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
가급적이면 하고 싶은 말이나 행동이 있다면 바로 실행하려고 한다. 이유는 단 하나,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기 위해서다.
과거의 나는 말이든 행동이든 '나중에 하지 뭐' 하고 넘겨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대부분의 감정과 행동을 뒤로 미뤄버리고는 이내 후회하곤 했다. 그랬으면 안 됐는데, 그러지 말걸. 과거의 순간에 얽매여 그렇게 계속 마음 쓰며 현재의 시간을 아깝게 소비하곤 했다.
지금의 나는 참 많이 달라졌다. 과거든 미래든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게 됐다. 굳이 지나간 시간에 크게 연연하지 않고 미래에 대한 엄청난 기대도 하지 않는다. 지나간 일은 그대로 흘려보내고 바라는 것이 많지 않으니 크게 실망스러울 것도 없다.
대신 지금 이 순간을 마주할 때 있는 그대로 충분히 즐기는 것, 그걸로 괜찮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 그렇게 내 삶은 현재의 내 마음을 가만히 바라보는 시간을 늘려가고 있다. 다시 오지 않을 지금이니까, 표현도 생각도 감정도 현재의 마음에 솔직해지려 노력하고 있다. 내가 이렇게 된 데는 하나의 큰 사건이 있었다. 생각만 해도 너무나 슬프고 아리지만 너무 감사하고 다행인 그 사건.
입사한 지 고작 2달, 아직 새로운 환경에 적응이 덜 된 상태의 나는 빠른 적응을 위해 사무실에서 고군분투를 하고 있었다. 전화벨이 울린다. 엄마다.
'아, 이것만 끝내면 되는데... 나중에 하지 뭐'
받지 않았다. 그런데 연이어 평상시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길이 없는 친오빠에게 전화가 온다. 뭔 일이 있나 보다 싶어서 조심스레 회사의 복도로 달려 나간다. 약간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다.
"아, 왜"
"어디야?"
"이 시간에 회사지 어디야. 왜"
"어... 저 지금 휴가 좀 써라"
"뭐? 나 입사한 지 2달밖에 안됐어. 휴가가 어딨어"
"아빠가, 아빠가 지금 병원이야."
"병원?"
무슨 말이냐고 물었더니 아빠가 지금 중환자실에 있으니 지금 회사에 양해를 구하고 빨리 오란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그냥 빨리 오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할 뿐이다. 웬만한 일에는 눈 한번 꿈뻑도 안 하는 냉동인간 오빠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린다. 아, 뭔가 큰일이 났구나 싶었다.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일을 대충 정리하고 심호흡을 크게 한 뒤 팀장님께 달려가 말씀을 드렸다. 다행히 흔쾌히 빨리 가보라고 해주셨고 그렇게 발걸음을 조금씩 조금씩 빠르게, 그러다 격렬하게 뛰어 눈 앞에 보이는 택시를 선택해 병원으로 간다. "한강성심병원이요."
택시를 내리자마자 병원으로 뛰어가 중환자실 위치를 물어 올라가니 저만치 얼굴은 사색이 되어 눈물은 범벅이 되어 넋이 반쯤 나간 엄마, 그런 엄마를 옆에서 달래는 오빠. 그리고 숙연하게 엄마와 오빠를 바라보는 남편. 주변에는 이모, 삼촌들과 같이 가까운 친척들이 이어서 눈에 들어온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의 나는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저벅저벅 발길을 옮길 뿐이다. 감각도 없는 무거운 발걸음을 겨우 옮겨 도착하니 너무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있는 이모가 나를 보고 내 이름을 크게 부르며 다가온다. 운다. 나를 꼬옥 껴안고 운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아빠가 병원에 있다고 했고 중환자실로 오라고 해서 왔다. 모든 조각을 조합하면 아빠에게 무슨 일이 생겼고 그 무언가의 일로 가족들이 병원에 모인 것이며 이 정도로 울고 있다는 것은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이다. 마음을 차분히 정돈하고 그나마 정신이 온전해 보이는 오빠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아빠가... 현장에서 일하는데 동파됐던 기름통이 터지면서 화재사고가 났고, 마지막까지 직원을 내보내다가 전신화상을 입었다나 봐."
"...."
갑자기 눈 앞의 세상이 핑 돌아서 쓰러질 뻔했다. 아, 드라마에서 너무 충격을 받으면 그냥 실신해버리던데 이런 기분이구나. 이렇게 픽 픽 하고 쓰러지는 것이었구나. 너무 황당해서 눈물도 안 났다. 그때, 간호사가 아빠 이름을 호명하며 부른다. "보호자분, 가족분 들어오세요. 4명까지만 가능하세요."
엄마, 오빠, 나 그리고 남편까지 네 명이 나란히 병원에서 건네는 가운을 입고 마스크와 일회용 장갑을 낀다. 그때까지 몰랐는데 아빠가 있던 그 병원이 화상전문 병원이라 감염관리가 철저하다고 했다. 화상은 감염이 치명적이라 하더라.
