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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책을 읽다

토마스 만 <선택받은 사람>

책 리뷰

by morgen

<선택받은 사람> 토마스 만 지음, 김현진 옮김. 2020. (주)나남


죄와 은총의 기이한 서사, 인간의 추함을 품은 구원 이야기

토마스 만의 후기 작품인 <선택받은 사람>은 중세 전설 그레고리우스(St. Gregorius)를 바탕으로 한 ‘근친상간과 구원’이라는 테마를 품고 있다.
이야기는 단순한 금기 파괴의 전설이 아니다. 인간의 어둠을 끌어안아 기어이 빛으로 데려가려는 신의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우화적·풍자적·신학적 소설이다. 토마스 만의 말년 문체가 보여주는 유머, 거리두기, 경건함이 공존하는 독특한 리듬을 가진다. 중세 풍의 장중한 문체를 일부러 패러디하면서도 진지한 구원 서사를 유지하는 오묘한 어투는, 마치 신학적 농담을 하는 성자를 보는 듯하다.


죄의 심연에서 선택된 인간

<선택받은 사람>은 본질적으로 ‘죄지은 인간은 어떻게 구원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레고리우스는 태어날 때부터 죄의 결정체로 태어난 인물이다. 출생 자체가 금기이며, 그의 삶은 스스로 알지 못한 채 또다시 금기를 반복하는 아이러니로 이어진다. 옮기기조차 망설여지는 금기의 결과이다.
그레고리우스(그리고르스/그레고르)는 죄인 중의 죄인이지만, 그렇기에 신이 선택한 사람이다. 토마스 만은 주인공을 향해 연민, 유머, 경탄을 동시에 보낸다.


이야기는 누가 이끌어가는가?

'나'라고 말하며 노트커의 책상 앞에 앉아서 이야기의 정령을 인물로 체현하는 당신은 대체 누구인가? 나는 아일랜드 사람 클레멘스라는 베네딕트회 사제로서, 아일랜드에 있는 나의 집인 클론마크노이스 수도원 원장 킬리안의 사도요 형제 대우를 받는 객으로서 이곳을 방문했다. 12쪽.

소설의 화자는 클레멘스라는 베네딕트회 사제다. 클레멘스는 어떤 의미에서 선택받은 사람이기도 하다. "선택받은 자"는 주로 그레고리우스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과 판단력에 따라 오래된 이야기를 다시 들려주는 베네딕토회 수도사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소설 읽을 때 소설을 이끌어가는 화자 "나"를 따라가며 이야기를 듣게 되므로 클레멘스가 "선택받은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화자 "나"는 작가가 만들고 이끌고 있지만, 이야기는 화자가 이끈다. 우리는 가끔 화자 뒤에 숨은 작가를 발견할 때도 있다.


중세 전설을 재창조하는 토마스 만의 문체

만은 <요셉과 그 형제들>에서 이미 성서·신화 재해석의 대가임을 증명했다. <요셉과 그 형제들>(2001, 살림출판사)은 6권의 대하소설인데 완독을 하지는 못했다. 어느 부분은 정독을, 어느 부분은 휘리릭 책장을 넘기며 읽었는데, 내용이 거의 구약성경과 같기 때문에 좀 지루했었기 때문이다.

<선택받은 사람>에서는 신화 재해석이 정교해진다. '전설을 옮겨 적은 것'이란 선입견을 떠나 재미있다. 문체는 장중한 듯하지만 사실은 장난기 많고, 경건해 보이지만 끊임없이 스스로를 패러디한다. 단권이기 때문에 정독을 하기에 좋다.

옛날 어느 군주가 있었다네. 이름은 그리말트.

실신하여 쓰러졌도다.

분명 두 아이를 남기었으나

아, 그들은 한 쌍의 죄인이었도다!

