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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성실함이라는 폭력

by 소소라온

남편의 회사 복지 프로그램으로

부부 상담을 시작했다.

총 10회기.


그러나 매 회기 상담을 마친 후엔

늘 답답함이 남았다.


상담이 거듭될수록

변화의 실마리를 찾기보다는,

오히려 더 단념하게 되었다.


나는 나의 실수와 부족함을 돌아보며,

앞으로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지 고민했다.


하지만, 남편은 끝내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고,

상담 내내 나의 감정 기복과 미성숙함만을 문제 삼았다.

남편은 그 상담의 시간마저도

나의 문제점을 지적해 내고,

자신을 합리화하는 도구로 이용할 뿐이었다.


매 회기 50여분의 시간은 빨리도 지나갔다.

내가 남편의 가면을 벗겨내기엔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


애써 틈을 만들고, 그 단단한 가죽을 조금이라도 들춰보려 하면

상담 시간은 종료되었고,


일주일 뒤 다음 회기를 시작할 때면

다시 남편은 단단한 갑옷을 입고 앉아

지난주에 했던 이야기를

처음부터 똑같이 되풀이하고 있었다.


상담이란 건,

결국 ‘자기 자신을 들여다볼 준비가 된 사람’에게나 의미가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도,

문제의식도 없는 사람이 상담을 받는다는 건,

그냥 상대방을

더 지치게 만드는 일일 뿐이었다.


그 상담실에서 나는,

변화를 위한 자리가 아니라,

단념을 확인하는 시간만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상담이 끝날 무렵,

우리에게 내려진 처방은 ‘대화 방식의 전환’이었다.

그 방법은 "I-message"로 감정을 전달하라는 것이었다.


특히 갈등 상황에서

남편이 내게 퍼붓는 인격 모욕과

내 가족에 대한 비난은 참기 어려웠기에,

나는 조심스럽게 말해보았다.


“당신이 그렇게 말할 때,

나는 마음이 아프고 힘들어.

그럴 땐 대화를 이어가기가 너무 어려워.

앞으로는

서로 상처 주지 않는 말로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어.”


하지만 그럴수록

남편은 오히려 갈등 상황에서

더 자주, 더 노골적으로 그런 말을 쏟아냈다.

마치 내 급소를 알고 거기만 찌르듯,

인격 모욕은 점점 더 심해져만 갔다.


이상했다.

내가 노력할수록, 남편은 점점 더 당당해졌고,

그 모습은 내 안의 마지막 기대마저 꺼뜨렸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도,

그는 늘 성실하게 일하고,

자신의 일상은 흐트러짐 없이 살아냈다.

나는 이렇게도 힘든데,

그는 늘 지독하게 성실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살아가는 그의 평온함이,

나에게는 큰 고통이었다.


보통의 관계에서 성실함은 미덕이다.

하지만 그것이 타인의 고통을 무시하기 위한 방패가 될 때,

그건 미덕이 아니라

방어이고, 외면이며, 결국엔 잔인함으로 다가온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나는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이 결혼을 유지할 것인지,

끝낼 것인지는

전적으로 나의 결정이라는 것.


내가 감정적 소통의 부재를 감내하고

그의 모든 반응을

무시가 되었던, 외면이 되었든

내 안에서 삼켜낼 수 있다면

이 관계는 지속 가능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버텨낼 수 없는 구조라는 것.


이혼을 진지하게 고민하던 내게,

주변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폭력, 외도, 도박. 그게 3대 이혼 사유야.
그 외의 이유로 이혼하면 나중에 다 후회해.

남편은 그 어떤 항목에도 해당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건 아닌지,

정말 내가 예민하거나 부족한 사람은 아닌지

참 많이도 자책했고,

나 자신을 검열했다.


아마 당시의 그도 어찌할 바를 몰랐을 수도 있다.

그래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방식,

지독한 성실함으로

자신을 더욱 감쌌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한참후에야 깨달았다.


그는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지만,

그보다 더 깊고 오래 남는 상처를

말과 침묵으로, 꾸준히 내게 남기고 있었다.


그건, 정서적 폭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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