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회사에 다닐 당시에 내 유일한 낙은 점심시간에 혼자 하는 산책이었다. 점심을 씹는 듯 마시는 듯 후다닥 먹고 들어와서 커피를 사러 다녀오겠다며 나올 때야 비로소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나는 카페로 가기 전에 일부러 근처 주택가를 빙 돌아 작은 놀이터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다 일어나곤 했다. 그날도 놀이터에서 10분 정도 앉아있다가 내려오는 길이었다. 어둑한 외벽에 걸친 나무의 초록빛이 예뻐 보여서 사진을 찍기 위해 핸드폰을 꺼냈다. 높은 담벼락 너머로 2층짜리 주택이 보였다. 감탄이 나올 정도로 찬란한 초록 나무의 사이사이로 건물의 1층 끄트머리가 보였다. 찰칵. 찰칵. 각도를 바꿔가며 여러 장을 찍은 후에 다시 카페를 향해 걸었다. 햇빛 때문에 핸드폰 화면이 잘 안 보였기 때문에 사무실에 들어가서 사진을 확인할 생각이었다.
차가운 커피를 손에 쥐고 사무실에 복귀했다. 커피를 책상에 내려놓고 꺼진 모니터도 다시 켜준 다음 시간을 확인했다. 5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서랍에서 양치 도구를 꺼내다가 사무실에 복귀하기 전 나무를 찍었던 게 생각났다. 사진을 확인하고 양치해도 시간은 충분할 것 같았다. 유독 푸르던 하늘 아래 찬란한 초록빛이 잘 담겼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책상에 엎어뒀던 핸드폰을 가져와 앨범을 열었다. 그리고 사진을 확인한 순간, 나는 말을 잃고 말았다. 담벼락 너머로 보이던 가정집 1층의 통창 중앙에서 창백한 얼굴이 카메라를 노려보고 있었다. 담벼락에 가려 눈 아래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분명 사진을 찍을 땐 그곳에 아무도 없었는데. 근데 보통 통창 앞에 섰을 때 정수리가 창 끝에 닿나 - 생각하는 동시에 오늘 찍은 사진을 모두 선택해 삭제했다. 휴지통에 들어가 사진을 완전히 삭제하면서도 천장에 닿는 정수리를 머릿속에서 몰아낼 수 없었다.
작년에 해둔 메모를 문장만 고쳐 옮겨온 글이다. 사진을 찍은 것까지는 실제 내 이야기이고, 이후는 모두 허구다. 이때 나는 괴담집*을 읽고 있었다. 괴담집을 읽으면서 출근한 날에는 제법 리얼한 상상을 했다. 실제로 비가 왔기 때문에 상상력에 더 힘이 들어갔던 것 같다.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에 걸맞게 괴담집을 챙겨 출근길 버스에 올랐다. 한참 재미있게 책을 읽다가 버스에서 내려서 정류장 앞 카페에서 커피를 샀다. 회사에는 늘 내가 제일 먼저 도착하는 편이었고, 오늘도 그랬다. 비가 와서 그런지, 괴담을 읽은 탓인지 건물의 내부 분위기가 묘했다. 원래 불을 켜두지 않아 어두웠지만, 오늘은 단순히 우중충한 것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괜히 무서워져서 듣고 있던 노래를 멈췄다. 순간 고요해진 공기 사이로 계단을 오르는 내 발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나는 노래를 멈춘 것을 후회하면서도 재생할 용기를 내지 못하고 회사 문 앞에 도착했다. 심장이 조금씩 빠르게 뛰는 것을 느끼며 키패드를 톡 건드렸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굳게 닫힌 문 너머를 떠올렸다. 이상한 건 불이 꺼져 어두운 사무실만이 아니라 비어있는 사무실 한 가운데에 누군가 서 있는 장면을 떠올렸다는 것이다. 그는 키가 아주 컸다. 얼마나 컸냐면 고개를 꺾어 사무실 천장에 한쪽 볼을 붙일 정도로 컸다. 그는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우두커니 서서 굳게 닫힌 문을 노려보고 있다. 거기까지 생각하니 웃음이 샜다. 괴담집을 너무 열심히 읽었나 보다. 이 정도로 상상력이 뛰어나지는 않았는데, 나중에 글로 써봐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제야 현실감이 돌아왔는지 오늘 해야 할 업무가 줄줄이 떠올랐다. 나는 멈췄던 손을 움직여 키패드를 다시 톡 건드렸다. 키패드 위로 번호판이 떠 올랐다.
그러나 나는 손을 움직일 수 없었다. 문 너머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문을 향해 다가오는 발소리였다.
이건 문 너머에 서 있는 괴이한 존재를 떠올린 것까지 - 가 실제다. 훨씬 더 축약된 버전으로 트위터에 써서 올렸는데, 이번에 쓰면서 좀 더 재미있는 상상이 떠올라 후반부를 조금 손봤다.
앞선 두 개의 소재를 떠올렸을 때는 괴담집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틈만 나면 괴이한 존재에 대해 상상했다. 보통 “내가 서 있는 이곳에 괴이한 존재가 나온다면?” 이 주제였다. 미처 닫지 못해서 손가락 한 마디만큼 열려있는 문이나 한 사람이 몸을 구겨 넣기도 어려울 정도로 좁은 담벼락 사이, 층계 사이에서 올려다본 난간 사이의 틈, 스쳐 지나가는 버스의 맨 뒷자리 창문, 그것 말고도 지금 이 순간 정면으로 향한 내 시야의 구석 같은 곳에서 희미한 이목구비가 비친다거나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스쳐 지나가는 것을 상상하곤 했다.
나는 괴담의 의뭉스러운 점이 주는 오싹함이 좋다.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의 괴이한 행동 혹은 현상 정도로 가볍게 넘길 수 있는 괴담이 좋다. 어떤 이유나 설명이 첨부되지 않는 나폴리탄 괴담이나 그저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 생고생하는 괴담 같은 것들 말이다. 그건 누구에게도 상처가 되지 않는 유머를 주고픈 마음과 비슷한 것 같다. 오늘 내가 소개한 이야기도 가벼운 공포에 가까웠다면 좋겠다.
*〈명신학교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김동식, 김선민, 문화류씨, 홍석인, 정명섭 / 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