지금부터 나는 은총에 관한 믿기 힘든 이야기를 할 것이며, 본이 되도록 그것을 제대로 만들어 보여 줄 것이다. 19쪽

서두의 이러한 문장은 토마스 만이 중세 연대기 작가의 어투를 흉내내는 동시에 ‘이 소설은 전적으로 내 해석'이라며 독자에게 찡긋 윙크한다. 토마스 만은 나와 동시대 사람이 아니고, 같은 지역 사람도 아니다. 그의 글은 언제나 나와 다른 문화권의 이야기, 다른 시대의 이야기이다. 그런데도 문체가 그가 활동하던 시대의 문체가 아니라, 그에게도 이미 먼 시대가 되어버린 중세의 문체인 것은 구분이 된다.

"그레고리우스의 전설"같은 이야기는 전혀 듣도보도 못한 먼 나라의 나에게 토마스 만은 "클레멘스"라는 화자를 통하여 먼 옛이야기를 들려준다. 무겁고 어두운 이야기를 어찌 이리 재미있게 풀어놓았는지! 하룻 밤새에 다 읽었다. <선택받은 사람>을 단숨에 읽을 수 있는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토마스 만과 친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여러 번 뒤적거리던, 두 번정도 정독을 한 만과 헤세의 책들.


죄의 반복과 운명의 순환

그레고리우스는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모른 채 살아가다가, 무지한 상태에서 자신의 어머니와 다시 결혼하게 되는 끔찍한 운명에 빠진다. 만은 이 끔찍함을 잔혹한 비극으로 그리기보다, 인간이 알지 못한 채 죄를 반복하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종교적 아이러니로 묘사한다.

나는 자연에게 묻고 답을 구하고싶다. 많은 사람들이 어머니라 부르고 여신이라 부르는 자연은 그러한 비난에 대해, 그 청년이 그런 행동을 한 것은 그의 무지의 소치이지 자기 탓이 아니라고 대답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여신이 거짓말을 한 것이다. 왜냐하면 무지를 방패로 삼아서 그런 짓을 한 것은 바로 자연이기 때문이다. 254쪽.

이 구절은 만의 인간적 성찰을 대표한다. 죄의 본질은 '의도'보다 '상황'에 있다. 그레고리우스는 악인이라기보다 무지한 인간의 전형이다.


고독의 바위 위에서: 속죄의 17년

가장 강렬한 장면은 그레고리우스가 자신의 죄를 깨달은 뒤, 스스로 자신을 바위섬에 가두어 17년 동안 물과 음식 없이 기도만 드리는 장면이다. 만은 이 장면을 괴이함과 신성함이 공존하는 이미지로 그린다.

상상할 수도 없고 세상의 끝에 이른거나 다름없는 죄악 속에 또다시 빠져 버렸습니다. 제가 편력하며 얻고자 하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혹독한 체류지입니다. 그곳에서 제 몸을 고통에 맡겨 죽음에 이르기까지 참회해서 신의 은총을 구했으면 합니다. 296쪽.

물과 음식 없이 17년을 견뎠다는 말에는 부연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사실은 바위의 약간 패인 홈에 고인 하얀 액체, 신께서 마련해주셨다고 믿는 젖을 먹으며 견뎌냈다. 그것이 다만 음식 역할만 한 것은 아니다. 신을 향한 그리움이 그레고리우스를 살게 한 것이다.

그가 극단적인 가혹한 회개를 통해 부모와 자신의 죄를 씻게되면, 신께서는 그를 위해 오히려 뭔가 은총 가득한 일을 베풀어 주실 계획이시라는 예감이다. 307쪽.

17년이라는 시간은 성자의 고행이라기보다 인간을 벼리고 녹이고 다시 빚는 시간, 만의 표현대로라면 "신의 실험실"같은 시간이다.


구원 : 인간의 참혹한 이야기를 신이 품는 방식

토마스 만은 앞으로 전할 전설의 결말, 새 교황의 선포, 마침내 구원받은 자가 영원한 도시에 입성할 때 나타나는 기적과 신의 은총의 증거로 소설을 시작한다.

