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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

by 최정식

국제질서에서 “균형이 잡힌다”는 말은 대칭적인 힘의 구도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현실의 세계는 언제나 불균형 속에서 흘러가며, 국가들은 각자의 힘 차이를 품은 채 상호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균형이란 강약을 지우는 개념이 아니라, 불균형을 관리하여 모두가 감당할 수 있는 질서를 만드는 기술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약한 쪽이 생존할 수 있는 길은 단순히 힘을 키우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핵심은 약함을 보완하는 전략적 장치를 갖추는 데 있습니다. 동맹과 파트너십, 기술적 비교우위, 규범적 지지 확보, 국제여론의 우군 형성 등은 모두 작은 국가가 자신의 취약성을 전략적 자산으로 전환하기 위한 수단들입니다. 약자는 혼자 버티려 하지 않고, 환경을 설계하여 자신의 약함을 완화해야 합니다. 이것이 국제정치에서 ‘약자의 영리함’이라 부를 수 있는 요소입니다.


반면 강한 쪽이 균형을 유지하는 방식은 전혀 다릅니다. 강대국은 상대를 굴복시키는 힘을 갖지만, 그 힘을 그대로 사용한다면 주변국 전체가 불안해지고 결국 반(反)강대국 연합이 형성됩니다. 그래서 강자는 오히려 절제를 통해 헤게모니를 유지해야 합니다. 작은 양보, 규범의 존중, 대화의 틀 제공은 패배가 아니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비용, 즉 장기적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투자입니다. 강자의 ‘양보’는 약함이 아니라 자신의 힘에 대한 자신감과 장기적 관점에서의 지혜입니다.


결국 국제정치의 균형은 힘의 대칭이 아니라, 상호 취약성에 대한 인식과 절제의 조율에서 시작됩니다. 약자는 “나 혼자 버틸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고, 강자는 “나 혼자 결정하면 모두가 불안해진다”는 진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 상호 인식이 무너지면 질서는 쉽게 파괴되고, 국가들은 다시 제로섬 경쟁으로 회귀합니다.


오늘날 세계가 격동을 거듭하는 이유는 바로 이 절제와 인식이 동시에 흔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약자는 자신을 과신하고, 강자는 힘을 절제하기보다 과시하려 합니다. 이 간극이 커질수록 국가는 갈등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고, 국제질서는 불안정한 파동을 일으킵니다.


따라서 우리가 말하는 ‘균형’이란 단순히 힘을 맞추는 문제가 아니라, 약자의 보완 전략과 강자의 절제 전략이 만나 만들어내는 공존의 틀입니다. 불균형을 인정하면서도 그 불균형을 관리하는 협력의 지혜, 바로 이것이 국제질서가 유지되는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가장 세련된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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