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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도 좋을 텐데, 지금 여기도 좋아.

by 소소라온

이십여 년을 넘게 학교에서 근무했다.

해가 거듭될수록 마음속에 풀리지 않는 질문 하나가 맴돌았다.


왜 학생들의 요구사항은 끊이지 않을까?

학교 시설은 더디나마 나아졌고,

교육 환경도 만족스럽진 않을지언정 진화했다.

하지만 학생들의 불만과 요구는 늘 새로운 형태로 거칠게 계속된다.

하나의 요구가 충족되면, 곧이어 또 다른 요구가 그 자리를 대체했다.


나는 이 현상을 매년 지켜보았다.

가끔은 학생들의 그런 요구들이 타당하다 여겨질 때도 있었다.


'그래, 너희들, 그런 부분은 참 불편하겠다.

개선된다면 너희들의 매일매일 긴 학교살이도 좀 나아지겠구나.

나아가 너희의 요구와 노력으로 개선 사항이 반영된다면 후배들은 얼마나 고마워할까.'

그래서 나아진 것들...


내가 근무하는 학교를 기준으로 말한다면,

우선 신발주머니가 사라졌다.

각 건물의 현관 입구마다 학생 개인의 신발장이 마련되며

그간 신발주머니를 들고 등교해야 하는,

또는 신발주머니를 들고 다니기엔 폼이 안난다고 여기는 학생들은

양손에 실내화와 실내화를 한짝씩 달랑달랑 들고 다녀야만 했던 비위생적 수고로움을 덜었다.

학생들의 두발 규제가 완화되었다.

과거 나의 학창 시절 귀밑 몇센티미터까지는 아니더라도

여학생의 경우 묶어서 어깨선을 넘지 말아야 한다거나,

남학생의 경우 옆머리는 귀를 덮지 않도록, 앞머리는 눈썹을 덮지 않도록 하는 등의 규제는 이제 없다.

그저 뽀글 파마나, 노랑,파랑,빨랑 등의 컬러풀한 염색을 제한하는 정도이다.

교복에 대한 부분도 많이 여유로워졌다.

여학생은 교복 자체도 치마 또는 바지 중에서 선택,

그마저도 불편하면 생활복이라고 하여

활동성과 편의성을 높인 새로운 복장이 추가되었다.

조끼나 자켓을 대신해

신축성이 좋은 가디건으로, 맨투맨으로, 후드점퍼로...

잘 늘어나지 않는 교복 바지의 재질이 불편하다면

검정색이나 짙은 남색의 편한 운동복으로...


급식은 또 어떤가..

학교에 식사를 할 수 있는 급식실이 마련되어 있지 않아

여러 명의 배식 당번이 교실로 밥차를 실어나르고,

친구들에게 직접 배식을 하고,

자신의 책상에 반찬을 흘리고,

그 냄새를 견뎌내고,

식사를 마친 후엔 식판과 잔반을 모아

다시 조리실로 운반해야만 했던 시대를 지나


이제는 급식실에 걸어 내려와

쾌적하게 식사를 마치고

식판을 모아 놓고 떠나면 된다.

그럼. 지금 학생들의 입장은 어떠할까?

우선 신발장의 문제.

불편하단다.

이유는 자신의 교실의 위치와 신발장이 놓여진 현관의 위치가 달라

몇걸음 돌아가야만 하는 불편함이 너무 커,

그냥 실외화를 신고 교실까지 가겠다고 한다.

그래서 그 학생의 신발장은 늘 비어있다.

두발과 복장의 문제.

불편하단다.

파마나 염색에 대한 규제는

개인 표현의 자유와 인권 침해의 소지가 있다며

몸소 파마와 염색을 직접 실천하며 투쟁하기도 한다.

편해지는 대신 실루엣이 살지 않는

지금의 교복은 너무 촌스럽고,

오히려 과거의 각잡힌 교복 자켓과 조끼, 넥타이가

더 예쁘고 멋스럽다며,

왜 그걸 없애버렸는지 모르겠다고도 한다.

급식실에서의 식사는..

배식을 받기 위해

줄을 서야 한다는 게 못마땅하단다.

자신의 식판을 퇴식구에 놓지 않고,

그냥 식탁 위에 놓고 도망가버리기도 하고,

그런 학생을 붙잡아 지도할라치면,

이런 정리까지 내가 꼭 해야하는거냐 되묻기도 하고.

잔반 정리를 하지 않은 채로 급식판을 겹쳐놓아

조리 종사원님들의 설거지 노동 강도가 더 높아지기도 한다.

대략 큼직하게 이 정도의 사례가 떠오른다.


우리는 끊임없이 나아졌는데,

왜 불만은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일까?

이런 모습은 비단 학교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사회 전체가 그런 것도 같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각 구성원들의 요구는 끊임이 없고,

그로 인한 갈등도 종착역이 없다.

나의 삶도 다르지 않다.

일상 속에서 느끼는 많은 불편함들,

그것들만 해결되면

지금보다 훨씬 나아진 삶을 살아갈 것만 같은 기대감.

그 기대감을 동력 삼아

무언가를 노력하고 성취해보지만,

그러한 성취 뒤엔

또다시 스멀스멀 찾아오는 불만족스러움...

이러한 현상은

개인의 심리적 문제인가,

사회구조적인 문제인가의

궁금증이 계속되던 요즘.


《편안함의 습격》 이라는 책을 만났다.

