나니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신기했다. 동수가 왜 글쓰기를 함께 하자고 했는지, 왜 글쓰기 동지가 중요한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효영의 글 바로 뒤에 댓글을 달았다. "묘사가 아름다운 글. 어메이징 ෆ"


자정이 지날 무렵 동수도 유경과 효영의 글을 읽었다. 동수는 뜻밖의 기쁨을 느꼈다. 사실 글쓰기 모임을 하자고 유경과 효영에게 제안을 했지만 두 사람이 실제로 그 제안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동수는 글쓰기로 인해 체험했던 위로와 치유의 힘을 그저 유경과 효영에게 전달해주고 싶었던 것뿐인데 일이 이렇게 쉽게 진행될 줄은 몰랐다. 아무튼 기쁜 마음에 허겁지겁 두 글을 읽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댓글을 남겼다. 먼저 유경의 글에 대한 동수의 글이다.


유경이가 사수하고 있는 새벽시간의 의미가 내게도 충분히 와닿았어. 글은 전달이 기본적인 목적이기 때문에 이런 면에선 아주 잘 썼어. 유경이는 이미 글쓰기 초보 단계를 넘어 그다음 단계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아. 몇 달 전부터 혼자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쓴 열매가 보이는 것 같구. 잘했어. 그러나 명제적 진술이 아닌 문학적인 감수성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에세이의 힘은 사실 전달에 있지 않거든. 그것을 밀도 있게 심금을 울릴 수 있도록 압축하고 절제해서 간결하게 보여주는 게 필요해. 반복된 연습이 도움이 많이 될 거야. 또 한 가지. 유경이 글에는 반복이 많이 보여. 이 반복은 글쓰기 재료가 빈약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어떤 느낌과 생각을 표현하고 싶은데, 표현할 단어와 문장이 단조롭고 병렬식으로 진행되는 느낌이 들더라구. 이럴 때 필요한 게 풍성함이야. 이 글 같은 경우엔 프리퀄이 있으면 좋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이를테면 첫 단락 이전 내용을 한 단락 더 추가하는 거지. 물론 내 생각일 뿐이지만. 얼마나 꽉 찬 시간 때문에 나를 잃어버리고 있었는지, 왜 혼자만의 시간이 절실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좀 더 썼다면 좋았을 것 같아. 육아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면 첫 단락에서부터 빠져들지 못할 것 같거든. 아무튼 하나의 생각에 사로잡혀 디테일을 교정하는 노력도 좋지만, 그것보다는 좀 더 뒤로 빠져서 내용 전체를 풍성하게 만들려고 애써보는 게 유경이에게 필요하지 않나 싶어. 지금까지 했던 노력과 질이 다른 노력을 시도해 보길 강력하게 권해. 참, 이 글 역시 대조로 볼 수 있잖아. 새벽시간 비포 앤 애프터로 말이야. 대조는 선명할수록 좋은 글이 돼. 이런 면에서 이 글은 애프터에 비중을 많이 둔 셈이지. 더 어두워야 잔잔한 빛도 밝게 보이는 법이니까 비포를 좀 더 쓰면 좋을 것 같아. 다음은 내가 수정해 본 글이야. 참고하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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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새벽, 나를 얻는 시간 - 수정본


두 살, 네 살, 여섯 살의 세 아이와 온종일 함께 하던 어느 날 문득 내 삶에 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라도 혼자이고 싶었다.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 시간을 확보하지 않으면 더 이상 못 버틸 것 같았다.


새벽 5시, 곤히 잠들어 있는 아이들 틈에서 조심스레 몸을 일으킨다. 행여 아이들을 깨울까 봐 살금살금 거실로 빠져나와 스탠드 불을 켠다. 그리고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읽고 쓴다. 지난 8년간 쉬지 않고 반복했던 나의 일상이다.


홀로 읽고 쓰는 시간. 내밀한 내 안의 여러 목소리에 가만히 귀 기울이는 시간. 나를 경청하는 시간. 때로는 나의 부끄럽고 못난 모습을 마주하는 고통도 느껴야 했지만 그 짧은 시간은 나에게 그런 내 모습까지도 끌어안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나는 비로소 숨 쉴 수 있었다. 깊은 위로와 치유를 경험할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시간을 통해 나를 넘어 타자에 대한 이해와 공감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마음의 여유가 없으면 보이지 않는 것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이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집안일을 하며 아이들과 종일 부대끼다 보면, 그 이른 시간에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글을 썼는지 기억나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점점 더 그 시간을 의지하고 사랑하게 되었고 길들여져 갔다. 나는 그 시간을 반드시 지켜내고 싶었다. 그 시간이 언젠간 나를 지켜주리라는 기대와 믿음도 어느새 마음 한 편에 생겨나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꾸준히 하는’ 사람이 되었다. ‘과연 내가 계속할 수 있을까?’ 반신반의하며 시작한 일이, 이제는 없어서는 안 될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상이 되었다. 반복되는 그 시간을 통해 무엇을 얻었냐고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자신 있게 대답할 것이다. ‘그 시간만큼의 나를 얻었다’라고.


