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 지배하는 무의식적 계급의식
"상향 대결 이후의 자괴감[이물감] 혹은 하향 대조 이후의 수치심[숲 속의 작은 집] 같은 것들과 대면하게 하는 것은 예술로서의 문학에 주어진 공적 임무"라는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해설은 문학의 의의를 잘 설명한다. 문학은 예술이 되었다가 사회학이 되었다가 역사가 되기도 철학이나 과학이 되기도 한다. 김애란의 소설 [안녕이라 그랬어]는 '경제적인 인간'으로만 살아가게 되어버린 우리의 모습을 마치 사회학자의 르포처럼 정확하게 재현하고 예술적으로 표현해 낸다. 아비투스와 각양각색의 계급의식이 모든 이야기에 등장한다. 그것들은 서로 조금씩 다른 형상을 띄고 다른 장소에서 발현되며 맞부딪힌다. 각자가 자각하는 경제적 지표에 따른 계급의식은 때로는 자괴감을, 때로는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며 끊임없이 인간을 고통으로 잡아끈다.
첫 번째 이야기 [홈파티]에서 주인공 이연은 모 대학의 최고경영자 과정에서 알게 된 몇 사람들과 모임을 하고 있다는 성민의 초대로 소위 상류층이라 불릴만한 사람들의 홈파티에 초대된다. 호스트인 오대표가 어떤 사람이냐는 이연의 질문에 성민은 부정적인 뉘앙스를 담지 않은 채 '계산이 정확한 분'이라고 말한다.
오대표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이연은 그 집의 '서사적 윤기'를 느끼게 된다. 식기와 가구의 다채로운 색감과 자재가 주는 기품 있는 질감, 물건 하나하나에서 집주인의 시간과 재력, 미감과 여유를 읽어내며 이연은 그 단아한 안정감에 녹아들기로 마음먹는다. 연극배우인 자신에게 오늘 이 자리가 어쩌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몇 해 전 성민에게 빌린 돈을 아직 갚지 못해 마음에 남아 있는 부채감을 조금은 덜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나름의 계산을 굴려보며 참석한 자리였지만 첫 환영의 건배 이후 이연은 '이 자리에 오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별 목적 없이 그냥 이렇게 놀다 가도 좋을 것 같다'라고 생각한다.
이사, 상무, 인테리어 편집 숍 대표, 명상센터 소장, 성형외과 의사, 법률회사 변호사 등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만큼 번듯한 명패를 거머쥔 사람들은 가히 귀티가 났다. 게스트인 이연이 연극배우인 탓에 모임원들은 연극을 대화의 주제로 삼아 친근한 환대를 표한다. 부드럽고 따듯한 사교모임이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대화가 진척될수록 이연은 묘한 불쾌감을 느낀다. 그것은 아비투스가 다른 사람들 간에 빚어지는 파열음이다.
그게 무대에 처음으로 프롤레타리아가 주인공으로 등장한 연극이죠? 저도 젊을 때 베를린에서 봤어요.
20p 명상센터 소장 서
화장실 거울 앞에서 혼자 그들의 말투와 동작을 따라 하다 관둔 뒤 싱겁게 웃었다. 세상에 주류다운 몸짓과 표정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닌데 제 모습이 민망해서였다.
23p 이연
박이 수줍게 말을 이었다.
"배우치고 참 소탈하신 것 같아요."
"아무튼 또 뵐 수 있으면 좋겠어요"
박원장 취했네.
사람들이 어색하게 웃었다.
31p
김이 말했다.
-차라리 주식을 하지
오대표가 반문했다.
-오백으로?
-아니. 그 이백 정도로. 좋은 공부가 될 텐데
35p
박이 호들갑을 떨었다. "서대표님은 그런 정보 다 어디서 얻나 몰라. 정계 쪽에 줄이 있나. 혼자만 알지 말고 우리도 좀 알려줘요."
순간 이연은 서와 오대표가 거의 동시에 눈을 내리까는 걸 봤다. 36p
계급은 느슨한 듯 촘촘하다. 상류층으로 보이는 그들 사이에도 위계가 존재했다. 호스트인 오대표와 명상센터 소장 서는 돈이 되는 고급 정보를 공유하는 사이다.
"그럼 그 가구 조립한 아저씨 돈이 서대표 주머니로 간 거야?" 김의 말에 몇몇이 조그맣게 웃었다. 이연은 몸이 살짝 굳었다. 37p
동의되지 않는 이야기에 동조하며 웃는 사람들을 볼 때 우리 몸은 경직된다. 그것은 본능적인 경계심이다. 이들은 나와 같은 종자가 아니라는 경계심.
