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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밝음 Oct 08. 2024

언젠간 만날 사이

 연락할 길 없지만 곁에 있는 친구

철없지만 순수했던 여고 시절. 내 곁에 머물러주는 친구 한 명이 있었다. 찰랑거리는 머릿결에 커다란 눈을 가진 친구. M과는 1, 2학년 이 년간 같은 반이었다. 하이틴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운명적인 사귐도 없었고 특별히 친해진 계기도 없었다. 그냥 어느 날 눈 떠보니 옆에 있는 친구였다. 노력해서 사람을 사귀려는 편이 아니고 특정 인물보다는 여러 명과 두루두루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M도 처음엔 그런 친구 중 한 명일 뿐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주변을 둘러보니 내 곁엔 M이 있었고, 그녀는 내 인생에 서서히 스며들어 있었다.


M의 별명은 원로 가수 '이미자'였다. 이름 두 글자가 같다는 이유만으로 예쁘장한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별명을 갖게 된 미자. 미자는 빼빼 마른 몸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먹성을 가졌었다. 교실 구석에서 친구들과 맛있는 간식을 먹고 있으면 귀신같이 냄새를 맡고 '나도~~~"를 외치며 달려왔다. 나는 그런 솔직한 미자가 사랑스러웠다. 한때 O가네 닭갈비가 유행했었다. 같이 밥을 먹으러 가면 볶음밥을 시켜 먹고 마지막에 미자는 꼭 철판에 들러붙은 눌은밥을 박박 긁어먹었다. 한 톨도 남길 수 없다는 의지의 표명을 보며 대체 저렇게 먹은 건 다 어디로 가나 신기했다. 밥 먹은 후 다음 코스는 늘 노래방이었다. 없는 용돈 긁어모아 둘이 누리는 소소한 일탈은 즐거움과 추억을 남겨주었다.


미자는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게 책 선물을 준 친구이기도 하다. 장 자끄 샹뻬의 『얼굴 빨개지는 아이』. 주인공인 까이유는 감정과 상관없이 시도 때도 없이 얼굴이 빨개지는 아이였다. 원인도 모르고 놀아주는 사람도 없어 외롭게 있던 어느 날, 이유 없이 늘 재채기하는 라토를 만나게 된다. 둘은 마음을 나누는 소중한 친구가 되었지만, 라토의 이사로 결국 헤어지게 된다. 많은 시간이 흐르고 성인이 된 어느 날 어디선가 들려오는 재채기 소리에 둘은 단번에 서로를 알아보았다. 그들은 떨어진 시간이 무색하게 서로 깊은 우정을 나누며 지냈다.


까이유와 라토처럼 우린 마음을 나눌 수 있는 편안하고 좋은 친구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로 다른 대학에 들어갔지만 상관없었다. 부산에 살던 미자가 서울로 직장을 갔어도, 내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살았어도 상관없었다. 하물며 미자가 스페인어 박사과정을 밟으러 스페인에 가서 몇 년을 살 때까지도 우린 마음으로 늘 함께했다. 오래도록 곁에 있어 주는 친구였다. 만날 순 없지만 주기적으로 안부를 묻고 매년 서로의 생일날을 챙기는 소중한 사이였다. 


 미자가 선물해 준 그 책이 도화선이 되었을까. 사는 게 바빠서 정신없이 시간을 흘려보내고 나서야 문득 미자와 연락 한지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언제 어떻게 친해졌는지 모르게 이루어졌던 만남처럼, 언제 어떻게 멀어졌는지도 모르게 헤어졌다. 나는 둘째 출산과 아빠 병환으로 오늘이 며칠인지도 모르는 나날을 보냈고,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다던 미자도 기약 없이 홀연히 사라졌다.


전화번호도 모르고 유일한 소통 창구였던 카톡 프로필 화면도 텅 비어 있다. 연락이 안 될 걸 알면서도 말을 걸어본다. 

"미자!"

시간이 흘러도 숫자 '1'은 사라지지 않는다.


파란 하늘과 흰 구름이 지나고 연홍색 노을이 세상을 물들일 때, 함께 하고 싶은 친구가 누구냐 물으면 미자라고 말할 것 같다. 어디서 뭘 하며 사는지 모르지만 무탈히 잘 지내기만을 바라게 되는 내 친구 미자. 세월이 흘러 환갑이 된다고 하더라도, 어디선가 우연히 마주치게 된다고 하더라도. 까이유와 라토처럼 우린 서로를 편안히 환대할 수 있을 것 같다.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한 번도 서로를 떠난 적 없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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