우리의 끝없는 불만족은

문명을 발전시키는 가장 강력한 동력이지만,

동시에

각 개인이 오래도록 누릴 수 있는

행복감을 앗아가는 함정이라는 것을...


충족될수록 높아지는 기준: 쾌락의 쳇바퀴


우리는 요구가 충족되지 않아서

불만이 생기는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한다.

하지만 진실은 훨씬 더 모순적이다.


요구는 충족되는 바로 그 순간,

더 높은 곳을 향해 도약한다.

이것은 심리학의 '쾌락의 쳇바퀴(Hedonic Treadmill)'와 같다.


나의 감정은 큰 성취 앞에서 잠시 흥분된다.

하지만 성취의 기쁨을 충분히 누릴 틈도 없이

놀랍도록 빠르게

평소의 감정 수준으로 복귀한다.

어제의 간절했던 ‘바램’들은

오늘은 그저 나의 새로운 '일상'이 되어버린다.

이는 뉴노멀(New Normal)현상과도 통하는 부분이 있다.

앞선 세대가 갖은 고초를 겪으며 이뤄낸 많은 것들은

뒤의 세대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기본값'이다.


그들에게 그것은 '성취'가 아니라 '당연한 권리'이다.

그래서 그 기본값 위에서 새로운 불만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세대가 바뀔 때마다

노멀의 기준 자체가 상향 이동한다.

그래서 우리는 문명의 성공적 진화를 맛보며 살아가고 있다.

문명의 동력: 불만족이 낳은 혁신


만약 인류가 만족할 줄 아는 종이었다면,

우리는 아마 아직 동굴에 머물렀을 것이다.

안락함은 진화를 멈추게 하지만,

끊임없는 불만족은 우리를 움직이게 만든다.

이 불만족이야말로 문명 진화의 근본적인 원동력이다.

우리는 덜 불편하고,

더 효율적이며,

더 공정한 시스템을 요구했다.

"정보를 더 빨리 얻고 싶다"는 불만족이

스마트폰을 만들었다.

"불합리한 대우를 받고 싶지 않다"는 불만족이

노동법과 인권을 발전시켰다.


편안함의 함정: '의미 있는 고난'의 상실


우리는 이제 진화의 결과물인 '편안함'이

개인의 행복을 갉아먹는 역설을 마주한다.

《편안함의 습격》의 가장 강력한 경고는 바로 이 지점이다.

문명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쉽게 얻는 방법을 주었다.

육체적 불편함,

즉 ‘의미 있는 고난(Meaningful Struggle)’의 과정이 최소화되었다.


과거에는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 자체가

유능감(Competence)과 성장을 선물했다.

여기서 앞선 세대와 현 세대 간의

'경험의 단절'이 발생한다.


과거의 노멀하지 않았던 시절을 경험해보지 못한 세대는

결코 노력을 통한 성취감과 만족감을 느낄 수 없다.

그들에게는 고통이 최소화된 만큼,

성취감의 깊이 역시 최소화된 것이다.

편안함은 이 감동과 경험 자체를 앗아간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늘 나날이 발전하는 문명속에서

많은 것들을 누리고 있음에도

만족감이 떨어지고 불만을 느끼는 근본적인 이유이다.


우리의 영혼은 '성장통'을 원하지만,

앞선 세대가 만들어준 편안함은 그 기회 자체를 앗아간다.

그래서 끊임없이 불만족한 부분을 짚어내고

그것을 개선하고자하는 욕구에 시달리는 것이 아닐까.


‘가장 편안한 시대에 가장 무기력한 불만을 느끼는 역설‘이 여기서 탄생하는 것이다.


거기도 좋을 텐데, 지금 여기도 좋아.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가정에서는 자녀들의

크고 작은 불만과 요구들을 마주했을 때,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내가 그들을 만족시켜주지 못하고 있다는 자괴감.

교사로서, 엄마로서

주어야 할 것을 주지 못하는 것만 같은 죄책감 등이 뒤섞여

교사로서, 엄마로서의 나를

내내 되돌아보고 반성도 했더랬다.


지금 여기가 그들에게 너무도 불편한 곳인게

꼭 나의 잘못인 것만 같아

몸둘 바를 몰라했던 적도 많았다.

그러나 이제 조금은 자유로워지는 듯하다.

그들의 요구와 불만족은 끝이 없을테니까.

지금 우리가 느끼는 수많은 불편함이 해결되는 곳,

거기 어딘가에 도착하면 행복할 것만 같지만,

도착하는 즉시,

새로운 불편함을 찾게 되는 거니까.


영원히 도착할 수 없는 거기 어딘가로 가기 위해

지금의 불편함을 찾아내려는 노력을

이제 조금 멈출 수도 있을 것 같다.


거기도 좋긴 할텐데, 그래서 가보기도 할건데,

지금 여기도 좋아...


여기 머무는 지금을 좀 덜 고달프게 여기며

그곳까지 갈 수 있을 것 같다.


p.s.십수년전 매일 교무실로 불려와

혼나고, 잔소리 들으면서

마음 상해하던 학생들이 많이 생각난다.


요즈음의 학교를 그들이 경험한다면,

“선생님.. 학교가 정말 많이 좋아졌어요~~

이 정도면 다닐만 하겠는데요~~

라고 할 것만 같다.


이 글을 쓰는 과정을 통해

저는 큰 위로를 얻었습니다.

아이들의 끊임없는 요구 앞에서 속상해했던

저와 같은 모든 부모님과 선생님들께,

이 글이

'당신의 잘못이 아니었다'는

작은 위로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우리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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