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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페이스

불안을 긍정해도 괜찮아

by 정 호

"너는 보여? 네 괴물 같은 얼굴이?"

주인공 시울은 자기 얼굴을 보지 못한다. 거울로도, 사진으로도, 어린 시절부터 그 어떤 방법으로도 자기 얼굴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온 주인공 시울은 단 한 번도 자기 얼굴을 마주한 적이 없다. 그래서 궁금하다. 다른 사람들은 자기 얼굴을 들여다보고 사는지. 그래서 시울은 묻는다. 네 얼굴이 보이냐고. 시울의 질문은 타인도 나와 같은지, 내가 특이한 사람인지, 자신의 보편성과 유일성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이것은 우리가 청소년기에 겪었던 일이며 동시에 작가가 던지는 화두이기도 하다. 우리는 과연 괴물 같은 자기 내면을 인식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인간은 필연적으로 양면성을 지닌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다. 자기 내면의 다양한 목소리 때문에 고뇌하는 주인공들을 우리는 영화나 드라마, 책을 통해 무수히 만난다. 그들은 한결같이 자기 안의 모순 때문에 괴로워한다. 그러다가 선한 쪽을 조금 더 긍정하며 살거나 악한 쪽을 합리화하며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악한 단면을 스스로 마주할 때면 자신이 꼭 괴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것이 고통스러워 어떤 인물들은 자아 성찰을 포기하거나 이율배반적인 자기 모습이 싫어 자신의 부정의를 정의인 것처럼 합리화하기도 한다. 그렇게 그들은 진짜 괴물이 된다.


진짜 괴물이 되기 전에, 자신이 어느 정도 괴물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순간, 인간은 성장한다. 시울은 묵재가 실수로 던진 농구공에 맞아 넘어지며 사물함에 이마를 긁힌다. 남들 눈에는 흉측해 보였을지 모를 상처는 시울에게 얼마간의 고통을 준다. 하지만 그날 이후 시울은 자신의 얼굴 중 유일하게 상처 난 이마를 볼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상처를 통해서만 자신의 진짜 얼굴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는 것, 그것은 아프고 두려운 일이지만 인간 내면에 자연스럽게 입력된 코딩 언어다. 인간은 본디 그렇게 설계되어 있다.


남들 눈치를 안 보는 사람들이 왜 그런 줄 아느냐고, 그것은 눈치를 볼 필요가 없기 때문이며 그 자체가 권력이라는 어떤 이의 말에 중년을 바라보는 나는 떫은맛의 동의를 표한다. 하지만 그런 이들은 분명 괴물이다. 권력이 있어 남들 눈치를 볼 필요가 없을지 몰라도 그 권력의 크기만큼 자신을 들여다볼 기회를 잃어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경향성은 점차 가속화된다. 자신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비뚤어진 가치관과 그릇된 자아관을 품은 괴물이 된다. 그렇게 자신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 서서히 무너지거나, 괴물에 맞서는 타의에 의해 언젠가 반드시 무너져 내린다. 반듯하지 못한 자아관을 가진 사람들은 위험하다. 중학생 때 만화책을 좋아했다. 그 당시 재미있게 봤던 만화 가운데 몬스터라는 만화가 있었다. 몬스터에는 요한이라는 악역이 나오는데 그에게는 이름이 없다. 실험 대상으로 태어난 그는 이름을 부여받지 못하고 여러 이유로 자신을 명확히 인식하지 못한 채 성장한다. 그리고 몇몇 불우한 경험까지 겹치며 그는 악마가 된다. 인간의 악마성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보여주는 캐릭터다.


인간은 오직 상처 입고 무너져 내릴 때, 자기 내면을 철저하게 파헤치려는 습성을 마지못해 꺼낸다. 무언가 잘 안 풀릴 때 이유를 찾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때 그 마음을 외면하지 않고 동력으로 삼아 자기 심연을 똑바로 응시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비로소 제대로 인식하게 된다. 상처는 자아를 찾고 바로 세우기 위해 반드시 겪어야 하는 과정인 셈이다.


모든 것을 당연하게 느끼는 이들은 질문하지 않는다. 어딘가 석연치 않은 것이 느껴지고 무언가 이상하고 불편한 것을 감지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질문을 던진다. 엄마가 자신을 걱정하자 그것을 귀찮게 느낀 시울은 어느 순간 얼굴이 보이는 척을 한다. 시울의 엄마는 다행히 시울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눈이 정확히 어떻게 생겼고 코가 어떤 모양이며 입술이 도톰한지 얇은지, 구체적인 질문은 하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다. 엄마 눈에는 시울의 얼굴이 보이기 때문이다. 시울은 앞으로 끝없이 질문을 던지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자기 얼굴을 볼 수 없는 사람이 자신뿐이라는 것, 그것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은 여섯 살 어린아이조차 느낄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시울이 자기 얼굴을 알지 못해 타인의 얼굴을 살피며 자기 얼굴을 유추하는 모습은 어찌 보면 우리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타인의 기호, 타인의 취향, 타인의 사고방식, 타인의 가치관이나 신념을 오랜 세월 지켜보며 그것이 세상의 표준이나 어떤 기준점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것에 나를 끼워 맞추며 살아가는 삶. 이것을 비난할 일만은 아니다. 우리가 자기 내면을 스스로 인식하기 전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기 인식은 외부 세계, 특히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헤겔의 주장처럼 우리는 자기를 독립적으로 인식하기에 앞서 반드시 외부와 타인의 기준을 먼저 받아들이거나 비판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니 타인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려는 시울의 노력을 바라보며 우리 스스로 자괴감에 빠질 필요는 없다. 그것은 차츰 나아지려는 어여쁜 마음이기 때문이다.


