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괜찮아
괜찮다는 엄마의 말을 곧이 곧대로 듣지 않기로 했다.
"엄마, 아파?"
"괜찮다."
꽤 아프다는 뜻이다.
"엄마, 아파?"
"......참을 만 하다. 괜찮다."
엄청 아프다는 뜻이다.
정말 괜찮으면 엄마는 역정을 내며 '아무렇지도 않은데 얘가 왜 자꾸 묻냐.' 고 짜증을 낸다. 차분하게 괜찮다고 하는건 일반인 기준으로 꽤 아프다는 뜻이고, 대답 전에 약간 뜸을 들이며 '참을 만하다.' 라고 까지 덧붙인다면 엄청난 통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뜻이다.
5월 내 생일에 고향집에 내려가 엄마에게 미역국과 잡채를 한 상 얻어먹고 왔으니, 꼭 한 달만에 엄마를 다시 만난 셈이다. KTX기차에서 내려 플랫폼 위를 걸어오는 엄마와 나의 사이가 좁혀진다. 구부정하게 등을 말고 고개를 떨군 채 위태롭게 걷다가 나를 발견하고 마침내 들어올린 엄마의 얼굴에는 병색이 완연했다. 놀란 마음을 감추고 아무렇지 않게 묻는다.
"엄마, 3시간 넘게 기차 타느라 고생했네. 지겹지 않았어?"
"아니다, 괜찮다."
"흉수가 계속 생긴다며, 아프지는 않아?"
"아니다, 괜찮다."
엄마는 바로 일주일 전 고향지역 종합병원에서 왼쪽 가슴과 폐에 차있는 물을 1.5리터나 빼는 시술을 받았다. 가슴에서 1.5리터 콜라 페트병의 양 만큼 물을 빼내다니. 복수는 많이 들어봤지만 흉수라는 단어는 처음 들어본다. 흉수의 원인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폐를 둘러싸고 있는 흉막(늑막)에 염증이 생긴 '늑막염' 의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원래 폐에서 시작된 암이 폐를 뚫고 나가 흉막(늑막)까지 번진 '폐암의 늑막전이' 가 일어난 경우이다. 00염으로 끝나는 병명이길 바랬건만 엄마는 후자로 보인다는 것이 고향지역 종합병원의 소견이었다. 별 거 아닐 텐데 서울 병원에 예약을 잡고, 왜들 호들갑이냐던 엄마도 '폐암' 이라는 말이 의사 입에서 나오자 저항없이 서울행 KTX를 탔다.
2월에 새 집으로 이사를 하고 엄마, 아빠를 한번 모셔야지 했는데 어느새 6월 말이 되어버렸다. 오매불망 집들이 초대를 기다리던 엄마는 뜻밖의 병원 진료를 위해 갑자기 둘째 딸 집을 찾게 되었다. 밤 기차로 이동한터라 집에 도착하자마자 잘 준비를 했다. 안방에 아이들과 남편을 재우고, 아이들 방에 엄마와 둘이 나란히 누웠다. 엄마는 밤새 바로 누워있지를 못하셨다. 베게 두 개를 높이 쌓아 거의 앉은 자세로 잠을 청했는데도 금방 다시 깨어 한참을 침대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가 다시 옆으로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 앉았다가를 반복하셨다. 배를 쓸기도 하고 손을 뒤로 뻗어 등을 쓸기도 했다. 나는 실눈을 뜨고 엄마를 지켜보면서 온라인 폐암 환우 카페 글 중에서 '폐암의 늑막전이로 인한 흉수' 로 인한 불편감을 토로하던 환우의 증상과 엄마의 모습을 대조해보았다. 우리는 내일 병원에서 무슨 이야기를 들을까.
진료실에 들어서자 입을 떠억 벌리고 눈썹을 모은 채 모니터를 바라보는 의사 선생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의사 선생님은 모니터를 한번, 엄마를 한번, 번갈아 쳐다보면서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 숨이 많이 차시죠? 많이?"
"네, 좀 숨이 가쁘긴한데, 괜찮아요."
아무 것도 모르는 내가 봐도 엄마의 엑스레이는 괜찮지 않았다. 엑스레이 사진이란게 원래 검정바탕에 흰색 해골이 보여야되는 것 아닌가. 헌데 엄마의 엑스레이 사진 상 왼쪽 가슴은 온통 하얀 구름으로 뒤덮여 있어 갈비뼈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왼쪽 가슴 전체에 차오른 물이 엄마의 장기를 누르고 등과 흉부를 팽창시켜 참을 수 없는 통증을 유발하고 있었다. 엄마가 밤새 누울 수 없던 것은 왼쪽 가슴을 점령한 흉수 때문이었다.
