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5장. 두 번째 만남
지난 모임처럼 테이블 위엔 커피 세 잔이 놓였다. 3월이었다. 며칠 전엔 기온이 20도가 넘어 갑자기 여름이 찾아온 듯했다.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벚꽃 시즌이 될 것이다. 그러나 유경과 효영의 마음속엔 이미 벚꽃이 피기 시작한 것처럼 보였다.
동수가 물었다. 야, 너희들 얼굴이 그냥 막 뭔가를 시작하는 신입생 같은데? 뭐 좋은 일이라도 있어? 유경과 효영은 동수의 말을 듣고 무슨 말인가 싶었다.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부끄러운 마음도 있었지만, 그게 그리 나쁘지 않았다. 둘은 그냥 씩 웃고 말았다. 동수가 말했다. 너네 어젯밤에 올린 글 너무 좋았어. 기대 이상이야. 역시 내가 보는 눈은 있어. 동수는 언제나처럼 잘난척하며 말을 이었다. 유경과 효영의 눈엔 그게 그리 미워 보이지 않았다. 어제 난 너네가 쓴 글에 코멘트도 하고 수정도 하느라 나 새벽 3시에 잤어. 내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하느라 6시에 잠에서 깼는데 이상하게도 하나도 안 피곤하더라구. 솔직히 기뻤어. 오랜만에 충만함을 느꼈다고나 할까? 아무튼 고마워. 유경과 효영은 종종 광대짓을 하는 동수의 진정 어린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았다. 동수가 조심스레 이어서 말했다. 어때? 내 코멘트가 기분 나쁘진 않았지? 함부로 너네가 쓴 글을 수정까지 해서 오늘 하루 종일 너네가 기분이 상했으면 어쩌나 걱정했어. 동수는 글이 곧 그 사람을 대변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글을 마음대로 허락 없이 수정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것과 같은 거라고 여겼던 것이다. 유경과 효영은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저으며 아니라고 했다. 고마웠어. 솔직히. 유경이 말했다. 효영도 고개를 끄덕였다. 동수는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사실… 잠시 동안의 침묵을 깨고 유경이 입을 열었다. 글쓰기를 시작한 건 오래되었지만, 이제야 제대로 글쓰기를 마주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효영이 유경의 말을 듣고 끼어들었다. 나는 유경이완 달리 처음 글쓰기를 해 보지만 이번 글을 쓰면서 신기한 경험을 한 것 같은 느낌이야. 아무도 묻지 않던 것들을 동수 네가 물어줘서 정말 고마워. 나조차도 묻지 않던 내가 사랑하는 것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어서, 이제야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묻게 되어서 다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기분이야. 나도 고마워 동수야. 동수는 가슴이 벅찼다. 야, 벌써부터 이러면 어떡하니. 앞으로 함께 써 나가야 할 글이 얼마나 많은데… 동수는 씩 웃으며 글쓰기 주제를 몇 개 선정해 왔다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글쓰기 주제는 다음과 같았다. 일곱 가지였다.
내가 가장 바보처럼 느껴질 때, 내가 깊은 불안을 느낄 때, 내가 깊은 분노를 느낄 때, 내가 가장 모순을 느낄 때, 내가 깊은 기쁨을 느낄 때, 나는 어떤 사람에게 끌리는가, 나는 '이런' 사람은 되고 싶지 않다.
순서는 크게 상관없어. 주제가 바뀔 수도 있어. 그냥 어제 자기 전에 생각나는 대로 써 본 것일 뿐이니까. 가장 먼저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 짚어보는 게 우선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정해본 거야. 어때? 좀 막막하지? 어떻게 보면 유치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거야. 그러나 지금까지 한 번도 이렇게 유치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본 적이 없지 않아? 스스로의 감정에 대해서 솔직하게 반응하고 점검해 보는 게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글쓰기의 여정에 좋은 시작이 될 것 같아. 나도 함께 쓸게. 동수의 말을 듣고 유경이 물었다. ‘내가 깊은 불안을 느낄 때’, 이 주제로 시작하면 어떨까? 동수는 좋다고 했지만 효영은 ‘내가 깊은 분노를 느낄 때’로 시작하면 좋겠어,라고 말했다. 동수는 그것도 좋다고 말했지만, 잠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그럼, 유경은 불안에 대해서, 효영은 분노에 대해서 써보는 게 어때? 여유가 되면 유경도 분노에 대해서 써보고, 효영도 불안에 대해서 써보는 걸로 하면 될 것 같은데. 어떠니? 유경과 효영은 둘 다 좋다고 했다. 그럼, 다음 달까지 저번과 같은 형식으로 글을 써서 단톡방에 올리기로 하자. 나는 두 주제에 대해 다 써볼게.
참, 그리고 한 가지 더. 너네 둘 다 '글쓰다짓다'에 정식 멤버가 된 거지? 진지하게 글쓰기를 일상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거지? 동수가 재촉하듯, 그러나 조심스럽게 묻자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유경과 효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런 기회가 내게 왔다는 걸 나는 우연 같은 필연이라고 믿어. 아임 인! 효영이 먼저 말했다. 유경 역시 멈춰있는 삶을 앞으로 진행시키고 싶다며 함께 열심히 해보겠다고 다짐했다. 동수는 유경과 효영의 대답을 듣고 안심을 했다. 그리고 목구멍까지 올라온 부탁 하나는 꿀꺽 삼키기로 했다. 실은 글쓰기 주제 중 하나로 '나에게 글쓰기란 무엇인가'를 정해서 유경과 효영에게 써오라고 부탁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둘의 글쓰기에 대한 진지한 자세가 행여 부담을 느껴 흐트러질까 봐 그건 다음 달 글쓰기 주제로 말하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