시울은 여러 번의 진화를 거듭한다. 2년 전 폐암 진단을 받은 할머니가 시울의 집에 온 어느 날, 시울은 할머니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75세의 노인 김옥분 씨가 아닌 열다섯 옥분이를 바라본다. 카푸치노보다 카페라테를 좋아한다는 것을, 예쁜 카페를 감상할 줄 알고 빠네 크림파스타를 고소하다며 오물거릴 줄 아는 것을, 그렇게 시울은 할머니 역시 자신과 같은 사람이자 소녀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렇게 시울은 겉으로 드러난 것 너머의 세상을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이 되어간다.

자기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 시울은 식사가 끝나면 곧바로 양치질을 한다. 그리고 그것이 노력과 비슷한 이유로 발휘되는 것이라 정의 내린다. 시울에게 노력이란 그런 것이다. 보이지 않는 어떤 불안을 제거하기 위해 지속하는 것.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이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불안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다. 인간은 자유 의지를 갖는 순간부터 선택할 수 있는 상태에 놓인다.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필연적으로 불안을 불러온다. 내 선택이 맞는지 틀렸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우리를 괴롭게 만드는 불안이 가능성에 의해 생겨나는 현기증이라고 서술했다. 어떤 가능성에 도달할 수 있는 선택의 순간에 놓일 때 우리는 불안이라는 현기증을 느낀다. 다만 이것은 가능성을 품고 있기에 희망적이다. 불안하니까 노력한다는 시울의 말은 그래서 딱 맞다. 우리는 불안하니 노력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것은 피할 수 있는 것도, 피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 인간의 숙명과도 같다.


시울의 친구 라미는 비뚤어진 앞니가 콤플렉스다. 시울이 봤을 때는 오히려 귀여운 매력을 발산하는 매력 포인트지만 당사자인 라미는 매일 그 미세한 틀어짐을 무의식적으로 확인하고 제거하고 싶은 일종의 결함으로 인식한다. 라미는 청소년 시기 자기 외모가 불만스러운 아이들의 마음을 대변한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살짝 틀어진 앞니가 잘 보이지도 않을 테지만, 사춘기 시절에는 군중 속에서 내 아이를 단번에 찾는 부모의 눈으로 자신의 단점을 필연적으로 발견해 낸다. 그런 라미를 바라보며 시울은 조언한다. 백설 공주 계모의 가장 큰 적은 왕자도 난쟁이도 아닌 거울이라고, 세상에서 제일 예쁜 게 백설 공주라고 외치든 말든 거울을 내동댕이쳐서 깨부숴버리라고, 그렇게 외부의 평가로부터 자유로워지라고 강권한다. 하지만 어쩌면 외부의 평가로부터 가장 자유롭지 못했던 것은 시울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자기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건, 생각보다 견뎌야 할 일이 많은 것 같다고 말하는

시울은 아직 어리다. 나이가 어려서가 아니라 자기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며 끝끝내 자기 얼굴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기를 들여다보지 못한다는 이 설정은 직관적이고 상징적이다. 시울은 언제쯤 당당히 자기 얼굴을 마주 보며 눈썹과 입술과 자기 표정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될까. 상처를 마주하는 일은 힘든 일이다. 놀다가 넘어지면 툭툭 털고 일어나면 그만인데 '너 무릎에서 피 나'라는 누군가의 외침이 들리는 순간 온몸의 통각이 무릎으로 모인 듯 고통의 크기는 커진다. 직면은 그렇게 아픔을 동반한다. 그래서 자신의 상처를 마주 보고 드러내는 일은 용기가 필요하다. 고통이 밀려올 것을 알면서도 행하려는 일이기 때문이다.

“라미야, 너는 만약에 네 얼굴을 볼 수 없다면 어떨 것 같아?”

