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7장. 동수
세 번째 모임을 일주일 앞둔 날 저녁 글쓰다짓다 단톡방에 효영이 글을 올렸다. 동수에 대한 질문이었다. 효영은 유경이 불안에 대해 쓴 글을 읽었고, 그에 대한 동수의 답글을 읽고 궁금해졌다. 동수의 미국 생활이 어떠했는지 그 맥락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효영이 기억하는 동수는 공부는 잘했으나 조금 거칠 정도로 성격이 강한 친구였다. 글쓰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친구로 기억되어 있기에 동수의 변신이 효영은 무척이나 궁금했던 것이다. 동수는 그에 대한 답으로 유경이와 같은 주제로 쓴 글을 공유했다.
불안의 역설
어른이 되고 나서부터였을까, 현실이라는 시공간에 덩그러니 내던져진 나 자신을 발견하면서부터였을까. 새해가 되면 늘 내 마음엔 깊은 불안이 스며들곤 했다. 나는 자주 텅 빈 눈이 되어 허공을 응시하게 되었고, 초점을 잃은 채 창백한 기분이 되었으며, 실제로는 아무 일도 하지 않지만 마치 힘든 노동을 한 것처럼 피로에 지친 사람이 되었다. 누군가에게 쫓기듯 마음이 조급해지나 정작 아무도 나를 쫓지 않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허탈해했다. 마음에 두고 있던, 그래서 공기처럼 익숙해졌던 그 무엇이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무너져 버릴 것 같을 때 나는 더럭 불안을 느꼈던 것이다. 징후는 명징하나 원인은 언제나 불분명한 기분, 불안. 익숙하고 확신에 차 있을 정도로 자명한 모든 것들도 의심하게 만드는 강력한 힘, 불안. 새해가 될 때마다 이런 의식을 치렀던 건 아마도 내가 그동안 달려온 시간들이 틀릴지도 모른다는, 혹은 엉뚱한 걸 쫓아왔는지도 모른다는 불확실성을 직면해야 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 중 하나는 이 불안이라는 녀석은 평상시에도 늘 나를 감싸고 있다는 것인데, 연말연시처럼 지나온 날들을 돌이켜보며 의미를 곱씹는 특별한 시간표가 아닐 때에는 좀처럼 인식하지도 못한다. 놀라우면서도 두렵기조차 한 이 사실은 일상이라는 긴 잠에서 문득 깨어날 때마다 가장 먼저 느끼게 되는 감정이 바로 불안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불안은 안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잠시 잊힐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상이 무탈하게 느껴지는 까닭도 신의 선물인 망각의 열매이리라.
마흔을 넘어설 무렵 그 어느 때보다도 불안을 두려워했다. 인생의 낮은 점을 지나며 가치관과 세계관의 변화를 겪던 시기였다. 가족을 데리고 무턱대고 아무 연고도 없는 미국으로 건너갔던 그때, 정작 뭐 하나 이루어 놓은 게 없다는 생각에 매일 숨이 차 올랐다. 평소에 물질적인 가치에 저항하며 살았다고 자부했건만, 그 시기의 나는 든든한 직장, 두둑한 통장이 가져다주는 부와 명예를 은밀하게 욕망했다. 나의 내면은 두 세계로 분열되었고, 그 괴리감에 매일 무너졌다. 내 인생은 외줄 타기인 것만 같았고, 내 손엔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은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자꾸만 작아져갔고 외톨이가 되었는데, 무엇보다 나로부터 그렇게 되었다는 점이 가슴 아팠다. 나는 자연스레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많은 시간이 지나고 지금은 그 시절에 나를 압도했던 외로움과 불안함에 감사하는 마음이 된다. 외롭지 않았다면, 불안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내가 존재할까. 과연 나는 읽고 쓰는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 더욱더 그런 마음이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 이것이 인생의 신비이리라 - 나를 읽고 쓰게 만들었던 건 다름 아닌 외로움과 불안이었다,라고 지금의 나는 고백하게 된다. 그것들이 나를 절박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힘겨웠던 그 시간들을 극복했기 때문에 읽고 쓰게 되었는지, 읽고 쓰게 되었기 때문에 그 시간들을 극복해 낼 수 있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둘 다라고 막연히 생각할 뿐이다. 아무래도 상관이 없지 않나 싶은 생각도 크다. 어쨌거나 그 시기를 지나오며 읽고 쓰는 일은 내 삶의 일부가 되었고, 나는 그것들로 말미암아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었으며, 여러 크고 작은 우물들을 벗어날 수 있었고, 이전보다 깊고 풍성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이젠 그렇게나 어색했던 작가라는 말도 감사하게 받아들인다. 나는 과학자이자 작가이다.
조용한 시간, 지금도 눈을 감으면 내 삶의 일부였던 그 시간들이 떠오른다. 외롭고 불안했던 그 시간들을 견뎌내며 내 안에 조금씩 자리 잡은 고요한 침묵의 순간들. 마음껏 읽고 쓸 수 있었던 그 시간들. 그 소중한 나날들. 아, 왜 아련한 기억들은 행복과 불안을 동시에 머금고 있는 걸까.
산에 굴곡이 있어야 햇빛이 비칠 때 음영이 생겨 입체적으로 아름답게 보이는 것처럼 오래 기억되는 과거의 아련함뿐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향유할 수 있는 현재라는 시공간도 불안을 머금고 있기에 행복의 입체감이 증폭되어 더욱 아름답지 않나 싶다. 어쩌면 불안은 행복을 파기하지 않고, 다만 입체감을 더할 뿐이지 않을까. 이게 불안의 역설 아닐까. 불안의 역설이다. 그리고 나는 제2의 외로움과 불안을 갈망하게 된다.