하루 중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간은 이른 새벽이다. 고요하고 가장 선명한 시간. 쓰러진 나를 일으키고 회복해 가는 시간. 오늘이라는 현실 속에서 영원을 꿈꾸는 시간. 그 축적되는 순간들 속에서 나는 여전히 나를 얻어가고 있다.


동수는 효영의 글을 읽고 유경이 느꼈던 것과 비슷한 감성을 느꼈다. 동수의 머릿속에도 학교 운동장에 서 있는 효영 어린이가 그려졌다. 묘사의 힘을 다시 한번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글 한 번도 써 보지 못했다고 했던 효영에게 이런 문학적 감수성이 있을 줄은 몰랐다. 정제되지 않은 보석을 찾은 듯한 기분으로 동수는 효영의 글을 반복해서 읽은 후 다음과 같은 댓글을 달았다.


유경이 댓글처럼 묘사가 훌륭해. 솔직히 나도 놀랐어. 너 글 처음 써 본다고 하지 않았니? 거짓말은 아니겠지? 아무튼 이 글을 읽으면서 친구들이 다 떠나고 운동장에 홀로 남아 엄마를 기다리는 효영 어린이가 그려지더라. 해 질 무렵의 그 아련함도 잘 전달이 되었어. 마음이 짠해지더라구. 특히 '저기 엄마가 보인다' 문장은 정말 영리했어. 기억에 대해 언급한 단락도 조금 아쉬운 감이 있지만 적절해 보였구. 그러나 임팩트가 충분히 강렬한데도 단락이 조금 따로 노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어. 문장과 단락은 괜찮아 보이는데 단락 간 연결이 매끄럽지 않고 생뚱맞게 읽혔거든. 특히 마지막 문장은 어색해 보여. 없는 게 더 깔끔해 보일 정도로. 이런 건 글쓰기를 시작하는 사람들에게서 많이 발견되는 현상인 것 같아. 어떤 느낌과 생각을 전달하고 싶은데, 표현할 재료가 소진되어 버린 거지. 유경이와 비슷하게 보완해야 할 점들이 보여. 그리고 초등학생 시절을 언급했기 때문에 성인이 되고 나서의 경험도 한두 단락 썼다면 더 좋았을 것 같아. 그러면 네가 사랑하는 시간은 과거에 머물지 않고 현재진행형이 되니까. 단락의 연결을 주의하면서 글 전체가 하나로 읽힐 수 있도록 좀 더 애써 보면 좋을 것 같아. 아주 잘 썼어. 네 글도 내 버전으로 조금 수정해 봤어. 참고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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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함의 시간들 - 수정본


쓸쓸함은 ‘외롭고 적적함’이다. 군중 속에서도 외로울 수 있지만, 쓸쓸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적적해야 한다. 적적한 가운데 외로워야 한다. 그래야 쓸쓸함에 다다를 수 있다. 나는 쓸쓸함을 사랑한다.


초등학생 시절, 방과 후 활동을 마치면 어김없이 축구공을 들고 운동장으로 뛰쳐나갔다. 포근하게 우릴 감싸던 늦은 오후의 햇살 아래 구슬땀을 흘리다 보면 어느덧 집으로 가야 할 시간이었다. 함께 뛰어놀던 친구들이 하나둘 떠났다. 나는 언제나 마지막이었다. 퇴근하는 엄마를 기다려야 했다.


혼자 남아 골키퍼가 없는 골대를 향해 공을 찼다. 터벅터벅 걸어가 공을 주웠다. 엄마가 오기 전까지 여러 번 반복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면 강당의 파란색 지붕이 보였다. 그 위로 아른거리던 벌건 해를 기억한다. 운동장도 금세 붉게 물들었고, 세상은 고요했다. 그리고 나는 혼자였다.


어릴 적 나는 운동장에 홀로 남아있던 그 쓸쓸함이 싫었다. 노을을 감상하기는커녕, 초조하게 시계탑과 교문 밖을 번갈아 볼 뿐이었다. 기다림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힘들다. 그러나 그 끝에 주어지는 달콤함이 있어 여전히 견딜 만하다. 아, 저기 엄마가 보인다.