박이 취기 어린 투로 응했다.
"실존. 진짜 오랜만에 들어본다."
김이 무슨 말을 할지 망설이다 뜻밖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내가 이래서 성민 씨를 좋아해. 이래서 다양한 사람들과 자주 만나봐야 한다니까. 안 그러면 굳어." 38p
변호사인 김은 누군가가 용기를 내 진심을 담아 꺼낸 말을 향해 가르치려는 듯한 태도로 우월의식을 드러내는 사람이다. 김이 말한 "다양한 사람"이라는 단어는 차별적이다. 성민과 자신은 결코 같은 계급이 아니라는 생각,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지 않기 위해 혜량을 베풀어 어울려주고 있으니 자신은 깨어있는 사람이라는 듯한 태도. 역겨운 위선의 본치다.
변호사인 김과 인테리어회사 대표 오는 귀족적 아비투스에 사로잡혀 다른 계급의 삶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고작 오백 같은 푼돈으로 무슨 주식이냐는 오대표의 말속에는 푼돈은 결국 푼돈일 수밖에 없다는 자본주의적 위계가 실려있고 보증금 빼고 이백정도로 주식을 했으면 좋은 경제공부가 됐을 거라 말하는 김변호사의 말속에는 고아원에서 살다가 18세가 되어 정책자립금을 받아 생활전선에 뛰어드는 아이들의 삶 속에 주식이라는 개념이 당연히 정착되어 있을 거라 생각하는 유해한 무지가 서려있다.
아이들이 꼭 철없거나 허영심이 있어 그런 게 아니라 가장 잘 가릴 수 있는 가난이라 보증금 대신 가방을 선택한 것이 아닐까라는 의견을 이연이 말하자 몇몇 이들은 묘한 눈빛을 주고받는다. 그들 역시 이연이 자신들과 다르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다. 아비투스는 말과 행동뿐만 아니라 들숨과 날숨에 배어 있는 탓에 호흡만으로도 알아차리게 된다.
비언어적 제스처 역시 상대에 따라 달리 사용된다.
변호사인 김은 오대표의 말에 동조할 때 예를 표하듯 상체를 숙이며 '잘하셨습니다'라고 말한다. 눈치껏 알아서 비위를 맞추는 성민은 자신은 아직 어리고 부족하다는 듯한 제스처로 올드보이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한다. 자신의 생각을 말하다가도 오대표가 오묘한 미소를 짓자 재빨리 '아직 제가 그 단계로 못 갔나 보다'며 자신을 굽히는 모습에서 선명하게 서열의식이 드러난다.
오대표의 팔십 년 넘은 빈티지 잔 세트가 깨질 때 이야기는 극으로 향한다. 이연은 어쩔 줄 모르며 오대표의 옆얼굴을 살피다가 문득 몸이 굳는다. 오대표의 얼굴엔 원망 대신 묘한 만족감 혹은 승리감이 스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계산이 정확하신 분'이라는 오대표가 이 상황에서 짓는 저 미소는 어떤 손익분기점을 통과했기 때문에 나오는 결과일까. 그와 동시에 오늘 가장 말수가 적은 서가 자신에게 던진 말이 대개 '걱정'과 '근황'이었다는 사실이 문득 떠오르며 이연은 자신이 동정받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오늘 어땠냐는 오대표의 말에 이연은 '너무너무 좋았다며' 의식적으로 달뜬 목소리로 꾸며 답한다. 이는 통렬한 복수다. 오대표의 만족감을 빼앗기 위해 이연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다.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빼앗고 싶다면 그것을 먼저 줘버리라는 서사 이론에 따라, 이연은 오대표로부터 승리의 도취감을 빼앗기 위해 기꺼이 승리감을 안겨주는 역할을 선택한다.
한 끼의 저녁식사 자리에서 펼쳐지는 적의 없는 호의는 각자의 아비투스로 인해, 삶의 다양성에 대한 무지로 인해, 치열한 계급투쟁의 장으로 변한다. 슬픈 것은 낮은 계급에 있는 자에겐 투쟁의 시간이었을지 모를 그 치열한 전투의 현장을 상위계급은 인식조차 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데 있다.
두 번째 이야기 [숲 속의 작은 집]에서는 서로 다른 배경에서 자란 부부가 각자 느끼는 경제적 감수성과 인권 감수성을 그린다. 메이드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각자가 느끼는 감정의 어긋남, 봉투에 돈을 담아주는 것과 지폐째로 꼬깃꼬깃 건네는 것이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킬 것인지 살필 수 있는 감수성 같은 것들, 이것이야말로 "금융 감수성"이 아닐까. 단지 셈에 빠른 것이 금융 감수성이 아니라 돈이 오가는 상황과 메커니즘 속에서 인간이 소외되지 않도록 살피고 배려할 수 있는 것.
