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항구적 초심

by 최정식

한반도 평화체제를 논할 때, 정부 간 협상과 제도적 합의가 우선적으로 거론됩니다. 그러나 평화가 제도 위에만 머무른다면 그것은 불안정한 토대일 수밖에 없습니다. 제도의 껍질을 넘어 사회 속으로 평화를 내면화하는 역할은 시민사회가 맡아야 할 몫입니다. 그렇기에 시민사회의 위치와 한계에 대해 성찰하는 일은 필수적입니다.


시민사회의 활동은 언제나 제도와 자금이라는 문턱을 넘어야 가능합니다. 정부의 지원, 국제기구의 기금, 민간의 후원 없이는 지속적 활동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이 과정을 거치는 순간, 시민사회는 독립성과 자율성을 잃을 수 있는 위험에 직면합니다. 반대로 이를 거부한다면, 활동은 단발적 프로젝트에 머무르며 축적성을 잃게 됩니다. 결국 시민사회는 끊임없이 출발선으로 되돌아오는 존재, 즉 ‘항구적 초심 상태’에 머무를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시민사회의 담론은 때로 상대방의 수용성을 고려하지 못한 채 이론적·규범적 차원에서 머무르곤 합니다. 평화와 인권, 교류와 협력의 가치는 본질적으로 옳지만, 이를 현실적으로 수용할 주체가 없다면 실행력은 취약해집니다. 특히 북한을 대상으로 하는 활동은 정치·군사적 변수에 따라 쉽게 흔들리며, 그 결과 시민사회는 도덕적 정당성은 확보하되 실효성은 낮은 행위자로 비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시민사회는 독립성과 지속성, 순수성과 현실성 사이에서 늘 긴장 관계를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바로 이 긴장이야말로 시민사회의 본질이자 역할을 규정합니다. 제도와 국가가 미처 담아내지 못하는 틈새를 메우고,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조율하며, 평화의 언어를 사람들의 삶 속으로 번역하는 과정이 시민사회의 자리입니다.


한반도 평화체제의 미래는 제도의 설계와 더불어 시민사회의 내면화 과정에 달려 있습니다. 시민사회가 매번 다시 시작해야 하는 불안정 속에서도 작은 성과를 축적하고, 수용성을 고려한 실천적 지혜를 발휘할 때, 평화는 비로소 일상화될 것입니다. 평화는 협상의 종착지가 아니라, 사회가 매일 새롭게 이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붙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