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여성에게 체화된 불안과 공포는 어디에서 왔을까
10년 전쯤, 대학원에 다니던 때였다. 수업에 늦을 것 같아 서둘러 택시에 올랐다. 기사는 몇 마디 건네더니 갑자기 박카스와 알약 하나를 내밀었다.
“손님들 피곤하시니까 하나씩 드리고 있어요.”
“와, 이런 걸 다 주시네요. 감사합니다.”
급히 학교에 가야 한다는 생각에 정신이 산만했지만, 이상하게도 손이 쉽게 가지 않았다. 남이 건네는 음료수를 함부로 먹지 말라는 엄마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받은 것을 손에 쥔 채 가만히 있었고, 기사는 다시 말을 붙였다.
“안 드세요? 드시고 기운 회복하세요.”
“아, 괜찮아요. 나중에 먹을게요.”
“바로 드시면 좋을 텐데.”
그의 말투는 다소 집요했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굳이 바로 먹으라고 재촉할까? 집에서 학교까지는 택시로 고작 10분 남짓. 한낮이었고, 도로도 한산하지 않았다.
차는 무사히 학교 안으로 들어섰고, 나는 평소처럼 기사에게 인사를 하고 내렸다. 손에는 여전히 박카스와 알약이 들려 있었다. 지금이라면 내리며 차 번호를 눈여겨보고 신고를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당시에는 내가 범죄 대상이 됐을 수 있다는 인식조차 분명히 하지 못했다. 그저 손에 든 음료와 알약이 불길하게 느껴졌을 뿐이다.
당시에도 박카스에 수면제를 타서 손님에게 건네며 강도나 성폭행을 저지른다는 가짜 택시 기사들의 이야기가 한창 떠돌고 있었다. 그러나 대낮이라는 시간,
익숙한 택시라는 공간은 그 이야기를 나와 무관한 세계로 밀어냈고, 그날의 경험은 오랫동안 일상적인 에피소드와 아슬아슬한 위험 사이 어딘가에 걸쳐 있었다.
만약 내가 그때 정말 목이 말라 음료를 망설임 없이 삼켰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엄마의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면, 기사에서 읽은 얘기를 단순히 괴담으로 흘려듣고 잊었다면. 한순간의 선택으로 내 삶은 전혀 다른 궤도로 흘러갔을지 모른다.
여성의 불안은 과장된 것일까
성폭행과 죽음의 위협이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다는 사실을 여전히 믿고 싶지 않다. 하지만 2017~2021년 전체 강력범죄 피해자 중 83.2%가 여성이었으며, 성폭력 범죄의 87.3%도 여성 피해자가 차지했다. 이러한 조사 결과는 내 경험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 대검찰청 범죄동향리포트에서 여성 피해자의 비율은 매해 증가 추세다. Ⓒ대검찰청
범죄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은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찬바람처럼 여성들의 생활 속에 늘 들어와 있다. 사람들이 전형적으로 떠올릴 만한 예를 들면, 혼자 자취하던 내 대학 동기는 밤에 열린 베란다 창틈으로 한 남성이 들어와 성폭행을 당할 뻔했다. 다행히도 적극적으로 몸부림치며 소리를 질러 범인은 달아났다. 만일 가해자가 약품을 썼다면, 소리조차 지를 수 없게 목에 칼을 들이밀었다면…. 경우의 수는 많다.
하지만 실제로 여성들이 느끼는 것들은 ‘사건’으로만 이야기할 수 없다. 지금은 플랫폼 택시 덕분에 걱정을 덜었지만, 전에는 박카스를 권하는 택시가 아니라도 택시를 탈 때는 언제나 긴장했다. 기사가 모르는 길로 들어서면 돈을 더 벌려고 길을 둘러 간다는 생각보다 다른 목적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나중에 조수석 밑에서 한 남자가 더 나왔다는 이야기 등 다양한 택시 괴담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런 긴장은 혼자 쉬고 싶은 장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작년에는 처음으로 혼자서 캠핑을 다녀왔다. 당일에 텐트 앞에 자리를 깔고 책을 읽는데 근처를 지나는 남자들이 나를 1분이 넘도록 빤히 쳐다봤다. 심지어 내가 마주 쳐다보고 있어도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궁금해졌다. 저 시선 속에는 무슨 생각이 들어있을까. 여자가 혼자 캠핑도 하네. 진짜 혼자인가? 텐트 속에 남자가 들어있나? 어떻게 여자가 혼자 캠핑을 하지? 대담하네. 그런 생각들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그들은 여자 혼자 캠핑을 오는 게 대담한 일이 될 수밖에 없는 사회에 대해서는 생각이 미치지 않았을 것이고, 그런 시선 자체가 상대 여성에게 위협으로 다가간다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 그날 밤 나는 휴대폰 긴급 신고를 설정한 뒤 휴대폰을 손에 쥐고, 호신용으로 가져간 면도칼을 머리맡에 두고 잤다.