은주는 인권 감수성이 높은 사람이다. 외국인인 탓에 한국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 분명한 집주인 프랑크 앞에서도 실례가 될만한 말을 할 때면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춘다. 엄마에게 매달 생활비를 전달할 때면 꼭 봉투에 담아서 건네고 메이드라는 말에서 계급의 부조리를 느낀다. 반면 은주의 남편 지호는 이런 개념에 상당히 무디다. 여행 계획을 세우며 예산을 맞추려 전전긍긍하는 은주에게 지호는 "그냥 대충 해. 별 차이 없다"라고 말한다. 그 '별 차이'에 대한 감각 차이가 은주와 지호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며 끊임없이 부딪히게 될 경계선임을 작품은 끊임없이 서술한다. 그렇게 은주는 가슴이 점차 휑해지고 지호는 은주를 갑갑해하거나 은연중에 비웃기까지 한다.
세 번째 이야기 [좋은 이웃]은 좋은 이웃이 될 수 있었던, 되고 싶었던 한 부부가 스스로 좋은 이웃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고 느끼는 이야기다.
선생님은 다 믿어요?
이 책에 있는 말들.
어떻게요? 저는 그게 잘 안 돼서요.
그런 걸 믿으려면 어떻게 하면 돼요?
선생님은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저도 가르쳐주세요. 126p
시우야 전염병이 길어져서 힘들지?
아니요
응?
잘됐다고 생각했어요. 다들 밖에 못 나가니까.
127p
시우는 교통사고로 홈스쿨링을 하고 있다. 가정 형편도 그리 넉넉지 않다. 그런 시우에게 공동체, 이웃, 연대 같은 단어는 무용지물에 불과하다. 그런 가치로운 것들을 진심으로 믿을 수 없는 시우는 어떻게 하면 그런 것들을 진짜로 믿을 수 있는지 방문 교사인 주희에게 묻는다. 코로나가 길어져 외출이 힘들어진 이유로 시우 역시 답답함을 느낄 것이라 생각한 주희는 밖에 나갈 수 없어 힘들지 않느냐며 별생각 없이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뜻밖에 시우의 입에선 다들 못 나가서 오히려 잘됐다는 답변이 되돌아온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자리에 서보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24p
첫 번째 이야기 홈파티에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자리에 서보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이냐'라고 저자는 독백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은 소설 [안녕이라 그랬어]를 관통하는 주제의식이자 우리 모두가 느끼는 삶의 진실이다. 그것은 신체의 자유와 부자유, 경제적 자유와 부자유를 넘나들며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동일하게 구속한다. 첫 번째 이야기 [홈 파티]에서는 파티에 초대된 이연이 스스로를 낮은 계급으로 인식하며 부자들의 아비투스를 불편해하고, 두 번째 이야기 [숲 속 작은 집]에서는 경제적으로 부유하지도 궁핍하지도 않아 보이는 평범한 한 부부가 해외 여행지에서 자신들보다 낮은 계급이라고 인식한 청소 도우미를 대하며 벌어지는 자의식 충돌에 당황하며, 세 번째 이야기 [좋은 이웃]에서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이거나 조금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타인이 자신보다 처지가 나아지는 것을 확인하며 벌어지는 묘한 질투심에 대해 이야기한다. 무섭고 슬픈 것은 이런 모든 인식의 과정이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이며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나쁜 사람들이 아니라 그저 우리와 같은 아주 보편적인 인물들이라는 것이다.
재미있다고 표현하기엔 너무 가볍지만, 이 소설은 정말 재미있다. 말 그대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게 된다. 읽다 보면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해 있고 마지막 페이지에서는 나도 모르게 헉하는 소리를 내뱉게 된다. 특히 '좋은 이웃'과 '안녕이라 그랬어' 두 편의 결말이 그랬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이토록 몰입해서 들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분명 소설가로서 가장 필요한 재능이다. 김애란 작가의 소설을 처음 읽자마자 곧바로 팬이 되어버렸다. 그녀의 작품을 하나씩 찾아 읽게 될 것만 같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김애란 작가가 이미 다 써놨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다른 책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아마 다른 책을 읽으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여기도 벌써 김애란이 다녀갔다"는 작품해설의 짤막한 한 마디가 오래 가슴에 남을 것 같다.