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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나는 옷을 고르지 못했다

미도파 백화점에서 만난 그 소녀

by 앎삶

어릴 적, 미도파 백화점에 간 기억이 있다.

대중의 시선에는 지금의 신세계 강남처럼 반짝이고 크고 화려했던 곳.

삼촌의 친구가 아동복 매장을 운영하고 있었고,

삼촌은 동생과 나를 데리고 응원차 들렀다.


동생은 대저택의 소공녀가 입었던 예쁜 모자와 망토, 그리고 두툼한 원피스를 선물 받았다.

삼촌이 넉넉해서라기보다 친구의 매장을 도와주기 위한 소비였다는 걸

국민학교 4학년이었던 나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옷을 고르지 못했다.

입고 싶은 걸 말하지도, 고르지도 못한 채

그저 옷걸이 사이를 조용히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말은 없었지만, 마음 안에서는 많은 감정이 일었다.


“그래도 내가 언니인데…”

“동생이 더 예뻐서 챙긴 걸까?”

“내가 사달라고 하면 부담스러울까 봐…”

“나는 그냥 조용히 있어야 할 사람인가 봐…”


나는 그날, 너무도 조용히,

너무도 깊이 섭섭했던 것 같다.


오늘, 문득 그 장면이 떠올랐다.

눈을 감고 그 백화점의 옷걸이 사이를 떠도는 소녀를 다시 떠올려보았다.


그 아이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손끝으로 옷을 만지며 말없이 서 있다.

나는 그 아이에게 다가가, 이번엔 이렇게 말해본다.


“골라. 예쁜 거 아무거나 골라봐.”

“지금은 내가 어른이야.”

“지금의 나는 너에게 뭐든 사줄 수 있어.”

“지금 네가 입으면 정말 예쁠 거야.”


그 말을 들은 아이가 환하게 웃는다.

깊은 보조개가 생길 정도로.

그 웃음을 오랜만에 본다.

참 예쁘다.


그날 나는, 비교받은 게 아니라

말하지 못한 마음이 그냥 묻힌 것뿐이었다.


그날 나는, 사랑받지 못한 게 아니라

그저 조심했던 마음이 표현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는 알겠다.

나는 그때도 충분히 사랑스러웠고,

지금은 그 소녀를 위로해 줄 수 있는

능력 있는 어른이 되었다.


#미도파 백화점, 그리고 30년 후의 깨달음


하긴, 그날은

매번 내 옷을 물려 입던 동생이

드디어 자기만의 옷을 가지게 된 날이었다.


그 옷이, 동생에게 몇 안 되는

‘진짜 자기 옷’이었다는 걸

나는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깨달았다.


나는 늘 먼저 입었고,

동생은 늘 내 옷을 물려 입었다.

국민학교 4학년이던 그때,

그런 마음의 배려는 미처 알지 못했다.


30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

나는 내 어린 마음도,

동생의 마음도 껴안을 수 있게 되었다.


가끔은 오래된 감정 위에

미소 하나 얹을 수 있다는 게,

나이 듦이 주는 선물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혹시 당신도,

옷걸이 사이에서 조용히 울던 소녀였을까?

그 소녀에게 다시 말 걸어보며.

우리는, 이제 그 소녀를 안아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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