책의 첫 장 "누가 종을 울리는가"를 시작하는 글은 독자들의 귀에도 종소리가 쟁쟁하게 울려퍼지는 느낌이 들 정도로 "종소리"에 대한 장황한 설명을 한다. 말많은 선생이 생략해도 될 것같은 설명을 세세하게 늘어놓는 것처럼 책의 화자는 "종소리"를 알리는 데 집중한다. 그 종소리는 책의 마지막 부분에 죄많은 그레고리우스가 교황이 되는 장면을 위해 앞선 설명이었다.

"종소리, 도시의 하늘에, 온 도시 위에, 여운으로 가득 찬 공중에 울려퍼지는 노도와 같은 종소리! --- 높은 곳에서도 종이 울리며 낮은 곳에서도 종이 울린다. --- 서로 멀리 떨어져있고 가까이 함께 있는 모든 것이 서로 소용돌이쳐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어 울려 퍼지듯, --- 왜냐면 종이란 종은 모두 성대한 제전과 숭고한 입성식을 위해 울리고 있기 때문이다. 9-10쪽


<선택받은 사람>은 신의 자비가 현대적 감수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논리적이고 무자비하며 동시에 무한한 것임을 보여준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끔찍한 죄를 지은 사람이 가장 거룩한 자리에 오른다.

하늘은 치욕의 자식이며 자기 어머니의 남편이 되고 자기 할아버지의 사위, 자기 아버지의 매부가 된, 또 자기 아이들의 혐오스러운 형제가 된 남자를 성 베드로 성당의 보좌에 앉게 했으며, 또한 나는 이해하건대, 하늘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일에 깊이 감동되었고 그 감동이 바뀌어 일곱 교구의 종이라는 종이 모두 저절로 힘차게 흔들리며 울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373쪽

그레고리우스는 마침내 교황으로 등극한다. 만은 이 역설적 순간을 통해 구원은 합리나 정의가 아니라 은총의 문제라고 말한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신학적 우화

<선택받은 사람>은 독자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죄인의 구원은 정당한가? 죄와 무지가 인간을 어떻게 규정하는가? 신은 왜 가장 어울리지 않는 사람을 “선택”하는가?

토마스 만은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아이러니와 유머, 상징과 장중한 문체로 답한다. 인간의 삶은 이해할 수 없는 오류로 가득하지만, 그 오류의 중심에서조차 구원의 빛이 시작될 수 있다.


교황이 된 그레고리우스에게 고해성사를 하는 지빌라의 말에 독자는 소설이 주는 반전의 맛을 볼 수 있다. 지빌라는 그레고리우스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고해한다. 조카이며 아들이며 남편인 교황에게 어머니이며 고모이며 아내인 지빌라는 눈물의 고백을 한다.

그녀는 첫눈에 남편과 아들이 동일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으며, 모르는 듯 알면서 자신의 아들을 남편으로 삼았으니, 그 이유는 오로지 그 아이만이 그녀와 필적할 만한 존재였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래, 그랬었노라고, 이로써 고백을 다 한 것이라고 했다. 404쪽.

궁금하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들은 두 주먹을 불끈쥐며 배신감을 느낄까, 지빌라와 함께 눈물을 흘릴까, 막장드라마에 헛웃음을 지을까...?


<선택받은 사람>은 깊이 생각할수록 더욱 이상하고, 이상할수록 더욱 아름다운 소설이다. 근친상간이라는 금기 소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만은 이야기를 고결한 신학적 은유와 유머러스한 문체로 변모시켜 죄와 은총의 파라독스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만든다.

이 책은 독자에게 '구원은 죄의 반대편이 아니라, 죄가 가장 깊을 때 열린다'는 토마스 만의 시선을 전한다.