편히 쉬어야 할 집안에서도 긴장은 숨 쉬듯이 함께했다. 혼자 빌라에서 자취할 때는 술에 취해 새벽에 우리 집 비밀번호를 누르는 윗집 대학생 때문에 공포에 떨었다. 범인이 윗집이라는 것을 알기까지, 퇴근해서 방에 돌아와보면 물건 위치가 퇴근 전과 미묘하게 다른 것 같은 기분에 머리칼이 바짝 곤두섰다.
혼자 있을 때만 불안을 느끼는 것도 아니었다. 여성인 동거인과 함께 새집을 구했을 때는 의뭉스러워 보이는 남자 집주인 때문에 셀로판지를 이용해 집안에 카메라가 있는지 검사했고, 택배를 받을 때는 종종 남자 이름을 썼다.
이렇게 하루하루 밖에서 이동할 때, 남성의 시선을 마주할 때, 그리고 가장 편안해야 할 집에서조차 느끼는 미묘한 긴장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 것일까?
지난 9월 일본에서 발생한 여성 피해 관련 교제살인 사건은 여성에게 실제로 닥칠 수 있는 극단적 위험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그러나 남성의 여성 살해 뉴스를 반복적으로 접하면서도 이를 구조적으로 바라보고 바로잡으려는 목소리에, 그리고 여성의 일상 속 공포감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은 한정되어 있다.
특히 여성이 남성으로 인해 느끼는 불안을 얘기할 때, “모든 남자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만든다”라며 불편해하는 남성을 마주하는 일은 흔하다. 많은 남성들이 ‘대다수의 문제 없는 남자들이 늘 손해를 본다’고 억울함을 표현하며 페미니즘에 대해 방어적인 자세를 취한다. 온라인의 글이나 댓글을 보다 보면, 상당수의 남성들이 ‘어디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다’는 여성들의 말을 피해의식이나 지겨운 넋두리로 인식하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작가 리베카 솔닛은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에서 이렇게 썼다. “여자들은 늘 강간과 살해를 두려워하며 산다. 때로는 그런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 남자들의 안락함을 보호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더불어 솔닛은 제니 추라는 여성이 트위터에 쓴 말을 인용했다. “물론 모든 남자가 다 여성혐오자나 강간범은 아니다. 그러나 요점은 그게 아니다. 요점은 모든 여자는 다 그런 남자를 두려워하면서 살아간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중요한 것은 모든 남성이 범죄자가 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아니다. 어떤 남성이 범죄자이고 아닌지 미리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내가 박카스를 건넨 기사님을 범죄자라 생각하지 못한 것도 그 상황과 분위기, 기사님의 느낌이 너무나 일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범죄를 저지를지 알 수 없고 내가 언제 어디서 피해를 입을지 모르니 마음 놓을 수 없다는 것. 단순한 이치다. 여성들의 불안이 생존에 대한 위협 그 자체에서 온다는 점을 외면하고 이를 남성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오히려 피해의식에 가까운 태도인지도 모른다.
도로 위에서 거대한 대형화물차 옆을 피하는 것은 상식이다. ... 이는 모든 대형화물차를 ‘잠재적 가해자’로 가정하는 것에 가깝지만, 그 말이 곧 대형화물차의 모든 운전자가 운전이 미숙하거나 악의적으로 난폭운전을 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아니다. ... 당장 내 입장에서는 실제 운전자의 상태나 의도를 알 도리가 없으니까... 잠재적 ‘가해의 가능성’은 누군가에게 내재된 악의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여성도 모든 남성이 가해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문제는 크고 작은 성범죄가 일상적으로 범람하는 가운데, 어떤 남자가 가해자가 될 수 있고 어떤 남자는 그렇지 않은지 구분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 권성민, <<커뮤니티에 입장하셨습니다>>, 돌고래, 2021, 226-227쪽.
성폭력의 연결고리가 되는 젠더 질서
여성 대상 범죄와 관련해 또 한 가지 간과하기 쉬운 것이 있다. 이러한 범죄는 단순히 개별 사건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성 역할 고정관념과 권력 불균형에서 이어지는 연속선 위에서 일어난다. 그래서 여성에 대한 강력범죄와 가벼운 성범죄 사이의 거리는 사실 그리 멀지 않다. 여성학 연구자 정희진 역시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에서 인신매매나 성폭행, 교제살인 같은 중대한 범죄가 ‘고정된 성 역할 개념’에서 비롯된다는 점에 초점을 맞춘다. “성폭력은 남성과 여성의 권력관계에서 남성과 여성의 상호 작용, 행위성(agency)과 관련된 범죄”다.
