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일년살이때의 일이었다.
2층짜리 주택에 살았다.
잔디가 깔린 넓은 마당이 있었고, 설거지 창으로 보이는 귤밭에서는 가끔 꿩 커플이 뛰어다니는 것을 볼 수 있는, 그런 아주 제주스러우면서도 갬성 넘치는 집이었다.
사정상 남편은 육지에 있고 나와 아이들만 제주에서 지냈다.
제주살이 일주일도 안되었을 때 일이었다.
아이들이 모두 잠든 것을 확인하고 나만의 시간을 위해 부엌으로 조용히 나가 맥주캔을 땄다.
나는 공포영화 마니아다.
혼자 있는 컴컴한 식탁에서 보는 공포영화는 정말 찐이다.
공포영화가 주는 그런 카타르시스를 한껏 느끼며 잠에 들기 위해 안방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어둠 속 벽에 붙어있는 커다란 '그것'.
'그것'도 나를 보고 놀란 것 같았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불을 켰다.
순간 '그것'과 나는 서로 놀라 그 자리에서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꼼짝 못 한 것이 체감상 5초 정도 되었던 것 같다.
나보다 먼저 현실을 직시한 '그것'은 빠르게 천정으로 기어올라갔다.
뒤늦게 현실을 직시한 나는 '그것'을 암살하기 위해 약을 인정사정없이 뿌려댔다.
큰 덩치의 그것은 내가 뿌린 약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듯 미친 듯이 도망갔다.
내가 뿌린 약을 뒤집어쓴 '그것'은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향한 물리적인 공격이 자신 없었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그것'이 항복할 때까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약을 뿌리는 것뿐이었다.
조금 과장해서 100번 정도 뿌렸나 보다.
결국 '그것'은 뒷다리에 경련을 일으키며 침대 밑에서 죽어갔다.
'그것'의 사체를 치워야 했지만 자신이 없어 죽은 '그것'을 보며 한동안 멍하니 서있었다.
휴지를 돌돌돌 말아서 집어 쓰레기통에 넣는 수밖에.
결국 '그것'의 사체를 집기 위해 휴지 한통을 다 썼다.
다음 날 나는 약국에 가서, 약사의 도움을 받아 전 날 사용했던 약보다 더욱 강력한 약을 구입했다.
"이거 한 두 번 뿌리면 즉사입니다."
약사의 표정은 매우 진지하고 결연했다.
그런 그의 표정에 나는 안심이 되었다.
다시 집안에서 '그것'을 마주치지 않으면 좋겠지만
한번 나타난 이상 계속 나타난다는 학계의 정설이 사실이라고, 그 약사가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 등장은 밤이 아닌 낮이었다.
새로운 '그것'과 마주치자 나는 약사가 권해 준 약을 재빨리 가져와 '그것'에게 뿌려댔다.
꺄악! 으악!!
내 등뒤에 숨은 아이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그것'은, 과연 약사의 말대로 새로운 약을 두 방 맞고 경련도 없이 즉사했다.
전날은 휴지를 한 통 다 썼지만 두 번째라 그런가 휴지를 반 통만 쓰고 그것을 집어들 수 있었다.
아이들은 나와 '그것'의 싸움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지켜보았다.
13살 아들은 그런 나를 보고 이렇게 감탄했다.
"뭔가.. 멋있고 웅장해!"
그취!
얘들아! 엄마가 지켜줄게.
걱정 마!!
하지만 '그것'과의 싸움은 이제 시작이었던 것을 그때 우리는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