우리에게 옛 전설을 들려준 클레멘스의 마지막 말을 들어보자. 딱딱하고 무거울 것 같은 토마스 만의 뜻밖의 재치가 그대로 드러난다.

누구든 여기서 잘못된 교훈을 이끌어내어, 죄라는 것은 결국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자, 이제 신나게 죄를 지어 보아라! 이런 사람들의 삶도 결국 그렇게 멋지게 되었다면, 나라고 뭐가 잘못되겠어?'하고 스스로에게 말하지 말하는 것이다. 413쪽. (참 걱정도 많으셔... 이럴 땐 꼭 한국의 어머니같은 잔소리다. 독일 남자같지 않게.)

이대로 끝나는가? 아니다. 덧붙임을 잊지 않는다. '너 그렇게 살아봐, 어떻게 되는지.' 이런 협박이다.

어디 한번 일단 17년을 바위 위에서 보내 보라. 고슴도치 꼴로 끌어내려진 채 말이다. 그리고 병자들을 20년 이상 목욕시키다 보면 그게 과연 재미나는 일인지 알게 될 것이다! 413쪽.


주제별 분석

토마스 만이 말년에 "그레고리우스 전설"을 선택한 이유는 단순한 중세 신학적 흥미 때문이 아니라, 만이 평생 천착해온 “병·죄·고독·초월”의 문제를 가장 응축된 형태로 다룰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읽기가 끝난 후 책의 이야기를 죄, 은총, 고행, 아이러니로 나누어 본다.


죄 ― 인간이 빠져나올 수 없는 구조

<선택받은 사람>에서 죄는 개인의 타락이 아니라 인간 존재 자체의 숙명적 결핍에 가깝다. 그레고리우스의 출생은 이미 죄이며, 그 죄는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반복된다. 만은 이를 통해 '죄는 개인의 도덕이 아니라 인간이 놓여 있는 조건'이라는 관점을 드러낸다.

죄는 ‘인식 이전’에 있다. 그레고리우스가 어머니와 결혼할 때 그는 죄를 알지 못한다. 만이 주장하는 ‘죄’는 윤리적 판단보다 더 원초적인 인간 조건이다. 만의 독일적 고전주의적 세계관(순수·불순의 변증법)과 니체 이후의 인간 이해(죄 vs 책임의 분리)를 결합한 해석이기도 하다.


은총 ― 불합리함 속에서 내려오는 것

<선택받은 사람>에서 가장 강렬한 개념은 ‘은총’이다. 만은 은총을 정의나 공정의 결과로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은총은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이며, 인간의 상식적 정의로는 설명 불가한 초월의 선물로 나타난다. 가장 극심한 죄를 지은 사람이 가장 극적인 고행을 거쳐 가장 높은 성직(교황)에 오른다.

이 역설 구조는 기독교적 구원관의 핵심 모티프이면서, 동시에 만이 평생 매혹된 '아름다움과 타락의 변증법'을 보여준다. 은총은 ‘정치적 구원’이 아니라 ‘신학적 아이러니’다. 은총은 논리적으로 합리화될 수 없다. 만은 이것을 진지함과 유머 사이에서 생겨나는 독특한 어투로 표현한다. 은총은 도덕의 산물이 아니라 서사적 기적이다.


고행 ― 인간적 죄가 신적 시간에 녹아드는 과정

그레고리우스의 17년 고행은 이야기의 절정이다. 만은 고행을 사실적 고문으로 묘사하지 않고, 정적이고, 상징적이며, 거의 명상적 은유로 그린다.

자아의 해체 과정; 17년이라는 기간은 실제 종교적 고행이라기보다 자기 인식이 완전히 무너지는 시간이다.

자아의 욕망, 죄책, 정체성, 이름, 모든 것이 무너진다. 고통은 열쇠가 아니라 통과 의례, 고행은 단순히 죗값을 치르는 과정이 아니라, 죄의 구조에서 인간이 벗어나는 변형의 계기로 제시된다. 고행은 도구가 아니라 매개이다.