이 구조는 내 사소한 경험들 속에도 뿌리내리고 있다. 다시 택시를 예로 들면, 예전에 나는 항상 택시 기사 아저씨들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 택시업 종사자에 대한 편견을 조장하려는 게 아니라는 점은 밝혀두고 싶다. 좋은 기사분들도 많았고, 때로는 닮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존경스러운 분도 계셨다. 요즘은 택시 어플의 평가 때문에 손님에게 말을 거는 일도 많지 않다.
그러나 이전까지 남성 기사들은 대체로 내게 함부로 사담을 늘어놓았다. 개인사를 캐묻거나 성적인 얘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여자 손님들이 치마를 입고 타면 타고 내릴 때마다 속옷을 그렇게 많이 보여준다는 얘기, 아줌마들이 일부러 멀리 택시를 타고 가서 돈이 없다며 유혹한다는 얘기 같은 것들이었다.
별것 아닌 일에 지적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 번은 공손히 ‘저기서 내릴게요’라고 했는데 ‘내릴게요’라는 말이 예의가 없다며 ‘내려주세요’ ‘내려주시겠어요’라고 하라는 핀잔도 들은 적이 있다. 내 나이 서른 중반의 일이다. 대학생 때까지는 내가 ‘안경 쓴 여자’라 태우면 종일 재수가 없다는 이유로 나를 그냥 지나치는 택시가 많았는데, 그나마 그런 일은 없어졌으니 세상이 나아진 거라며 자신을 위안했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남자인 친구에게 듣고 알게 됐다. 기사들이 남자 손님에게는 보통 아무 얘기도 걸지 않는다는 것을. 여자들이라면 모두 겪어본 이 '택시 스트레스'에 대해 그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나는 같은 지역·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동갑 친구와 그렇게도 다른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충격을 받았다.
많은 경우 택시 안에서 나는 서비스 제공자와 서비스 이용자의 관계가 아닌 ‘남성과 여성의 관계도’ 위에 놓여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 관계도에는 불균형한 권력관계와 성 역할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여성에 대한 편견이 반영되어 있다.
내게 훈계를 했던 기사에게 나는 남자 어른에게 공손히 대해야 하는 젊은 여자였고, 성관계를 요구한 여성들에 대해 얘기했던 기사에게는 성적인 얘기를 하며 만족감을 얻을 만한 쉬운 대상이었을 것이다. 안경 낀 나를 승차 거부했던 기사들은 단순히 미신을 믿었을 뿐이었을지라도, 그 미신 속에는 ‘여자는 남자보다 똑똑하고 잘나서는 안 된다’는 편견이 들어있었다. 내가 택시를 이용할 때 겪어온 불편과 불안은 단지 개인적 경험이거나 택시 이용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젠더 구조 속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들의 일부를 보여준다. 교제폭력과 살인 역시 ‘감히’ 남자를 거부한 여자에게 벌어지는 응징이라는 점이 이것을 뒷받침한다.
젠더 구조가 만들어내는 연속선은 사회 전체를 감싸며 이어져 있다. 정희진 작가는 고정된 성 역할이 성별화된 자원을 기반으로 한 이성애와 이성애 관계의 제도화(가족)로 이어지고, 이것이 성매매로, 성매매가 성폭력으로, 성폭력이 인신매매로 이어지는 연속선을 만든다고 설명한다. 뉴스에서나 보는 일로 여기기 쉬운 여성혐오 범죄나 중대 성범죄의 뿌리는 공기처럼 포진된 일상 속 편견에 닿아있는 것이다.
새삼 의아해지곤 한다. 세계의 반이 여성인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일생 고통을 겪는 문제에 대해 공감대를 형성하기는 왜 이렇게 어려운 것일까? 우리는 여성 대상 범죄 소식을 접할 때마다 사건의 본질에 대해서는 오히려 조금씩 무뎌져 가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가장 눈여겨봐야 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일 것이다. 체화되어버린 불안과 공포, 너무도 단단하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 먼지 같은 의식들 간의 연결고리 말이다. 여성이 일상적으로 겪는 수많은 작은 사건과 차별,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불안과 고민은 ‘살아남는 일’에 직결되어 있다.
누군가는 이런 이야기들을 듣는 것이 지겹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궁금해해야 한다. 지겨워질 만큼 이야기되는데도 왜 여성들에게는 매일 같은 위험과 두려움이 이어지는지, 왜 현실은 달라지지 않는지. 내가 10년 전 택시 안에서 손에 받아든 박카스와 알약, 그리고 모호한 위협의 순간은 오늘도 나와 당신의 주변을 스쳐 지나간다.
[필자 소개] 민바람. 자신의 경험으로 사회 구조를 비추는 글을 쓴다. 퀴어, 여성, 신경다양성, 빈곤, 지역 문제의 교차성 탐구에 관심이 많다. 『나는 ADHD 노동자입니다』(2025년 재출간), 『낱말의 장면들』(2023) 등을 출간 후, 퀴어 소설을 써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