“글쎄... 어떤 사고로 잘 보이던 얼굴이 갑자기 안 보이면 모르겠는데, 처음부터 안 보였다면...”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는 다양한 형태의 신경병리적 증상을 지닌 환자들이 등장한다. 그중 첫 번째 사례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는 시각피질에 문제가 있어 자신과 타인의 얼굴을 인식하지 못하는 장애를 갖게 된다. 그는 꿈조차 시각적으로 꾸지 못한다. 이런 시각인식 불능증은 그 정도와 경향이 다양하다. 소설 속 주인공 시울이 자신의 얼굴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 역시 시각인식 불능증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이는 우리가 농담처럼 말하는 "나 안면인식장애가 있어서 사람들 얼굴 기억을 잘 못한다"는 것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이들은 추상의 세계에서 길을 잃은 셈이다. 현실의 시각 세계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은 현실의 시각적 자아에도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있는 그대로를 들여다보지 못하고 뭉개지거나 찢겨있거나 뒤죽박죽으로 엉켜버린 이미지 형태로 자신을 인식하고 있음을 뜻한다. 이런 형태로 살아가게 된다면 반드시 상실감을 겪게 된다. 세상과 연결될 뿌리이자 기준점인 내가 흐릿하니 그 무엇도 연결할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들이 타인과 부딪히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자기만의 편안한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 자기 인식의 선명도를 높이는 일이다.

"거울 그 너머에 보이는 게 있으면 그걸 표현해 봐."


미술 선생님은 자화상을 그리는 수행평가 시간에 시울에게 말한다. 똑같이 그릴 필요는 없다고, 거울 너머로 보이는 것을 그려도 된다고, 이는 상처 입은 아이들과 어른들에게 작가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임이 분명하다. 상처를 응시해야 정확히 자신을 알 수 있지만 때로는 상처 너머로 보이는 것을 그려내는 것도 괜찮다고, 그 또한 상처를 더듬는 과정이라고, 남들은 이상하고 기괴하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내 안의 나를 끄집어내는 과정이라고, 그것은 오로지 내 힘으로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그러니 무엇이든 좋으니 거울 너머에 내 눈에만 보이는 잔상을 꼭 붙들어 잡아보라고. 선생님의 말에 힘을 얻은 시울은 정말 자신의 눈에 보이는 대로 자화상을 그린다. 이목구비도 없고 눈썹도 없는 얼굴을, 그저 파랑과 회색과 검은색 물감을 이리저리 흩뿌린 듯한 그림을 보고 아이들은 인상파니, 입체파니, 잠시 웅성거렸지만 얼마 못 가 소란은 수그러든다. 그러자 시울은 목울대가 아려온다. 그냥 내 눈엔 이렇게 보인다고 한마디만 하면 됐을 일을 왜 이렇게 오랫동안 혼자서 꽁꽁 가슴앓이를 해왔는지. 사람들은 타인의 외모에, 생각에, 가치관에 흥미가 없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깨달은 셈이다.


"그러니까 내 말은, 나는 이 흉터를 빨리 지우거나 어떻게든 없애야 하는 그런 나쁜 것이라고 생각 안 한다는 거야. 나는 그냥 이 흉터도 내 얼굴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니까. 이 상처로 인해 내가 그전에 볼 수 없었던 뭔가를 볼 수 있는지도 모르잖아?" 148p


그러니까 흉터를 통해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은 우리네 생을 관통하는 진실이다. 시울은 묵재에게 자기가 자화상에 흉터를 또렷이 그린 이유를 설명한다. 시울이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자, 묵재 역시 오랫동안 품고 있던 상처를 꺼낸다. 알코올중독자였던 어머니의 사망 사건으로 묵재는 어린 나이에 매스컴을 타는 등 동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출생의 비밀까지 알게 되는 바람에 충격은 배가 된다. 하지만 결국 묵재는 아버지와의 조용한 연대를 통해 상처를 묵묵히 견뎌낸다.


묵재의 비밀을 알게 된 시울은 조심스럽지만 담담하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위로를 건넨다. 고통을 겪은 사람이 치유자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고통을 겪은 자에게 거부감 없는 위로를 건넬 수 있기 때문이다. 멋모르는 사람들이 쉽게 내뱉는 공허한 위로가 아닌, 비슷한 고통, 혹은 전혀 다른 종류의 고통, 자신이 겪은 아픔을 통해 맥이 맞닿아 있는 어떤 통찰적 치유를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울과 묵재는 서로에게 치유자가 된다.

"야 그런데 진짜 우리 아빠랑 나 웃는 게 닮았어?"

묵재는 자신의 죄책감을 씻겨 달라는 듯 시울에게 묻는다.


"너는 거울도 안 보냐?"

시울은 그동안 자신을 가장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문장을 가장 큰 치유제로 치환해 묵재에게 건넨다.

노력은 불확실한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함이라고 앞서 작가는 시울의 입을 통해 말했다. 하지만 불확실성이 반드시 고통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불확실성은 미지의 존재이기에 두려움을 주지만 동시에 기대감을 품게 하기도 한다. 작가는 청소년들에게 불확실한 것에 대해 두려워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그것은 반드시 두려워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오히려 불확실하기에 너희에게 예상치 못한 기쁨을 줄 수도 있는 것이라고. 모든 불확실성에 관해 불안해하고 있을 청소년들을 응원하기 위한 긍정의 마음으로 작가는 이 책을 쓴 것이 분명하다. 그 마음이 이 책을 읽는 이들에게 잘 전달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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