아이러니 ― 만의 후기 문체를 지배하는 미학

<선택받은 사람>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아이러니다. 만은 중세 연대기 작가의 목소리를 흉내내면서, 동시에 그 형식을 은근히 풍자한다. 경건한 듯하면서도 장난스럽고, 비극적인 이야기인데도 우화처럼 가볍고, 성스러운 결말인데도 아이러니가 가득하다. 아이러니는 토마스 만 문학의 정수이자, <요셉과 그 형제들>과 직접 연결되는 만년의 문체적 결정판이다.

왜 이 소설은 ‘가볍게 느껴지는 경건함’일까? 만은 '경건함의 무게'를 그대로 재현하지 않는다. 오히려 경건함을 문학적 거리두기를 통해 성찰하게 만든다. 그 결과, 독자는 “이게 진지한가, 우스운가?” 지속적으로 혼란을 느끼지만, 바로 복합적 감정 속에서 죄·은총·구원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레고리우스, 그레고르, 그리고르스

위의 세 이름은 맥락없이 불쑥 튀어나와 독자를 당황하게 한다. 오탈자, 교정 오류인가 잠시 의심을 하게 된다. 처음으로 이름이 달리 표기된 것을 발견한 이후로도 종종 이름은 정확히 한 가지로만 표기되지 않았다. 책에서는 각주(foot note)를 달아 이름에 대한 설명을 한다.

(그레고르는) '그리고르스'와 마찬가지로 '그레고리우스'를 지칭하는 이름이다. 소설 후반부에서 서술자는 아무런 설명 없이 그를 '그레고르'라고도 부른다. 이후 소설 내용에서 드러나는 그레고르의 모습은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 <변신>에서 어느 날 '갑충'으로 변신한 '그레고르 잠자'를 연상시킨다. 203쪽 각주.

바위 위에서 17년을 보낸 후 고슴도치처럼 보이는 모습에서 <변신>의 그레고르 잠자가 연상된다.


원문(독일어)에서 실제로 이름이 변형되어 등장한다

토마스 만은 <선택받은 사람>에서 주인공 이름을 일관되게 하나로 쓰지 않았다. 번역본을 읽을 때 궁금한 점은 원전을 찾아보는 것이 최고의 해답이다.
'그레고리우스'라는 이름이 원전에서 다음과 같은 다양한 형태로 등장한다. '그레고르'(Gregor)는 가장 일반적인 독일어형 이름이다. '그레고리우스'(Gregorius)는 라틴식 정식 이름이다.

중세 연대기 문체를 모방한 부분에서는 일부러 고풍스럽고 라틴어스러운 어형을 쓰기도 한다. 이름의 변형은 실수나 번역상의 문제가 아니라, 토마스 만이 의도적으로 중세 연대기의 혼용적·다층적 문체를 흉내낸 결과다.

중세 원전(그레고리우스 전설)에서도 이름이 통일되어 있지 않다.

만이 참고한 중세 전설(그레고리우스 성인 전설)은 라틴어와 고지독일어 사이에서 이름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중세 문헌은 오늘날처럼 이름 표기 일관성이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 문서 안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이름이 혼용되었다. 토마스 만은 이 중세적 ‘문체 혼종성’을 일부러 살려 사용했다는 평이 있다.

번역자가 원문을 그대로 반영하면, 한국어에서도 자연스럽게 이름이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번역자가 원문에서 어떤 형태를 사용했는지에 따라 같은 인물이라도 한국어 책에서는 이름이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독자 입장에서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책을 읽으며 이름이 바뀔 때 잠시 생각해보면 그레고르는 세속적·일상적 이름, 그레고리우스(그리고르스)는 더 격식 있는, 성인적·전설적 호칭이라는 생각이다. 토마스 만은 상황(평범한 소년 시기 vs 고행 후 성인으로 불릴 때)에 따라 이름의 격식을 의도적으로 바꾼 것이 아닐까?