지나간 시간은 어떻게 기억되는 걸까. 분명 싫었는데, 전혀 인상적이지 않았는데, 그 시간은 세월을 거쳐 아름다운 기억으로 자리 잡았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일까. 지금도 눈을 감으면 붉게 물든 운동장에 홀로 서 있던 내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성인이 되어서도 바다에 가면 좀처럼 해 지기 전에 돌아오는 일은 없다. 그 순간을 위해 가는 거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푸른 바다 너머로 아른거리는 붉은 해와 붉게 물든 해변은 곧 어릴 때 보았던 파란 지붕 위에 걸려 있던 붉은 해와 붉게 물든 운동장을 소환한다. 쓸쓸함이 아련함이 되는 순간이다.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외로움의 시간, 해맑은 웃음과 활기찬 걸음도 온데간데없는 적적함의 시간, 내가 사랑하는 쓸쓸함의 시간이다. 나는 더 이상 이 쓸쓸함이 싫지 않다. 오늘의 쓸쓸함은 내일의 아련함으로 자리 잡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잃어 가는 빛만큼, 그만큼의 빛이 내 안으로 들어올 것이므로. 아, 가슴이 벅차오른다.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번진다.


동수는 유경과 효영의 글을 읽고 코멘트를 남긴 뒤 이어서 자신이 쓴 글을 올렸다.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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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의 순간들


인생에는 무대 위에서 빛나는 순간이 있는가 하면, 무대 뒤에서 초조하게 대기하는 순간이 있으며, 마침내 연극이 끝나고 어두운 무대 아래에 홀로 앉아 관객이 빠져나간 텅 빈 공간을 응시하며 풍경이 되는 순간도 있다.


얕은 눈의 나는 인생이 빛나는 찰나를 위해 존재한다고 믿었다. 무대 뒤나 아래의 시간은 모두 무대 위의 화려한 조명과 함께 당연히 사라진다고, 사라져야 한다고 믿었다. 무대 위에서 얼마나 빛났는지가 모든 삶에 대한 합당한 평가라고 여겼다.


남들보다 더 빛나고 싶었다. 이왕이면 가장 빛나는 별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무대 위로 오를 기회가 내겐 주어지지 않았다. 나는 빛날 수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둠에 익숙해진 나는 마침내 무대 아래에서 잔잔한 빛들을 볼 수 있었다. 기이했다. 무대 아래는 어둡지 않았다. 순간 전율과 함께 깨달았다. 이 작은 빛들이 이제껏 보이지 않았던 이유는 무대 위 화려한 조명에 의해 내 동공이 작아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눈을 뜨고도 눈먼 자였다.


빛나는 순간은 찰나다. 대기하는 순간도 길지 않다. 그러나 무대 아래의 시간은 일상이다. 모든 삶의 바탕이자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다. 빛나지 않지만 빛나는 곳, 많은 한숨 어린 견딤과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기다림으로 이루어진 낮은 곳, 소중한 사람들과 따스한 마음들이 머무는 곳, 무엇보다 벌거벗은 나 자신이 거하는 곳이다.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너무 늦지 않게 이 빛들을 볼 수 있어서. 높고 빠른 것들이 아닌 낮고 느린 것들에 내 시선이 머물 수 있어서. 간신히 일상의 소중함에 눈을 뜰 수 있어서. 눈을 뜬 나는 이제 눈이 깊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하루 중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간은 이런 여백의 순간들이다. 과학자의 옷도, 남편이라는 옷도, 그리고 아빠라는 옷까지 모두 훌훌 벗어던지고 오롯이 궁극의 나를 마주하는 시간. 이 시간에는 멍하니 허공을 응시해도 좋고, 가만히 눈을 감고 멀리서 들려오는 자동차 경적 소리나 기차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잠시 마음의 여행을 떠나도 좋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생각나면 그들을 위해 잠시 마음을 모아 기도를 읊조려도 좋다. 이 시간은 모든 시간의 여백이므로, 이 시간은 그렇게 구별된 시간이므로 나는 어떤 모습이어도 상관없다. 그 모습이 온전히 나이기만 하면 된다.


언젠가부터 이 여백의 시간을 활자로 수놓기 시작했다. 그렇다. 다른 모든 허울을 벗어던진 나의 깊은 자아는 '쓰는 사람'이었다. 작가는 옷이 아닌 피부였다.


나는 하루 중 가장 사랑하는 시간에 경건한 자가 되어 내가 가장 사랑하는 행위를 한다. 여백의 순간들을 글로 남긴다. 쓰지 않으면 사라지고 말 순간들을, 그 삶의 조각들을 절박한 마음으로 부지런히 주워 담는다. 그 조각들이 장차 어떤 그림을 그려낼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히 안다. 그 그림은 숨기고 싶었던 나, 도망가고 싶었던 나, 웅크리고 있었던 나를 포함하여 여러 겹으로 이루어진 가장 나다운 나일 거라는 사실을. 한 사람의 진정한 모습은 드러난 것들의 균열을 통해 드러나는 법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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