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루고 싶은 날, 기다려지는 날.
여름에 한 번 겨울에 한 번, 대학 졸업 이후 각자의 바쁜 삶 속에서도 꼭 시간을 맞춰 1년에 두 번은 모이려 애쓰는 고등학교 친구들이 있다. 나이를 먹을수록 어린 시절 친구들의 소중함을 새삼 느낀다. 10대로 돌아간 듯한 느낌, 각자의 일과 책임과 역할을 내려놓고 허무맹랑하고 인과관계도 엉망진창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무리에 잠시 스며드는 것은 정신과 정서를 환기시킨다. 반가운 친구들의 얼굴을 그리며 친구들과 모임을 카운트하던 어느 날 아침, 무심결에 단체 카톡방에 D-80이라고 적어놓고 출근을 했다. 바쁜 오전 일과를 마치고 잠시 한숨을 돌리며 카톡을 확인하자 친구들은 또 대화인지 독백인지 모를 각자의 헛소리들을 잔뜩 늘어놓았다.
숙소는 어디?
올해는 뭐 하고 놀까?
이걸 세고 있어? 대단하십니다!
점심 뭐 먹냐
80일이나 남았어?
80일밖에 안 남았네?
다채로운 헛소리들 가운데 "80일이나"와, "80일 밖에"에 잠시 눈길이 머문다. 누군가는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고 누군가는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한다. 각자 서로 다른 속도의 시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니 이는 당연한 일이다. '이나'와 '밖에'는 마음의 크기 때문일 수도, 현실 살이의 고단함 차이 때문일 수도, 어쩌면 앞선 다른 응답들처럼 아무 의미 없는 반응일 수도 있다.
D-day라 하니 불현듯 20년 전 교실에서 수능 공부를 하던 때가 떠오른다. 처음으로 하루하루 날자를 꼽아 세어가며 어느 날을 기다렸던 시절, 누군가에겐 빨리 해치우고 싶은 날이었을 테고 누군가에겐 미룰 수 있다면 조금 더 미루고 싶은 날이었을 테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아무 의미 없는 숫자놀이었을 테다. 아침마다 실장이 어제의 숫자를 지우고 하나씩 줄어드는 숫자를 칠판에 써넣을 때마다 그 숫자를 바라보며 소리 없이 조용하지만 확실하고 분명하게 다가오고 있는 그 정직한 속도의 시간을 미룰 수 있으면 미루고 싶다고 생각했다. 6개월만 더, 한 달만 더, 일주일만 더 있었으면 좋겠다. 수능 날이 다가올수록 충분한 준비가 되지 않은 나는 그렇게 초조해졌다.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맞아야 하는 D-day란 그런 것, 최선을 다해 미루고 싶은 것이었나 보다.
또 다른 강력한 D-day가 떠오른다. 남자들은 입대하자마자 전역 날을 손에 꼽기 시작한다. D -730... 믿어지지 않는 730이라는 압도적인 숫자에 아직 훈련소도 벗어나지 못한 병아리 군인 아저씨들은 불면의 밤을 보낸다. 언제 그날이 올지 희뿌연 안개에 가려져 있는 듯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 것, 하지만 매일 그 순간을 꿈꾸며 간절히 기다리는 것, 군 전역의 D-day란 어서 빨리 다가오길 바라는 그런 것이었다.
우리는 살며 수많은 D-day를 맞이한다. 어떤 때는 좀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D day도 있고, 어떤 것은 피하고 싶어 하염없이 미루고 싶은 D day도 있다. 반대로 어떤 것은 하루빨리 만나기만 손꼽는 D day도 있다. 우리 의지와 관계없이 다양한 감정과 감각을 느끼게 하는 디데이들이 우리 인생 앞에 하나씩 다가올 테지만 기쁨과 환희의 D day가 조금 더 많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