책에서 인물의 이름이 바뀌는 일은, 개명한 것을 명시하지 않고 슬쩍 바뀌는 일은 거의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레고리우스'에 대한 생각을 기록한다.


<선택받은 사람>과 <마의 산>의 연결점

두 작품은 겉으로 보면 아주 다르다. <선택받은 사람>은 중세 전설 기반의 신학적 우화이고, <마의 산>은 근대 유럽 문명의 병리학을 담은 실존적, 지성적 소설이다.

토마스 만이라는 작가의 일관된 세계관이라는 렌즈를 통해 보면, 둘 사이에 몇 가지 깊은 층위의 연결점이 존재한다.


인간의 ‘질병’ 혹은 ‘결함’을 통한 자기 인식

<마의 산>에서 한스 카스토르프는 치유를 위해 산에 올라갔다가, 오히려 병과 죽음, 사유의 심연을 만난다.

<선택받은 사람>에서 그레고리우스는 죄를 알지 못한 채 살아가다가, 오히려 죄와 고행을 통해 자신의 본질을 깨닫는다.

두 작품 모두 인간은 상처·병·죄를 통해 자기 인식에 도달한다는 토마스 만의 철학을 공유한다.

‘고립된 공간’에서의 변형

<마의 산>의 무대는 고산 요양원, 절대적 고립 공간이다. <선택받은 사람>은 바위섬 고행의 17년이 완전한 고립의 형상이다. 그러고 보니 토마스 만에게 고립은 변형을 촉발하는 실험실이다. 한스와 그레고리우스는 모두 일상과 사회로부터 분리된 장소에서 ‘다른 인간’이 된다.

문체의 아이러니와 거리두기

두 소설은 모두 서술자의 아이러니, 중립적이면서도 장난스러운 말투를 공유한다. 진지한 것을 쓰면서도 직설적 진지함을 피하고, 항상 조금 옆에서 비꼬듯 말한다. 이는 만의 세계관에서 아주 중요한데, 그는 '진지함이야말로 가장 아이러니한 인간의 상태'라고 믿는다.

인간의 구원 또는 성숙은 언제나 역설 속에서 이루어진다.

한스 카스토르프가 전쟁으로 내려가는 순간은 비극적인 성숙이다. 그레고리우스가 교황이 되는 순간은 아이러니한 구원이다. 둘 다 바닥에서 올라온다. <마의 산>에서 한스는 병과 사유와 죽음의 세계에서, <선택받은 사람>의 그레고리우스는 죄와 고행과 무지의 세계에서 올라온다.

토마스 만에게 성숙/구원은 정상적인 삶의 연장선에선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종교적이든 세속적이든, 토마스 만에게 세계는 언제나 이중 구조이다.

생과 사, 죄와 은총, 병과 치유, 신성함과 우스꽝스러움, 계몽과 광기, 문명과 야만.

<마의 산>에서는 문명 비판으로, <선택받은 사람>에서는 신학적 우화로 나타난다. 이중 구조와 그 사이의 긴장은 토마스 만 문학 전체의 특징이며 두 작품 모두 그 긴장을 정교하게 다룬다.

두 작품은 다른 모양의 “변형” 서사이다.

<마의 산>은 근대적 인간의 변형, <선택받은 사람>은 신학적 인간의 변형이다. 하지만 둘은 토마스 만의 세계관에서는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한다. “인간은 어떻게 해서 지금보다 더 깊은 자신에게 도달하는가?”

두 작품 모두 높은 곳(요양원/바위섬)에서의 고립, 역설적 상황, 아이러니를 통한 성찰을 공통 방식으로 사용한다. 둘은 장르도, 시대도 다르지만, '토마스 만식 인간 탐구의 두 얼굴'이라 부를 수 있다.