효영은 동수가 쓴 글을 읽고 왜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가 말하는 인생의 낮은 점에서 가치관과 세계관의 변화를 겪었다는 표현에 그 답이 있었다. 단순하게 대답하기에는 효영이 보기에도 너무나 커다란 주제였던 것이다. 효영이 알던 동수의 모습과 현재 글쓰다짓다를 이끌고 있는 동수의 모습 사이에 있는 괴리는 금세 사라질 것 같았다. 단지 글 한 편을 읽었을 뿐인데, 효영은 동수를 다 이해한 것만 같았다. 동수의 과거가 보이는 듯했고, 동수가 겪어냈던 어려운 시기가 간접적이나마 느껴져 마음이 시리기도 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이것이 글의 힘인가 싶었다. 효영은 아직도 동수가 겪었던 변화를 경험해 본 적 없었기에 한 편으론 동수가 부럽기도 하고, 또 한 편으론 더럭 겁이 나기도 했다. 효영의 마음은 두 가지로 분열되었던 것이다. 바보 같이 느껴지는 현재의 모습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도 혹시 이러다가 무슨 큰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할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한 치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늘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보여 마음이 괴로웠다. 하루 종일 동수의 글을 읽고 또 읽다가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얼른 댓글을 달았다.
동수 글을 읽고 불안은 행복을 요리할 때 꼭 들어가야 할 재료이지 않나,라는 생각을 해봤어. 망각이라는 재료를 함께 넣는다는 전제 하에서 말이야. 그러나 막상 불안을 느낄 때는 자신이 행복을 요리하고 있다는 자각은 할 수 없겠지. 지나고 난 뒤에야 행복이라는 요리가 완성되어 맛을 볼 때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거 같아. 그제야 인간은 불안과 망각이 좋은 감미료 역할을 했음을 깨닫는 거지. 나도 불안 너머에 있는 행복을 볼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비록 불안에 잠식되어 눈앞이 가려질지라도 저 멀리 비춰오는 그 한줄기 빛을 볼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어. 그 빛을 볼 수 있는 자가 강한 사람일 테니까.
유경 역시 동수가 올린 글을 읽고 동수의 과거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동수의 과거는 평서문으로 적기에는 다 담아내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자세한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진 않았지만 동수가 겪어냈을 어려움을 왠지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외로움과 불안이 결국 동수를 글쓰기로 불러내었다는 말에 강하게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금 유경의 상황과 맥락은 다르지만 너무나도 흡사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또한 유경은 동수가 쓴 마지막 문장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제2의 외로움과 불안을 갈망하게 되었다니! 쉽게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동수의 마음이 느껴졌다. 유경도 다음처럼 댓글을 달았다.
너에게 외로움과 불안이라는 결핍이 있었기에 '읽고 쓰는' 일에 간절할 수 있었다 생각하니, 그런 감정 또한 고마워해야 할 대상이라는 생각이 들어. 힘겨운 시간을 읽고 쓰는 일을 통해 치열하게 극복해 봤기에, 너의 말과 글이 더 명료할 수 있게 된 것 같아. 너에게 고마워할 이유가 점점 많아지는 것 같네. 결국 인생을 해석해 내는 힘도, 불안하고 막막하지만, 그 고요한 깊이를 버티고 견뎌낼 때만 길러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제2의 외로움과 불안을 갈망하는 너의 결연한 마음이 건강한 여유로 느껴졌어. 부러웠어.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다니. 나는 아직 글을 쓰면서도 외로움과 불안을 매일 경험하거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정돈되지 않고, 나에게 와닿는 글이 써지지 않을 때는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야. 그래도 지나가야 할 과정이라면 이 불안을 좀 견디고 즐기고 싶어. 길이 보여서 가는 게 아니라, 가다 보면 찾게 될 나만의 길을 기대하면서. 동수 네가 겪어냈듯이 나도 그 길을 겪어내고 싶어. 글쓰기를 제대로 마주하게 해 줘서 고마워.
동수는 퇴근하고 여느 때처럼 책상에 앉아 효영과 유경이 남긴 댓글을 읽었다. 뜻밖의 감사가 밀려왔다. 동수는 미국에서 겪었던 경험을 뒤로하고 귀국하여 인생의 후반전을 읽기와 쓰기로 수놓고 있었다. 어느덧 책을 읽고 쓰고 나누는 일이 일상으로 깃들 만큼 좋아하고 있었다. 동수는 이제 읽고 쓰는 일에 어떤 의무감 같은 것도 느낀다. 동수는 평생을 해 온 과학이라는 학문도 대중에게 할 수 있는 한 알리고 싶어 책도 두 권이나 썼다. 뿐만 아니라 동수는 과학만을 고집하지 않았다. 문학 읽기와 글쓰기를 마음에 두고 난 다음부터 인생이 좀 더 풍성해진 것 같다고 느꼈다. 아마도 동수는 더 높아지고 더 빨라질 기회랄까 능력이랄까 하는 것들로부터 스스로 멀어졌다고 느끼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동수가 지향하는 ‘기억에 남는 삶’이 더 높고 더 빠른 삶의 방향과는 거리가 멀다고 믿었다. 읽고 쓰는 것이 일상으로 깃든 삶은 동수에겐 곧 깊고 풍성한 삶의 다른 이름이었다. 동수는 귀국하면서 이런 삶의 전도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만으로 머물던 계획이 우연히 동창회에서 다시 만나게 된 유경과 효영 덕분에 마침내 실천으로 옮길 수 있게 된 것이다. 기막힌 인연이란 이렇게 누군가가 일부러 설계한 듯한 완벽한 시기에 지극히 적은 확률로 탄생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