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지역N문화

총명한 천재를 이기는 ‘둔필’의 힘!

48. 지역N문화

by 조연섭

16일, 필자가 몸담고 있는 동해문화원에 반가운 손님이 찾아오셨다. 여든여덟의 고령에도 올해만 세 권의 책을 집필하신 홍경표 전 원장님이셨다.

깊어진 가을빛만큼이나 무르익은 전 원장님과 대화는 자연스럽게 ‘글쓰기’의 중요성으로 이어졌다.

필자 역시 하루에 한 가지씩, 어느덧 2천여 개에 달하는 글을 쓰고 있다고 말씀드렸더니, 전 원장께서는 “일이 무척 바쁠텐데 잘하고 있다“ 고개를 끄덕이시며 묵직한 사자성어 하나를 건네셨다.


‘둔필승총(鈍筆勝聰)’.

“무딘 붓이 총명한 머리를 이긴다.” 였다.

필자는 자리에서 카카오톡에 메모를 남기고 다음날 글로 기록하기로 했다. 바로 앞에계시던 전 원장께서는 자필로 해설과 같이 넉자를 작성해 주셨다.

디자인_ 조연섭

우리는 흔히 ‘천재’의 번뜩이는 영감과 ‘총명’한 두뇌가 세상을 바꾼다고 믿는다.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기발한 아이디어, 한번 듣고 모든 것을 기억하는 비범한 능력은 분명 매력적이다. 하지만 인간의 기억은 놀라울 정도로 휘발성이 강하다. 어젯밤 잠 못 들게 했던 그 ‘총명한’ 생각도, 아침 안갯속에 사라지기 일쑤다. ‘나중에 정리해야지’ 다짐했던 그 영감은 다시는 우리를 찾아오지 않는다.


반면 ‘둔필’, 즉 무딘 붓은 정직하다. 여기서 ‘무디다’는 것은 어리석다는 뜻이 아니라, 화려하지 않아도 묵묵히 제 할 일을 한다는 ‘우직함’을 의미한다. 총명한 머리가 스쳐 지나간 수백 가지 생각을 공중에 흩날려 보낼 때, 둔한 펜은 그중 단 하나의 생각이라도 붙잡아 종이 위에 새긴다.


기록하는 행위는 단순히 생각을 ‘보존’하는 것 이상의 힘을 지닌다. 머릿속에 머물던 모호한 생각은, 펜 끝을 통해 문장이 되는 순간 비로소 ‘명료함’을 얻는다. 글을 쓰는 과정은 곧 생각을 벼리는 과정이다. 둔한 연필로 꾹꾹 눌러쓰는 그 지난한 행위 자체가, 총명한 머리로는 미처 다듬지 못한 생각의 결을 다듬고 논리를 세우는 가장 확실한 훈련법이다.


필자가 쌓아온 2천여 개의 기록 역시 ‘총명함’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매일의 ‘둔필’이 쌓아 올린 성실함의 결과물이다. 하루의 기록은 미약해 보일지 몰라도, 2천 개의 기록이 모이면 그것은 한 사람의 역사가 되고, 세상을 바라보는 고유한 철학의 증거가 된다. 천재가 단 한 번의 번뜩임으로 세상을 놀라게 할 때, 둔필을 든 사람은 축적된 시간의 힘으로 자신만의 우주를 완성한다.


홍경표 전 원장께서 여든여덟의 나이에 세 권의 책을 펴내신 저력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것은 하루아침의 총명함이 아니라, 평생을 붙잡아 온 ‘둔한 연필’이 거둔 위대한 승리다.


모든 것이 빛의 속도로 휘발되는 시대다. 총명한 머리를 믿고 수많은 생각을 흘려보내기보다, 지금 당장 둔한 연필을 들어 단 하나의 문장이라도 붙잡아 두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혼란한 시대를 살아가는 가장 총명한 지혜가 아닐까. 원장님의 말씀이 묵직한 울림으로 남는 깊어가는 가을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공동체 문화 공론장 가능성 보여준, '아리울예술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