토마스 만(Thomas Mann, 1875-1955)

병과 고독, 아이러니의 문장 속에서 세계를 다시 바라본 사람

토마스 만을 말할 때 흔히 떠올리는 단어들은 ‘노벨문학상’, ‘거장’, ‘교양주의’ 같은 무거운 표지들이다.
그의 문학적 얼굴은 그런 휘장보다 훨씬 더 미묘하고, 더 인간적이며, 더 깊은 어둠과 빛을 함께 품고 있다. 만은 태어날 때부터 교양의 공기 속에서 자랐다. 음악과 문학, 철학이 일상의 바다처럼 흐르는 가정. 그는 그 세계를 사랑하면서도 끊임없이 의심하고 해체한 사람이다.

그의 소설을 읽으면 언제나 장중한 멜로디 아래 미세하게 갈라지는 균열음이 들린다. 균열이야말로 그의 문학이 숨 쉬는 자리다. 무엇보다 그는 병과 고독을 사유의 재료로 삼은 작가다.

<마의 산>에서 한스 카스토르프가 고산 요양원에서 병을 통해 세계를 배워가듯, <선택받은 사람>의 그레고리우스는 바위섬의 고립을 통해 죄와 은총의 심연에 닿는다. 만에게 고립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간을 변화시키는 하나의 ‘실험실’이다. 사람은 군중 속이 아니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소음을 잃었을 때 비로소 더 깊은 자신에게 도달할 수 있다. 만은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고, 끝까지 고통스러운 고립의 통로를 문학으로 탐사했다.

그의 문체는 냉정하고 균형 잡혀 있지만, 바로 아래엔 불타오르는 열기가 있다. 감정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인간을 깊이 사랑하고, 진지함을 유지하면서도 스스로를 비켜 서는 독특한 아이러니. 만의 아이러니는 조롱이 아니라 지혜의 태도에 가깝다. 세계가 너무 복잡하고, 인간이 너무 나약하며, 역사가 너무 잔혹하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삶의 비극을 더 비극적으로 만들지 않고, 이야기의 숭고함을 더 무겁게 만들지 않는다. 그의 문장은 한 걸음 뒤에서 미소 짓는 듯하지만, 그 미소는 세계를 깊이 이해한 사람의 조용한 여유이다.

말년의 만은 더욱 신학적 주제, 특히 구원의 문제에 천착한다. 그가 말하는 구원은 종교적 교리나 윤리적 순결의 결과가 아니다. ‘깨어진 인간이기에 가능한 구원’, 죄와 무지, 병과 몰락을 통과해야만 볼 수 있는 세계에 대한 직관이다. <선택받은 사람>의 그레고리우스가 보여주듯, 만이 믿은 구원은 완전한 자가 아니라 부서지고 길을 잃은 인간에게서 시작된다.

토마스 만을 읽는다는 것은 이성과 감정, 질서와 혼돈, 죄와 은총, 병과 건강 사이를 그가 만든 정교한 다리를 건너는 일이다. 다리는 멀리 돌아가고 때로는 느릿하게 흔들리지만,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우리가 익숙한 세계의 모습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내려다보게 된다. 그것이 만이 남긴 문학의 힘이며, 그가 읽는 이에게 건네는 가장 고요한 선물이다.

토마스 만은 문학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인간이 얼마나 복잡한 존재인지를 아이러니와 사유, 고독과 구원이라는 네 겹의 얼굴로 끝까지 탐구한 사람이다. 그를 읽는 일은 언제나 ‘세계와 인간에 대한 재교육’이 된다. 우리는 그의 책을 덮을 때마다 조금 다른 시선으로, 조금 더 깊게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2022년 6월 다보스 여행중. ©morgen


(<선택받은 사람> 리뷰를 다 읽으면 아래 링크된 <마의 산> 리뷰를 열어보세요.)

https://brunch.co.kr/@erding89/330

https://brunch.co.kr/@erding89/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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