태어나서 처음 중환자실을 들어왔는데 너무 무서워서 온 몸이 위축되고 긴장됐다. 긴장감을 유지한 채 주변을 두리번거려도 아빠는 보이지 않는다. 간호사가 우리를 부른다. "이쪽으로 오세요"
저 멀리 온몸에 붕대를 감은 게 설마 아빠는 아니겠지. 근데 왜 발걸음이 계속 거기로 향하는 걸까. 한 명, 두 명을 지나고 마지막에 있는 침대에서 아빠 이름을 발견한다. 눈과 입을 제외한 온몸이 붕대라 아빠인지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내가 아는 우리 아빠는 캡틴아메리카 저리 가라 할 정도의 튼튼한 몸인데, 언제 이렇게 야위었던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아빠를 부른다.
"아빠..."
아빠는 아직 눈이 온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라 귀로 잔잔히 스며드는 딸의 목소리에 반응한다. 그 아픈 몸을 일으키려는 시도와 나를 찾으려 손을 여기저기 찾는 시도를 동시에 한다.
당신의 인생에 최고의 보물인, 딸을 그렇게도 열심히 찾는다. 갈 길을 잃은 아빠의 손을 내가 조심스럽게 잡으니 이내 안심하는 듯 떨어지지 않는 입을 겨우 떼내며 내 이름을 속삭이듯 부른다.
그제야, 단단하게 잡아두었던 마음이 와르르 무너지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렇게 그 자리에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아빠'라는 단어만 계속 외치며 그렇게 열심히도 울기만 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앞에 있는 이 사람이 지금 내 아빠가 아니기를, 이 모든 게 꿈이기를 바랐다.
난 아직 아빠에게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데, 아직 아빠랑 할게 너무 많은데 당장 내일이라도 아빠가 없으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으로 지배되어 팔도 다리도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면회시간 내내 울기만 해서 어떻게 나왔는지 잘 기억도 안 난다.
그 날 집에 오며 깨달았다. 하고 싶은 말도 해야 할 일도 할 수 있을 때 해야 한다고. 지금이 아니면, 어쩌면 내일은 하고 싶어도 아무것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다음 날, 회사에 다시 출근을 했고 괜찮냐는 팀장님의 말에 대략적인 설명만 가볍게 건네고 양해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한 뒤 목례 후 자리에 앉았다.
회사에서는 가능하면 울지 않았다. 나약해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조금 나약했어도 됐는데 그때는 조금이라도 벌어서 병원비에 보탬이 되겠다는 생각만이 있었을 뿐이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저 그 생각만 가득했다.
그렇게 집중도 있게 일을 하고 칼퇴근을 해서 아빠에게 달려간 생활을 한 달 정도 했을까. 아빠는 담당 의사도 놀랄 정도의 기적의 회복력을 보였고 아빠는 가족만 생각하며 재활도 그 누구보다 열심히 받았다고 했다. 아빠도 나도 각자의 목적 하나를 위해 그 순간 최선을 다했다.
사고를 낸 아빠 회사가 악덕 기업은 아니었는지 아빠가 정상생활이 가능할 때까지 모든 병원비와 치료비를 산재처리를 진행하기로 약속했기에 병원비도 걱정이 없어졌다. 병원비 부담이 사라지니 나도 조금은 내려놓고 이 상황을 맞이할 수 있게 됐다.
아빠가 조금 건강을 되찾은 뒤 아빠와 둘이 대화하는데 나에게 묻는다.
"아빠 얼굴이 형편없지?"
"아니? 여기서 아빠가 제일 잘생겼어"
아빠가 수줍게 미소 짓는다. 아빠에게 이토록 살갑게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던 지난 세월의 내가 떠올랐다. 그 순간만큼은 그 누구보다 살갑고 애교 많은 예쁜 딸이 되어있었다. 이 시간이 만약 존재하지 못했다면, 나는 아마도 언제까지고 후회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나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크게 다가오지 않게 됐다. 그 어떤 사건이 아빠를 당장 상실할지도 모르는 두려움보다 클까. 당시를 회상하면 아려오는 기억이지만 덕분에 나는 나에게 일어나는 그 어떤 사건도 조금 여유롭게 바라볼 수 있게 됐다.
당장 이 감정노동의 필요성을 못 느끼면 가벼이 흘려보낼 줄 알게 됐다. 그렇게 자연히 감정을 제어하고 판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감정 기복이 줄어드니 가능한 일정한 감정선을 유지할 수 있게 됐고 조급해하지 않고 지금 해야 할 일을 조금 더 심도 있게 고민할 수 있게 됐다. 득도라도 한 건가 싶지만, 아빠 사건 이후로 정말 삶이 달라졌다.
자기 몫의 삶을 후회 없이 살아야 한다. 무슨 일이건 생각이 떠올랐을 때 바로 실행할 일이다. 지금이 바로 그때이지 따로 시절이 사람을 기다려주는 것은 아니다. - 법정 [산방한담]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이 있다. 아빠는 화재사고가 났던 그곳에서 일을 다시 시작했다. 과거가 어땠든 지금 당신의 몫을 하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과거를 떠올리면 걱정부터 된 것은 사실이지만 아빠의 사과나무를 존중하고 응원하기로 했다.
다시 마주할 수 없을지 모르는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고 충분히 즐기길 바란다. 말이든 행동이든 할 수 있을 때 해야 할 것이다. 당장 내일이 없다고 생각했을 때 지금 해야겠다고 느껴진다면 당장 실행하길 바란다. 그렇게 지금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온전하게 내 마음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