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마을 두 바퀴

자발적 고독, 설레는 점심시간

by 리베준


11월


일 년 중 가장 기다려온 달이다. 산책하기 가장 좋은, 걸어도 땀이 나지 않아 걷기 좋은 최적의 온도.

걷고 나서 사무실에 들어와 또 업무를 봐야 하니 땀 안 나고 걸을 수 있는 계절이 이렇게 소중할 수가 없다.

좋은 계절은 기다려주지 않고 묵묵히 흘러가니, 좋아하는 이 시기를 놓쳐서는 안 된다.

더 바삐, 열심히 걸어야 할 때다. 초겨울로 진입하기 전 피부에 닿는 상쾌함과 청량함이 좋고 하늘 또한 청완하다.

아직은 코끝이 시리지 않는 시기.


점심시간 5분 전.

밥을 기다리는 설렘보다 산책의 설렘으로 즐거운 마음에 발을 총총거린다.

점신시 간에 하는 산책은 워킹맘인 나에게 하루 중 온전히 나 혼자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회사에서 주어진 일을 하며, 퇴근 후 엄마로의 역할을 하고 쉼 없이 바쁜 하루를 보내는 속에

나를 위해 잠깐 멈출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이런 귀한 시간이기에, 점심시간을 매일 기다리는 기쁨으로 오전을 보내곤 한다.






남자직원들에 둘러싸여 있는 이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얻어진 능력이라면 거의 씹지 않고 넘길 수준으로 밥을 빨리 먹을 수 있는 것이다. 초창기 입사 시절 팀마다의 밥 먹는 문화는 다 달랐다.

내가 속한 팀은 차례로 테이블에 앉아 마지막 앉는 사람을 기다리며

"맛있게 드세요. "

라는 멘트와 함께 숟가락을 들었다. 먹은 사람은 제발 일어나 가주면 좋겠지만, 부담스럽게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 단체로 일어나야 한다. 소속감이 아주 제대로인 팀이었다. 이곳에서 개인플레이는 조금도 허용되지 않았다. 밥 먹는 속도가 느려 제일 늦게 먹었고, 다 먹을 때까지 고개를 숙이거나 허공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보며 따라오는 부담감에 점점 먹는 속도의 레벨을 올려갔고, 어느 남자직원 못지않게 빨라졌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과 함께 식사를 마칠 수 있게 되었다. 빨리 먹다 보니 점심시간도 늘 여유롭였다.


다행히도 지금 속해 있는 팀은 자유로운 분위기다. 앉은 사람부터 먹고 일어나 사무실로 간다. 20년 차 직장인이지만, 아직도 아무 말 없이 밥만 빨리 먹는 이 점심시간은 그다지 편하지 않다. 또한 다시 사무실 가면 각자의 자리에서 쉬는 적막한 이 분위기 역시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

자리에 앉아 폰으로 유튜브를 보거나 의자를 제치고 잠을 잔다. 누군가는 컴퓨터로 쇼핑을 하고, 누군가는 또 쉬지 않고 일을 한다. 각자의 쉬는 방식이 있겠지만, 사무실에 있고 싶지는 않았다.




잠깐 쉴 수 있는 시간을 이렇게 보낼 수는 없었다. 동료들과 카페 가기, 다 같이 산책하며 수다 떨기로 긴 시간 나의 점심시간을 버텨왔지만, 몇 년 전, 지금 있는 공장으로 팀이 바뀌면서 오게 되었고, 즐거운 마을 산책이 시작되었다.


다니는 회사는 시골의 작은 마을을 둘러싼 곳에 있다. 농사짓고 집집마다 마당에 개가 있는 그런 시골동네.

사실, 외근도 없고 출장도 없는 업무다 보니, 사무실에 내내 앉아 컴퓨터로 일만 해야 하느라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하면, 평일 내내 내 바깥세상은 어떻게 흘러가는지 잘 모를 때가 많다.

각각의 공장으로 이동하며, 업무 처리를 넘길 때 콧바람 쐬며 다녔지만, 얼마 전부터 모든 일이 전산으로 바뀌며 정말 사무실에 박혀 일만 하게 되었다. 이제는 작은 이동도 할 수 없었다.

