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반의 한적한 펜션에서 통신기기 없이 일주일을 홀로 보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며칠 전 유럽 출장에서 돌아온 뒤 몸살이 심해 링거 세 개를 맞으며 나흘간 누워 있었습니다. 아직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몸은, 낯선 피로 속에서 이렇게 묻습니다.. “출장 전의 나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이처럼 인간은 힘든 일을 겪으면 언제나 그 일이 일어나기 전의 상태로 되돌아가길 원합니다. 건강하던 때로, 평온하던 때로, 아무 문제가 없던 순간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삶은 물리적 시스템이 아닙니다. 시간은 결코 거꾸로 흐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복원(復元)’은 가능한 한 위안이자, 동시에 불가능한 꿈이기도 합니다. 복원이란 상처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고자 하는 회귀의 욕망이며, 그 속에는 ‘이전의 나’가 가장 온전했다는 믿음이 깔려 있습니다. 하지만 그 믿음은 환상에 가깝습니다. 상처는 흔적 없이 사라지지 않고, 경험은 언제나 나를 변화시킵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재구성(再構成)’-주어진 요소들을 다시 엮어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과정-입니다. 재구성은 과거로 돌아가려 하지 않고, 지금의 나를 출발점으로 삼는 회복입니다. 병든 몸을 예전처럼 만들 수는 없지만, 그 과정에서 얻은 깨달음으로 더 단단한 균형을 세울 수 있습니다. 일이 어그러졌다고 해서 그 일을 없던 일로 돌릴 수는 없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는 것은 언제나 가능합니다.
재구성은 복원의 불가능성을 인정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은 과거를 붙잡는 몸부림이지만, “지금 여기서 다시 살아보자”는 말은 현재를 끌어안는 용기입니다. 재구성은 바로 그 용기에서 시작됩니다. 결국 삶의 성숙은 복원에서 재구성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몸이 아플 때, 관계가 흔들릴 때, 일이 어그러질 때—그 시점에서 비로소 묻습니다.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가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어떻게 다시 세워갈 것인가?”
복원은 과거를 향한 회귀의 힘이고, 재구성은 미래를 향한 창조의 힘입니다. 지혜로운 회복은 두 힘의 균형 위에서 이루어집니다. 즉,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이해하되, 거기에 머물지 않고— 지금의 현실 속에서 다시 살아내는 재구성의 결단.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성숙하며 살아가는 가장 깊은 형태의 회복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