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루들은 주변 대기의 결에 따라 목적 없이 부유해서는 한쪽으로 몰렸다가 다시 퍼지고 다른 한쪽으로 몰렸다가 다시 퍼진다.
결국 거스를 수 없는 강렬한 기류가 휘몰아치면 가루들은 더 이상 의미 없던 춤사위를 멈추고 원래 가야 했던 어떤 곳을 향해 비산한다.
기류는 처음 가루들을 거뒀던 곳에서 백두대간을 넘고 바다를 건너기 전 종전부터 달갑지 않았다는 듯 가루들을 게워낸다.
해 질 녘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깔려가며 조금씩 사물의 모습을 가렸다.
K는 그 그림자 속에서 미동도 없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K를 만날 것을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약사 선생을 짧은 인사를 마치고는 용건을 꺼냈다.
"요즘 병원이 아주 난리야.."
약사 선생은 병원 설립 초부터 근무를 시작해 병원 운영에 대한 소식을 구석구석 알고 있는 편이었다.
"이사장 대행이 취임하고서 몇 개월 동안 인사발령만 벌써 열세 번째라 한가닥 한다는 사람들 보직이 익숙하기도 전에 바뀐단 말이야.. 이사장이 무슨 실험을 하는 건지 몇몇 과장들만 불러 무슨 과감한 결단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지시를 하는데 뭔지 잘 모르겠어. 그래 놓고 인사과는 수시로 소집해서는 생소한 조직을 그리 만드는지...
그래도 그나마 전임 이사장보다는 라인을 따지지는 않아서 반대하는 목소리에 대해서도 징계나 해임을 지시하지는 않는다고 하더군."
K는 병원 사정에 그리 밝은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병원 영업을 하기 위해서는 약사 선생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아니 듣다 보니 K가 거래처로 상대했던 여느 대형 병원의 운영과는 너무나 달라서 신임 이사장 대행이 무슨 생각으로 최근의 일들을 추진하고 있는지 호기심이 생겼다.
"신임 이사장이 부임하기 전 어디에서 근무했던가요?"
"... 글쎄? 내가 어디라고 했던가?"
"아, 아니요. 그런데 왠지 들은 거 같아서요. 약사님은 신임 이사장님 약력은 전혀 들은 게 없으세요?"
"음. 전혀."
"병원에 알만한 분도 없고요?"
"글쎄. 물어봐도 아는 사람이 없더라고. 유럽에서 최근 들어왔다는 것 밖에"
"유럽이요?"
"그게 다야. 유럽. 하튼 꽤나 모르는 구석이 많더라고"
K는 지난 모임에서 얼핏 얼핏 들렸던 이사장 대행의 대화 일부를 속으로 되뇌었다. 대행 꼬리표가 붙어있을 때는 별다른 이슈 없이 임기를 지내고 싶다거나, 당분간 적임자 선출이 어려워야 자신이 대행 꼬리표를 떼지 않겠냐는 등 시시콜콜한 이야기였다. K가 앉았던 자리는 병원 최고 결정권자의 이야기를 듣기에는 너무 멀었다.
"차선책으로 위원들 중에 만나볼 만한 사람은 있을까요?"
"의약품위원회?"
"네, 의선위요."
"있지. 왜. 내가 위원들 중 제일 오래된 위원이잖아. 최고참."
"알아요 알아."
K뿐만 아니라 약사 선생 스스로도 자신의 너스레에 갑자기 씁쓸해져 왔다. 수십 년째 의선위에 참여를 하고 있었지만 대상 약물을 선정하는 과정이든 약물 구매를 결정하는 과정에서든 핵심적인 결정권은 결국 의사들에 돌아갔기 때문에 최장수 위원이었어도 허울뿐이었기에 K는 헛웃음이 나왔다.
'지방 소도시라도 꽤나 권한이 분산되어 있단 말이지... 약사 선생을 통해 우군을 많이 만들어야겠어.'
K가 잠시 생각에 빠져있는 동안 대화가 끊기자 약사 선생은 이틈을 놓칠 새라 담배를 꺼내 베어 물고 있었다. K는 그런 약사 선생의 태도가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병원 영업을 위한 셀파로 그에게 접근한 것이 잘한 선택인지 다시 한번 되묻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