휴게실도 따로 없는 곳이다 보니, 사무실에서만 쉬어야만 했고, 디스크 환자인 데다 치명적으로 골골거리는 설늙은이 아줌마는 걷기가 절실했다.


처음에는 동료와 열심히 걸었고, 정말 운동의 목적으로 열심히 걸었더니 몸이 가벼워지며 살도 저절로 빠지게 되었다. 먹을 것 다 먹고 점심에 걷기만 열심히 했을 뿐인데 몇 달 걸었다고 그렇게 안 빠지던 살이 빠지는 것이 놀라웠다. 다시 한번 경험이란 것이 중요하구나 실감을 했다.

몸이 가벼워지는 것이 느껴지니 그 경험은 동기가 되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점심시간에 나와 꾸준히 걷는 사람이 되었다.


같이 걷던 동료에게 혼자 걷겠다고 이야기하며 혼자 건 지 1년이 되어 간다. 이제는 운동의 느낌보다는

천천히 산책하며 걷고 있다.

바쁘고 지치는 이 일상 속에 혼자 있는 시간이 없었다. 바쁜 하루 중 잠깐이라도 나를 돌아보고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흘러가는 데로 정신없이 살다 보면 언제나 금방 일 년, 일 년 흘러가 있었다. 어쩌면 워킹맘들은 퇴근하면 더 바쁠지도 모른다. 일에 치여있다가 퇴근하면 또다시 집안일과 육아로 정신없이 보내다 아이와 같이 잠드는 일상이 아닐까.



사무실에서 듣고 싶지 않아도 들리는 여러 음성들, 보고 싶지 않아도 볼 수밖에 없는 인물들, 내 주변을 둘러싸고 종일 앉아있는 사람들, 피로한 일상 속에 쉼이 필요했다.

한 직장에 오래 있다 보니 사람들에 대한 피로도가 누적되어 있는 듯하다. 좋은 사람들도 있는 반면, 싫은 사람들도 많으니까.

일처리 중 오전에 받은 스트레스로 인해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힐 때에도 산책을 통해 나의 감정을 자각하고 이유를 생각해 보며 마음을 돌본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터벅터벅 홀로 하는 이 즐거운 발걸음으로 정말 딱 동네 두 바퀴만 신나게 걷다 보면 나도 모르게 부정적인 감정들은 다 부서지고 한층 홀가분해짐을 느낄 수 있다. 산책을 하며 혼자 걷게 되니 사색을 하게 되고, 잠깐 멈추어 생각해 보게 된다. 또 계절마다 곳곳에 자연으로 즐거움들은 그득했고. 일상들을 관찰하며 소소한 재미도 발견하게 되었다. 하루 중 우리는 멈추며 그 지점을 관찰하는 시간들이 얼마나 있을까? 대부분 그냥 바삐 흘러가지 않을까. 생각해야 한다는 사실도 모른 채 그냥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당신이 생각한 대로 한다.

그러지 않으면
당신은 머지않아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프랑스 소설가 폴 부르제




사실 지금의 설레던 11월은 사실 후회와 우울함의 달이였다. 매년마다의 일 년간의 후회가 짙게 배어있던 11월.

11월이 다가오면 늘 알 수 없는 우울감이 밀려왔다.

그 우울함을 설레는 기쁨으로 바꿔준 것이 산책이다. 마음을 돌보게 되었고, 작은 것에 감사하게 되었으며, 행복은 가까이에 바로 느끼는 지금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기분 좋은 바람과 햇살만으로도 충분했다. 아이들을 떠올리면 보고 싶은 마음이 흘러넘쳤다. 앞으로의 나날들이 기대가 되었다. 하루를 충실히 사니 더는 연말이 되었다고 우울해지지 않았다.

하루의 일상 그 중간의 틈 사이 아주 적은 시간이지만 온전히 혼자 있는 이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





마음을 들여 애쓴 시간은 허무하게 흩어지지 않아요. 특히 나를 보살피기 위해 보는 시간은 절대 증발되지 않습니다.

검은 감정 -설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