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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호 Jul 24. 2020

지쳐서 질린다

지속적이며 반복적으로 지쳐가는 일


"질린다"라표현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실제로 실감해 본 적이 별로 없다.


 나와 관계를 맺는 것이라면 그게 음식이건 영화건 책이건 음악이건, 무엇이 되었든 일단 한번 좋아져서 빠져버리고 난 다음이면 아무리 주야장천 마르고 닳도록 반복해서 그것과 접한다고 한들  결코 그 대상에 대해서 질린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느낌을 받아본 적도 없다.  

 

 대학 4학년 임용을 준비하던 시절, 3학년 때까지의 대학생활과 비교하여 가장 큰 변화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한 끼를 사 먹던 식사가 두 끼로 늘었다는 것을 꼽을 수 있겠다. 매일 두 끼니를 사 먹어야 되는 생활은 생각보다 고역이었다. 교육대학교 주변은 전국 어딜가봐도 번화한 곳이 없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는데 내가 졸업한 학교의 주변도 예외는 아니었다. 식당이 몇 군데 없어서 일주일이면 주변 식당 투어를 끝마치기에 충분했다. 자연스레 모든 식당들이 단골이 되어갔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자주 가던 집이 하나 있었다. 점심특선으로 김치찌개를 파는 고깃집이 바로 나의 최애 식당이었다. 얼마나 자주 갔던지 저녁에는 하지 않는 김치찌개 정식을 내가 가면 해줄 정도였고 가끔 손님이 없는 한산한 시간이면 계란 프라이를 따로 해주기도 하였다. 어제도 먹고 오늘도 먹었지만 내일도 김치찌개를 먹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심지어 어떤 날에는 같이 밥을 먹는 친구들이 정한 메뉴가 영 먹기 싫어 혼자서 김치찌개를 먹으러 발걸음을 옮기기도 했다. 그 정도로 나의 김치찌개 사랑은 대단했다.


 대학시절 댄스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한 곡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서 같은 곡을 수백 번씩 반복해서 들었다. 그 당시 집에서 학교까지의 거리는 버스로 1시간 정도의 거리였다. 하루에 왕복 2시간을 꼬박 한 곡만 반복해서 듣는 날도 많았다. 그 당시 아이팟이라는 기계에 음악을 넣어서 고 다녔는데 아이팟의 기능 중에 재생 횟수를 알려 주는 기능이 있었다. 내 기억에 가장 많은 재생 횟수를 기록했던 곡이 500회를 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 곡이 4분이라고 어림잡았을 때, 약 20일 동안 매일 2시간씩 들었던 셈이다.  


 어린 시절 만화책을 좋아했다. 학교 앞에 있던 만화가게에 일 같이 출근 도장을 찍어가며 용돈의 대부분을 만화책을 보는데 탕진했다. 만화책을 빌려 보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급기야 책을 사서 모았다. 친구들은 빌려서 보면 되지 뭐 하러 책을 느냐며 의아해하며 물어왔지만 사둔 만화책은 두고두고 읽으면서 결코 구매한 돈이 아깝지 않을 만큼 반복해서 보았다.


 앞선 일화들의 공통점은 지긋지긋할 정도로 반복을 했지만 결코 질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데 질린다는 말이 잔인하고 무섭게 쓰일 때가 있다.

바로 사람에게 쓰일 때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질린다는 감정을 느끼게 되는 순간은 나에게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반복적으로 끼쳐 지치게 만들 때 찾아온다. 그때 우리는 그 사람에게 질린다는 말을 직접 뱉거나 속으로 삼키고 마는데, 무엇이 되었건 결과적으로 그 사람과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둔하고 예민하지 못해 질림을 잘 느끼지 못하는 나의 성향이 사람에게까지 뻗어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사람을 쉽게 질려하지 말 것. 한 순간으로 그 사람의 영원을 판단하지 말라는 말처럼 내가 바라본 그 사람의 일부가 그 사람의 전체인 것처럼 쉽게 속단하지 않는 내가 되기를, 순간의 판단으로 저 사람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함을 범하지 않기를, 그리하여 질렸다고 생각하는 과오를 범하지 않기를 소망한다. 조금 더 욕심을 부려본다면 나 또한 다른 사람에게 질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주고 싶다는 희망도 하나 살짝 얹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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