외래진료 차 방문했으나 당일 입원이 결정되었고 '긴급으로' 흉수 배액과 조직검사를 위한 흉강경 수술이 진행되었다. 옆구리 쪽 가슴에 구멍을 뚫어 폐에 있는 혹의 조직을 조금 뜯어낸다. 이 때 확보한 조직을 분석하여 엄마 폐에 있는 혹이 암인지 여부를 가리고, 폐암이라면 어떤 종류의 폐암인지 상세히 밝혀낸다. 조직검사 결과에 따라 향후 치료 방향이 결정된다.
당시 엄마의 가장 시급한 문제는 끊임없이 생성되는 흉수였기에 가슴에 뚫어놓은 구멍으로 호스를 넣어 가슴의 물을 빼내는 흉수 배액 시술도 동시에 진행되었다. 바로 일주일 전 지방병원에서 1.5리터의 흉수를 배액했음에도 불구하고, 서울 병원에서 2.5리터의 흉수를 추가로 배액했다. 수술방 간호사 선생님이 배액병을 몇 번이나 비웠다며 혀를 내둘렀다.
조직검사는 가수면 상태로 진행된다. 전신마취가 아니라 위내시경을 할 때 처럼 가수면 상태에서 진정제를 맞으며 진행되기에 검사 중에 의료진과 환자가 대화를 하기도 한단다. 엄마도 조직검사 중에 '아이고, 아파라. 왜 자꾸 쿡쿡 찌르노. 그만 찔러라!' 라고 비몽사몽 간에 소리 지른 기억이 난다고 했다. 흐릿하게라도 의식이 깨어있는 중에 생살을 뚫고 장기를 쑤신다니.
수술실에서 나온 엄마는 저녁시간 내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휠체어를 타고 로비로 내려가 오후 내내 엄마를 기다린 남동생과 마주했을 때도 제대로 눈을 뜨지 못했다. 완전한 밤이 되서야 가수면상태를 벗어나게 되었는데 그 때 부터 본격적으로 통증이 몰려왔다. 생살에 구멍을 뚫고 호스를 연결해놓았으니 아프지 않을리 없다.
"엄마, 아프나?"
"응, 괜찮다."
"엄마, 진통제 놔달라고 할까?"
"주사 맞을 정도까지는 아닌거 같은데. 괜찮은데."
"엄마, 움직이지도 못하네. 많이 아프구만 무슨. 진통제 놔달라고 할게. 일단 맞아봐."
간호사 선생님이 들어와서 진통제를 놔주셨고 30분 정도 지나자 엄마는 편안하게 잠에 들었다. 새벽이 되어 엄마가 깨어나 부스럭댔다.
"엄마, 또 아프나?"
"이야, 그 주사 진짜 신기하네. 주사 맞으니까 진짜 살 것 같더니, 이제 또 살살 아프기 시작한다."
"엄마, 진통제 또 놔달라고 할게."
"응? 약을 계속 맞아도 되나?"
"아프면 당연히 진통제를 맞아야지."
간호사 선생님이 두번째 진통제를 놔주셨고 엄마는 금새 또 잠에 들었다. 간호사 선생님께 물어보니 4시간 간격으로 진통제 주사를 맞을 수 있다고 했다. 아이들 해열제도 4시간 간격으로 먹을 수 있는데, 엄마 진통제 주사도 똑같네 따위의 생각을 하며 나도 눈을 붙였다.
4시간 마다 진통제를 맞으며 크나큰 평안을 얻으면서도 엄마는 무슨 이유에선지 진통제에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앓아야 낫는다는 옛날 사람 특유의 사고를 가진데다, 엄마는 뭐든지 그냥 참는 것이 습관화 되어 자신을힘들게 하는 것을 통제하거나, 인위적으로 불편감을 완화해 본 경험이 전무한 사람이었다.
"엄마 이제는 참으면 안돼.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약먹고 주사 맞고 통증 조절해서 항상 편안한 컨디션을 유지하는 게 엄청 중요해. 사람이 통증을 느끼면 지치고 기력이 빠져. 기력 빠지면 항암치료 못 받아. 항암치료 받으려면 항상 체력을 길러놓고 컨디션 관리해야돼. 엄마가 지금까지 살던대로 아픈 거 억지로 참고, 견디고, 버티면 기력이 쇠해. 엄마는 암환자야. 이제는 참으면 어차피 엄마 몸이 예전처럼은 못 버텨준다고. 작은 통증도 참지말고 컨디션 관리 해야해."
