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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안에서

결혼기념일

by 앎삶

나도 남편도 회사 일로 지난주 주말 없이 달려온 일상의 끝에서,

잠깐이라도 쉬고 싶어 금요일 연차를 냈다.

마침 그날은 결혼기념일.

우리는 그것을 핑계 삼아, 조용히 제주행 비행기를 예약했다.


남해나 여수로 운전하겠다는 남편의 제안은 정중히 거절했다.

운전을 좋아하는 그이지만, 장거리 운전 뒤 피로에 짓눌린 그의 얼굴을 나는 알고 있다.

조수석에 앉아 눈치를 보느라 마음 졸이는 나.

운전하는 사람도, 그를 바라보는 사람도

달달하지 않은 여행은 이번엔 하고 싶지 않았다.


이번엔, 나란히.

같은 속도로, 같은 풍경을 함께 보고 싶었다.

그래서 렌터카도 알아보지 않았다.

내가 운전하는 것 또한, 핸들 조작 하나하나 간섭받는 그 특유의 안전주의로 인해

결국은 우리 둘 다 피곤해지니까.


그래서 선택한 여행의 길잡이는 ‘버스’.

버스로 닿지 않는 곳은 두 다리와 콜택시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계획은 단출했다.

제주행 비행기, 귤밭 안 숙소, 그리고 그 외엔 비워두기로 했다.

나머지는 그날그날 마음이 가는 대로 두었다.


제주도는 늘 그렇게 너그럽다.

버스 하나만 타도, 반쯤은 완성된 여행이 되는 곳.

처음 올라탄 버스는 제주 해안선을 따라 천천히 달렸다.

우리는 마음에 드는 정류장에서 내려

바다를 가까이 마주할 수 있는 카페에 들어섰다.


창밖으로는 이륙과 착륙을 반복하는 비행기와

햇살을 머금은 파도가 부드럽게 펼쳐졌다.

무릎 앞 테이블 위엔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


조용한 풍경 속에서,

회사와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우리의 일상의 피로도 조용히 풀려나갔다.


그렇게 앉아 있다 보니 식사 시간이 되어

근처에서 오마카세 식당을 즉흥적으로 방문했다.

셰프는 반갑게 인사했고,

접시에 한 점 한 점 정성을 담아낸 음식들이

제주 바다 풍광과 어우러져 더욱 근사하게 다가왔다.


한라산 소주 두 병까지 비워냈다.

평소 술을 거의 마시지 않는 우리에겐 꽤 특별한 식사였다.


살짝 술기운이 오른 남편이 말했다.

“20살 초반, 지하철 타고 창밖 아파트들을 보며 생각했어.

나도 언젠간 저런 아파트 한 채 가질 수 있을까?”라고 소망을 했던 과거를 털어 두었다.

그때 그는 모으는 것밖에 할 수 없던 청년이었고,

낭비를 모르는 습관이 그의 성품이 되었고,

정말 필요한 순간에만 꼭 맞춰 쓰는 사람이 되었다.

그의 그런 성실함으로 우리 가족은 서울 아파트를 소유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는 것은 두 손 번쩍 들어 큰 동그라미 그려 주기에 마땅하다.


그리고 점점 혀가 꼬인 그는 계속 말했다.

“나는 총각 때 내가 이렇게 괜찮은 남자 사람인지 몰랐어, 지금 보니 나 좀 괜찮은데

세상에서 만나 본 여자가 너 하나만이라는 게 조금 억울할 때도 있어. 더 많은 사랑도 못 해보고.” (진짜 억울했는지 결혼 전에 내가 만났던 남자사람 이름을 불러낸다)


나는 웃으며 되받아쳤다.

“그래, 나는 이렇게 안목이 있는 여자야~~

당신도 아직 몰랐던 당신의 매력을,

나는 그때 이미 알아봤거든.

다른 여자들이 스쳐 지나갈 때, 나는 한눈에 알아봤지

당신의 깊은 가능성과 따뜻함과 선함을~.”


그렇게 웃고 떠들다 결국, 낮술의 무서움을 실감하며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왔다.

편의점에서 숙취해소제도 사 마셨다.

숙취에 내릴 곳을 놓칠까 주위를 살피면서

2시간 넘게 버스를 탔더니

어느덧 맨 정신으로

귤밭에 둘러싸인 남쪽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 가는 길에 편의점과 마트가 없어

물과 라면, 사과 한 알을 샀고,

물 2리터를 살지 말지를 두고

너구리 라면이냐 스낵면이냐를 두고

짧은 말다툼도 있었다.

고작 그걸로.

그러나 우리는 15년을 그렇게 살아왔다.


어쩌면 함께 살아가는 방식이란,

크고 멋진 일보다

이런 사소한 감정의 파도를

몇 번이고 함께 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음 날, 우리는 다시 버스를 탔다.

창문을 열고 바닷바람을 폐 깊숙이 들이마셨다.

해안선을 따라 천천히 달리는 그 버스에서,

정류소마다 잠시 멈추고,

사람이 없어도 속도를 내지 않고,

누군가를 기다리며 묵묵히 달리는 그 리듬은

마치 우리의 삶과도 같았다.


사람들은 어떤 버스든 끝까지 확인하지 않아도

그 버스가 오늘 자기 할 일을 해냈다는 걸 안다.

(타이어 펑크나 갑작스러운 사고 같은 변수가 없었다면.)

버스는 늘 정해진 속도로 앞으로 나아간다.

유턴도, 후진도 없이.

사실 그런 유턴이나 후진기어 기능이 없진 않지만,

그렇게 하지 않기로 결심한 존재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이미 지나온 길을 후회하거나

되돌아보며 주저하지 않도록

또, 길 가다가 도

쉬어가는 법, 기다리는 법,

그리고 함께 타고 있는 많은 사람들 중,

가장 중요한 사람을 알아보는 법도 잊지 않도록


버스는 그렇게 우리에게

조용한 깨달음을 안겨주었다.


우리는 다음날 아침 일어나 다시 버스를 타고

해안선을 길게 따라

제주국제공항에서 서울로 향하는 비행기에 탑승했다.


서울로 향하는 비행기가 착륙하고,

스피커에서 익숙한 멘트가 흘러나온다.

“서울에서, 즐거운 여행 되세요.”


그래, 우리도 그렇게 살아보자.

오늘부터 다시 시작되는 일상이라는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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