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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호 May 15. 2022

교사의 직업병

선생님, 아 선생님

선생님. 꼭 저한테 보험가입을 하지 않으시더라도 보험가입을 하실 때에는 목 쪽 질환과 다리 쪽 질환이 보장되는지 꼭 확인하시고 진행하세요. 교사들이 특히 성대나 다리 쪽 질환에 많이 걸리시거든요.


교사의 직업병 하면 흔히 성대결절이나 하지정맥류를 쉽게 떠올린다. 하루 종일 목을 쓰고 하루 종일 서있는 탓에 아무래도 높은 발생빈도를 보이는 것이리라. 이런 종류의 질병도 물론 힘들고 고통스러울 테지만 직업병이라는 것은 어느 직업에나 존재하는 것이고, 아직 경력이 얼마 되지 않은 탓인지 본디 목소리 톤이 높지 않은 탓인지 다행스럽게도 아직 성대나 다리에 무리가 온 적이 없어 성대와 다리에 자주 찾아온다는 교사의 직업병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교직경력 8년 차. 많다고 하기도 적다고 하기도 애매한 시간이지만 아이들과 학교라는 공간에서 함께 생활하며 다양한 감정을 느껴왔다. 여러 종류의 긍정적 부정적인 감정들을 느끼곤 하지만 그중 교사를 가장 힘들게 하며, 아직 정년이 되지 않은 교사들이 퇴직을 결심하게 만들 정도로 강력한 파동을 전달하는 감정이 있다. 그것은 바로 베푼 사랑이 조롱과 비난으로 되돌아옴을 알아차렸을 때 느껴지는 "배신감"이다


선생만 있을 뿐 스승은 없다는 말을 쉽게들 한다. 옛날이 좋았다며 수십 년 전 학창 시절을 미화하는 식의 발언들을 종종 듣는다. 체벌과 폭언, 촌지와 차별이 난무하던 시절의 교사를 떠올리며 저주하면서도 그때가 오히려 참스승이 많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20년 전 각 그랜저가 2022년의 그랜저보다 성능이 좋다는 소리와 별반 다르지 않게 들려 이게 정말 맞는 소리인지 잠시 고민을 하게 된다.


이상하지 않은가. 단순히 경험적 통계에만 의존해 생각해 보더라도 그 시절 교사의 폭언과 폭력으로 몸과 마음의 상처를 입었던 기억을 둘쯤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한데 어떻게 그 시절에 참스승이 많았다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일까.


이십  전에는 학생이었기 때문에 학생 입장에서 교사를 바라보았다면 현재는 교직에 몸담으며 교사의 입장에서 교사를 바라본다. 이십 년의 시간을 건너 학생과 교사라는 입장 차이가 분명 존재하기도 할 테지만 단순한 입장 차이를 넘어 인간적으로 본받고 싶을 만큼 열과 성을 다해 학생을 사랑으로 대하고 수업 개발을 위해 애쓰는 교사들이 넘쳐난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이십 , 삼십  전과 비교하여 스승이 줄어들었다는 말을 감히 꺼낼 수 없게 된다.


나쁜 교사는 어디에나 존재했을 테고
동시에 좋은 교사도 어디에나 존재했을 테다.


다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회적이라는 말의 의미는 체제에 종속된다는 의미로 사용하고자 한다. 체벌이 용인되던 시절에는 사람의 본성에 관계없이 체벌을 가하는 교사의 비율이 아무래도 높을 수밖에 없다. 흡연이 용인되던 사회적 시스템 아래에서는 길거리든 가게든 버스 안에서든 사람들은 흡연을 하게 된다. 동성애가 법적으로 금지된 국가보다 동성애를 허용하는 국가에서 동성애적 사랑은 더욱 표면으로 드러나기 쉬우며 사람들의 인식 또한 허용적으로 변화하게 된다.


일반적이며 보편적인 대중의 인식은 제도에 수렴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그래서 사회적 체제에 종속되는 존재다. 다시 한번 물어보고 싶다. 정말 수십 년 전이 지금보다 참된 스승이 많았을까? 매로 때리는 것은 오히려 정중하게 느껴질 정도로 뺨을 때리고 발로 차고 인격 모독과 부모 욕을 해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던 체제 아래에서의 교사들과, 어린이들에게 사탕 하나 편지하나 받는 것도 혹시 무슨 법에 저촉되진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스승의 날이 오히려 불편하고 두려워진 요즘의 교사들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존재할까?

 

제도와 규율이 엄격해져야 결과물이 좋아진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악행이 최대한으로 발휘될 수 있는 느슨한 조건보다는 최소한의 제약이 의미 있는 정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교사는 여러 가지를 가르치는 사람이다. 가르침과 배움을 가장 효율적으로 작동시키는 것은 바로 관계 형성이다. 가르침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교사는 천성적으로 혹은 후천적인 교육으로 아이들을 사랑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다.


허나 건네는 마음에 비해 돌아오는 마음이 형편없을 때가 많다. 기대를 하고 마음을 건네는 것은 아니지만, 교과를 가르치기 위해서라는 목적을 넘어 교사는 다양한 상황에 마음을 써야 하기 때문에 학생에게 인간적으로, 사랑으로 다가설 수밖에 없다.


그런데 간혹 아이들이 입을 통해 뱉어내는 날카로운 말들은 사랑을 기본값으로 장착하고 있는 교사의 마음을 후벼 판다. 


학생 : 선생님~ 오늘 입은 옷 너무 멋져요~
교사 : 그래? 고마워~ 너도 오늘 머리 예쁘다.
학생 : 병신 칭찬해주니까 좋다고 쪼개기는(들릴 듯 말듯한 소리로)
교사 :...?


당신이 평소에 잘했으면 그런 말을 듣지 않았을 것 아니냐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겠다. 허나 결코 그렇지 않다. 좋은 어른이 있고 나쁜 어른이 있듯, 좋은 아이가 있고 나쁜 아이가 있다.


이 배신감은 교사에게 생각보다 크게 다가온다. 왜냐하면 성인 간의 관계와 달리 교사는 이런 아이가 올바르게 자랄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교육적 효과가 나타날 확률이 매우 낮다는 데 있다.  안 바뀐다는 소리다. 해마다 이런 아이들은 존재한다. 해마다 반복될 것을 알면서도 교사이기 때문에 사랑을 다시 되새긴다. 


이런 아이들을 만나면 오히려 교사로서 도전의식이 생기기도 한다. 옳지, 올해 나한테 큰 선물이 왔구나. 내가 너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주리라. 간혹 크게 변하는 아이를 마주할 때면 본인의 노력과 변화한 아이 양쪽에 감동하기도 하겠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실패한다. 일 년 동안 교사 한 사람이 학생 하나를 바꾸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바로 이 회의감을 동반한 배신감이 교사의 직업병이다. 성대결절이나 하지정맥류는 교사들에게 많이 발생하는 질병이기는 하나 교사 전체가 걸리는 질병은 아니다. 하지만 이 배신감과 회의감은 거의 모든 교사가 교직생활을 하는 동안 반드시 겪게 된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 교사의 직업병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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