엄마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젠장, 항암치료고 뭐고, 얼마나 더 살지도 모르는데. 이 판국에 참긴 왜 참아. 누구 좋으라고 참아. 라는 말이 뒤따랐지만 입 밖으로 뱉지는 않았다.
낮 시간은 진통제 주사 없이 보냈지만 밤이 되면 통증이 심해졌다. 4시간 마다 알람을 맞추어두고 간호사 선생님께 진통제 주사를 요청했다. 딸 덕분에 편안하게 밤을 보낸다고 엄마가 인사를 했다. 수술환자에게 진통제 정도는 당연한 건데 엄마는 당연한 것을 누리지 못하고 살았다.
병원 지하 편의점에서 500ml 생수를 2병 사서 입원 기간 동안 정수기 물을 채워넣으며 엄마와 나 각 1병씩 개인물병으로 사용했다. 생수병을 볼 때 마다 이런 병 5개에 해당하는 흉수가 엄마 가슴에서 나왔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조직검사 이 후에도 엄마의 옆구리에 매달린 흉관을 통해 매일 200-300ml 정도의 흉수가 나왔다. 흉수가 해결되지 않아 각종 검사 결과가 나올 때 까지 입원을 유지할 수 밖에 없었다.
벌써 7월, 병원에서 새 달을 맞았다. 우리 부모님은 촌스럽게 음력 생일을 챙기신다. 덕분에 우리 삼남매는 가짜 생일을 쇠고 있다. 누가 생일을 물어보면 길게 설명하는 것이 번거로워서 언젠가부터 주민등록증에 쓰여진 날짜로 '사회적 생일' 로 삼아온 것이다. 그런데 입원 기간 중 언니의 '진짜 생일' 이 있었다.
"오늘이 너거 언니 진짜 생일이데이."
"응? 언니 생일 6월이잖아. 이제 7월인데?"
"너거가 챙기는 가짜 생일 말고. 오늘이 진짜 너거 언니 음력 생일이란 말이다. 내 니한테 20만원 줄테니, 너거 언니한테 카카오톡으로 케이크 하나 보내고. 저번에 아빠 생일 때 니가 사온 거, 아이스크림 케이크. 그걸로 보내고. 닭도 한마리 보내고. 저녁 안해도 되게. 애들 먹게 통닭도 보내고. 현금도 10만원 보내라."
"갑자기?"
"그래. 갑자기 챙겨주야겠다니까. 니는 니 생일 때 마다 내려오면 내가 국도 끓여주고 잡채도 해주잖아. 너거 언니는 가까이 사니까 오히려 못 챙겨줬다. 시집가고나서는 한번을 못 챙겨줬다. 평일에 생일이 끼면 일하느라 못 챙기잖아."
"알았어. 엄마, 여기 카톡 선물에 음성메세지도 남길 수 있어. 큰 딸 생일 축하한다고 한 마디 해."
"큰 딸~ 생일 축하해~."
"사랑한다고도 해야지. 거 하는 김에."
"큰 딸 싸랑해."
"전송완료. 아이스크림 케이크, 치킨 쿠폰, 현금 10만원에 음성메세지 카드까지 단디 잘 보냈어."
"응, 그래. 잘했다. 니미럴, 며느리가 둘도 아니고 셋도 아니고 달랑 하난데. 하나 있는 며느리 생일을 매년 까먹는게 말이 되나."
엄마는 참지 않고 있었다. 언니가 결혼한 이래로 3년 연속으로 언니 시댁에서 언니 생일을 잊은 일이 있다. 한번이야 실수지만 어떻게 계속 잊을 수가 있냐고 친정에 와서 언니가 서러움을 토로하곤 했다. 그 때 마다 엄마는 식구 없는 집이라 오히려 새 사람의 날짜를 기억하는게 익숙하지 않으실거라고, 생일이 뭐가 중하다고 서러워하느냐고, 우리 식구들도 서로 생일 자주 까먹지 않느냐고 괜찮다고 언니를 달랬다. 항상 점잖은 시어른들 만나서 언니가 복이 많다고 했었다.
그런데 참지 않는 연습을 하는 중에 타이밍 상 예상치 못한 곳으로 불똥이 튀어버렸다. 엄마는 통증을 참지 않고 진통제를 챙겨 맞듯, 자신이 하고 싶은 말, 하고 싶은 것들을 조금씩 챙기기 시작했다. 사돈 욕을 하며 대놓고 딸 편을 들질 않나. 심지어 경상도 모녀가 사랑한다는 말을 입에 올렸다.
잘한다. 잘한다. 잘한다. 죽는 날까지 참기만 하고 간다면, 보는 마음도 더 억울할텐데. 우리 엄마는 이제 더이상 참지 않는다. 이제는 다 괜찮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